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이란 것에 어느정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대학 2학년 무렵이던가, 무슨무슨 대학 추천 100선 같은 곳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유명한 저자들의 소위 '고전'이라 불릴만한 책들을 인터넷으로 검색하다가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부분의 책들은 번역본이 없던가 절판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위와 같은 우리의 천박한 번역실태를 고발하며, 날림 번역은 왜 일어나는지, 번역과 관련된 우리 학계의 현실은 어떤지를 설명한다. 그리고 번역은 반역이라는 통념에 반대하며, 번역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학문 발전을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일임을 역설한다. 개인적으로는 이슬람 문명이나 서유렵,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번역을 계획하고 지원하여 문화적 황금기를 누릴 수 있었다는 주장이 흥미로웠고 공감도 갔다. 영어 못하기로 유명한 일본이지만, 그들의 학문수준은 국내외에서 알아준다는 점을 생각해봐도, 번역을 통해 상대의 문화를 자신의 문화로 체화하는 것이 학문발전에 정말 중요한 일이라는 저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책은 뿐만아니라 번역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번역을 위한 충고도 하며, 책을 만듦에 있어서 편집인과 번역가 간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까지도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오역문제, 도서관 문제(난 도서관에서 책을 돈주고 구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몰랐다), 대학원에서의 잘못된 번역관행(암암리에 소문을 듣긴 했지만, 그게 사실일 줄이야), 영어 공용화론에 대한 비판까지 언급하고 있는데, 저자의 유려한 필체와(그야말로 격정토로 수준인데, 개인적으로도 평소에도 가끔씩 생각했던 문제들이라 정말 '속 시원했다')깔끔한 비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다. 학문에 대해, 혹은 책에대해 관심있는, 때문에 이땅에 살고 있는 '독자'라면, 더군다나 이중번역이니 대리번역이니 하는 것들이 요 며칠전까지만해도 이슈가 되었던 오늘날 한번쯤 찾아 읽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책 아닐까 싶다. 사실 나도 별로 기대하고 구입한 책은 아니었지만,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
| 종종 외서를 읽다보면 번역본에 대해서 생각할때가 있었어요. 너무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아직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책들이 참 많거든요.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번역은 다른문명과 처음 접촉할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작업입니다. 번역을 통해 지적활동이 가능해지집니다.아무리 좋은 학문이라도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으면 우리 문화로 편입될수 없으니깐요.그럼으로 번역으로 인해 우리 문화가 풍성해집니다. 번역은 텍스트의 철저한 이해와 소화를 요구합니다.하지만 번역은 '문자의 옮김'이 아니라 '의미의 옮김', '문화의 옮김'입니다.잘된 번역은 원서보다 더 큰 시너지를 주지만 잘못된 번역은 원서를 망치기도 하지요.그래서 원서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원서의 저자만 원망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해요. 저자는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번역자들을 위로하기도 하지만, 아직도 사회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지식인이라는 자들의 횡포에 대해서도 고발합니다.자신이 번역하지도 않은 번역서를 출판하고(그런자들이 번역서에 대한 애정이 있을리 만무하며), 책임감 없는 번역으로 인해 고생하고 있는 번역자들을 욕되게 합니다. 번역은 외국어만 안다고 되는것이 아닙니다.전문적인 지식과 함께 정확한 글을 찾아 옮기겠다는 열정도 함께 있어야합니다.그리고 모국어 구사능력도 함께 갖추어야지요.참다운 번역은 원작의 가치에 대한 존경과 감동이 함께해야 독자들에게도 사랑을 받을수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전으로 독자들도 정확한 오역들을 지적하고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게됨으로써,번역의 발전에 도움을 줍니다.종종 번역의 충실도와 아님 문맥의 연결이 중요한가를 두고 번역자와 독자들간의 토론이 오고가지만 그런면에서는 번역자와 독자의 개인 취향이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지나친 충실도는 때론 우리가 모르고 있는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수도 있지만,지나친 간섭 또한 원작자에게 누를 끼칠수 있으니깐요. 번역은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국내 번역일은 그리 좋은 사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한가하게 번역해서는 생활하기 힘든 사정을 보면서 번역자에 대한 환상이 깨지더군요.사실 번역서뿐만 아니라 국내 출판되고 있는 도서들의 사정은 열악하긴한것 같습니다.여러나라 도서관시절에 대해서 비교하면서 공공도서관에서의 책 구입이 출판사를 살릴수 있는 또 다른 길이라는것을 보여줍니다. 이 책으로 인해 국내 번역의 현실과 번역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공공도서관이 많이 생기고 사람들이 연평균 독서량이 늘어나길 희망해보며 또한 좋은 외서들이 많이 번역되어 여러사람의 정신을 즐겁게 해주길 바랍니다. |
