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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나이 묻는 사회 -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정회옥 지음" 내용보기
*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나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은 질문받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숨을 쉬기 시작했는지 묻지 않듯이, 나는 왜 나이를 먼저 묻는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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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장 먼저 묻는 것이 나이라는 사실을, 나는 오랫동안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냥 당연한 일이었다. 공기처럼 존재하는 것들은 질문받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부터 숨을 쉬기 시작했는지 묻지 않듯이, 나는 왜 나이를 먼저 묻는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외국인 친구와 처음 만남을 가졌을 때, 그 친구가 내 나이에 전혀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요즘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물었다. 그 대화는 이상하게도 훨씬 가벼웠고, 동시에 훨씬 깊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묘한 해방감을 느꼈는데, 한참이 지나서야 그 감정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숫자로 분류되지 않은 채 그냥 한 사람으로 존재했던 느낌이었다.

나보다 어린 사람 앞에서 나는 선배가 되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나는 후배가 된다. 이 질서 속에서 우리는 어디에 서야 하는지, 어떤 말투를 써야 하는지, 어느 자리에 앉아야 하는지를 순식간에 파악한다. 참으로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하지만 효율과 인간다움은 종종 정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나이가 위치를 결정하는 순간, 사람은 사라지고 숫자만 남는다. 서른 살의 누군가는 그가 어떤 슬픔을 안고 살아왔는지, 무엇에 웃음을 터뜨리는지, 새벽 세 시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와 무관하게, 그냥 '서른 살'이 된다. 예순 살의 누군가는 지난 수십 년간 쌓아온 경험과 지혜, 여전히 뛰고 있는 욕망과 꿈과 무관하게, 그냥 '예순 살'이 된다. 인간이라는 복잡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두 자리 숫자로 납작하게 눌린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우리가 나이 대신 다른 무언가를 먼저 물었다면 어땠을까. 요즘 가장 관심 있는 것이 무엇인지, 최근에 읽은 책이 무엇인지,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 무엇인지. 그랬다면 우리는 훨씬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알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훨씬 많은 의외의 연결을 발견했을 것이다.

나이에 대한 우리 사회의 집착이 만들어낸 가장 잔인한 결과 중 하나는, 모든 나이대가 차별받는다는 역설이다. 어린이는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발언권을 빼앗기고, 청년은 아직 모른다는 이유로 훈계를 듣고, 중년은 시대를 모른다는 이유로 조롱받고, 노인은 이미 늙었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어느 나이대도 온전히 환대받지 못한다. 모두가 차별받고 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모두가 누군가를 차별한다. 아무도 안전하지 않은 이 구조 속에서 우리는 그저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 더 씁쓸한 것은, 이 차별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것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어린 사람에게 기특하다고 말하는 것이 칭찬이라고 생각하고, 늙은 사람에게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특하다'는 말 속에는 그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라는 전제가 숨어 있고,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어느새 공동체의 중심에서 그를 밀어내는 거리감이 되었다. 좋은 의도가 차별이 되는 순간이다. 나는 한 초등학생이 헌법재판소에서 기후위기에 대해 또렷하게 발언하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그 목소리가 담고 있는 절박함과 진지함을 생각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반응이 대견하다는 것이었다면, 그 아이의 메시지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 내용이 아닌 그 나이가 먼저 읽힌 것이다. 우리는 말의 내용 앞에 나이를 먼저 세워두는 사회에 살고 있다.

나이에 맞는 삶이라는 개념이 우리를 얼마나 조여왔는지,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깨닫는다. 이십대에는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불안이 있었다. 삼십대에는 안정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다. 사십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내가 좋아하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 같은데, 그것이 나이가 들어서 용감해진 덕인지, 아니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들을 어느 정도 해냈기 때문에 허락된 자유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에 맞는 직업, 나이에 맞는 결혼, 나이에 맞는 언어, 나이에 맞는 태도. 이 목록은 생각보다 훨씬 길고 촘촘하다. 우리는 매 순간 그 목록에 자신을 대입하며 맞는지 아닌지를 확인한다. 그 확인의 시선은 때로 타인의 것이고, 때로 나 자신의 것이다. 안으로 내면화된 나이의 감옥은 외부에서 잠그는 감옥보다 훨씬 빠져나오기 어렵다. 육십에도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팔십에도 사랑이 찾아오고, 열두 살에도 세상을 바꾸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이것은 나이와 무관한,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 증거들을 종종 예외나 이변으로 처리한다. 예순의 열정은 감동적인 뉴스가 되고, 열두 살의 용기는 기특한 해프닝이 된다. 예외는 기억되지만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나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는 것들이 있고, 나이는 그 축적의 흔적이다. 그러나 그 흔적이 사람을 설명하는 일차적 언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나이는 그 사람이 몇 년을 살았는지를 알려줄 뿐, 어떻게 살았는지는 말해주지 못한다. 어떤 예순 살은 서른처럼 뜨겁고, 어떤 서른 살은 예순처럼 지쳐있다. 어떤 열 살은 어른들이 외면하는 진실을 보고, 어떤 어른은 평생 그 진실을 마주하기를 피한다. 역연령과 기능적 연령이 다르다는 말은 단지 의학적 사실이 아니라, 사람이란 숫자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오래된 진실을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나는 언젠가 우리 사회가 처음 만난 사람에게 나이 대신 다른 것을 먼저 묻게 되길 바란다. 그 변화는 작은 것 같지만, 실은 사람을 보는 방식 전체를 바꾸는 일이다. 나이를 먼저 묻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몇 살인지보다 어떤 사람인지가 더 궁금하다는 뜻이니까.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나이를 살고 있지만, 결국 같은 삶을 공유하고 있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실패하고 늙어가는 그 과정을. 그 공통의 취약함 앞에서, 나이라는 숫자는 생각보다 훨씬 작은 것이 된다.


