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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라.. 마음이 지친 탓에 자연스레 집어든 책이다. 정리(情理)와 감성에 호소하는 책에 마음을 내려놓고 싶어서. 나는 사실 선방, 하면 무문관(無門關)부터 생각한다. 무문관 수행은 문을 밖에서 잠가 출구 없는 방에서 세끼 공양을 매일 아침 문틈으로 전달받을 뿐 출입할 수 없이 오직 화두만 들고 몰두하는 수행이라 알고 있다. 선방, 하면 무문관부터 생각하는 것은 외부인의 환상일 수도 있다. 나 개인도 주변 환경도 어수선하고 혼란스럽다.
’선방일기‘는 39년 전인 지난 1979년 모 월간지에 연재되던 글로 지은이의 세속에서의 이력이나 선사로서의 수행 경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글의 첫 순서인 ’상원사행’에 나오는 오대산 중대(中臺)는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적멸보궁이 있는 곳들 가운데 한 곳이다. 몇 년 전 동두천의 한 산사에 들렀는데 거기에 뜻 밖으로 적멸보궁이 있었다. 이 한적하고 먼 곳까지 부처의 진신사리가 배분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선방일기‘에는 당연히 글 중간 중간에 선객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자유롭고 무애(無碍)한 삶과 아울러 본래 면목에서 멀어진 불교계에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마침 현재는 하안거 철이다. 음력 7월 15일까지이니 아직 두 달 정도의 시간이 더 남았다. 지허스님은 선방에서의 일상을 비정한 자기 본위의 생활이라 표현했다. 견성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비정(非情)인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이루는 것이 식부족(食不足), 의부족(衣不足), 수부족(睡不足)이다.
스님들의 고행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가? 2박 3일의 템플 스테이에 참가하려 해도 망설여지고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저울질 하게 되는데 몇 달씩 감옥 같은 선방에 머물며 깨달음을 위해 고행하는 스님들의 심정은 어떨까? 글쎄 ‘선방일기’에서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연상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불교 공부가 깊고 세속에서의 공부 내공도 상당한 스님과 경제학과 교수 출신의 신영복 선생의 면모, 성격, 학식 등이 겹치기 때문만은 아니다. 바로 무문관이라는 스스로 받아들인 감옥과, 타의에 의해 사상범으로 수용된 선생의 감옥이 묘하게 겹쳐 보이기 때문이다.
한 서평 전문가가 사방의 벽을 책으로 가득 채운 방을 갖는 남다른 즐거움을 말했지만 일반적으로 스님들의 방은 검소와 내핍이라는 이미지를 전해준다. 그리하여 상원사 김치가 짜냐? 주안 염전의 소금이 짜냐?며 이야기한 상원사의 소문난 김치 이야기에 나오는 소금이 그런 검소와 내핍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견성을 위해 정진하는 선객의 9할이 경중의 차이는 있지만 위장병 환자라는 이야기는 안타깝게 들린다. 젊은 선객들의 눈총을 받으며 뒷방 신세를 지다가 끝내 골방으로 쫓겨가며 유야무야 사라지는 노년에 이르도록 견성하지 못한 선객은 세간(인생)과 출세간(승가)에 대한 2중의 도박을 치른다는 말은 쓸쓸하게 들린다.
