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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제1회 김학철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김학철의 삶과 문학, 조선의용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설가 방현석과 지원단 100명이 뜻을 모아 만든 문학상이다. 대상 작품을 심사위원이 아닌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다는 점에서도 여느 문학상과 결이 다르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 자체가 평생 민중과 함께하고자 했던 김학철의 삶과 닮아 있다.
1916년 원산에서 태어난 김학철은 열아홉 살에 상하이로 망명해 의열단과 황포군관학교를 거쳐 조선의용군 분대장이 되었다. 태항산 전투에서 일본군의 총탄에 다리를 맞았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한쪽 다리를 절단했다. 전향서 한 장이면 치료받을 수 있었지만 끝내 거부했다. 육체는 꺾였어도 정신은 굴복하지 않았다. 광복 이후에도 그의 고난은 끝나지 않았다. 서울에서는 좌익으로 몰렸고, 평양에서는 김일성 체제를 비판했으며, 중국에서는 『20세기의 신화』로 개인숭배와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다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돌이켜보면 그의 스무 살부터 예순 살까지, 한 인간의 가장 빛나는 시절 대부분이 시대에 저당 잡힌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유머와 낙관을 잃지 않았다. 출소 후 예순넷부터 다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평생 자신의 삶과 함께 싸웠던 전우들의 삶을 문학으로 복원했다. 새벽에 일어나 운동하고 글을 쓰고, 편지에 답하고 신문을 오려 붙이는 평범한 일상까지 신명나게 살아냈다. 그의 문학을 떠받친 힘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정신과 삶에 대한 낙관이었다.
이번 작품집에 실린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 최진영의 「울루루-카타추타」, 전춘화의 「웰컴 투 빌라」 역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 질문을 던진다.
황정은의 「문제없는, 하루」는 제목과 달리 결코 문제없는 하루가 아니다. 소설은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통과하는 일상에 얼마나 많은 무감각과 폭력이 숨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소규모 의류회사에서 일하는 영인은 납기와 반품, 물류 차질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반면 그림을 그리는 동생 인범은 가자지구 전쟁과 수요집회 같은 사회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처럼 받아들이는 인범을 영인은 피곤해한다. 자신의 삶 하나 감당하기도 벅찬데 세상의 고통까지 짊어지는 동생이 한가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영인을 비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독자는 영인의 피로에 쉽게 공감한다. 바로 그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 떠오른다. 악은 특별히 잔혹한 인간에게서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겨를 없이 살아가는 평범한 삶의 무감각 속에서도 자란다. 서해에서 재미 삼아 칠게를 잡고 어린 낙지를 죽이는 장면 역시 그렇다.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다. 그저 ‘재미’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 무심함 속에서 다른 생명의 고통은 지워진다. 마지막 터널 장면은 이 질문을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사고 차량과 피 흘리는 노인을 발견한 영인과 인범은 차를 멈추고 구조에 나서지만 다른 차량들은 힐끔 쳐다본 채 지나간다. “사람 있어, 사람.” 영인의 외침은 소설 전체를 관통한다. 우리는 정말 타인을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황정은은 묻는다. 당신이 아무 문제 없이 지나왔다고 믿었던 그 하루가 정말 ‘문제없는 하루’였느냐고.
최진영의 「울루루-카타추타」는 한 사람의 죽음 이후 남겨진 사람들이 고인을 다시 이해해가는 애도의 시간을 그린다. 태훈은 5년 전 졸음운전 차량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대신 목숨을 잃었다. 세상은 그를 ‘좋은 사람’,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아내와 아들 혜성의 기억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특히 혜성에게 아버지는 엄격하고 강압적인 사람이었다. 모두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자신은 왜 그렇게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 모순은 아이에게 또 다른 죄책감이 된다. 소설은 한 인간이 사회적으로는 영웅이면서 가족에게는 상처를 남긴 존재일 수도 있다는 불편한 진실을 피하지 않는다. 남편의 서재에서 발견한 고대 유적지 사진은 화자가 알지 못했던 태훈의 내면으로 향하는 작은 통로가 된다. 그중 9억 년의 시간을 견뎌온 ‘울루루-카타추타’는 인간의 짧은 생과 상처를 압도하는 거대한 시간의 상징처럼 놓인다. 혜성이 그 사진을 자신의 방에 걸어두는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용서했다기보다 자신이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일부를 이해해보려는 조심스러운 몸짓에 가깝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더라도 이해하려는 마음. 어쩌면 그것이 애도의 다른 이름인지 모른다. 「울루루-카타추타」는 상실을 극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모순된 기억까지 품은 채 죽은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일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전춘화의 「웰컴 투 빌라」는 국경을 넘어 한국에 정착하려는 이들의 삶을 통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다. 연길에서 결혼한 ‘나’는 남편 림과 한국으로 건너와 빌라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연변 시절 인연을 맺었던 혜주언니와 양선생님 사모님은 임신한 화자에게 아기보험과 아파트, 세탁기와 냉장고, 화분까지 권한다. 모두 선의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나 화자에게 그 호의는 점차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잘 사는 방식’에 자신을 맞추라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더 넓은 집과 더 많은 물건, 더 많은 자산을 갖는 삶과 최소한으로 소비하며 남는 것을 이웃과 나누는 삶. 소설은 어느 쪽이 옳다고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는 삶의 기준이 누군가에게는 낯선 규범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작품은 여기서 통일 이후의 미래까지 시선을 넓힌다. 탈북민들은 통일이 되면 북쪽에도 ‘압록강 뷰 아파트’가 들어서고 결국 돈 많은 사람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할 것이라고 말한다. 국경이 사라진다고 모두가 같은 출발선에 서는 것은 아니다. 자본은 새로운 공간을 점유하고 또 다른 주변부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의 마지막 편지는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남북통일은 아직 요원하지만 언니와 나 사이에 있는 선부터 지우고 싶다고.” ‘웰컴 투 빌라’의 빌라는 더 이상 아파트보다 작은 집을 뜻하지 않는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리이며, 국경을 건너온 사람이 비로소 허리를 펴고 뿌리내리는 삶의 공간이 된다. 거대한 통일보다 먼저 지워야 할 것은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어진 작은 경계인지도 모른다.
세 작품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지만 하나의 지점에서 만난다. 황정은은 무심히 지나치는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게 하고, 최진영은 한 인간을 선과 악의 단순한 잣대로 규정하지 않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마음을 보여주며, 전춘화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어온 삶의 기준과 경계를 되묻는다.
홍기돈 평론가가 수상작 선정 이유에서 밝힌 ‘불안한 현실에 맞서 이월하려는 치열한 작가정신’도 바로 이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편하게 살려거든 불의를 외면하라.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맞서라.” 김학철이 남긴 이 말은 과거의 문장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한 인간을 쉽게 단정하지 않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의 경계를 지우려는 것. 세 작품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 정신을 오늘의 삶 속으로 불러낸다.
문학상이 한 작가의 이름을 기념하는 데서 그친다면 동상 하나를 세우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을 오늘의 문학으로 다시 질문하고, 독자가 읽고 선택하며, 그 질문을 다음 사람에게 건넨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2026 제1회 김학철문학상 수상작품집』은 그렇게 김학철을 잇는다. 사람에서 사람으로, 문학에서 문학으로. 그리고 그 이어짐 자체가 또 하나의 연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