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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사회학자 라우라비스뵈크의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끊임없이 선을 긋고 우월해지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여러 사회적 이론을 근거로 하여 위트있게 해부한 작품이다. 그런데 필자는 읽어가면서 머지않아 의아함이 들었다, 제목 『내 안의 차별주의자』와 담고 있는 내용이 어쩐지 개연성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제를 찾아보기로 했다. 물론 독일어를 모르니 읽을 줄도 모르고 뜻도 모르지만 궁금했다. 원제를 찾아 번역기를 돌려보았다. 그 결과 원제는 <더 나은 사회> 였다. 번역기의 정확성이 얼마나 좋을지 몰라도 필자가 보기엔 <더 나은 사회>라는 제목이 도서가 담고 있는 내용에 더 적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럼 왜 『내 안의 차별주의자』라는 제목을 달았을까? <더 나은 사회>라는 원제를 생각하며 읽어 보았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제목이 내용과 달라 너무 마케팅 적인건 아닌가? 했던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시작했다. <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하는 생각들이 편견이고 차별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 되어야 한다고 책은 말하고 있었다. 일, 성, 범죄, 소비, 정치 등 다양한 부분에 대한 만연한 태도들, 그리고 생각들에 대하여 저자는 요목조목 짚어낸다. 그 중에는 필자가 이미 깨닫고 있었던 것들도 있었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왔던 것들도 있었으며,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이 중 생각조차 못한 것과 대수롭지 않게 여기었던 부분들에 있어서는 얼마전 읽었던 <판결의 재구성> 중 '비판받지 않은 논리는 독선에 빠진다.'는 문장을 떠오르게 했다. 우리는, 필자는 얼마나 독선에 빠져있었는가?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사람 사는 사회는 어디나 그렇다는 것인지, 오스트리아 사회가 우리나라와 어쩐지 닮아있는 것인지 책의 내용은 크게 낯설지 않다. 저자 이름을 분명 확인하고 구매했음에도, 한국 작가가 쓴건가? 착각 들 정도로 닮아 있었고, 쓰인 문장도 단어도 한국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쉽게 읽혀지진 않았다. 왜 일까? 내용이 어렵게 서술된 것도 아닌데 자주 몰입이 깨졌다. 그리고 자주 표지를 들여다 보았다. 아마도 책의 초반부 느꼈던 내용과 책의 제목의 거리감 때문 같기도 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필자가 제목에 영향을 좀 많이 받는 편이기 때문이다. 비록 필자의 몰입이 자주 깨졌다하더라도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누구나 한번쯤 읽고 고민해보고 깨닫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편견 속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그것이 잘못인지 모르고 얼마나 자신을 확신하는지, 타인에게는 얼마나 엄격하며 자신에겐 관대한가? 우리는 책을 통해서라도 깨닫을 필요가 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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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간이 나온줄은 알고 있었지만,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는 것을 들어서 관심이 생겨서 사보게 되었습니다. 역시 내용을 사서 보니 더 재미있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던 내용 들이 있어서 아주 꼼꼼하게 읽고 있는 책입니다. 무엇이 차별인지 아리까리하게만 알고 있던거에 더해서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가 연구한 책이니만큼 더욱더 예리한 시각에서 심도 있게 쓰여진 책이구요. 거의 읽으면서는 논문수준으로 내용이 폭넓게 다루고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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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도에 책을 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왜 이제야 리뷰를 남기느냐, 블로그에서 사락으로 바뀌면서 적응이 안되기도 하고 불편한 느낌이 잔뜩 들어 혼자 골이 나서 여태껏 리뷰를 쓰지 않았다. 원래도 변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해가는 나를 좀 더 경계해 보겠다며 다시 노력하는 중이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 제목부터 매력적이다. 올해 서울 국제 도서전에 갔다가- 여기 가면 모르는 책들을 많이 알수 있는 기회가 있어 좋긴 한데 사오기엔 너무 너무 너무 팔이 빠질거 같고 무거워 사올 엄두가 안난다- 사진만 찍어두고 이번에 구입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얼마나 허약한 논리 위에 서있는지 생각해 볼수 있는 기회랄까. 그들과 나는 다름을 구분짓고 경계를 만듦으로써 너와 나는 다르다는 오만을, 나는 아니라고 확신할수 있을까. 난민 문제부터 외향성의 이상에 젖어있는 사회 분위기까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일깨워주었다. 