p****r 2026.05.0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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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내용보기
#나이묻는사회 #정회옥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나이 묻는 사회. 정회옥 지음. 한겨레출판. 2026._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나이가 뭐라고, 라는 생각이 첫 번째로 들었다. 그 말이 맞다. 누군가를 만나면 궁금해한다. 저 사람은 몇 살일까. 이건 그 사람의 나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내 나이와 비교했을 때 누구 더 나이가 많은가가 더 궁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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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묻는사회 #정회옥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나이 묻는 사회. 정회옥 지음. 한겨레출판. 2026.

_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나이가 뭐라고, 라는 생각이 첫 번째로 들었다. 그 말이 맞다. 누군가를 만나면 궁금해한다. 저 사람은 몇 살일까. 이건 그 사람의 나이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의 내 나이와 비교했을 때 누구 더 나이가 많은가가 더 궁금한 것이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면 어쩌려고 그러는 건지, 나이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이 너무 비이성적인 판단이란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든 생각은 그로 인해 발생한 혐오와 차별의 문제다. 정말 말 그대로, 우리 사회는 모든 연령대에 대한 혐오가 심각했다. 나이가 적으면 적어서 문제, 나이가 많으면 많아서 문제. 그냥 한 마디로 내 나이 아닌 모든 나이를 싫어하는 거구나 싶었고, 이런 감정이 이젠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여겨지고 있다는 것이 더욱 끔찍한 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한전이 나이 제한을 없었다는 것이 반갑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지인과 나누다 또 다른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건강 여부로 판단한다는 것은 또 다른 차별을 형성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건강상의 이유로 일을 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또한 차별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결국, 이 사회는 어떠한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발생될 수 있는 문제 상황을 해결할 힘을 잃은 것이 아닐까. 오해와 불신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씁쓸한 지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언어,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더 많은 차별을 만들어내는 시작점이 된다는 것이 세 번째 생각이었다. 그러라고 사용하는 언어가 아닌데 말이다. 언어가 얼마나 소중하고 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인지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언어를 함부로 다루고 있다. 부제에도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멸칭이라는 것. 멸칭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사용하는 말들이, 때론 재미삼아, 내지는 그런 멸칭으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걸 알면서 일부러 사용하고 있는 경우들을 보면, 한결같이 언어를 가볍게 다루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은 힘이 세다. 어떤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와 파장은 무척 커질 수 있다.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너무 부족하다. 그게 안타깝다.

결국 이 모든 것의 이유는 무엇일까. 차별을 하고 멸칭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것의 모든 이유가 자기 자신만을 세상의 중심에 두고 생각하는, 그래서 다른 사람의 처지나 상황, 생각에 대해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이게 네 번째 생각이다.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인 판단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공감할 마음의 자세마저 부족한 것이다. 언젠가부터 생각했다. 이 사회의 문제는 모두 공감하지 못하는 문제에서부터 비롯된다고. 이 역시도 마찬가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결론이 참 슬프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n*****0 2026.05.1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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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나이 묻는 사회" 내용보기
"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65" 한동안 아무데나 다 붙여 쓰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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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65"

한동안 아무데나 다 붙여 쓰던 '00린이(79)'라는 표현이 있다. 처음엔 그 표현이 어떤 일을 시작한 초보나 아직 숙달되지 않아 부족함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새롭고 재밌는 표현이라 생각했는데, 자꾸 여기저기서 마주치다보니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기 시작했다. 실생활에서는 어린이의 미숙함을 이유로 노키즈존이니하는 혐오와 배제를 앞세우면서, 본인의 서툼과 부족함은 어린이라는 이름을 가져다붙여가면서 이해와 포용을 바라고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았다. 공공장소에서 아이가 울거나 큰소리를 내는 걸 두고 갑론을박을 펼치면서 스스로를 두고 00린이라며 '응애' 농담처럼 우는 흉내를 내는 것이 폭력적으로 보였다. 요즘 아이들은 학교에서 운동회를 하려고 하면 먼저 인근 주민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글과 그림부터 준비해둔다. 학군 좋은 거주지는 찾지만 그 학군에서 당연히 일어나야 하는 교육단계는 민원을 넣는다니, 대체 어느 쪽이 더 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나이를 앞세워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나보다 늙었거나 어린 상대를 향한 혐오와 무시를 너무나 쉽게 일삼고 있는 건 아닐까? 최근 [어린이 탐구 생활]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나이 묻는 사회] 역시 이런 의문과 불편함에 대해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줄 것 같아 흥미를 품고 읽게 되었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문제인가 하면 첫 만남에 상대방에게 가장 쉽게 던질 수 있는 질문 중 하나이기도 하고, 그 대답에 따라 서로의 행동양식이 자연스럽게 달라지기도 한다. 심지어 쌍둥이에게까지 손위아래를 묻는 일(301)이 예사로운 사회아닌가. 개인적으로도 고백하자면 누군가 쌍둥이라고 하면 누가 손위인지 물어보고 싶은 욕구를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나이, 그게 대체 왜 궁금할까?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성장하며 학습해 온 '위치 찾기'를 하고 싶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닐까. 하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있고 나이로 대접받으려 하면 그저 도태된 꼰대일 뿐인 것이다. 오히려 나이 묻기와 위치 찾기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나이값을 조금이나마 하게 된다. 무엇을 물어도 좋을지 어떤 것을 궁금해하면 좋을지 제대로 판단할 수 없다면 침묵하는 것이 더 낫기 때문에, 요즘은 타인에게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 연령주의 사회에서는 나이 듦과 늙음이 같은 말로 간주되는데, 나이 듦과 늙음의 관련성은 성별에 따라 다르게 작동한다. 나이 듦이 곧 늙음을 의미하는 경우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많이 해당된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진정한 여성은 어리고 예쁜 여성이다'라는 왜곡된 통념이 반복된다. 여성 노인은 탈성화된 존재이자 할머니로만 간주된다. 250"
나이가 주는 멍에는 사소하면서도 광범위하다. 마흔이 넘으면 긴 생머리가 안 어울린다, 양갈래 머리는 몇 살까지 해도 되는가 같은 질문들에 인터넷에서 의견이 분분했던 것을 보았다. 겉으로는 나이랑 상관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도 된다고 했지만, 어떤 머리 모양을 하는지도 제 나이에 걸맞는 것이 있다며 저마다 의견을 내는 것을 보며 내심 그런가? 싶어 하는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친구를 만나 늙었더니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않아서 외출할 때 전과 다르다는 대화를 했던 적이 있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에는 화장하고 옷을 차려입지 않으면 가까운 집 밖도 잘 나가지 않았는데 나이들고는 그냥 막 나가게 되었다. [나이 묻는 사회]를 읽다 나이 든 여성은 탈성화된 존재로 간주된다는 문장에서 스스로가 느끼고 서 있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었구나 깨달았다.