스님은 선객을 끌고 가던 화두(話頭)는 마침내 선객을 백치 아니면 천재 쪽으로 끌어놓는다고 말한다. 백치는 백치성 때문에 고통에서 해방되고 천재는 천재성 때문에 번뇌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훌륭한 선객일수록 섭생에 철저해 병마를 이긴다는 스님의 말씀이 나를 일깨운다. 이 대목에 이르니 사람은 누구나 선객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아닐까, 란 생각이 든다. 스님의 위선이라는 글에 한 스님이 나온다.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아 정돈되지 못한 지식이 포화 상태를 지나 과잉상태이지만 두루 깊이가 없이 박식할 뿐인 스님 이야기다. 독서량이 지나치게 많은 데 비해 정돈되지 못한 지식은 결국 읽은 내용을 써서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정리도 중요하지만 깊이를 갖추었느냐의 여부 역시 글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스님의 위선이라는 글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었듯 선객들에게서 배울 것은 언어의 유희를 경계하고 몸으로 임하는 자세이다. 스님은 해제날 월정사 층층계 밑에서 지객스님과 헤어졌다. “성불하십시오.” “성불하십시오.” “남방행인 그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갔고 나는 월정사를 뒤로 한 채 강릉을 향해 계속 나아갔다.”.. 이 부분이 ‘선방일기’의 끝이다. 3년 전 이 즈음 찾았던 강릉 바다와 월정사는 잘 있는지 문득 그 깊이를 음미하고 싶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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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지인심 견성성불(直旨人心 見性成佛)”
모든 중생(衆生)은 불성(佛性)을 갖고 있어 교리(敎理)를 공부하거나 계행(戒行)을 떠나서 직접 마음을 교화하고 수행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선종(禪宗) 교리의 근간이자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부르는 이유를 잘 설명해주는 문구라고 한다. 이제는 불교를 더 이상 탈속(脫俗)·은둔(隱遁) 종교라고 부르기에는 세상 명리(名利)에 너무 물들었지만, 스님들이 여름(4.15.~7.15.)과 겨울(10.15.~1.15.)에 산문(山門) 출입을 금하고 수도(修道)에 전력하는 “안거(安居)”를 통해 아직도 수행(修行)종교로서의 전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안거”제도는 원래 인도의 브라만교의 전통으로 우기(雨期)인 여름철에 수행자들이 돌아다니며 수행을 하다가 폭풍우를 만나 피해를 입기도 하고, 또 이를 피하기 위하여 초목과 벌레들을 살상하는 사태가 많으므로, 이 시기에는 아예 외출을 금하고 수행에만 몰두하던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에게도 관습이 되어 오늘날에는 여름(夏安居))과 겨울(冬安居), 두 계절에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원래 불교에 관심이 많았던 지라 안거에 대해서는 이전에 알고 있었는데, 최근에 동안거 수행 과정을 올곧이 그린 선향(禪香) 가득한 책을 만나게 되었다. 이미 1993년에는 비매품으로, 2000년에는 정식 단행본으로 출판되었지만 출판사 사정으로 절판되었다가 이번(2010년)에 새롭게 복간되어 나온 지허 스님의 <선방일기(禪房日記)/2010년 11월)>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화자(話者)인 지허 스님이 겨울 수행을 위해 오대산 상원사(上院寺)로 향하던 10월 1일부터 수행이 끝나는 날인 이듬해 1월 15일인 해제일(解制日)까지의 동안거 수행과정을 그린 일종의 수행일기(修行日記)라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불교에서는 흔히 여름과 겨울은 공부철이라 하고, 봄과 가을은 산철이라 하는데 공부철에는 출입이 엄금되고, 산철에는 출입이 자유롭다고 한다. 그래서 결제(結制;안거가 시작되는 날)를 위한 준비는 산철에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한다. 책 초반에는 이러한 결제를 위한 준비들, 즉 김장 울력(運力 또는 雲力. 여러 사람이 힘을 구름처럼 모은다는 뜻으로 일반에게는 삶의 한 방편인 노동을 뜻하나 불교에서는 중요한 수행 수단에 속한다고 한다)과 겨울 채비 과정을 설명하고, 동안거가 시작되는 10월 15일 부터는 본격적인 수행 과정과 함께 선방 풍경과 동료 스님들과의 일화, 그리고 화두(話頭), 열반(涅槃) 등 불교 주요 교리에 대한 스님의 단상(斷想)들을 그리고 있다.
