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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집이다. 책 소개에 나오듯이 국제노동기구의 사무차장 정책특보인 글쓴이(지금도 이 자리에 있는지는 모르겠다)가 이곳 저곳에 썼던 칼럼을 비롯한 짧은 글들을 모아두었다. 책에서는 각각의 글들이 다루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 4개의 장으로 주제를 구분하여 글들을 보여준다. 책의 첫 번째 장인 1부 ‘일터의 풍경’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노동 현장을 보여주며 자본가들이 보유한 돈의 힘과 그 힘에 기생하거나 좋은 머리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학자들이 합작으로 왜곡한 노동의 실제 모습을 펼쳐 설명한다. 노동자들을 희생의 장으로 내몰고는 희생의 원인이 노동자들에게 기인하는 것으로 돌리는 악덕한 기업가와 정치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도 있다. 노동자가 잘못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지만 기실 일터가 이상하게 돌아가게 되는 원인의 많은 부분을 자본의 우악스러움이 차지하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더불어 어떻게 경영이 이루어지면 생산성 향상을 유도하게 되는지 예시한다. 자본의 속성은 증식이라고 하는데 인간다움이 반영된 자본의 성장을 낮은 확률로나마 기대해본다. 2부 ‘ ‘경제학과의 불화’에서 글쓴이는 주류 경제학이 보인 실패의 모습과 그 실패의 책임을 노동자와 일반 시민들이 걸머진 모습을 보여준다. 경제는 성장하지만 고용은 늘지 않는 ‘고용 없는 성장’이 자리잡은 현실을 설파하며 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흔히 말하는 파이 키우기의 방책으로서 올바른 분배가 기능함을 주장하며 자본의 과도한 집중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 것만 챙기지 말고 세상의 꼴찌에게도 작지만 그들의 몫이 있음을 알려주고 챙겨주는 그런 세상이 언젠가 오기를 어설프게 기대하게 된다. 3부 ‘사람을 읽다’에서는 특정 인물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소재로 한다. 용기를 발휘한 이들의 삶의 가치란 무엇인지, 불의한 권력은 그들과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을 둘러본다. 일종의 가십거리가 포함되어서 읽는 재미를 북돋우기도 한다. 이미 알고 있던 얘기들도 있는데 다시 읽어도 흥미롭다. 이 땅에서도 한참 유행했던 종북좌빨이라는 딱지가 20세기 초의 미국에서도 유행했고 그런 딱지를 붙여서 만든 블랙 리스트에 헬렌 켈러와 찰리 채플린과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의 이름이 올라있었음을 다시 확인하는 내용에서는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매카시즘은 우연히, 한 인간의 광기에 의해서 나온 게 아니라 뿌리 깊은 탄생 배경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인슈타인과 엘리노 루즈벨트를 통해서는 지식인의 참된 역할을 떠올리고 스탈린과 헨리 포드를 통해서는 가진 자들의 광기를 엿본다. 제대로 된 이름값을 한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는 장면들이다. 마지막 4부 ‘기억을 위하여’는 (책이 나올 당시에는 생존해있었을) 김수행 교수와 송전탑 설치를 반대하는 밀양의 할머니들과 동료들의 땀과 눈물을 지키기 위해 굴뚝 위에 올라섰던 쌍용자동차 노조의 이창근과 김정욱(책에서는 이름을 밝히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이 맞으리라 생각한다)과 아직 팽목 항에서 자식들의 이름을 외쳐 부르던 아비들에게 보내는 헌사다. 글쓴이는 잔잔하게 그들을 응원하고 그들이 고립되어있지 않다며 손을 내밀어 잡아주듯 연대 의식을 표한다. 모두 아직 살아있는 이웃들에게 바치는 글들인데 그 이웃들은 핍박 받는 삶의 최전선에 서있다. 