책은 '나이'라는 핵심어로 문제를 바라보고 있지만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나이는 혐오를 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쓰이고 있었다. 나와 다른이를 구분하여 혐오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고 거기에 '재미'라는 껍데기를 붙여 멸칭을 유행어처럼 소비하는 사회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히 스스로에게 붙은 멸칭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타인을 향한 혐오는 0린이, 급식, 틀딱 같은 표현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거부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이와 관련된 다양한 멸칭들 중에서 내 연령대와 성별에 대한 차별과 혐오적 표현에서는 벗어나기 어려워졌다. 스스로가 거부하려고 해도 이미 그 집단에 속해있고, 집단을 향해 타인이 씌우는 멍에에서 벗어나려는 개인의 시도는 오히려 더 추한 발악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이 흐름은 영포티가 초기 좋은 의미로 사용(62)되었다가 어느 순간 나이에 맞지 않는 겉모습과 태도를 가진 사람을 비하하는 의미로 변질된 것과 비슷하다.

이 나이에 대한 공격은 주로 어리고 늙은 사람들, 생산성과 자기관리(115)를 주요 가치로 두고 이에 취약한 연령층에 대한 무시와 혐오를 담고 있다. 하지만 가장 생산성 높은 젊은 세대마저도 쉬었음 청년층,'노력이 부족한 세대(145)', MZ세대라는 밈으로 혐오적 표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는 혐오가 어느 세대가 일방적으로 드러내는 특수성이 아니라,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처럼 전 세대를 아울러 나타나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 존엄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경쟁이 심화된 사회에서 서로를 한정된 파이를 나누어 가져야 하는 경쟁 상대로 여기는 탓에 심화된 갈등과 충돌이 혐오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나이 묻는 사회]를 통해 우리 사회에 고착된 연령주의가 존중과 우대의 형식으로 기능하던 과거에서 비하, 혐오, 경멸로 전락해버린 연령차별주의의 현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나아가 나이에 대한 굳은 생각이 아직도 자리잡기 어려워보이는 '만 나이' 사용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거부감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한두살의 나이에도 서열을 구분짓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연령주의가 완화된다면,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보편화된다면 이런 문제들도 유연히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동안 나이에 연연하지 않고 상대방을 존중하고 나와 구분짓지 않는 연습이 필요함을 의식하면서, 이런 변화는 '어른'들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주는 틀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을 하면서 나이를 기준으로 삼아 변화를 시작하자고 하니 모양이 재밌어졌지만, 차별하기 위해서 나이를 이용하지 않고 배려하고 존중하기 위해서 나이를 파악하는 사회가 되기 위한 받침으로 사용되는 '나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한동안 나이/늙어감을 의식하면서도 잊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졌는데 [나이 묻는 사회]를 통해 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자신의 태도에는 어떤 영향을 줬는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여러 방면으로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어 의미있었다.

*토머스 홉스



>>>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게시되었습니다


m******j 2026.05.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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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혐오의 언어가 된 나이
"[나이 묻는 사회] 혐오의 언어가 된 나이" 내용보기
'숫자는 나이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나이에는 다양한 편견과 차별의 시선이 더해진다. 일상 속 대화나 온라인상에서 우리는 나이와 관련한 멸칭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잼민이, 영포티, 틀딱충, 연금충 등 특정 세대를 향한 비하와 조롱을 담은 표현이 대부분이다.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혐오 표현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생겨
"[나이 묻는 사회] 혐오의 언어가 된 나이" 내용보기


'숫자는 나이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더 이상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나이에는 다양한 편견과 차별의 시선이 더해진다. 일상 속 대화나 온라인상에서 우리는 나이와 관련한 멸칭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잼민이, 영포티, 틀딱충, 연금충 등 특정 세대를 향한 비하와 조롱을 담은 표현이 대부분이다. 어린이부터 노년층까지 혐오 표현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생겨난다. <나이 묻는 사회>는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를 면밀히 분석하는 책이다. 어느덧 사회 전반에 깊숙이 자리 잡은 연령차별의 배경과 역사를 알아보자.