스님은 선방에 전래되는 생활규범으로 “두량 족난 복팔분(頭凉 足煖 腹八分)”라고 소개한다. “머리는 시원하게, 발은 따뜻하게, 배는 만복(滿腹)에서 이분(二分)이 모자라는 팔분(八分)으로 유지”하라는 뜻으로 의식주의 간소한 생활을 표현한 극치라고 말하며, 납자(衲子, 승려가 자기를 낮추어 부르는 말)의 수행을 생사문제까지 의탁해 버린 부처가 되겠다는 대욕(大欲)에 사로잡혀 심산유곡을 배회하면서, 면벽불이 되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고행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우리가 종종 헷갈려 하는 숙명(宿命)과 운명(運命)의 정의에 대하여 숙명은 자기 이전에 던져진 의지와 주어진 질서여서 생래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천적인 사실이지만, 운명은 자기 자신의 의지와 자유로이 선택한 후천적인 현실이므로 선객(禪客)은 숙명의 소산이 아니라 운명의 소조(所造)이며, 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고, 숙명은 자기 부재(不在)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殞命)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고 설명한다.
또한 우리가 보통 자기 주장의 주제라는 뜻으로 종종 사용하는 “화두(話頭)”에 대해서 스님은 화두란 참선할 때 정신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붙드는 하나의 공안인데 철학의 명제, 논리학의 제재(題材)라고 말할 수 있으며, 처음 선방에 입방할 때 조실(祖室)스님으로부터 받게 되는데, 흔히들 세상에 화두 아닌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그 종류가 무한량이지만, 그 많은 화두 가운데서 자기에게 필요한 화두는 단 하나일 때 비로소 화두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화두는 철학적인 명제가 아니라 종교적인 신앙으로 분석적인 것이 아니고 맹목적이라 할 수 있으며, 화두는 견성의 목표가 아니라 방편(方便)이며, 여하한 수단도 목적이 달성되면 정당화되는 것처럼 여하한 화두도 견성하고 나면 정당해지니 화두가 좋으니 나쁘니, 화두다 아니다 하고 시비함은 미망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절에 가더라도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글귀인
입차문내 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
처럼 유무(有無)에 얽매인 세간의 지식은 무용(無用)하여 선객을 끌고 가던 화두는 마침내 선객을 백치가 아니면 천재 쪽으로 끌어놓는데, 백치는 백치성 때문에 고통에서 해방되고, 천재는 천재성 때문에 번뇌에 얽매여서 대우(大愚)는 대현(大賢)이 되고 대고(大苦)는 대탈(大脫)이 되며, 선객의 우열은 화두에 끌리느냐 끄느냐가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래는 神光不昧 萬古輝猷(신광불매 만고휘유) 入此門內 莫存知解 (입차문내 막존지해)라는 절구로 "천지신명의 빛은 어둡지 아니하여 만고의 아름다운 지혜로다. 이 문에 들어오려거든 지식을 알려고 하지 마라“라는 뜻이라고 한다.)
스님은 인간 완성을 열반(涅槃)에 귀결시키는 데 열반은 현실태(現實態)인가 가능태(可能態)인가라는 물음에 '모든 것은 현실태로 있는 것이지 가능태로 있는 것은 없다', 즉 일원론적인 현상은 현실밖에 없다고 하면서 현상 뒤의 어떤 실재, 어떤 영원한 세계를 말하는 것은 잠꼬대라고 말하면서 현실에서 인간이 완성될 수 있는 길을 열지 못하고 있는 것을 실존주의의 함정이라고 잘라 말하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은 생명이 단절된 죽음의 저편에 때로 존재하는 세계를 말함이 아니고, 부조리하고 무분별한 실재(百八煩惱)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조화시킨 생명력, 즉 무의 인식에서 반야를 밝히는 힘이 열반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 무여열반(無餘涅槃)은 아집(我執)의 색상色相에서 해방된 세계를 말하므로 진제(眞諦)는 열반이고 속제(俗諦)는 유무(有無)이며, 유무에 얽매임은 현실적인 생사이나, 열반에 들어옴은 영겁에 의해 해탈된 것으로 신 없는 세계의 신, 이것은 곧 완성된 인간을 의미함이요, 주는 자 없이 주어지는 것은 완성된 인간의 내용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책에서는 이처럼 일반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 교리만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방에서의 재밌는 일화들도 들려주고 있는데, 수행하면서 스님들이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밤마다 고방에서 감자를 훔쳐 구워 먹자 살림살이 책임자인 원주 스님이 자물통을 채웠지만, 자물통을 못과 손톱깎이로 열어 계속 구워 먹게 되고, 이번에는 큼직한 번호 자물통으로 채우자 고방문의 돌쩌귀를 아예 뽑아버린 후 감자 구이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원주 스님이 방법을 바꿔 감자국에 감자나물 등 주 부식을 아예 감자 위주로 편성하자 감자에 질려 드디어 감자구이가 끝나게 되었다는 사연을 소개한다. 