책에 나오는 존 홀로웨이 John Holloway가 최근 주장한 것처럼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의 맹아는 우리 모두의 일상적 투쟁에 있지 않을까. (p. 257) 라는 내용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자본가 계급과 그에 빌붙은 권력자 집단은 그들이 들이는 노력에 비해 너무도 거대한 잉여가치를 가져가는데 임금노동자 계급은 모든 분노를 잊은 채 자신들의 몫을 착취 당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생활의 작은 영역에서 이해와 연대가 지속되고 굳건해져야 한다. 이것이 김수행 교수의 신념이었고 내가 동조하는 의식이다. 불행하게도 현실은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동료인줄 알았던 세력들의 이해 관계가 다 달라서 일정 지점을 지나고 나서는 뿔뿔이 흩어지는 것으로 결론 날 때가 많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허나 그런 지점이 다가올 때 책의 제목처럼 우리 모두 조금씩 불편해짐을 감수하고 커다란 연대의 길로 나아가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자본의 일탈을 어느 정도 제어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어본다. 자본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고 뻔뻔하기 때문에 가진 것이 적은 이들의 연대는 절실하다. 다만 어떤 글들은 좀 더 길게 상황을 설명하고 상세하게 밝혀서 글이 나왔을 당시를 되짚어보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도록 보완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처음 글을 썼을 때에야 여러 정황 상 어떤 것을 다루는지 알 수 있었을 수도 있고 행간에 숨은 뜻을 보다 쉽게 파악할 수 있었을 수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왜 이 글이 씌어졌는지 알아채기 힘든 것들이 있어서이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쉽게 글쓴이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사회 상식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 받을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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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동경 그리고 허울을 덜어내면 무엇이 남을까? 아집과 불통인 정체된 흔적된 잔재만이 남을까? 하나씩 비워져 가는 이상에 가린 허울들.... 온 몸에서 모든 이상과 희망이 빠져나가는 순간처럼 두려움과 허탈함이 앞서곤 한다.
때론 허울과 방종 그런것들도 자신을 옹립하는데 도움된 지존이긴 했는데..... 무너져 내리는 순식간의 허울이 벗겨질때 허망함이 든다. 언젠가 다가서고 벗어야 할 짐이지만 한가닥 희망으로 일관한 모든 상념이 부질없어질때 남겨진 잔재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다.
자신에 가장 중요한 상황속 형성된 물질들이 우리들 이상과 희망에 어른거리고 나른한 동경의 이상마져 날개를 잃을때 남겨진 것들은 잔재뿐이다. 상황과 이상의 조화 그리고 일치된 이유있는 인생의 길을 다시 외따른 길로 모색해야하는 모순 때문에 슬픈 가슴은 아파하고 있다.
이질감을 모른체 넘길수 없어 옳고 그름을 진실의 잣대를 들어민 댓가를 치루고 검푸른 상황에 찌든 너울진 허울은 사라져간다. 설사 본의는 아니라 믿지만 그래도 자신을 망실한 거래의 핀잔은 모든 잔재를 삼키고 만다. 무엇으로 대변한들 진실이 상황을 삼킨 결과이다.
무엇이든 우리의 심사에 하나씩 잃어져가면 다시금 채울 기력마져 없어지는것이 허망한 실의뿐이다. 그래. 무거운 잔재의 모순들이 다 빠져나가면 난 또 무엇으로 살아야하나? 다시 허울을 성집하며 구름처럼 나를 옹립하여 살아야하나?
지친다. 그러한 용기가 없지는 않치만 살아감의 이질감에 묻히고 만다. 그래 좀더 아프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상황을 깊이보자. 항상 상황의 전제가 소멸되어 버리면 다시는 만지어 볼수 없는 허망이 된다.
비록 그것이 오래 자신을 힘들게 한들 마지막 이기인 나를 버리고 다음 모든걸 버릴순 없지 않은가? 나약하지만 그렇게라도 나을 버티고 기다리면 모든것은 시간이 희석하여 주리라. 무엇이 진실의 의미인지는 따지지 않아도 마음속에 다져 질 테니깐.