|
자세히 떠들 시간이 없으니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 책은 번역가가 되려는 사람이나 번역가로 활동하는 사람의 필독서다. 1부에서 다루는 '번역의 역사'는 흥미진진함 그 자체이고, 2부에서 다루는 모국어 이야기와 3부에서 다루는 번역의 실제는 번역가로서 알아둬야 할 배경 지식이고, 4부에서 다루는 책의 세계는 함께 생각해볼 만한 주제다. 몇 가지 흥미로웠던 부분을 언급해보자면, 1부에서 언급한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탄생 이야기다. 어떤 배경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탄생했는지 알고 나니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또 4부에 나오는 도서관 이야기도 새겨둘 만하다. 그나마도 얼마 되지 않는 한국 도서관들이 저자들에게 손을 벌려서 책을 기부받으려 한다는 사실은 한마디로 폭소가 터지는 대목이었다. 그래도 그 공무원 양반들 제 월급은 꼬박꼬박 챙기겠지? 하하하하. 일본의 도서관 상황도 무척 흥미로웠다. 도서관 수가 우리의 여섯 배라는 점도 놀랍지만 (미국은 무려 50배지만ㅋㅋ) 시민들이 도서관을 이용하는 상황은 더더욱 놀라웠다! 하기는 나 같은 사람도 도서관에 거의 가지 않는데--나는 필요하면 그냥 사버리니까ㅋㅋ--일반 시민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저자가 자신의 처지를 다소 일반화했다는 것이다. 자신이 인문학도이고 인문학 교수에 인문서 번역자라는 점에 치중했는지, 소위 '인문'의 한 축인 '소설'마저도 배제한 느낌이 강하다. 소위 다독가 중에도 소설을 제외한 인문서를 일 년에 수십 권씩 읽어내는 독자는 많지 않다. 인문학 전공자가 아닌 한 대체로 그러할 것이다. 그런 상황을 일반화하기는 약간 무리가 아닐까. 물론 번역이라는 작업 자체를 인문학의 한 갈래로 볼 수는 있겠으나, 학문 분야가 다양하듯 책도 다양하므로 하나에만 치중하기보다 전체를 아우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주석에 실린 강유원 씨 관련 기사도 읽어두면 좋을 듯. 다행인지 모르겠으나 2006년 10월에 나온 이 책이 그래도 작년 말에 3쇄를 찍었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 역시 정부가 뭔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건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터무니 없는 일이다. 번역가들이 시작해야 한다. 반역을 주도하자.
|
|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을 읽다보면 여주인공 유키호의 오로라 어쩌구 저쩌구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글을 읽고 연달아 오로라 오로라 하니깐 도대체 오로라가 무엇일까 ? 하는 의문이 든 적이 있었다. 문맥을 보면 오로라라기 보다는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아우라가 아닐까? 하는 순간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오로라는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어가 아니었기에, 그때는 그냥 넘어갔었다. 한참 나중에야 그 오로라가 역시 생각했던 대로 아우라였다는 것을 일본 원서와 비교해가며 번역의 오역을 지적한 타인의 리뷰를 보고 알았다. 그 때 백야행을 번역한 정태원이라는 사람의 일본어 실력이 일본어만 알고 인문총서에 대한 무지를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서 실실 웃고 넘어갔는데,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이 몇몇 단어에 의해서 좌우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지 않았고 그까짓거 용어 모를 수도 있지. 인문과학이나 예술 총서도 아니고 기껏해야 소설인데 뭐, 하며 번역문학에 있어서 오역은 어쩔 수 없는 하나의 현상이다라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었다.
오히려 이 <백야행>이라는 작품을 읽고 나서 정태원이라는 역자의 몇몇 가지 오역보다도 이 작품에 대한 안내 정보(작가 소개도 형편없는)는 커녕 역자 후기 한장 없다는 사실에 경악 했었다는 사실이다. 번역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는 작업이라는 사실로 짐작하건데, 그래도 책 한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서는 무슨 소감 한마디 정도는 독자들을 위해 남겨 놓아야하는 것이 의무 아닌가! 달랑 작품만 수록 되어 있다는 사실이 오역보다도 더 꽤심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오죽하면 그 때 게이고를 검색한 것이 아니고 정태원이라는 역자를 검색하고 난리를 친 적이 있었다.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정태원이라는 분은 거목정도로 받들어 모시는 인물같은데, 이런 무성의로 일관하는 책의 역자에게 거목이라는 무슨 조폭 우두머리에게 머리 조아리듯 갖다 붙여댄 것에 비웃지 않을래야 비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 독자가 이런 작품에서 보여준 역자의 매너에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책 도서관에서 빌려보고 나중에 포인트로 사야지하고 있었는데, 개정본에 역자 후기 실리는 날 살 것이다.)