1장 '한국 사회를 집어삼킨 나이 멸칭 문화'에서는 차별의 언어들과 함께 각 세대를 향한 사회의 부정적인 시선을 조명한다. 해당 챕터를 읽으며 혐오 표현이 이토록 다양하고 일상에서 활발히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씁쓸함과 막막함을 느꼈다. 저자는 각각의 멸칭을 설명할 때 이러한 단어가 탄생하고 확산한 사회적 배경을 덧붙인다. 

가령 '할매미'는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노인을 매미에 비유한 멸칭이다. 그러나 노인성 난청으로 귀가 잘 들리지 않는 노인들에게, 큰 목소리로 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크게 말하는 노인을 무작정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으로 비난하는 태도는 서로의 신체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젊은 세대의 일방적인 기준과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책을 읽으며 혐오는 무관심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인을 향한 이해와 배려가 결여된 시대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약점을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나와 다른 세대를 손쉽게 낙인찍고 배제하는 언어들이 끊임없이 생겨나면서,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 또한 점점 희미해지고 있다.



2장 '우리는 왜 나이에 집착하는가'에서는 관계 형성 과정에서 나이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을 살펴본다. 장유유서, 경로사상이 오랜 세월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을 수 있었던 사회문화적 토대와 근대화 이후 세대 인식의 변화까지 폭넓게 짚어 나간다. 대한민국의 나이 전쟁을 '생산성', '죽음', '자기 관리'라는 키워드로 설명한 부분이 특히 인상 깊었다. 이를테면 사회에서 노인과 어린이는 생산성이 낮은 존재로 간주한다. 빠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노인과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어린이는 자연스럽게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난다.



일상에서 나이와 관련한 다양한 혐오 표현을 마주할 때마다 이런 멸칭 문화는 대체 언제부터 시작된 것인지 늘 궁금했다.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개성과 자아는 타인을 멋대로 규정하고 낙인찍는 혐오의 언어에 잠식되어 갔다. <나이 묻는 사회>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연령차별주의와 나이 멸칭이 어떤 배경 속에서 확산했는지를 세밀하게 분석하며, 독자들이 이러한 현상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점점 심화하는 세대 갈등과 혐오 표현이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사용해 온 언어와 그 안에 자리한 연령주의를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YES마니아 : 골드 y*****2 2026.05.14.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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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라는 계급 공식을 해부하며 | 정회옥 <나이 묻는 사회>
"나이라는 계급 공식을 해부하며 | 정회옥 <나이 묻는 사회>" 내용보기
<나이 묻는 사회>는 우리 사회가 나이를 단순히 숫자가 아닌 '계급'으로 활용하며, 어떻게 세대 간 멸칭과 차별을 정당화하는지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읽는 내내 공감과 불편함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공존했는데,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연령주의(Ageism)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임을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제도적 대안들이 과연 실효성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
"나이라는 계급 공식을 해부하며 | 정회옥 <나이 묻는 사회>" 내용보기


<나이 묻는 사회>는 우리 사회가 나이를 단순히 숫자가 아닌 '계급'으로 활용하며, 어떻게 세대 간 멸칭과 차별을 정당화하는지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읽는 내내 공감과 불편함이라는 복잡한 감정이 공존했는데, 전방위적으로 가해지는 연령주의(Ageism)가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임을 다시금 확인했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제도적 대안들이 과연 실효성 있을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의구심이 든다. 한국 사회는 규제가 생기면 또 다른 방식의 차별을 찾아내는데 능숙하기 때문이다. 결국 본질적인 문제는 제도 이전에, 우리 내면에 뿌리 깊게 박힌 고정관념과 타인을 향한 인식의 틀을 깨는 데 있다. 하지만 희망보다 혐오가 익숙해진 사회의 온도를 체감할 때면, 변화가 너무 늦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최근 화두인 수많은 갈등의 기저에는 ‘나를 우습게 본다’는 낮은 자존감과 피해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를 단순히 개인의 성격 문제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랜 시간 우리를 지배해 온 계급과 자산, 권력 중심의 논리가 대중을 향한 집단적 가스라이팅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과거의 차별을 견뎌온 세대가 그 보상 심리를 자녀 세대 혹은 타인에게 투영하며, 역설적으로 차별의 공고화에 일조하고 있는 모습은 비극적이다. 저자가 언급한 “차별어를 듣고 자란 아이는 차별하는 어른이 된다”는 말처럼, 미디어가 희화화하여 송출하는 세대별 멸칭은 서로에 대한 이해와 존중의 벽을 더욱 높이고 있다.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각 연령대에 완수해야 한다고 믿는 ’표준화된 생애 주기‘다. 10대에는 명문대, 20대에는 대기업, 30대에는 결혼과 출산, 이후에는 자산 형성과 자녀 지원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트랙 위에서 우리는 늘 조급함과 불안을 느낀다. 