마음이 무겁다. 그 많은 상념을 나 홀로 이겨 내기는 너무 역겹고 힘들다. 모든것이 본연대로 치닫지 않고 허공에 나붓기는 바람이 되어 바람처럼 모두 부셔져 흔혼만이 즐비하고 이질된 후회만이 나를 괴롭혀 오고 있다.
이제 곧 모든것이 내 몸에서 다 빠져 나가면 공중 부양된 가벼운 마음으로 이세상에 서고 싶다. 두려움도 여한도 사무치지도 않아 모든것이 다 그렇고 그랬기에 귓가에 스치는 기만만이 기억된다. 최선을 진실이라 말 하는 것도 믿을수 없다. 그 최선이 진실치 않았기 때문....
나의 몸에서 이 모든것이 다 빠져 나가면 무엇이 남을까? 상처뿐인 고뇌와 허울진 동경만이 나붓기려나? 그래 마디의 끝을 생각 하리라. 다음의 마디엔 새로운 시작을 연명할수 있는 새순의 마디를. 나 아닌 단원의 정점을 생각 할수 있는 희망이면 좋겠다. 다신 아프기 싫으니깐.
어서 모든것을 내려 놓아 허망함과 실의 그리고 회한마져 비우고 나면 애뜻한 자락에 새순이 돋을꺼야. 너무도 맑은 새순을 바라 볼 기력은 없지만 오랜 잔재를 지우고 다시 소생의 시작을 보고싶다. 아마 여기서 내가 머물러 지체 한다면 다시 일어 설 수 없을지.... 마음의 상념이 허기진 고뇌에 묻히고 말것이니깐.
그래! 모든것이 내 몸에서 빠져 나가는 듯하다. 그냥 두겠어. 허기진 욕망으로 새로움을 기다리고 그곳에 새로운 온기가 가득하도록 내버려 두겠어. 언젠간 이것이 진실은 아니고 허울의 기웃거리는 잔재된 허상이라는 걸 알거야.
모두 모두 모든것이 다 빠져 나가도록 난 기다리고 허물어지는 진공의 아픔을 견디어야 해. 나의 마음은 이제 본연을 찾아가려 해. 이상과 동경 그리고 허울은 항상 나의 마음에서 부담이 됐거든....
다달지 못하는 흐름을 지켜보며 결국엔 허공에 날려보낼 허울의 잔재 더미에서 씁쓸한 회의만을 지켜 보고 있어. 그것이 전부인거야. 이질적 기만의 최선은 용기있는 희생이나 배려를 낳지못하니 허우적 거리는 허공속에 사라질 뿐이야. 지글거리는 잔재를 비우기엔 그만한 고통과 그만큼의 댓가가 아닌가?
세상은 항상 나의 마음과 같지 않었어. 마음 따라 걷지 않고 이젠 상황 따라 걸어야 할 시간이 오지 않었나? 수많은 생각을 했어. 어차피 그 본연의 길도 내가 지나쳐야 하는 길이라면 시련의 폭풍이 지날때 함께 도강 하리라고...
아직은 전부를 포괄할순 없지만 지금의 상황이 나에게로부터 전부 한꺼번에 빠져 나가듯 흡입당하고 하나둘 생성되는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는 기쁨으로 받아드리리다. 다신 나에게..... 나의 자신을 경멸할 이유에 들지 않겠다고..... 어서..부딛쳐 굉음의 경멸스런 잔재를 걷어가거라.