또한 결핵에 신음하던 스님이 퇴방하자 십시일반 비상금을 거두어 보탰던 일화를 소개하면서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더 추해져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와 비열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맨다며 양생(養生)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116쪽의 페이지에 23컷의 동화(童畵)풍의 삽화가 실려 있어 작은 분량의 이야기라고 할 수 도 있겠지만 분량 이상의 많은 생각꺼리를 담고 있으며, 동안거라는 불교 전통의 수행 면면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참고 자료이고, 그동안 귀에는 익숙하지만 참의미를 몰랐던 불교 용어들의 개념 정리에도 도움이 될 만한 책이라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불교의 참선(參禪)을 하릴없이 앉아서 시간이나 죽이는 것이라고 비웃는 사람들에게는 “寂靜妙窮 寂然妙覺[적정묘궁 적연묘각. 고요한 가운데 신묘한 이치를 궁구(窮究)하고, 조용한 가운데 신묘한 이치를 깨달음. 고요 속에서 무상(無上)의 정각(正覺)을 얻는다는 의미)”라는 말처럼 스님들의 참선 수행 모습이 소리 없이 조용한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스스로가 정신과 육체에서 고혈을 착취하는 고행”을 하는 스님들의 치열한 열정이 소리 내어 외치는 그들의 통성 기도보다도 얼마나 큰 울림과 감동을 주는지를 절로 깨우치게 될 것이다. 출판사 홍보 문구처럼 “종교나 연령을 떠나 새해에 누구에게나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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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에 관한 책은 어렵다는 편견이 있다. 내가 특정 종교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온갖 교리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선입관. 어쩐지 책을 읽고 나면 그 주장에 나도 모르게 휩싸일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종교에 관련된 책은 가까이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예외인 책들이 있다. 법정스님의 책이나 이해인 수녀님의 책같은 경우는 종교를 떠나 많은 이들에게 읽히는 대중적인(?) 책이 되어있다. 아마도, 자신의 종교관을 떠나 모든 종교가 지향하는 한가지.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선방일기는 꽤나 유용한 책이었다. 이미 불교계에서는 법정스님의 책들과 함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와 있던 책이라고 한다. 한 때 절판되었다가 이 번에야 새로운 모습으로 보다 많은 이들에게 따뜻함을 전해주게 되었다. 저자인 지허 스님에 대해서는 알려진바가 거의 없다. 정확한 출가와 입적년도도 없으며 출가전의 활동상과 출가후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명확한 사실이 없다. 단 이 글이 1973년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다는 것과, 출가 전 서울대를 졸업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이다. 사실 이 책을 읽다보면 종교,철학,문학 전반에 걸친 저자의 해박한 지식을 느낄 수 있다. 아마도 그런 부분이 지금의 사람들에게 스님의 학력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스님들은 일년에 두 번 안거 생활을 하게 된다. 여름철에 행해지는 하안거와 겨울철에 행해지는 동안거. 이 기간동안은 외부 출입이 전혀 통제되며 선방에 들어가 용맹정진하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스님들의 공부철인 샘이다. 이 책은 스님이 오대산 성원사에서 동안거 기간중의 일들을 기록한 23편의 짧은 글들을 모아놓고 있다. 제목처럼 선방일기인 셈이다. 일기인 만큼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동안거 중에 일어나는 스님들의 일상이기에 참으로 경건하고 소박할 뿐이다. 