2030세대가 ’벌써 너무 늦은 것 아니냐‘며 불안해하는 이유는, 이 궤도에서 이탈하는 순간 실패자로 낙인찍는 이분법적 사고와 유교적 가부장제가 결합된 높은 도덕적 잣대 때문이다. 나이에 따른 서열화는 결국 개인의 삶을 체면과 위치라는 좁은 틀에 가둬 버린다. 


타인의 삶의 이면을 헤아리기엔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살고 있다. 나이를 무기로 무례하게 구는 이들을 마주할 때, 멋진 모델을 만날 기회조차 박탈당하며 절연된 세대론을 내면화한다.


배려를 강요할 수 없지만, 배려가 깃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공동체의 책무다. 사람을 벌레에 비유하는 ‘00충’이라는 표현이나, 미숙함을 비하하는 ‘0린이’, 노인을 비하하는 ‘틀딱’ 같은 언어들이 사라지려면 개개인의 각성뿐만 아니라 사회적 기능의 정상화가 필요하다.


<나이 묻는 사회>는 단순히 연령 차별에 대한 고발을 넘어, 우리 사회 전반에 흐르는 ‘차별의 공식’을 짚어준다. 나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투영된 우리 안의 괴물을 직시하고, 이제는 서열이 아닌 수평적 존중의 토양을 고민해야 할 때다.  

r*******7 2026.05.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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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 너머의 당신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선.
"숫자 너머의 당신을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선." 내용보기
한국 사회에서 처음 마주한 타인과 인사를 나눈 직후, 정적을 깨는 질문은 정해져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일수도 있지만 우리사회에선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대개 나이는 관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좌표'이기 때문에 호칭 정리를 위한 '질문'으로 사용되곤 한다. 나이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말을 놓을지 높일지, 상대보다 앞서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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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처음 마주한 타인과 인사를 나눈 직후, 정적을 깨는 질문은 정해져있다.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나요?" 호기심에서 비롯된 질문일수도 있지만 우리사회에선 그렇게 사용되지 않는다. 대개 나이는 관계의 방향을 결정짓는 결정적인 '좌표'이기 때문에 호칭 정리를 위한 '질문'으로 사용되곤 한다. 나이를 확인해야만 비로소 말을 놓을지 높일지, 상대보다 앞서 걸어야 할지 뒤에 서야 할지를 정할 수 있는 규칙은 사람 그 자체보다 '숫자'에 먼저 집중하게 만든다. 『나이 묻는 사회』는 바로 이 익숙한 장면에서 출발해,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나이라는 지표가 어떻게 우리 삶을 규제하고 차별의 근거로 변질되었는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책은 이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 나이에 대한 시선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봐야 한다는 화두를 던진다. 서른 해의 간격을 넘어 친구가 되는 일은 가능한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한다. 나이가 관계의 시작에 앞서 확인되어야 할 우선순위가 되는 순간, 우리는 한 사람을 온전히 마주할 기회를 잃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나잇값'이라는 단어는 사실 무서운 언어다. 이는 본래 삶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표시하는 유연한 지표여야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사람을 재단하고 구속하는 틀로 작동한다. 이 보이지 않는 규범은 전 연령대에 걸쳐 멸칭을 만들어내며 서로를 향한 치열한 '나이 전쟁'을 부추긴다. 생애 주기를 따라다니는 이 멸칭은 혐오의 언어로서 유머로 소비되며 사회에 수용된다. 그러나 혐오는 유머가 될 수 없다. 특정 연령대를 뭉뚱그려 비하하는 표현들은 차별적인 관행과 제도로 이어지며, 결국 우리 모두를 그 연령대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 몰아넣는다.


우리 사회는 마치 인생이라는 도로 위에 보이지 않는 '속도 제한' 표지판을 세워둔 것 같다. 서른에는 무엇을, 마흔에는 어디쯤을 통과해야 한다는 압박은 "이 나이에는 이 정도는 해야지"라는 가혹한 채찍질이 된다. 이러한 사회적 기대는 개인의 고유한 삶의 속도를 부정할 뿐이다. 획일화된 트랙 위에서는 그 무엇도 자유로울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고 말했다. 불평등을 전제로 한 위계질서가 녹아 있는 한국어 체계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정해진 틀에 가둔다. 집단주의적 잔재는 'MZ세대'라는 정체불명의 용어로 수많은 청년을 하나로 묶어버리고, 행정 편의에 따라 그들의 호칭을 마음대로 바꿔 부르며 주체가 아닌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상대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를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숫자의 높고 낮음으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태도는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벽이다.


특히 이 문제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두드러진다. 한 사람의 한 번의 발언이나 행동이 순식간에 'X세대의 전형', 'MZ의 특성'으로 일반화되고, 그렇게 형성된 고정관념은 실제 관계 속에서 편견으로 굳어진다. 우리는 어떤 세대의 대표자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서사를 가진 개인이다. 커뮤니티의 목소리가 한 세대 전체의 목소리인 양 소비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가 경계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나이 묻는 사회』가 던지는 질문은 결국 우리 자신을 향한다. 멸칭을 입에 올리기 전에, 특정 나이의 누군가를 고정된 시선으로 보기 전에, 자신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묻는다. 이 책은 제도나 사회 구조를 바꾸기에 앞서, 오늘 내가 마주친 사람에게 숫자가 아닌 사람으로 먼저 다가가는 작은 실천을 권한다. 차별의 피해자인 동시에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이 순환을 끊는 첫 번째 걸음은 서로를 향한 태도에서 시작된다.