거짓은 항상 자연스럽지 않고 경망스럽기 마련이다. 난 차라리 모든걸 무너뜨려 그 쓰러진 잔재더미 아래 이질된 후회로 거름되어소멸되면 다시 작은 잎새를 가꾸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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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함이 없는, 편안한 삶이란, 마치 매끄러운 면을 미끄러지는 것에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밋밋하기만 할 뿐 변화도 없고, 갈등도 없이 그저 시간과 함께 흘러가기만 하는 삶이라는 게 과연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어 내는가에, 흔히 하는 말로 스토리가 있는 삶이라는 게, 내 삶의 가치가 결정이 된다는 걸 감안하면 편안함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그다지 많지 않을 듯합니다. 그러니, 일부러라도 우리는 불편을 감내해야 합니다. 지금의 편안함, 안락함 속에서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것들을 떠올려보자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적어도 지금의 이 편안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으려면 비교할 수 있는 불편함이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여야 합니다.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이유로 평생 그 학문의 언저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저자의 말과는 달리, 그가 살아오고 있는 삶은 분명 현재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경제학의 주장과는 사뭇 다릅니다. 오랫동안 세계노동기구(ILO)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만 보더라도,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일반 경제학자의 그것과 많이 다르리라는 걸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국을 떠난 자가 돌아오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전해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편안함, 편리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어떻게든 개선해서 편해지고자 하는 게 인간의 본성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으면 안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나의 편리함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늦은 밤, 간식거리를 사기 위해 찾아가는 편의점은, 밤을 새며 일하는 그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하고, 깨끗하고 청결한 사무실은,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에 나와 일하는 분들의 노고가 있어서 가능합니다. 그들도 늦은 밤에 가족들과 편히 잠들고 싶고, 달콤한 잠을 더 청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런 소망들이 나의 편리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에, 미안해 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감정일 것입니다. 또 한가지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은, 우리가 누군가에게 합당한 댓가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서비스를 사는 것이지 그의 인격이나 인간 자체를 사는 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대해서 불만을 말할 수는 있어도, 인격을 모욕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갑질'은 이렇듯 기본적인 관계를 잘못 해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가치를 소위 말하는 자산의 크기, 권력의 크기로 평가하도록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과거 자본주의 초기에 그 가능성을 예견하고 경고했던 루소의 말이 떠오릅니다. '부유한 정도가 아무리 대단하다 할지라도 다른 시민을 매수할 정도여서는 안 되며, 또 아무리 가난하다 할지라도 자신을 팔 정도로 가난해서도 안 된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가난때문에 자신을 팔지 않아도 되는 세상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불편함으로 다른 누군가가 편해질 수 있다면, 그 불편함은 응당 견뎌낼 수 있어야 인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책의 말미에 팽목항 앞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쭈그리고 앉은 한 아버지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누구나 다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국가를 책망하고, 진실을 규명하기는 커녕 숨기기에 급급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갑갑하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의무를 져버린 국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양심과 공감의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 사회는 정말 불편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지는 수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늘 세월호 앞에서 불편합니다. 그 불편함이 아직 규명되지 않은 '진실'과 책임의 문제, 외면하는 권력의 문제, 내 안의 양심의 문제 등등 많은 것들로부터 유래하고 있음을 봅니다. 무엇보다, 등을 보인 채 쭈그리고 앉아 한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가슴에 묻은 아이를 목놓아 부르고 있을 사진 속의 그 아버지가 저를 불편하게 합니다. 엊그제 총선이 있었고, 세월호 2주기가 지나갔습니다. 많은 이들이 세월호에 담긴 불편함이 해소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우리의 오늘이 불편함을 넘어서기를 기대해 봅니다. 이건 불편함을 넘어 '정의'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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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책을 눈으로 읽으면서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는 미디어를 더 편하게 생각하며 더 즐기게 되는 것이 사실인 것 같다. 하지만 활자화 되어 있는 글을 읽으면서 생각을 더욱 깊게 상상을 더욱 넓게 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그 글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나 감정 등에 대하여 천천히 곱앂을 수 있다는 장점과 책을 들고 눈으로 활자를 읽어야 한다는 불편함을 체험하여야 한다. 이러한 과정으로 인하여, 저는 다른 어떤 미디어 보다 책이 주는 매력이 훨씬 강하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예시인지는 모르지만 과학 기술과 경제 만능의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조금 불편하지만) 더욱 값지게 살며 좀더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바르게 사는 것인가 ? 하는 것에 대한 세계경제의 최전선에서 일하고 있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사무차장 정책특보의 자리에 있는 이상헌 박사의 바르고도 따뜻한 마음과 생각을 알 수 있으며, 비록 세계 경제와는 달르게 가정 경제 밖에 모르는 한국의 한 독자에게 어떻게 경제를 바라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내어 주는 글이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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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 : Great Brain, Great Mind, Great Economy.