이런 정태원 같은 역자가 꼭 읽어야 할 책이 바로 이 <번역은 반역인가>이다. 박상익 선생은 어학 실력만 있다고 번역 작업이 쉽사리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113쪽)라며 인문학만 들여다 보더라도 문학 역사 철학 사이에는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련이 있으며, 또 그것들은 사회과학 및 자연과학의 여러 분과들과 영역이 서로 중첩되어 있(110쪽)다고 말하고 있는데, 자신도 번역 작업시 필요한 참고 서적을 구입하는 비용이 큰 비중을 차지 하다보니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고 말하고 있다. 이 정도의 번역 서비스는 차치하고라도, 고등학생도 알고 있는 아우라를 몰라 오로라(혹 오로라 공주를 연상하지 않았을려나?, 이 정도의 용어는 사전 한 번 들춰보았더라면 금방 알 수 있었을 텐데) 라고 덥석 해석한 정태원씨나 편집자가 이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있으니 .. 하긴 메이저급 출판사라고 다르지 않다. 얼마전에 읽은 하루키의 <의미가 없다면 스윙도 없다>라는 작품에 하루키가 부르스 스프링스틴에 대한 음악평을 얘기하다가 그의 노래 Born in the USA를 거론할 때 본 인 디 유에스에이라고 음운을 옆에다 표기해 났는데 이거 무슨 웃지 못할 해괴망측한 일인지. 아니 우리 나라가 영어시장에 쏟아붓는 돈이 조가 넘는다면서 본 인 더 유에스에이를 본 인 디 유에스에이라고 곳곳마다 표기한 것은 정말이지 한숨이 푹푹 나오는 일이었다. 이거 요즘 영어 배우는 아이들이라면 누구나 알지 않나요. 모음 앞에서 디라고 읽어야 하는데 발음상 예외적인 경우가 어쩌구 저쩌구.....메이저급도 이모양이니, 이렇게 되면 이 책에 대한 신뢰가 반으로 깍이는 것은 사실이다.
저자 박상익이 말하는 우리 나라 번역문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귀 기울이면서, 우리 나라 번역문화의 현장을 자세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저자 박상익은 다른 나라 언어로 된 텍스트의 번역이야 말로 우리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며 문화 경쟁력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솔직히 우리 나라 번역의 현주소가 이렇게 개판인 줄 몰랐다. 번역자에 대한 대우가 형편 없다보니 전문 교수들 조차 대학원생 제자들에게 번역을 떠 맡기고 얼렁뚱땅 번역해 놓은 우리 글을 무슨 말인지 몰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던 것이다. 부끄러운 것은 둘째치고 적어도 어떤 분야에서 전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학문에 대한 열정은 다 어디로 가고 자리 꿰차고 앉자 있기위하여 엉뚱한 곳에서 기를 쓰고 아부하는 권력형의 교수만 있는 것 같아서 영 씁쓸했다.
좀 놀란 것은 지금 이렇게 사용하고 쓰고 말하는 한글이 사용된 시기가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박상익 교수가 지적하기 전까지는 몰랐었고 자각조차 하지도 않았었다.게다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용어 또한 대부분 일본에게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즉 우리가 이렇게 한글로 말을 하고 글을 쓴 것이 100년이 채 안 된다는 것이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부터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국가차원에서 번역국이라는 기관을 설치하여 조직적으로 서양 서적을 수만권씩 번역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었다. 어느 문명이든지 다른 문명을 처음 접촉할 때 가장 먼저 수행하는 작업이 바로 번역(27쪽)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까지도 번역을 우습게 알고 번역자에 대우가 형편 없다는 사실은 지식 사회가 순수 학문에 대한 열정보다는 권력으로 물들어 있음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일본에게 우리가 번역에 있어서는 100년 정도 뒤져 있다는 저자의 말은 필시 새겨들을 만 하다.
박상익 선생은 이 책에서 저술가이면서도 역자이기에, 번역 작업을 하면서 겪은 경험들과 공감대를 번역의 역사에서 부터 중역 문제, 번역의 오역, 편집인의 자질 그리고 도서관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 넓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그것도 상당히 재미있게, 아이들이 간식달라고 하는 말도 무시하고 불량 엄마 소리 들어가며 이 책 읽고 있었다. 어째든 그가 제시하는 것 중에서 번역문학계의 권력자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 했고 독자는 당연히 제대로 번역된 문장을 읽을 권리가 있고 오역에 대해 당당히 말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지금 당장 태동출판사와 문학세계에 전화 걸어 볼까나 ! 하지만 이렇게 오역에 대한 항의 전화 일일히 출판사에 걸었다가는 전화비는 어떻하라구)
학자로서의 길은 어둠속에서 묵묵히 연주하는 파블로 카잘스 같은 모습이여야하지 않을까싶다.
![]() 인상 깊은 말
읽기에 재미있는 역사는 피상적, 감정적인 저작에 틀림없고 난해한 문체는 심오한 사상가임과 성실한 저술가임을 암시한다는 생각은 진실이 아니다. 읽기에 쉬운 것이 쓰기에는 어렵다. 설령 저자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처음부터 정확하게 알고 있다해도,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치는 수고는 모든 훌륭한 저술가들이 당연히 치러야 하는 일이다.투명한 문체는 언제나 고된 노력의 결과이며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사이의 흐르는 듯한 연결은 항상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
|
번역하면, 개인적으로 3개 정도의 경험이 생각난다.
