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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안의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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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가 오랜 시간의 사유를 통해 내린 결론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프로이트가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라고 극찬한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특히 무신론자인 이반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대심문관」편은 이러한 그의 고민을 잘 드러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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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낳은 세계적인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자유와 행복이 과연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그가 오랜 시간의 사유를 통해 내린 결론은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일찍이 프로이트가 세계 문학사의 압권이라고 극찬한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 특히 무신론자인 이반의 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주는 「대심문관」편은 이러한 그의 고민을 잘 드러내준다.
한창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자들을 단죄하던 16세기 스페인에, 예수가 다시 한 번 민중들 사이에 나타나게 된다. 너무나도 위대한 분이기에 모두들 그가 예수임을 알게 되지만, 추기경(대심문관)은 그를 붙잡아 들이고 감옥에서 예수를 심문한다.
이 대화를 통해 도스토예프스키가 우리에게 전하려 한 메시지는 인간의 자유는 인간의 행복과 양립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를 지배하기는커녕 당신은 인간에게 한층 더 많은 자유를 주고 말았소! 선악을 분별할 때의 자유로운 선택보다는 평안, 그리고 심지어는 죽음이 인간에게 더 소중하다는 사실을 당신은 잊었단 말이오? 인간에게 양심의 자유보다 더 매혹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것이요.”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는 양심을 잠재워야 하며, 선택의 자유를 빼앗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의 능력을 믿었는데,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내려오라는 악마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마음먹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겠지만, 인간을 기적의 노예 즉 기적의 신앙이 아닌, 자유로운 신앙을 우리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대심문관은 이것을 비판한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말았소. 그들은 비록 반역자로 창조되긴 했어도 노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요. 당신은 인간을 너무나 존중했기에 인간을 동정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았소.” 사실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은 강자들의 특권일 수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향유할 능력이 없는 약자들에게 자유는 고통의 또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중은 어째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할까? 스피노자의 말처럼 “왜 인민은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신학정치론』”

 

맑스주의 정치학이 등장한 이후로 지배-피지배, 억압-복종(예속)과 같은 문제는 경제구조의 산물로 이해되어 왔다. 물론 생산관계에 따라 그에 걸맞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을 새로운 굴종상태로 만드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를 전적으로 경제에 종속시키는 것에는 불만이 제기되어 왔었다.
가령 우리는 교육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도 최하위 계층인 사람일수록 극우보수정당을 선호 하는 경우를 목격할 수 있다.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독일 경제가 급격히 쇠퇴하는 동안 반동적 보수정당인 국가사회주의 정당(나치)의 절대적인 지지자는 사무실 노동자와 육체노동자였다. 이처럼 주위를 둘러보면 경제적 상황과 대중들의 심리 구조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라이히는 정치경제학의 한계를 심리학으로 보완할 것을 주장한다. 경제와 이데올로기 사이의 균열을 심리학을 통해 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훔치는 경우, 그리고 착취당하는 사람이 파업을 하는 경우 그것은 경제적 생산관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둑질이나 파업을 하지 않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분석하기에는 경제 분석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즉 굶주리는 대다수, 착취당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왜 도둑질을 하지 않는가, 또 왜 파업을 하지 않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한 것이다.
파시즘의 대중사회역시 마찬가지이다. 처음의 질문처럼 투쟁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왜 대중은 어째서 마치 그것이 자신을 위한 것이라도 되는 양 자신에 대한 억압을 욕망하는 것일까?’라는 질문 역시 경제적인 조건 이상의 해석이 필요하다. 이때 라이히가 찾아낸 원인은 다름 아닌 ‘성 억압’이다.