속세를 떠나 기나긴 수행생활을 하는 스님들에게는 삼부족이라는 것이 필수적이라 한다. 식부족,의부족,수부족으로 불리우는 삼부족은 먹고,입고,자는 것에 대한 지극한 절제를 의미한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먹고,입고,자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욕구일진대 그것에 대한 절제를 한다는 것 만으로도 가장 큰 수행이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반대로 의.식,수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인간의 욕심은 그 한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일수도 있다. 가장 기본적인것이 가장 세속적인 것이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진정한 수행의 결과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 스님들 또한 엄연한 인간(대중)일지라, 앞에서 말한 세가지 것에 결코 초연할 수는 없다. 기나긴 겨울밤 허기를 달래기 위해 몰래 먹는 감자구이와 보름날 만 특별히 먹을수 있는 별식인 찰밥과 만둣국에 대한 예찬은 보는 이 또한 군침을 넘기게 만든다. 또한 그것에 대해 집착하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며, 그 진솔함이 정겹기 까지 하다. 20세가 되지 않은 젋은 스님들 사이의 올깨끼와 늦깨끼에 대한 완력다툼. 그것 또한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한 욕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서로를 자극해서 좀더 빠른 수행의 길을 걷고자 하는 격려의 의미를 갖는다고 한다. 조직이 있고 권력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욕심을 먼저 채우는 것이 인지상정인 요즘 시대에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일이기도 하다.
화두,선문답 등으로 대변되는 고승들의 이야기는 난해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책 또한 중간중간 나오는 화두에 대한 논쟁은 어떠한 철학정 논쟁보다 심오하고 치열하다. 하지만, 자신의 잘남을 과시하기 위한 현학적 태도도 아니며 중생을 구제한다는 오만함도 아니다.그저, 나또한 중생의 일원으로서 다 같이 해탈의 길을 걷고자 하는 자각이며 격려이다. 이 책이 아름다운 이유다. 서걱서걱한 나뭇잎을 밟으며 시작한 선방일기는 소복히 쌓인 하얀 눈을 맞으며 맺음을 한다. 기나긴 동안거를 끝낸 스님들의 발길에서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한마디. '성불하십시오'라는 말이 오랫동안 가슴깊이 울려펴지는 책이다. 우리 다같이 성불하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마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만나 괴롭다.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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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눈이 내렸으니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된 것이다. 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짧아지고 길고 긴 밤과의 동거만이 남았다. 겨울은 준비해야 할 것들이 많은 계절이다. 아궁이에 불을 때던 어린시절에는 산에 가서 솔방울과 죽은 나무 가지를 주워왔고 연탄 보일러가 있던 시절에는 창고에 연탄을 쟁여두었다. 메주와 김장을 빼놓을 수 없다. 생각해보면 아련한 추억으로 떠오르는 겨울 풍경이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없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다.
『선방일기』는 1973년 신동아에 연재되었던 글로 1993년과 2000년에 출간된 적이 있다. 10월 15일에서 1월 15일까지 전국 각지에서 ‘상원사(上院寺)’로 모여든 스님들의 선방생활 기록이다. 곰과 개구리가 동면을 하는 동안 깊은 산사의 선방에선 스님들이 수도에 전력을 다하는 동안거(冬安居)가 시작되는 것이다.
동안거의 생활은 새벽 두 시 반에 기상하여 참선과 휴식을 번갈아 하며 9시 취침까지 단순하고 단조로웠다. 세속을 떠나 불가로 들어왔다지만 아침엔 죽, 점심엔 쌀밥, 저녁엔 잡곡밥을 먹고, 이불도 없다니 너무 열악한 환경이 아닐까. 37년이 지난 지금의 산사는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다. 그믐에는 목욕과 이발을 하고 세탁을 하는 모습은 생경하지만 이런 게 절제의 삶은 아닐까.