아르바이트를 하느라고 한 번은 산림청 관련, 또 한 번은 중국 쪽 관광지 개발에 대한 사업계획서를 번역한 적이 있다. 둘 다 초벌 번역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부담이 덜하기는 했는데, 내가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인지라 꽤나 어려워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내 미천한 영어실력 때문인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고.) 또 한 번은 모 출판사에서 출간될 책을 교정을 본 거였는데, 필자가 재중교포인 까닭에 책을 거의 다시 쓰는 정도의 교정을 봤었다. 물론 마지막 것은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말도 안되는 문장을 그야말로 '번역'해야만 했기에 생각이 나는 것이다. (몇몇 문장은 정말 일하다가 폭소를 터뜨렸다. -_-... 지금 생각할 때 참 어이 없는 것은 내가 받아든 원고가 초고가 아니라 책의 형식으로 인쇄된 것이었다는 점이다. 그 출판사의 편집자는 뭐하는 사람일까? --;;)
'번역은 반역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러가지 뉘앙스를 가지고 있겠으나, 이 말은 대부분 '원전'을 강조하는 말로 쓰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역설한다. 번역은 결코 반역이 아니며, 반역이 되어서도 안된다고.
번역이 왕성해야 우리말도 풍부해지고, 우리말이 풍부해져야 세상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으로 육화되는 법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적 역량은 향상되고 지식과 정보의 민주화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암울한 수준인 우리 번역문화를 진단하는 이 글을 읽으면서, 좀 오버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번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나라 대학, 학계의 문제, 사회적 인식의 문제를 자꾸만 건드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을 읽어나갈 수록,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게 될 수록 그럴 수 밖에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가의 수입 대리석이나 외제 욕조, 세면기, 홈시어터 따위로 집안에 '돈'을 바르는 일에는 열심이지만, 책으로 집안 장식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읽지도 않는 책을 꽂아놓기만 하는 건 위선 아니겠느냐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위선도 그립다'고 한 김교신의 말을 떠올린다. 김교신은 성경에서 위선자의 표본으로 꼽히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비록 자신들이 선을 행하지는 못 할지라도 선을 마땅히 행해야 한다는 것은 알았고, 그 선에서 어그러지는 일을 두렵게 여길 줄은 알았는데 반해, 20세기의 현대인은 '위선을 꺼린 나머지' 공공연하게 불의를 말하고 비례非禮를 행하면 도리어 솔직하고 철저하다는 사회적 칭찬을 받는다고 지적하면서, "오호라, 이제는 위선도 그리운 세대로다"하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행해지고 있는 정부 차원의 번역 지원은 1999년부터 본격 시행되기 시작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전부이다. 2002, 2003, 2004년에는 예산이 15억 원씩 책정되다가 2005년에는 2억이 늘어 17억 원으로 책정되었다. 선저된 과제수는 각각 42건(2002년), 52건(2003년), 52건(2004년)이었다. 2002년부터 3년간 146개 과제가 선정되었으니 해마다 평균 50개 과제 정도가 예산을 지원받는 셈이다. 여기에는 서양 고전 뿐만 아니라 동양 고전까지 포함되어 있다. 4천 5백만 국민을 위한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투입되는 정부 1년 예산이 서울 강남의 아파트 한 채 값이다.
번역서를 읽다보면, 정말 짜증나는 일이 있다. 분명 한글로 되어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도통 알 수가 없는 거다. 그 긴 문장에 주어는 없고, 조사는 멋대로 쓰이고, 접속사는 문맥을 부숴버린다. 원문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럴 경우 거의 100% 번역에 문제가 있는 거다. 요새 읽고 있는 책의 한 문장을 보자.
노엄 촘스키는 공공연한 반란의 동기들 중에서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에 대한 거부를 올바르게 지적한다.
한 번만 읽고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난 문장력이 떨어져서 이 문장을 한 번, 두 번, 세 번 읽고도 원 저자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노엄 촘스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사실 이 표현도 어색하기 그지 없다)이 ~에 대한 거부라? 뭐.. 이건 그렇다 치자. (공공연한 반란... 도 일단 그냥 넘어가자.)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 이 문장이 지칭하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한 것 -> '선한 독일인'의 편을 드는 것 인가, 아니면 우리가 경멸해야 한다고 배우기만 했던 '선한 독일인' ->의 편을 드는 것 인가? (뒤에 이어지는 '에 대한 거부'까지 더해지면 그야말로 카오스다. -_-) 이렇게 되면 노엄 촘스키가 올바르게 지적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원전을 비교하지 않더라도 번역에 문제가 있다는 확신이 드는 것이다. 원문의 문장 구조를 따르는 것도 좋지만, 어차피 '번역'이라면 한글을 읽는 독자들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더군다나 이건 문학작품의 번역도 아니지 않은가.