 

성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에너지로서, 생동적이고 자유로운 본성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이 성에 대한 억압으로 이어지는 경우, 생동적이고 자유로운 에너지가 억압되는 것이기에, 자연스럽고 일반적인 사고를 억압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가장 자연스러워야할 본능이 억압되는 순간 그만큼 부자연스러워 질 수밖에 없음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성적 억압에 길들여진 어린아이의 경우 불안하고 수줍음을 많이 타며 권위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쉽사리 복종하고 만다. 다시 말해 말 잘 듣고 길들이기 쉽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본능의 역동성에 대한 두려움이 권위를 쉽게 수용하고, 반항하는 능력을 제거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성욕에 대한 도덕적 억압의 목적은 고통과 모욕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적 질서에 적응하고 그것을 참아내는 말 잘 듣는 노예 같은 인간을 만드는 것에 있다.(p.67)” 황소의 거세가 기꺼이 수레를 끄는 동물을 확보해 주는 것처럼, 성 억압 또한 인간을 권위에 쉽게 복종하도록 만든다. 
그러므로 자유에 대한 인민대중들의 두려움은 신체에 대한 경직성에서 발생하며, 그것은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의 자연스러운 성생활에 대한 억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의 ‘자연스러움’을 상실한 인간들은 기계적인 권위주의적 문명을 지지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주체이자, 생명력 있고 자유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기계적 방식으로 변해버린 파시즘적 인간이다.
더불어 성적 억압과 같은 이유로 자연스러운 사랑능력이 방해받을 경우, 이 또한 파시즘을 증폭시킨다. 금욕으로 인해 발생하는 생물학적 에너지 막힘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긴장해소를 위한 비합리적인 행동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회사생활과 같은 일상생활에서 주기적인 스트레스 해소와 같은 카타르시스(배출)를 경험하지 못하는 사람은, 온갖 정신질환에 시달릴 것이다. 마찬가지로 욕망의 억압으로 에너지의 발산을 하지 못해 잔뜩 긴장된 신체와, 그러한 긴장의 지속으로 고통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파시즘은, 지도자와 지도자 이데올로기에 헌신함으로서 일시적으로나마 긴장에서의 해방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와 본능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두려워할 때, 근본적으로 무력하고, 자유를 즐길 수 없으며, 권위를 갈망한다. 스스로가 자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성적 억압상태의 사회가 대중으로 하여금 파시즘을 지지하고 열광하게 만드는 것이다.

 

파쇼의 전체주의 사회를 분석한 정치학자 아렌트(Arendt)는 무엇보다도 인간들이 세계와 고립될 때, 전체주의가 유감없이 발휘된다고 말한다. 독일에서 전체주의가 발현될 수 있던 이유는 대중이 원자화되었고 사회 지위를 상실했기 때문이며, 상식이 통하게 만드는 공동체적 관계를 상실하였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세계와 관계를 맺지 않는 고독한 인간이라는 것. 한편은 기존의 상식적인 세계로부터 뿌리 뽑혀 무용지물이 되어 피해자로서 살해되고, 다른 한편은 가족이나 친구와의 유대감 없는 외로움에 집단적인 위안을 느낄 수 있는 전체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 간에 형성될 수 있는 소통의 공간이 철저히 파괴되었기에, 소신을 가질 수 없게 된 대다수의 인민은 국가가 제공하는 허구적인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고립은 전체주의의 성공적인 승리를 보장한다.
공통점을 쉽사리 찾기 힘들어 보이는 두 거장의 파시즘 이론에서, 라이히였다면 아마 아렌트가 말한 ‘고립’의 원인으로 성 억압을 들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실제로 자위가 아닌 이상 성적 요구는 타인과의 유대를 필연적으로 전제하는데, 이는 자연스럽게 다양한 형태로 세계와 직접 접촉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적 욕구가 억압된다면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널찍한 타인과의 관계 대신, 좁은 가족영역으로 고착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성적 억압이야말로 세계와의 고립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누가 궁극적으로 옳고 그르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파시즘이란 자신을 찾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능력을 직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발생한다는 점이다. 기억하자, 이렇듯 세상의 모든 파시스트는 자신감 없는 겁쟁이들이며, 겁쟁이들 속에서 자란다는 것을.             


 

 

YES마니아 : 로얄 a*****e 2008.04.06. 신고 공감 16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