난민이 500만명이라고 외치는 것은 그다지 호소력이 없지만 신문기사에 실린 세살짜리 아이의 시신은 사람들의 의식을 일깨워줄수 있다는 것, 그러므로 옆에 사는 이웃이 난민이라면 나 역시 태도가 바뀔거라는 것. 그리고 우선은 그 '난민'이라는 단어 조차 어떻게 쓸지 여러번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라는 거다. 국외체류자, 이민자 등등 우리가 쓰는 단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것. 불충분한 인식과 배려 역시 멸시의 한 형태이다. 열정을 바친 직업은 특권층에서 자기 최적화의 우아한 몸짓이 된다. 그들이 생각하는 직업은 돈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행위이다. 자아는 직업을 통해 마침내 정당화된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래픽 디자이너인 것이다.좋아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것인가. 자기 긍정을 하면 뜻대로 다 되는가. 되지 않으면 그건 개인의 탓인가. 10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는 근로자가 퇴근후 근로조건을 논의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고민할 시간과 여유가 있을까. "번아웃과 혁명은 서로를 배제한다." 라는 말이 씁쓸하게 들리는 이유다. 일하는 여성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없고 엄마는 좋은 직장인이 될 수 없다. 여성이 일을 하면서 동시에 아이를 키우는 일은 공식적으로 상을 주어 치하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공로인 것 같다. 여자는 남자보다 돈을 적게 '번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하지만 돈을 적게 버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아직도 고정관념이 이렇게 많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워킹 대디'라는 말은 없다. 나 역시 기존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자 무수히 노력하고 있고, 내 아이에게도 남자는 이래야 해, 여자는 이래야 해 라는 말을 가급적 안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기 감정에 솔직하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뿐더라 자신은 물론이고 남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슬픔과 절망을 억누르다 보면 나중에는 아예 느낄수도 없게 된다. 그렇게 자신의 아품을 느끼지 못하면 남의 아픔도 공감 할 수가 없다. 고통과 아픔을 인정하고 표현하는 것이 여자 같은 짓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다보면 결국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할 수도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공감했던 내용이었다. 사내녀석이 약하게 왜 울어! 라는 말은 부모로써 금기어 인듯하다. 내 아이가 정신이 건강하고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면 말이다. 상징적 폭력은 조용하고 잠재의식적이기에 당하는 사람이 폭력적이라고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폭력이다. 멸시의 연출방식을 통해 상징적 차원에서 빈곤이 고착되기 때문이다.내로남불의 전형이다. 내가 실업을 했다면 그건 사회적 문제인 것이고, 남이 일자리를 잃으면 게을러 빠진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실업자= 게으르다'라는 스테레오 타입처럼 우리가 미처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상징적 폭력이 얼마나 많을까. 상품의 용도는 욕망 충족, 결핍 해소, 보상이 아니라 구매자가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느낄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지속가능한, 착한 소비라는 말이 얼마나 많이 들려오는지 피로할 지경이다. 사실 진정으로 착한 소비는 소비하지 않는 것일테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윤리적으로 얼마나 올바르게 살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친환경적인지, 내가 얼마나 지구를 생각하는지 남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 환경과 건강을 생학하는 신중한 식습관이 먹고 사는 문제조차도 힘든 사람들에게 강요할수 있는 것은 아닐것이다. 제일 환경을 파괴하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제3세계의 사람들에게 이제 환경을 생각할때다, 라고 말하는 건 너무 이기적인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의 가치시스템은 외향성의 이상에 젖어 있다. 행복하려면 사람들과 잘 어울려야 하고 자의식이 넘쳐야 하며 매사에 개방적이어야 한다고, 그래야 삶을 열정적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고의 원칙은 여전히 목표에 맞춘 효율성이다. 심리는 더이상 복잡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활용해야 하는 자원이다.외향적인 사람이 더 행복한 것도 아니고 내 인생이 꼭 효율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내 마음 상태가 활용해야 하는 자원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씁쓸하다. 내성적인 사람들의 특성을 경시하고, 그들을 너무 느리다거나 너무 수줍음이 많다거나 너무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인식할 경우 그것 역시 일정의 사회적 불평을 초래 한다.