번역이 정말 어려운 일인 반면에, 그 노력에 대한 보상이 턱없이 부족한 일인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돈을 주고 책을 산 독자의 입장에서는, 울컥하는 짜증을 가라앉히며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할 의무까진 없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직접 번역을 하고 있는 번역가의 입장에서, 그리고 학계에 몸을 담고 있는 학자의 입장에서, 또 인터넷 서점의 회원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리스트에 담긴 책을 구매하는 애서가의 입장에서. (아.. 동료애가 느껴진다. ㅎㅎ) 이 책은 읽기 쉽고 깔끔하게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책을 사랑한다면, 그리고 번역에 대한 문제를 종종 느꼈다면. 분명 읽어볼만한 책. |
|
19세기 영국에서는 한 주교의 연설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영어사전 편찬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기존의 사전에서 드러나는 결함을 제기한 트렌치 주교는 이 작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영어로 쓰인 모든 출판물과 문서를 샅샅이 검토하고 해당 언어가 처음으로 적용된 문장을 일일이 찾아 표제어의 예문으로 싣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참여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을 알리지 않은 각 지역의 수많은 자원봉사자의 협조로 사전 편찬은 착착 진행되었고 그 결과 탄생한 사전이 바로 세계 최대라 칭송받는 옥스퍼드 영어사전이다.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대에 어떻게 가능한 일이었는지, 눈 뜨면 노트북 전원버튼부터 누르는 나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대 혁명에 가깝다. ≪번역은 반역인가≫의 저자는 영어 번역가이기에 책 속에서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언급했다지만, 일본어 번역가인 내게는 일본국어대사전은 고사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구입한 일한사전 한 권이 전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번역가로서의 내 자질이 심히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웬만한 단어는 컴퓨터가 찾아주니 사전을 멀리하는 게 당연하다 하겠지만, 검증되지 않은 설명들이 남발하여 그 중에서 옥석을 가려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종이로 된 사전에 손이 간다고 구식이라 할 수도 없다.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국어사전도 어문 규정에 맞지 않은 언어가 섞여 있다는데, 어차피 인터넷이건 종이사전이건 도긴 개긴인가?
이 책의 내용은 매우 현실적이다. 읽을거리가 참 많다는 뜻이다. 아시아와 유럽의 번역역사는 차치하고라도, 번역가들이 실제로 번역을 하면서 겪어야 하는 괴로움과 설움, 번역가로서의 책임과 자세, 번역계의 현실과 미래를 출판계와 결부시켜 민감하게 꼬집었다. 저자가 스스로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하면서(내게는 훌륭한 역사 전문 번역가로 보이지만) 번역에 속한 세계를 적나라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이유는 번역을 허투루 보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본문 중 번역가의 한 달 벌이가 민주노총이 매 년 발표하는 표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언급이 있어 인터넷을 뒤적거려 보았다. 저자가 말한 때는 2001년 지표였으니 10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좀 나아졌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서 말이다. 그러나 초등학생 자녀 2명을 둔 4인 가족 기준 표준 생계비는 492만165원. 한 달 월급을 이만치 받는 직장인도 드물 텐데, 번역가로 밥 벌어 먹고 살기는 더더욱 힘겨울 듯하다. 거미줄만 안치면 다행인 이런 현실 속에서 번역 말고도 투잡, 쓰리잡을 고집하는 번역가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루 종일 구부정히 앉은 자세로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면 글자가 겹쳐 보이기도 하고 화면에 뜨는 글자들이 머릿속으로 입력되지 않을 때가 있다. 돈 받고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직업병의 일종이긴 하지만, 재미와 직업의 차이를 새삼 깨닫는다고 할까. 즐겁게 번역하기는 희망에 불과한 것인지. 번역을 남은 생의 업으로 생각하려는 내 발목을 붙잡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가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어 같은 업계에 발을 담근 나로서는 번역가의 위상이 그만큼 높아질 것 같은 기분 좋은 착각을 한다. 번역이 왜 반역일까? 저자는 본문에서, 해당 외국어에 대한 상당한 소양 및 전문지식, 모국어 구사 능력은 번역가로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항목이이라고 말한다. 이들의 조화가 어긋나면 오역으로 치닫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독자서평과 e-mail등 독자들의 반응을 실시간으로 접하게 되는 현실을 생각하면 번역이 얼마나 아슬아슬하고 부담스러운 작업인지 그대로 전해진다. ‘무식유죄(無識有罪), 유식무죄(有識無罪)’를 외친 저자의 마음이 곧 모든 번역가의 마음일 것이다. 