n******1 2026.05.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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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살이세요 대신 어떤 분이세요를 질문할 사회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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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하나, 경로 우대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분들이나 등산가방을 메고 어깨를 치며 지나가는 무임승차 우대를 받는 노인분들을 보며 미어터지는 출근시간의 다른 세대들은 어떤 마음일까? 더욱이 개인의 안전 거리가 허용되지 않으며 의도하지 않게 타인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어느 덧 혐오 배양실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 전장연의 요구까지는 무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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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하나, 경로 우대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이는 분들이나 등산가방을 메고 어깨를 치며 지나가는 무임승차 우대를 받는 노인분들을 보며 미어터지는 출근시간의 다른 세대들은 어떤 마음일까? 더욱이 개인의 안전 거리가 허용되지 않으며 의도하지 않게 타인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지하철이라는 공간은 어느 덧 혐오 배양실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 전장연의 요구까지는 무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이다. 지하철 출퇴근조차 제로섬게임이 되어버렸다. 


단상 둘,  오늘 교회에서 목사님은, 부모님이 이미 돌아가시고 자신이 어버이인 분들이 대부분이라 해마다 돌아오는 어버이주일에 효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게 맞는지 고민이라 하신다. 설교 말미에는 자식들 힘들게 하지 말라고, 지나친 간섭으로 부부 관계에 금이 가는 행동은 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해주셨다. 신박하다고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보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이 대부분이셨다. 일요일이 되면 온 가족이 함께 교회를 다니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가진 X세대의 나에게 상상조차 되지 않았던 모습이다. 인구소멸이라는 문제도 있겠지만 종교 중 특히 기독교의 경우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젊은 층의 진보와 많이 부딪쳤고 그 결과값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쩌다 종교 마저 나이로 바벨탑을 쌓게 된 걸까. 


저자의 전작 <아시아인이라는 이유>, <차별의 나라에서 행복한 사람들>에서 인종, 국적, 성별, 장애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혐오 문제를 꾸준히 다뤄 온 정회옥 교수는 이번 책 <나이 묻는 사회>에서는 우리나라 특유의 서열 문화, ‘나이’로 화두를 넓혔다.


이 책에는 틀딱충, 연금충, 할매미, 개저씨, 김여사, 영포티, 급식충, 잼민이 등 갖가지 멸칭이 등장한다. 서구권에서는 실례라는, 나이를 묻는 질문은 서열을 중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필수적이다. 머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한국식 인사는 유교의 전통문화인 장유유서에서 비롯된 문화인데 그 탄생지인 중국에서조차 이제 그렇게 하지 않아 국뽕 동영상으로 인기를 끌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그 미덕이 서로에 대한 배려가 아닌 일방적인 제재로 변하며 나이, 또는 세대에 갇힌 혐오의 감옥에 갇혀버렸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어린이와 노인층에 대해 더욱 심하다는 이 멸칭들은 각 세대가 서로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단점을 극대화해 프레임 속에 가두고 있어 안타깝다. 


나이로 관계를 정립하는 우리의 문화는 수평적이지 않은,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변질시킨다. 한 사람을 온전히 한 인간으로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이라는 정체성으로 바라보게 되고 그 차별은 이 책의 3장, 정치사회적인 이슈로, 혐오는 4장, 연령차별의 단상들로 나타난다. 

“나이에 따른 혐오와 차별은 단순한 구분을 넘어, 갈래갈래로 세분화되어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들고 있다. 나이 차별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모습을 드러낸다. 온라인에서 장난처럼 소비되던 나이 멸칭은 이제 현실로 흘러나와 노키즈존과 노시니어존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서 있다.”(p.296)


저자는 <나이 묻는 사회>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나이에 대한 제한을 모두 없애자는 것이 아니다. 이는 결코 좋은 해결책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 지나치게 나이에 얽매여 있는데 이렇게 나이를 묻는 사회는 한계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현실을 인식하고 제도적 맥락마다 맞는 나이 기준에 대한 논의의 장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p.242) 


‘나이는 누구나 먹는 것’이라는 평등의 논리에 가려져 그 위험성이 제대로 인식되지 않아 더 큰 문제가 되어가는 ‘연령차별주의’이다. 저자는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p.321)고 본다. 어린이는 미성숙하고 노인은 퇴화의 시기로 보기만하면 그 사회는 이미 인간다움의 근본을 잃어버린다. 그저 밥 몇끼를 더 먹었기에 서열이 높은 사람이 아닌, 나이가 아닌 다른 인간다운 가치를 찾아 세워야 할 때이다. 


#나이묻는사회#정회옥#하니포터#하니포터12기#한겨레출판

f****j 2026.05.1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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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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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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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듣고 말해본 적이 있을 말들이 있다. 싸가지 없는 놈, 나이도 어린 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 노친네… 너무 쉽게 말해져 혐오라고 불리지도 않는 이 말들에는 나이라는 공통점이 도사리고 있다. '애새끼'도 모자라 '유충'에서부터 잼민이, 급식충, MZ, 아줌마, 영포티, 틀딱, 노친네까지, 우리 사회에서 멸시 어린 연령 집단으로 묶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툭하면, 주로 저 마음 불편한 소리에 '갈라치기 하지 말라'며 예의 '준엄한 꾸짖음'이 횡행하는 시대에 누구보다도 서로를 촘촘하게 규정짓고 혐오한다. 나이보다는 개인적 속성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청년세대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고하게 사회 전반을 구성하는 연령주의적 제도 및 인식은 필연히 개인과 사회 수준 모두에서 충돌하고 갈등한다.