절간에는 열반도 피안도 없으며 인간을 육체적으로 거의 박제화(剝製化)시키려는 고통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끝내는 피안에로의 길을 자기 자신이 열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하면서 즐거이 수고(受苦)할 뿐이다. p. 61
스님들이 기거하는 선방에도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휴게실 공간인 뒷방이 있어 놀라웠다. 절에서 절밥을 먹고 자란 어린 스님들의 귀여운 다툼이나 배고픔에 감자를 훔쳐 구워먹는 모습에 웃고 만다. 다양한 이력을 지닌 스님들의 화두는 정신과 육체 중 어느 것이 우위인가, 본능 억제가 미덕일까, 하는 인간에 대한 것이 많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얇은 한 권의 책이 가슴 깊이 쌓아둔 노여움과 욕망을 내려놓게 한다. 차갑지만 맑고 신선한 겨울 아침을 만나는 기분이라고 할까. 해서, 어지러운 마음이 차분해지고 정갈해지는 듯하다. 복잡한 일상을 떠나 쉼을 만나고 싶다면 선방일기를 읽어보면 좋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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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말 그대로 일기였다. 스님들의 실 생활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스님의 일기다. 스님이 되는 과정이 많이 힘들다고 어느 스님이 말씀하셨지만 스님이 되고 나서도 인간의 기본 생리를 많이 참고 인내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아주 편하고 쉽게 적어 놓으셨지만 책을 읽는 나로서는 절대 할 수없을 것 같은 인내같다. 특히 육식을 좋아 하는 미식가인 나는 먹는 낙으로 사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아주 소식을 하면서도 음식의 종류 또한 아주 몇가지에 불가하니 산속에 살면서도 그렇게 먹고 어떻게 살아 갈 수 있을까 싶지도 하다. 몰래 감자를 구워 드신 스님들에게 감자가 질리게 하신 스님은 아주 얄미우시다. 예전 못 먹고 살던 시절 애기가 밥을 많이 먹는다고 질릴때까지 먹어 보라고 찰밥을 배터지게 먹게한 계모 생각이 나 눈물이 나려 했다.
산속에서 오래 기도하고 있다보면 눈에 선한 것만 보이고 다른 사람의 마음 까지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른다고 누구나 도는 닦으면 득도를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누구나가 절대 누구나가 될 수 없을 듯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정말 대단하신 마음의 결정이 아니면 부처님의 재자가 될 수없고 불심이란 다른 종교와는 또 다른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스님들이 1년에 2만원이면 생필품 그러니까 먹고 입는 것이 해결 된다니 정말 우리는 모두 많이도 과소비를 하고 있는 것 같다. 스님들 정도는 아니더라도 옷값과 신발 가격이 너무도 과한것은 가격이 비싸고 상표가 유명할 수록 그리고 유행을 따질 수록 잘 나가는 우리의 소비풍조에서 조장되는 가격때문일 것이다. 광목이 그렇게 싼 지도 몰랐다. 스님들이 절에서 광목에 물 들이는 것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천이 뻣뻣한 것은 그저 빳빳하게 다려 폼 나라고 그런줄 알았는데 그 가격이 그토록 저렴 할 줄은 정말 몰랐다. 부식과 잡곡은 자급자족이라 작은 암자들에서는 텃밭도 가꾸고 산에서 더덕이나 산나물도 캐오는 것을 본적은 있지만 그것이 자급자족이 아닌 그저 스님들의 취미 생활인줄로만 알았으니 나도 엄청 무식하긴 한가 보다.