이것까지는 생각 못했다. 남녀 불평등, 자기계발 신화, 난민 이주 문제 등까지는 예측 가능한 사회 문제들이었다. 내성적인 사람이 사회적 불평등을 받고 있다고는 미처 생각 못했다. 그러고보니 남편도 사회생활을 하면서 회식을 좋아하지 않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받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간만에 내 정신을 정화시키는 책을 만난것 같았다. 삶을 살면서 경계해야 할 것들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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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리뷰입니다. 책소개에 내가 평소 인지하지 못했던 차별적 시선을 짚어주는 책이라고 나오는데 그 말이 맞네요.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는 차별과 멸시의 순간들이 나오는데 흥미롭네요. 책을 읽으면서 나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볼지 되돌아보는 계기였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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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책인 것 같아요.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삐딱한 시선과 생각들을 이 책을 통해서 지적받게 되어 낯이 뜨겁더라구요. 또 그렇게 차별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이라는 게 딱딱하게 굳어져서는 안되는 것 같아요. 좀 더 유연하고 부드러운 생각을 가지자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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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나를 그렇게 키우시지 않았어 라든가 대학까지 나온 내가 라며 온갖 이유들을 내세워서 나도 의도 하디 않게 차별 아닌 차별을 행해왔던거 같다. 특히 컴플렉스나 자격지심처럼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되는거야 라고 너무 선을 그어 상각했던 부분들도 많았었다. 호흡하기 쉽게 세분화 되어 나누어져서 읽기 편했다. 차별은 내가 그 문제에 대해 어떻게 알고 있고 생각하는 순간 차별하게 된다는 생각이 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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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대화의 서두에 붙어버렸다. “절대 ~하려는 건 아니지만”이란 문구다. 이를테면, “절대 여성을 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이러 이러한 경우도 있다.”, “절대로 장애인을 모욕하는 건 아니지만, 저러저러한 얘기도 있다.” ‘절대로’라는 단어를 사용했지만 나의 발언은 분명한 차별이었다. 상황이 어떠했건 차별의 말을 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솔직함을 가장한 나의 언어습관은 분명히 누군가에겐 아픔이었을 테다. 스스로를 합리화하면서 그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외면했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가 있음을 부정하고자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그러면서 그래도 엄청나게 나쁜 사람은 아니지 않나라고 자위했다. 해야 할 말을 하지는 못할지언정,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도록 다짐했다. 그러던 차에 <내 안의 차별주의자>를 읽으며 서두부터 신나게 두드려 맞았다.
“꼭 멸시의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된다. 몰래 조용히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법으로도 특정 집단의 관심사가 표현될 수 있다. 또 멸시하거나 경멸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그 멸시를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비슷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p.19)”
말하지 않고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 역시 당사자에게는 유사한 효과를 낸다. 점점 더 어려워진다. 배려를 위해 모른척 한 것도 상대에게는 차별의 힘으로 작용하는 걸까. <내 안의 차별주의자>의 저자는 라우라 비스뵈크다. 오스트리아의 사회학자로 사회 불평등의 원인과 행태, 그 결과를 연구한다. 특히 성적 평등의 사회학, 권력, 언어, 이민 문제에 관심을 갖고 집필 및 연구 활동을 한다. 관심분야만 봐도 책의 내용을 짐작케 한다. 서두에 책의 목적을 분명히 밝힌다.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피고 “그를 통해 타인의 자질과 능력에 대한 폄하가 경계 짓기와 소속감, 인정 욕구를 반영 한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p.20~21)”고. 이를 통해서 “함부로 타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p.21)”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폄하”다. 