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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감이 가는 사람이 있다. 그의 언변보다도 그의 삶이 진실되어 보이고, 의견은 공감이 가며, 지성마저 돋보인다면! 이런 세 박자가 맞을 때, 나는 그에 관해 더 알고 싶고, 진심을 다하고 싶다. 하지만 인간관계란 섣부른 다가감은 금물이며(눈물겨운 배반), 서로 간에 시간을 들여야 하는 일종의 노동과 같다.
내가 작가를 좋아하는 이유는 딱 한 가지. 글을 쓰는 작업은 진심을 눌러쓰는 자기 고백이란 점 때문이다. 오직 자신의 삶에서 길어 올린 체험과 지식을 하나의 작품에 쏟아 부은 것, 책. 그러나 고백이 독하디 독해 차라리 독설로 불리는 한 작가가 있었으니, 바로 영어강사 유수연이다. 그녀의 삶이 힘있는 언어로 녹아 있는 책 <인생 독해>를 지금 만나 본다.
이 책은 인문학 서적을 탐독하며 힘겨운 청춘을 견딘 작가의 내면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인문학 독후감이다. 말해 두지만, 유수연 작가는 책에만 의존하여 현실을 잊는 사람들을 위해 책을 쓴 것은 아님을 밝힌다. 독자들이 어떻게든 현실에 초점을 맞추고서 인생의 목적을 갖고 살아가길 바라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힘겹던 과거까지도 불러온다.
세간에는 '독설'로 잘 알려진 작가 유수연. 하지만 그 독설의 이면에는, 그녀가 어릴 적에 일삼던 핑계와 변명을 어느 순간 내쳐 버리고 "결국, 믿을 수 있는 건 내가 버텨낸 오늘 하루" 라는 인내로 재무장한 강한 마음이 있었다. 그녀의 독설은 이 사회와 인생 선배들의 어설프고 무책임한 충고에 절망한 그 자신의 말처럼 "한번 독하게 앓고 나와서, 절망 속에서 몸부림 끝에 자신을 완전히 붕괴시킨 후, 스스로를 일으켜 세워 살아남는 방법을 몸으로 터득"한 실존의 언어인 것이다.
'독해', 글을 읽어서 뜻을 이해한다는 뜻임에도, 그 앞에 '인생'을 붙이니 인생이 독하다는 뜻으로도 읽힌다. 제목부터 저자의 집념이 투영된 듯하다. 책의 부제는 '나의 언어로 세상을 읽다'. 책을 읽고 해석하기 또한 사람들마다 달라질 수 있고, 나는 나에게 맞게 세상을 해석해야겠다고 판단한다.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한 작가의 글을 읽으려 했다가 한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하였던가? 바로 나에겐 유수연이란 한 사람이 그러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녀의 인생이 떠올랐다. 그녀의 청춘은 언제 어디에서나 홀로였고, 매일 아침 눈뜨면 그 고독과 맞섰다. 외국에서, 그리고 더 외로운 한국에서 온몸으로 부딪치고 버텨 낸, 인생의 노력이 그녀를 살아갈 수 있게 한 힘이자 시간이었다. 유수연의 책들엔 많은 청춘들로 하여금 공감의 영역을 넘어 그녀의 노력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하는 강한 당부가 실려 있다.
유수연의 글은 마치 흑과 백이 어우러진 영화 같다. 그녀의 고독한 과거와 현재의 화려한 성공이 공존해 있는 현실을 보여주므로. 단지 머리만이 아닌, 온몸으로 깨우친 단어의 힘은 한 줄의 문장을 더욱 강력하게 표현했다. 나 또한 외로운 청춘이었음에 독자로서 공감했다. 저자가 과거의 자신을 조금도 감추지 않고, 벼랑 끝 자신의 노력을 절절하게 들려주었기에, 독자들에겐 적잖은 위로와 힘이 될 것이다.
"인생에서 다양한 시도들로 자신만의 풍성한 여행을 끌어낼 수 있기를." 에필로그는 독하지 않았다. 마치 인생의 선배가 부드럽게 손을 내미는 것처럼 전해지는 것이다. 한국에서든, 외국에 나가서든 자신의 처지에서 비롯된 고독을 인내하고, 독하게 노력하여 성공의 반열에 오른 작가 유수연. 삶의 외로운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그녀를, 나는 존경한다.
"나는 초라한 내가 몸서리치게 싫었다. 그저 내일은 오늘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나로 살고 싶었고, 오늘보다 나아진 내가 만나는 내일은 좀 더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차피 나에게 인생이란 처음부터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삶이고 단지 스스로 끝내지 못하는 것뿐이지만, 살아 있는 동안만은 나 자신에게 만족하고 싶다. 그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나의 희망은 바깥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을 마주 보는 나 자신의 거울 안에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