병든 스님이 스스로 절을 떠나는 것이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어느 종파인지는 모르나 평생을 불재자가 되고자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신 분이면 건강할때만이 아닌 병 들었을 때도 종단에서라도 책임져 주셔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이책을 읽고 나서 계속 머리속에 그 스님은 어디로 가셨을까 하는 생각이 맴돈다. 뭔가 뒷 이야기라도 있었으면 하지만 스님들의 행적은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그저 단순히 보통의 생을 태어났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불교에 몸을 바치신 분들의 소소한 생활을 알수있는 좋은 책이었다. 스스로 스님이 되신것을 후회 하시지는 않으시는지 가끔 스님들의 속뇌가 궁금할 때가 있었는데 이런 속내를 다는 아니지만 소소한 생활을 적은 읽기가 조금의 궁금증은 해결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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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오늘도 정진한다
한없이 흔들릴 때 집어 든 책이다. 머리 깎고 산에나 들어갈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검색에 검색을 거듭하다 안거 수행 중인 스님의 기록이라는 말에 우선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해보자는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다른 저서가 있는지 찾아봤는데 정보가 없는 스님이다. 1962년~1963년 사이 1년간 강원도 정성 정암사 근처 토굴에서 수행했고 이때의 기록이 <대한불교>에 연재된 적이 있다. 작가 이정범 씨가 우연히 발견한 기록을 1973년 <신동아>에 연재했고 그 글을 추려낸 책이 《선방일기》이다. 1975년에 입적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아무리 스님의 일기라지만 종교나 연령을 초월한다. 내게 종교가 있느냐 물어보면 기독교라고 대답하지만 나름대로 깨달음을 받은 건 영화 <달마야 놀자>를 보고 나서다. ‘불상이 부서지든 십자가가 부러지든 신의 존재는 저마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 대답하며 교회는 안 간다. 아주 그럴듯한 핑계다. 오지 말라고 아무리 발버둥 처도 저마다 바닥에 고꾸라지는 순간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다른 누군가의 고달픔을 보며 저보다는 낫다며 위안 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남들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사는구나 하며 위로받을 것이다. 나와는 전혀 다를 거라 생각했던 스님들의 동안거 짧은 생활 속에서 내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았다. 선방 스님들의 하루를 담담히 풀어냈다. 그렇다고 해서 스님들의 하루는 전혀 담담하지 않다. 겨울 채비로 김장 울력과 메주를 쑤고, 감자를 훔쳐 먹는다던가, 만두를 빚으며 갖은 방법으로 장난을 치는 등 의외로 인간적인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지허 스님의 깊은 사색과 예리한 성찰이 담겼다. 안거 중 중간지점에서 수면을 거부하고 주야로 일주일 동안 수행 정진하는 ‘용맹정진’이 있다. 졸음과 싸우며 뼈마디가 쑤시고 신경이 없는 머리카락과 발톱에까지 고통이 느껴지는 수행을 하기도 한다. 그 자리 누워 버리면 그 순간의 고통에서 해방이다. 하지만 그러는 순간 모든 것은 물거품이다. 몸이 약하면 계속 정진하고 싶어도 못한다.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가르치고 있다. “분명히 열반(涅槃)은 있고 또 열반에 가는 길도 있고 또 그것을 교설(敎說)하는 나도 있건만 사람들 가운데 바로 열반에 이르는 이도 있고 못 이르는 이도 있다. 그것은 나로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如來)는 다만 길을 가리킬 뿐이다.”(중략)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틀림없는 평안이다. 왜냐하면 극악한 고뇌의 절망적인 상황은 두 번 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죽음을 이긴 사람에게 죽음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죽음은 결코 두 번 오지 않는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 자조한 길이지만 녹록지 않다. 하지만 뜻하는 바가 확실하기에 묵묵히 정진한다. 책은 얇지만 내용은 묵직한 울림이 있다. 저마다의 열반을 찾아 오늘도 살아가는 이들이. 안거하고 있을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이들이, 고된 하루, 짊어진 짐을 잠시 내려두고 선방 스님들의 하루를 들여다보며 마음과 정신을 토닥여 보는 건 어떨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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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여는 순간 먼저 매캐한 화약냄새가 나는 것은 무슨 일일까? 나는 50,60,70년대를 냄새로 표현하자면 왠지 화약냄새의 시대라고 표현하고 싶다. 지리산 부근 어느 산골의 내 유년의 시절 60,70년대는 어딘지 모르게 화약냄새가 났다. 술에 떡이 되어 오줌에 지리고 눈에는 핏발이 서 있고 좌절과 허무, 그리고 영혼을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통째로 팔아치운 시대... 그래서 나는 그 시절의 모든 것은 화약냄새에 갇혀있다고 생각 해 왔다. 사람도 산천도 물건도...... 화약냄새를 지우기 위해, 화약냄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모두들 몸부림 쳐 왔다고 생각했다.