가끔 독자들의 비판 중에는 누가 읽어도 오역임을 지적한 내용도 있지만, 번역가와의 해석의 차이에서 비롯된 비판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럴 때 핏대를 세우고 내 주장을 밀고 나가는가, 적정선에서 고개를 숙이며 수긍하는가는 번역가마다의 가치관이 다르니 옳다 그르다를 논할 수는 없고 본다. 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은 중역의 오류이다. 본문에 예로 든 찌루찌루와 미찌루는 벨기에의 유명한 동화 ≪파랑새≫의 주인공들 이름이다. 이 동화책이 일본에서 먼저 번역되었는데, 우리나라의 번역가가 다시 이 책을 번역하면서 일본 발음 그대로 옮겼기 때문에 원래와 전혀 다른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말로 표기하면 틸틸과 미틸 정도가 될 것이라고 하는데, 언뜻 듣기에 거북하다. 오역의 산물인 찌루찌루와 미찌루의 말맛에 이미 길들었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다. 외국 원서를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왜 일본어로 번역된 도서를 다시 번역하는가. 영어가 원서라면 영어책을 놓고 번역하면 될 일을 왜 돌아가는가. 일본어를 수단으로 벌어먹는 나 같은 사람에겐 밥벌이에 도움은 되겠지만, 우리나라의 번역 역사에 또 하나의 오점을 남길 위험한 작업이라 생각하니 그냥 넘길 일은 아닌 것 같다. 이런 현실이 번역가 개인의 잘못된 글 해석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판권 문제, 편집자와 번역가 사이의 미묘한 감정싸움, 책을 홀대하는 국민정서, 국내 번역시장의 열악함 등 여러 문제들 속에서도 양서 한 권을 끄집어내기 위한 숨은 노력들을 무시해 온 것 또한 사실이지 않은가. 언젠가 이런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면 반역하지 않고 번역할 수 있는 그날이 올 수 있겠지. 역사는 한 세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
|
모음 하나가 가지는 무게
번역을 반역이라 하니 뭔가 울림이 좋지 않아 정확한 의미를 찾아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올라와 있습니다. 반역: 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통치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 함 와우, 졸지에 반역자가 되다니……. 그렇습니다. 번역가들은 늘 번역을 할 것인지 반역을 할 것인지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자칫하면 반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반역은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어정쩡하면서도 단지 언어만 바꾸어 놓은 번역문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 보니 저도 꽤나 반역을 저질렀었습니다. (마치 지금은 아닌 것 같은 말투지요? ^^) 그렇다면 번역이 지향해야 할 바른 길은 무엇이며 번역가들은 어떤 자세로 번역에 임해야 할까요? 저도 백배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아서 밑줄 쭉쭉 그으면서 읽었답니다. 몇 가지 간략하게 옮겨 봅니다. 먼저, 번역은 독자들에게 한글 문장을 좍좍 읽어 내려가는 큰 행복을 줄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굉장히 공감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첨삭하실 때 자주 쓰시는 ‘술술’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물론 한국말로 써 있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를 전혀 알 수 없을 때는 더욱 난감하기도 합니다만……. 상상해 보세요. 읽고 싶은 일본어 원서가 있는데 한 페이지 읽는 데 한 시간씩 걸려 하루에 대여섯 페이지 읽고 책을 집어던지고 있는 모습을 말입니다. 이런 책을 집어 던질 일을 저희 번역가들이 흔쾌히 대행해 드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있는데, 대략적인 의미를 파악하고 넘어가는 것과 우리글로 정확하고 매끈하게 옮기는 것은 전혀 별개라는 점입니다. 번역가들이 스스로의 한계와 부딪히면서도 원서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쏟아 부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즉, 번역은 번역가의 피와 땀이 섞인 노역의 산물인 셈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참 열악하기 그지없고 경시되는 직업이기도 합니다. 성실함과 투철한 프로정신으로 무장된 번역가들이 힘들게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번역서에 번역가들의 이름이 올라 있지 않거나, 역자 후기가 없는 책들은 이제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은 양질의 번역문을 탄생시키기 위해서 번역가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뭘 잘 몰랐던 그 시절, 외국어만 잘 하면 되는 줄로만 생각했던 그 시기를 슬쩍 지워 없애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외국어보다는 모국어 구사능력이 조금 더 필요합니다. 물론 전문지식-한시도 마음 놓을 새 없이 부지런히 이런저런 자료들을 두루 살펴야 하는 팔자인 것입니다-을 쌓으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영국 역사가 트리벨리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읽기에 쉬운 것이 쓰기에 어렵다. 투명한 문체는 언제나 고된 노력의 결과이며 문장과 문장, 단락과 단락 사이의 흐르는 듯한 연결은 항상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얻어지는 것이다. 이 말을 읽고 얼마나 공감을 했는지……. 