폄하는 “경계 짓기”와 “소속감”, “인정욕구”를 반영한다는 대목이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구분을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이유는 흰색인 종이와 검은색인 글씨를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나라는 존재와 타인을 구분할 수 있어야 자의식을 가질 수 있다. 구분을 통해서만 남과는 다른 나를 인지할 수 있는 셈이다. 그렇기에 구분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오히려 필수적이다. 경계 짓기는 불가피하다. 세상은 복잡다단하기에 한 명의 개인이라도 성별, 인종 등 다양한 기준에 따라 구분된다. 여기서 소속이 생긴다. 한 개인이 다양한 구분에 따라 소속이 생긴다면, 어떤 소속을 따르는 게 유리할까. 어떤 기준에 속하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게 될까.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선택이 된다. 생존을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소속감을 통해 자아를 고양하고, 자신의 소속에서 인정을 받으려는 욕구는 구분에서 파생된 당연한 결과다. 결국 경계 짓기가 소속을, 소속이 소속감과 인정욕구를 유발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인간에게 불가피한 행위다. 문제는 “폄하”다. 소속감이 고양되고, 인정욕구가 강해지면서 경계 간 점점 깊은 참호가 만들어진다. 상호 간 저열한 비난과 비판으로 불신의 참호는 점점 깊어진다. 두 소속 간의 권력이 비슷하다면 그나마 타협의 여지가 있겠지만, 약자는 일방적으로 ‘폄하’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런 참호와 전선이 수 없이 펼쳐진다. 개개인의 소속과 정체성이 여러 개듯, 한 사회 내에서도 다양한 참호가 중첩해서 구축된다. 사회 전반에 참호가 생기고, 돌격 앞으로! 차별과 구분은 개개인의 소속감을 강화하고 인정욕구를 자극한다. 상대를 낮추면 자신이 높아지는 것을 느끼게 한다. “차별과 구분은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친다. 구분과 멸시가 우선시되면 사회적 불이익은 정치적 참여가 아닌 도덕적 분노를 낳(p.153)”는다. 여기에 정체성 정치는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계를 강화한다. 에이미 추아의 <정치적 부족주의>는 집단본능을 통해 생겨난 정치적 부족주의 현상을 파헤친다. 인간의 ‘집단 본능’은 ‘소속 본능’인 동시에 ‘배제 본능’이다. 미국 내 집단 본능으로 갈라진 부족과 기록적인 수준의 불평등, 정체성 정치로 인한 혼란이 결합하면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했다. “자유주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불확실성을 견디면서 쉬지 않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p.300)” 하지만, 불평등과 경제적 위기는 불확실성을 강화했고 차별과 구분, 멸시는 정치적 부족주의와 정체성 정치를 가속화했다. 그리고 그 역으로도 작용하며 순환고리를 만들었다. 이제 사람들은 명확하고 확실한 영웅을 고대하게 된다. 애매하고, 불확실한 정치인이 아니다. 세상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불확실한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 해줄 영웅을 선택한다. 그 영웅 중 한 사람이 히틀러였다. 히틀러 역시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다른 세계관을 인정하고 용인하며, 그것을 토론의 장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p.303)” 가짜뉴스와 혐오, 개소리가 넘쳐나는 전선에서 우리는 참호를 향해 무비판적으로 돌격할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서야 한다.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의견도 인권 규약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항상 관용으로 대”하고”거슬리더라도 ‘남’의 생존권을 인정(p.289)“해야 한다. 또한,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정치는 싫다고 말하지 말라.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권 행위다. 비정치적일 수 있는 것도 특권”이다. 비정치적이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성별, 재산, 인종, 성적 지향 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p.300)” 있기 때문이다. 정치인들 역시 노력해야 한다. 무너진 신뢰를 찾아야한다. “오늘날 정치의 중요한 과제는, 앙상해진 도덕적 진정성에 너무 의지하지 않으면서 그 구분을 재정의”(김영민 교수)해야 한다. 이 모든 행위들이 함께 이뤄져야 참호전의 비극을 막을 수 있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는 말한다. 우리가 이 문제의 일원이기에 우리가 먼저 나서야 한다고. “쉬지 않고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묵은 주제도 다시 따져보며 자신의 태도를 성찰하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질서 유지의 기본 조건(p.290)”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이자 책임이다. --------------------------------------------------------------------------- 꼭 멸시의 말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된다. 몰래 조용히 무시하고 외면하는 방법으로도 특정 집단의 관심사가 표현될 수 있다. 