100여쪽정도밖에 안돼는 얇은 책인데 엄청난 묵직함으로 다가왔다. 수십권의 책이 응축되어 있는 듯한 그런 묵직함이다. 내 그릇이 너무 작아서 그럴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큼만 한 그릇을 각자 가지고 있다. 크기는 저마다 다른데 내 그릇은 간장종재기 정도밖에 안된다고 항상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다. 역시나 이 책을 읽고 이것을 담아 낼 수 있는 내 그릇은 확실히 간장종재기라고 재삼 느꼈다. 그러니 간장종재기가 찌그러질 정도로 무겁게 다가 온 것이다.
리뷰룰 써야겠다고 생각 했지만 쉽사리 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어 보았다. 역시 무거웠다. 물론 그 무게란 짓눌러 뭉게는 그런 무게는 아니다. 凡人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무게...
선객답게 많은 것을 던져 놓았다. 그가 던진 화두는 이미 선객의 그것이 아니라 禪師의 가르침으로 온다. 많은 것을 상상하고 많은 것을 추측하게 한다. 누굴까? 왜? 어디로?
진한 먹물 냄새가 난다. 보통의 먹물은 아니다. 물론 고약하고 천박한 먹물의 냄새는 아니다. 근본에 대한, 실존에 대한, 견성에 대한......대단히 깊은 성찰의 냄새, 간결하기에 더 궁금하고, 더 생각케 한다.
아마도 철학이 전공이 아니었을까? 그것도 실존철학, 전후를 풍미했던... 현각스님이 불문에 입문하기 전 마지막으로 당도 했던 곳이 쇼펜하우어였던 것처럼. 동안거가 끝난 후 禪客의 행선지는 토굴이다. 마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연상케 한다.
동시에 한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넘쳐 흐르고 있다. 그것이 전혀 천해 보이지 않고 진지하고 심오하고 체화 되어 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전혀. 나의 이 천한 간장종재기의 단순한 호기심일 뿐.
무겁다고 해서 무겁지는 않다. 깊은 산골짜기 숲속의 샘물같은 시원함이 있다. 목을 축여 준다. 법정스님의 글들도 그러하다. 종일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산속의 작은 개울같은 느낌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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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숲속 산사에서 오랜 명상을 하고나온 기분이 드는 오묘한 책. 마치 내가 선방에 있는 느낌의 그 소박하고 경건한 감취가, 전신을 아우르는 정결한 기분이 지허스님의 글을 읽으며 오감에 골고루 퍼졌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소재들이 무척 소소하고 친근하다. 물론 우리는 선방의 하루하루를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삶이 일면으로는 낯설고 멀게 느껴지지만,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또 스님들의 언행은 때를 털어내려는 수행이라 멀게 느껴져서는 안됐다. 나를 비롯해 이 사회를 사는 우리는 한층 정결한 품성을 지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결핵으로 인해 절을 떠나야 했던 스님에게 안쓰러운 마음에 모아서 준 돈은 푼돈에 지나지 않았고, 식사 조절을 철저히 하는 통에 대개 위장병을 안고 사는 모습에선 수행의 강도와 진정한 고행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간혹 들르는 월정사의 위에 있는 실존 절이라 더욱 친숙했고 마치 옆에서 스님들을 보는 듯 글을 읽었다. 일러스트도 고즈넉한 게 글의 분위기와 100% 맞아 떨어진다.
얇다는 게 오히려 묵직한 느낌을 준다는 걸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누군지 모르는 스님의 글이라는 사실이 이 글의 신비로움을 더한다. 지허스님이 누굴지 궁금도 하지만, 그보다 고행을 실천하고 있는 스님들의 육체적 건강도 한층 나아졌음 좋겠다는 생각을 품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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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는 상원사 선방에서 동안거를 지냈던 지허스님의 일기이다. 본래 책으로 나온 것이 아닌 73년 월간 <신동아>에 연재되었던 작품을 묶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던 책이라고 한다. 편집자의 말을 보면, 많은 사랑을 받은 책이었지만 재출간이 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에 대해서 알려진 것이 '지허'라는 법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선방일기>속의 그일 뿐이었다. 어쩌면 이 일기 자체가 그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