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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복음주의 과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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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과학을 통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자신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과시한다. 이러한 근대적 자신감은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기본적으로 과학적 방법이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양자 역학이 등장하고 난 이후 실험의 결과를 하나로 예측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다시 말해 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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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과학을 통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자신의 우월성과 절대성을 과시한다. 이러한 근대적 자신감은 양자 역학(quantum mechanics)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기본적으로 과학적 방법이란 관찰과 실험을 통해 가설을 입증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양자 역학이 등장하고 난 이후 실험의 결과를 하나로 예측하기가 불가능해졌다. 다시 말해 양자 역학의 대상이 되는 세계에서는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uncertainty principle)이다. 이제 근대 과학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하나의 진리를 밝히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비슷한 접근, '개연적 진리'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15p). 이것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과 같다. 과학은 더 이상 보편적 진리를 보여주는 절대반지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의 객관성을 전제하는 복음주의 입장에서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위기인가, 또 다른 기회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기를 잘 극복해서 기회로 삼아야 한다. 위기를 잘 극복하기 위해서 먼저 무엇이 위기인지 알아야 한다. 항상 그렇듯이 위기는 안과 밖에서 찾아온다. 외부적 위기는 성경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창조주를 발견할 수 있다는 자연신학이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자연 계시는 인정하지만 자연신학은 인정하지 않는다. 이미 완성된 성경에 비해 자연 계시는 시대의 발전에 따라 완성을 향해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저자는 어거스틴의 신의 흔적을 통해 자연 계시의 완성은 일신론적 창조주에 대한 발견을 넘어 삼위일체 하나님을 살펴보는 것이라고 말한다(25p).

 

이러한 위기는 과학적 이슈들을 통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복제를 예로 들어보자. 과학은 윤리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복제는 생명 윤리와 연결된다. 우리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질 수 있다. 실험을 위해 복제된 생명은 단순히 도구에 불과한가?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는데 복제된 생명은 예외라고 할 수 있을까? 한 번의 생명 복제 성공을 위해 수많은 실패는 괜찮은가? 생명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복제도 결국 돈을 위한 것이다. 생명 복제 실험은 엄청난 돈을 필요로 한다. 안타깝게도 돈이 많이 들면 들수록 혜택을 보는 사람은 소수라는 불편한 진실을 피할 수 없다.

 

진화론은 어떤가. 복음주의 과학관의 특징 중에 하나는 명료성이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식의 고립적 태도가 아닌 다양한 영역에 대한 관심과 대화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과 대화는 복음주의 성경관의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성경과 전통적 신조의 확실성을 전제로 한다. 이런 맥락에서 창조주를 인정하지 않는 진화는 함께 할 수 없다. 하지만 같은 종 안에서의 소진화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충분히 인정될 수 있다. 물론 다른 종으로의 대진화까지는 인정할 수 없다. 또한 진화론의 관점에서 인간은 적자생존, 양육강식의 살벌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이웃 사랑과는 거리가 먼 세상이다. 이렇게 살아남은 자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말씀하셨다면 이미 여기가 지옥인 셈이다. 이러한 과학적 이슈에 대해 복음주의 과학은 침묵이나 무조건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겸손한 확신을 가지고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이렇듯 외부적 위기만 있었다면 내부적으로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복음주의 과학에는 내부적 갈등이 존재한다. 창조 논쟁을 예로 들어보자. 창조 논쟁의 핵심은 창조시간이다. 창조기사에 등장하는 날의 대한 해석에 따라 젊은 지구론 혹은 오래된 지구론으로 나뉜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적인 문제로 국한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지질학적 입장에서 보면 다양한 질문들이 나온다. 동일 과정설을 근거로 지구의 나이가 젊다고 말하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화석이다. 쉽게 말해 동일 과정설은 한 번에, 천천히 지금 지구의 모습으로 형성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화석은 매우 급격하게 매몰된 후 퇴적되지 않으면 만들어 질 수 없다. 지질학을 연구하면 하나의 동일한 퇴적층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퇴적층이 (그것도 순서대로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닌!) 발견되기 때문에 지구의 나이가 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창조과학은 젊은 지구론을 주장한다. 물론 이 안에서도 오래된 지구론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문제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 저자의 표현대로 친구를 적으로 대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창조 시간이나 지구 나이는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다. 창세기를 통해 우리는 창조의 주체이신 삼위 하나님과 그분이 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입장이든 궁극적인 목적이 같다면 적이 아니라 함께 대화해야할 친구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방향의 문제이지 구조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태도는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을 초래한다. 젊은 지구론이든 오래된 지구론이든 어디까지나 이다. 어느 부분은 명확하게 설명이 되지만 아직 설명할 수 없는 부분도 여전히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 계시의 점진적인 빛 아래서 함께 풀어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갈등이 아니더라도 복음주의 스팩트럼은 다양하다. 종교개혁, 청교도, 경건주의, 부흥운동을 통해 다양한 형태의 복음주의가 등장한다. 맥그라스의 지적대로 이러한 다양성 가운데 공동된 특징을 찾아야 한다. 다시 말해 복음주의라는 한 가족 안에 다양한 구성원들이 있지만 한 가족이라는 가족적 유사성’(family resemblance)으로 서로 대화하며 공동성 안에서 다양성을 추구해야 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단순히 내부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테드 피터스의 말대로 과학과 신학과의 관계 속에서도 가설적 공명을 찾아가는 노력으로 연결된다(237p). 재미난 것은 이러한 대화가 가능한 것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성의 특징 때문이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듯 절대 진리의 강요가 아닌 절대 진리이기에 공유할 수 있는 것으로 대화를 할 수 있다면, 분명 위기는 또 다른 기회가 될 것이다.

 

복음주의 과학관은 성경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토대로 복음을 수호하는 점에서 매우 귀하다. 하지만 성경의 권위, 즉 성경의 무오성이 단순히 문자적 해석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언어로 바뀌면서 필연적인 해석을 동반한다. 따라서 해석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어떤 해석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물론 해석은 불완전하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적응의 원리를 적용해볼 수 있다. 말씀에 대해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태도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살피되, 여전히 성경에서 명확하게 이야기 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겸손하게 기다리면서 다양한 해석과의 만남을 피하면 안 될 것이다. 아울러 겸손함은 과학적 엘리트주의를 경계하고 일상의 언어로 대중과의 친근한 만남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y******7 2018.10.1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