 p.9 연령차별주의는 가장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차별이면서 가장 잔혹한 거부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는 달리 연령차별주의 피해 당사자들은 차별에 문제의식을 느끼거나 저항하려고 하지 않는다. 나이는 누구나 다 평등한 속성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연령차별주의가 너무나 우리 의식 속에 깊숙이 침투하여 제도화된 관행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p.65 기존의 나이 멸칭이 지겨워지면 새로운 나이 멸칭을 만들어 특정 세대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행태, 계속해서 낙인찍을 나이대를 찾는 행태, 이제 한국 사회의 거의 모든 나이대는 다 제각각의 멸칭을 갖게 되었다.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나이 멸칭으로 조롱하는 사회, 지독한 연령주의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언젠가 SNS 댓글에서 본 적이 있다. 임산부 우선석에 노인이 앉아 비켜주지 않았다는 토로에 달린 내용 중 "10년만 지나면 그런 노인네들이 다 없어져서 깨끗한 사회가 될 것"이라는, 나름의 '위로'가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황당하고 참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혐오에 있어 개인의 문제와 사회구조의 문제가 이렇게나 뒤섞여 있구나, 하는 생각에 댓글창을 떠나지 못했다. 우리 시대의 초상은 배제와 구분에 다름아니다.


 어쩌면, 아니, 확실히, 한국사회의 키워드 중 하나는 조롱과 혐오일 것이다. 이 둘은 극단적인 타자화의 일부이기도 하다. 익히 알려져있듯 구분짓기는 혐오의 첫걸음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혐오할 수 없다. 혐오 대상으로서의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은 타집단, 그것도, 지금 현재의 기준으로서는 절대 내가 아닌 이들에게 전가되어야 하므로.


 p.88 나이에 따른 혐오스러운 멸칭들이 각종 언론과 일상 대화에서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이는 '일상성'을 넘어서 '사회성'을 얻게 된다는 점에서 더 심각한 문제가 된다. (...) 이제는 우리 사회가 언어를 통한 탈인간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악영향을 인식하고, 이를 줄이기 위한 대안적 표현을 학습할 기회를 충분히 제공하는 데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


 p.144 늘어난 평균수명으로 인해 현대사회에서 노년을 살아간다는 것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삶을 산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전의 어떤 세대도 지금의 노년 세대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오랫동안 살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의 고령층은 문화적 전위 의 역할을 떠맡아 새로운 노년의 삶의 의미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문화적 전위의 역할을 하거나 새로운 노년의 의미를 받아들이기에 우리 사회의 연령주의는 너무 막강하다.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단순히 살아온 햇수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기대되는 역할과 태도에서 벗어나기를 금지하는 강력한 규범이자 위계로 기능한다. 이것은 탈-규범적 전위를 요구하는 동시에 '감히' 전형을 벗어나는 이레귤러를 가혹하게 조롱하고 탄압하는 모순적 사회에서 이중구속으로 기능한다. 연령주의의 폐단은 개인의 삶에 그치지 않는다. 아젠다 선정에서 실질적 참정권까지, 정치-제도의 곳곳에 연령주의의 뿌리는 깊고도 촘촘하다.


 예의 청년정치를 표방하는 모 정치인을 떠올려보자. 무능과 도덕성은 차치하고라도, 청년유권자에 '우리'로 묶이려 시도하며 그 자신이 마치 아이콘인 것처럼 행세하는 전략이 왜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가 청년이라고 불릴 만큼, 사회초년생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일 만큼 정치기득권이 고령화 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p.64 나이 멸칭은 특정한 개인들의 행태를 전체 나이대의 공통적인 특성처럼 확대 재생산한다. 우리 사회는 특정 나이대에 대한 틀에 박힌 이미지와 이들에게 기대하는 책임이 있다. 그렇기에 자꾸 특정 나이대 사람들에게 뭘 해야 한다고 규정을 내린다. 그 규정에 어긋나면 멸칭이 만들어지고, (...) 유행이 되어 빠르게 번지고 오프라인까지 선을 넘어 퍼져 나간다.


 p.321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이 행복하지 않은 나라에 꼽히는 것도 이런 나이에 대한 차별이 한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유권자의 목소리'는 평등하게 대표되지 않는다. 소구와 '표밭'이 따로 노니 아젠다는 자연히 과시행정에 급급해진다. 고령화와 동시에 경제-기득권화 된 정치권이 호소하는 부양 부담의 증가는 과연 누구의 '억울함'인가. 그놈의 '갈라치기', 과대표와 청년 호도 정치인의 부상은 이런 식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끊임없이 나 아닌 집단을 배격하는 인식은 과거와 미래, 사회와 개인 모두를 옭아맨다.