교정할 때 몇 번을 고치고 큰 소리로 읽어 보기도 하지 않습니까? (교정을 하다가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만)번역가가 이렇게 흘린 땀방울 덕분에 수많은 외국 서적들이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번역가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고 과감히 칭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책은 번역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번역가들은 우선 정확한 번역을 하고 오역이 있을 시(기본적으로 하면 안 되는 것이지만 인간이기에 오역을 범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겸허하게 오역을 사과하고 최고의 번역문이 나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렇게 최상의 번역문이 만들어지면 그 다음은 편집자가 나설 차례입니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애당초 정확하게 번역되지 못한 글은 편집자가 아무리 뜯어고치고 윤문을 해도 독자들에게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어쩜 이리 잘 들어맞는 표현인지요. 번역가도 편집자도 자기 위치에서 책임을 지고 작업을 해야 하는 중요함이 절실히 느껴집니다. 주위에 든든한 편집자가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편집자에게 좋은 번역가가 필요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존중할 수 있는 편집자와의 동행이 이루어져야 함을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참다운 번역은 원작의 가치에 대한 이해에서 생겨난 존경과 감동을 전제로 한다. 그렇지 못한 번역은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의미 없는 노동일뿐이다. 불문학자 김화영의 말입니다. 이러한 깊은 의미들은 잊은 채, 앞으로 ‘짝퉁 외제 상품’들을 생산해 내면서 저소득 전문직이라며 한탄만 할 것인지. 아니면 ‘번역은 거인의 어깨와도 같다’라는 말처럼 더 많은 독자들이 더 멀리 많은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거인의 어깨가 되어 기꺼이 어깨를 빌려 줄 것인지, 이미 정해지셨겠지요? 번역을 통해 우리말이 더 풍성해지고 우리나라 문화 성장에 작은 보탬이라도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반역자가 되어 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해 봅니다. |
|
읽는 내내 느꼈던건 정말 글쓴이가 많이 열받았구나..... 예를 들면, [대학원생들에게 번역 작업을 분담시켜놓고 검토도 하지 않은 채 주섬주섬 원고를 모아 출판사에 던져주는 파렴치한 지식 사기꾼들-안정효 식으로 말하자면 '매춘 교수'들-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고귀한 수치심'이다. 사기꾼에게 수치심을 기대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매ㅋ춘ㅋ교ㅋ수ㅋ..
일본사람들은 멍청한듯 똑똑하다. 내가 느끼기엔 분명 우리나라 사람들이 머리도 좋고 열정적인데 왜 항상 뒤쳐져 있을까? 쇄국정책? 후진정치? 이런것들은 어느나라나 다 갖고 있는 문제잖아..
는 한국인인 내생각/.// |
|
도(道)란 무엇인가. 공자님은 계사전에서 "一陰一陽之謂道(일음일양지위도)"라고 말씀하셨다. 한번은 음이 한번은 양이 갈마든다는 뜻이다. 나는 이 "갈마든다"는 말이 정말 마음에 든다. 나는 이 "갈마든다"를 음과 양이 동전의 양면처럼 따로 존재해서 왔다갔다한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본체가 때로는 음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양이 되기도 한다는 말로 이해한다. 나는 문학(소설)책과 철학책을 갈마들 듯이 읽는다. 한두번은 소설을 읽고 한두번은 철학책을 읽는다. 소설은 재미와 여유를 주고 철학은 의미와 방향을 준다. 재미만 추구하다 보면 내가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지 자책하게 되고 의미와 본질만 추구하다 보면 삶 자체가 건조해진다. 그런데 이 책은 소설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철학책도 아니다. 그러나 이런 책은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스스로 "우리 번역문화에 대한 체험적 보고서"라고 말한다. 번역이 없었다면 도대체 우리는 무슨 책을 읽을 수 있었을까 반문해 본다.
"제1장 번역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서유럽의 번역사를 소개하며 번역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동시에 우리나라의 참담한 번역의 역사를 반추시켜 준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번안국이라는 정부조직아래 국가주도적으로 번역에 힘써 왔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말이나 학술용어들은 거의 일본을 통해 번역된 용어를 그대로 쓰고 있다. 자유, 평등, 의무, 권리, 정의, 민주주의, 도덕, 책임, 철학 등등 수많은 단어들은 일본이 메이지 시대에 서양문물을 받아드리며 번역된 말이다. 이 책에서는 사회(社會)라는 말을 예를 들어 짧게나마 번역의 어려움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살림지식총서의 [번역과 일본의 근대]라는 책에서는 사회, 개인, 자연, 권리, 사진 등의 말이 생겨난 배경을 아주 싼 값에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아울러 서유럽의 번역사를 소개하며 먼저 이슬람 문명의 찬란했던 이유를 번역사로 설명한다. 이슬람 문명이 찬란했던 것은 서양문명의 원류인 그리스 철학(그리스어)를 아랍어로 번역한 결과물이며, 서유럽이 도약하기 시작한 것은 중세철학자들이 이러한 이스람 문명(아랍어)과 접하면서 그들의 번역물을 라틴어(유럽 공통어)로 번역한 결과라고 설명한다.