1) 정글 자본주의를 넘어서 a. 이 책은 이상헌이라는 Great Brain 이 “정글 자본주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 그의 첫 번째 책이다. b. 정글자본주의 한계는 “정글 자본주의 룰을 따르다보면 고결한 인간도 동물로 변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도덕적으로 뛰어나고, 뛰어난 학식을 가진 사람도 돈 문제 앞에서는 만나 동물적 속성을 띠면서 동물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는 인간의 고결한 정신적 가치 - 정직, 신뢰, 믿음, 배려-는 존재하기 어렵다 c. 그리되는 이유는 “인간의 고결한 가치(great mind)”가 돈 버는데 도움이 안되고 오히려 방해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글 자본주의 룰이 자신의 본성을 타락 시킨다” 것을 알면서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과연 경제문제를 다루면서 great mind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새로운 대안은 존재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일까 2) 공존의 Economy :
a. 이상현 선생님이 정글 자본주의를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공존의 economy" 이다. “정직 신뢰 믿음 배려” 라는 인간적 가치가 -“국가의 부와 국민들의 부”- 를 촉진시킨다는 사실을 다양한 경제 이론과 사례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b. 솔직히 많은 학자들이 높은 도덕적 가치가 부를 생산하는데 필수요소라는 것을 증명해왔다 가. 엘빈 토플러는 “권력이동” “부의 혁명”에서 각 국가별로 “부의 생산속도”가 있으며, “부의 생산속도 (speed of making wealth)” 가속화 될려면 “정직 신뢰 믿음 배려 같은 도덕적 가치”가 필수요소임을 역설했다 부의 생산 속도는 “계약체결/진행 속도”에 비례하는데, 사기 당할 위험이 높을수록 계약 체결은 많은 시간이 걸리고, 계약 진행 속도는 느려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도덕적으로 타락한 국가일수록 부의 생산/축척속도는 느려지고 그 나라와 국민들은 가난해 질 수밖에 없다
나. 에릭 바인하커 역시 “부의 기원”에서 부의 생산의 핵심은 “높은 수준의 질서”이며, "높은 수준의 질서"는 “신뢰와 믿음” 같은 높은 도덕적 가치를 바탕으로 한다고 말하였다 “한 나라의 국민끼리 서로 얼마나 협력적인가?” 라는 무형적 자산은, 그 나라의 부의 생산수준/속도를 결정짓는 핵심 자산이며, 사회적 자산 (social capital) 이라고 한다. (이 사회적 자산-도덕적 가치-이 파괴된 국가는 국민들이 가난해지는 깊은 불황속에 빠지게 된다.)
다. 아래 도표는 "한 나라의 국민들이 "서로를 신뢰하는 지수"와 GNP 의 상관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the-Relationship-between-Trust-and-Economic performance)
3) Great Brain, Great Mind, Great Society a. 우리가 이런" 공존 혹은 Moral Economy "의 가치를 이해하고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Great thinker 들이 쓴 Great book 를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그 책들을 읽으면서 그들의 시각과 지혜, 용기, 믿음을 빌려 정글 자본주의를 뛰어 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정착시킬수 있기 때문이죠
b, 그리고 “우리는 조금 불편해야 한다” 에는 이상현 선생님이 20년간 연구해 온 “수 많은 Great Brain 들의 다양한 시각과 믿음, 신뢰, 희망이라는 Great mind”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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