 삶은 분절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어리게 태어나 늙어 죽는다. 어느 순간도 삶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려서, 젊어서, '적당한 나이'를 지났기 때문에 '임시'로 밀려나기를 요구받는 사회에서는 모든 순간이 불행하고 불안하다. 결국 나이는 수로 계산될 수 없는 삶을 욱여넣지 않는, 그저 '중요한 숫자'일 뿐이어야 할 것이다. 생의 모든 시기가 그 때만의 가치를 갖는, 제각기 어떤 사람의 바로 그 순간이어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는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라 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p.204 대통령이 될 나이를 높게 잡은 것은 2030 청년세대의 정치적 역량 약화와 기회의 제한으로 이어진다. 고령화로 인해 선거에서 노인들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게 되고, 정치인들은 고령층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공약 경쟁을 함으로써 청년을 위한 정책은 감소할 가능성이 있는데 피선거권 제한까지 더해지니 문제는 한층 심각하다.


 p.243 한국 사회에서 노인은 기본적으로 계급적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정치인이나 재벌 등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노인이라 불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민'에게만 노인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노인이 되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만 문제가 된다.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s*****7 2026.05.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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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묻는 사회》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와 멸칭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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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나이는 각 개인의 삶의 한순간이자 과정일 뿐이다. 노키즈 존에 입장을 거부당했던 어린이도 언젠가는 청년이 된다는 사실, 노인을 '연금충'이라 부르는 청년도 언젠가는 반드시 노인이 된다는 것, 이것이 삶의 진리이자 역설이다. 나이에 있어서, 누구든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 나이라는 억압에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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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나이는 각 개인의 삶의 한순간이자 과정일 뿐이다. 노키즈 존에 입장을 거부당했던 어린이도 언젠가는 청년이 된다는 사실, 노인을 '연금충'이라 부르는 청년도 언젠가는 반드시 노인이 된다는 것, 이것이 삶의 진리이자 역설이다. 나이에 있어서, 누구든 언제든 약자가 될 수 있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 나이라는 억압에서 자유로워졌으면 한다. 관계를 규정해 온 나이라는 오래된 문법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더 넓은 인간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p.11


우리는 연령차별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어린이는 노키즈존이라는 이름으로 공공장소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존재로, 청년은 미래를 위한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은 이기적인 존재로, 중년은 재미없고 권위만 앞세우는 존재로, 노인은 무력하고 쇠퇴하는 존재로 바라본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나이는 숫자 그 이상인 것 같다. 자기를 인식하는 데에도, 남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도, 하다못해 지하철을 타는 데도 나이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으니 말이다. 


인종, 국적, 지역, 성별, 장애, 빈부, 소수자 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차별과 혐오 문제를 꾸준히 다뤄 온 정회옥 교수는 이번에 ‘나이’로 화두를 넓혔다. 이 책은 틀딱충, 개저씨, 삼포 세대, 영포티, 급식충, 잼민이 그리고 노키즈존과 노시니어존 등 나이가 많아서, 적어서, 같아서 비하하고 조롱하는 한국형 연령차별주의의 역사적·문화적 배경을 살펴보고, 궁극적으로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개인적, 사회적, 제도적 방안을 모색한다. 유아든 청년이든, 장년이든 노년이든, 사람은 각자의 경험을 통해 저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나이는 그 자체로 매우 제한된 의미만 지니는 변수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왜 그토록 나이를 묻는 걸까. 장유유서의 수직주의적 교류 문화는 이제 서로를 하나의 인격체로서 존중하는 수평적 문화로 바뀌어야 한다.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아이는 미성숙하고, 청년은 노력과 열정이 부족하며, 중년은 꼰대처럼 꽉 막혀 있고, 노년은 퇴화의 시기로 보기만 하면 우리는 삶에 대한 창조적 해석이 불가능하게 된다. 어린 시절은 어린 시절대로, 청년은 청년대로, 그리고 중년 및 노년은 그 나름의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제도를 만들어 나갈 때 모두가 행복한 사회가 가능할 것이다.                 p.321


요즘 자주 들리는 '영포티'라는 말은 사실 젊은 감각을 유지하며 자기 관리에 적극적인 40대를 긍정적으로 지칭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나잇값을 하지 못하고 젊은 척하려는 중년층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변질되어 사용되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일부 할머니를 매미에 비유해 모욕적으로 지칭하는 '할매미'라는 노인 혐오 표현도 있고, 무례하거나 인성이 좋지 않고 예의가 바르지 않은 초등학생을 비하하는 '잼민이'는 심신이 저연령층 같은 사람들에게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 사회는 멸칭이 없는 나이대가 없을 지경으로 각 세대가 서로를 향해 '나이 멸칭'이라는 총알을 퍼붓고 있다. 여러 연령대 중에서도 특히 사회적 약자이자 소수자인 아동과 노인에게 쉽게 비하와 경멸의 화살이 향하고 있다는 점이 유독 아쉬운 점이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지독한 연령차별주의(Ageism) 사회를 살고 있다.


연령대마다 따라붙는 편견과 차별은 언제나 부정적인 모습만을 부각시킨다. 그러다보면 누구나 맞이하게 될 인생의 여러 단계를 설렘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행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나이에 대한 부정적이고 왜곡된 전제가 해소될 때 우리는 생애주기별로 행복한 미래를 그릴 수 있다. 그러니 단순히 농담과 유머로 여겼던 나이 멸칭이 우리 사회에 차별과 혐오 문화를 어떻게 고착시키는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세대 간 협력과 교류를 위해 사회 제도를 만들어 나가고, 법제도적인 개선도 필요하다. 그동안 무심히 답습해 온 연령차별에 대한 민감성을 높여 은폐된 현실을 더 예민하게 마주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약자인 어린이였으며, 언젠가는 반드시 노인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이란 삶의 한순간이자 과정일 뿐인 것이다. 모든 세대가 나이가 주는 편견에서 자유로워지고, 결국엔 ‘나이 묻지 않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r*******n 2026.05.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