"제2장 슬픈 모국어"에서는 우리들의 모국어를 누가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우리나라 소위 고위층 자제들의 병역기피와 국적포기를 언급하며 우리 사회의 엘리트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국가관과 사회관을 비판한다. 모국어를 지키기보다는 오직 실리만을 위해 영어공용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런 저런 면을 볼때 이 땅의 엘리트들은 이 나라의 미래에 별반 기대를 걸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그저 잠시 머물며 부와 명예를 한껏 누리다가 위기가 닥치면 언제라도 미련없이 버리고 떠날 난민촌으로 생각한다. 특권층만 있고 존경할 만한 지도층을 찾아 보기 힘든 이유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제3장과 제4장에서는 우리나라 번역환경의 현주소와 그 문제점을 다루고 있다. 원전의 번역이 아닌 중역(일본번역판이나 영어번역판을 한국어로 재번역하는 것)의 문제, 국내교수들의 대학원생 번역 하청(?)문제, 그리고 번역자와 편집자와의 관계 및 도서관 도서기증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특히 도서관 도서 기증문제는 흥미롭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보면 공공도서관에서 몇 권씩만 구입해줘도 학술 서적을 출판에 도움이 될 터인데 우리나라 출판의 현실은 일반독자의 구매에 전적으로 너무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우리나라 도서관에서는 책 구걸(도서 기증)을 아예 정규 업무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일본 등 유럽 선진국에서는 공공도서관의 의무적인 학술 도서 구입이 제도적으로 정착되어 있다고 한다. 정부차원의 번역지원 사업으로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동서양 명저번역 지원사업"이 있지만 강남 아파트 한채 값밖에 되지 않는 지원은 국민들의 지적 인프라 구축차원에서 보면 말 그대로 "언 발에 오줌누기"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 말이 영 내키지 않는 모양이다. 왜냐하면 위기란 말은 한창 잘 나가다가 추락할 때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문학은 해방 이후 한 번도 잘 나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나는 인문학이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없다.그러니 인문학의 위기란 말이 별로 감동스럽지 않다. 다만 책을 읽는 것이 다른 것보다 재미있을 때 책을 볼 뿐이다. 그리고 기왕 책을 읽는 거라면 난삽하고 난해한 책보다는 쉽게 볼 수 있는 모국어로 된 책을 볼 수 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번역은 참으로 중대한 문제임에 틀림없다. |
|
나는 픽션보다 논픽션 쪽을 선호한다. 소설이나 수필이 아닌 논픽션류엔 참고문헌이 많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책 뒤에 주르륵 나열되어 있기도 하고 책 중간중간 '어느 책에선 뭐라고 했는데...'하며 이야기를 풀어가기도 한다. 읽다가 아, 나도 이거 읽어봐야겠다, 하고 체크하기도 하는데 읽던 책이 외서인 경우 그 참고 서적을 찾을 수 없어 위시 리스트에조차 올리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때면 얼마나 아쉬우면서 한심한지. 교양으로서 재미와 약간의 지식을 찾아 책읽기를 할뿐인 내가 이런데, 인문학을 연구하는 저자는 어느 정도 심각하게 느겼겠는가. 영어 공부를 해서 원서로 읽으면 될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진작에 영어 공용화가 이루어졌어야 하는 거라고 이 당선자나 인수위원장은 말할지 모르겠다. ^^; 그렇다면 박상익 교수의 말을 들어볼까? 모국어로 글을 읽는다는 것은 기쁨이다. 유려한 한글 문장을 좍좍 읽어 내려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복인가. ...중략... 남의 나라 글을 더듬더듬 읽는 어려움을 겪어본 자만이 모국어의 고마움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걱정하고 있는 부분이 마땅히 번역되어 있어야 할 기본 텍스트들이 번역되지 않은 채 그에 대한 연구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원전 번역이 없는 연구는 사상누각, 결코 우리의 것이 되지 못한다는 우려이다.
번역에 매진해 자신들의 것으로 체화한 예로 중세 서유럽과 아랍을 들고 있다. 로마인들은 지식인인 자신들은 그리스어를 알고 있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 등 그리스 철학서를 번역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로마가 멸망하고 그리스의 지식은 구체적으로 전승되지 못하고 전설처럼 남는다. 그렇게 몇세기가 지난 후 아랍과 만난 서유럽 인들은 깜짝 놀란다. 전설속의 저작들이 모두 아랍어로 번역되어 계승, 발전을 이루고 있던 것이다. 그제야 서유럽인들은 아랍어를 다시 라틴어로 번역한다. 이 번역된 사상을 기초로 위대한 사상을 이어가고 자신들의 언어로 더욱 발전시켜 12세기 르네상스를 일으키게 된다. 말하자면 난장이가 거인의 어깨에 올라타 더 멀리까지 볼 수 있게 된 셈이다.
영어, 불어, 독어로 된 책을 아무리 독파해도 그것만으로 우리의 한국사상은 나오지 못할 것이다.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그것이 한국말을 통해 소화되지 못하는 한 그것은 영미사상, 프랑스사상, 독일사상은 될지언정 우리 자신의 사상은 될 수 없다....중략..... 자기나라 말을 존중하여 아낄 줄 알고 그것을 잘 살리어 쓸 줄 아는 곳에 독특한 사상도 싹트며 빛을 발하게 됨을 우리는 외국의 사상사에서도 본다. 박종홍, <한국사상사>, 서문당, 1972
한세기 전의 우려인데 아직도 지지부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