또 멸시하거나 경멸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그 멸시를 당하는 당사자에게는 비슷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p.19 이 책은 소속 범주로서의 ‘우리’가 노동, 성별, 이민, 빈곤, 재산 범죄, 소비, 관심, 정치의 영역에서 어떤 구조를 띠는지, 또 그 안에서 ‘남들’을 바라보는 독선적 시선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살필 것이다. 그를 통해 타인의 자질과(p.20) 능력에 대한 폄하가 경계 짓기와 소속감, 인정 욕구를 반영 한다는 사실을 밝히려 한다. p.21 함부로 타인에게 손가락질하지 않고, 자신과 타인의 판단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 그것이 이 책의 바람이다. p.21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외침은 위장되고 은폐된 엘리트주의이다. 항상 열정만 좇으며 살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p.30 열정을 바친 직업은(p.30) 특권층에서 자기 최적화의 우아한 몸짓이 된다. 그들이 생각하는 직업은 돈과 교환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실현의 행위이다. 자아는 직업을 통해 마침내 정당화된다. p.31 그런 그녀에게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비슷한 처지의 인턴들과 모여 근로 조건을 논의하고 정치적 영향력을 고민할 시간이 있을까? 10시간 중노동에 시달리고 퇴근하면 쓰러져 자기 바쁠 것이고, 기껏해야 요가나 몸에 좋다는 샐러드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것이다. 그렇기에 한병철은 말한다. “번아웃과 혁명은 서로를 배제한다.” p.36 에랭베르는 우울(p.40)증은 규율과 죄가 아닌 책임과 자발성에 기초한 질병이라고 말한다. 결핍감, 가능성과 불가능성, 현실과 ‘불가능은 없다’의 분열을 말해주는 질병이라고 말이다. p.41 열정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접근 방식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모토는 ‘좋아하는 일을 하라’가 아니라 ‘네가 하는 일을 좋아하라!’가 될 것이다. p.41 카를 마르크스도 말했다. “자연 시스템에서 머리와 손이 짝을 이루듯 노동 과정은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을 결합한다.” p.43 테일러주의는 혁신적 아이디어이자 이론의 뼈대였고 포드주의는 그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세상을 뒤바꾸었다. 비약적 지점은 전체 작업 방식에서 전문 지식과 능력을 걸러내어 그 지식을 기업이 습득하고 체계화하며, 남는 노동은 끝까지 해체하는 것이다. 이것이 테일러가 말한 ‘과학적 운영’의 핵심이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이 바로 머리와 손의 분리였다. / 관리자는 지금껏 개별 노동자들이 혼자 간직해온 전래의 지식을 모두 모아서 분류하고 도표로 작성하고, 그 지식을 규칙과 법칙, 공식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매일 일을 할 때 도움이 되게 해야 한다. / 과거의 시스템에서는 모든 정신노동을 노동자들이 함께 거들었기에 정신노동은 노동자 개인의 경험이 낳은 결과였다. 그러나 새 시스템에서는 그 일을 과학적으로 개진한 법칙에 따라 관리자들이 떠맡아야 한다. ... 그러므로 대부분의 경(p.45)우에서 당연하게도 정신노동에는 특별한 사람이 필요하고 육체노동에는 그와 전혀 다른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분리되면서 과거의 수많은 장인들은 단순 노동자로 전락했고 소수의 관리자와 기술자들만 높은 자리로 올라갔다. 따라서 수직적 노동 분업과 육체와 정신의 위계적 평가는 지배를 고착화한다. 지식이 곧 권력이기 때문이다. 정신노동이 이끌고 통제하고 명령하면 육체노동은 그저 그 명령에 따라 생산만 하면 되기에 교체되기도 쉽다. 당연히 관리직이 생산직보다 더 오래 더 많이 공부를 해야 할 테고 임금도 더 높을 수밖에 없다. p.46 전체적으로 볼 때 몸과 머리의 분리, 그와 연관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경계 짓기에는 은밀한 계급투쟁이 몸을 숨기고 있다. p.54 같은 행동이 성별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다른 평가를 받는 것이다.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일하는 여성은 좋은 엄마가 될 수 없고 엄마는 좋은 직장인이 될 수 없다. p.62 흔히 여자는 남자보다 돈을 적게 ‘번다’는 말들을 많이 한(p.78)다. 하지만 돈을 적게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p.79 남성성은 문화와 역사에 따라 변하는 사회적 구조물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회에 몸담은 일원으로서 우리 사회가 어떤 특성과 품성을 남성성과 결부하는지, 혹시라도 여성성을 폄하하지는 않는지 살피고 책임질 의무가 있다. 연약함과 공감은 여성의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특성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 인간의 특징을 외면하라고 배운다. p.96 우리의 공감은 반드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의 숫자와 관련 있지 않다. 우리의 공감은 오히려 개인에게서 솟구친다. 그를 보며 자신을, 자신의 아이들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 숫자 뒤에 숨은 개인들은 추상이 되고, 추상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가까워야, 혹은 그들의 고통이 가깝게 느껴져야 우리는 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 고통에 맞설 각오를 다지게 된다. p.106 핵심은 사회적 친밀도, 친숙한 개별 사례에 있다. 쫓겨나게 생긴 이주민이 평소 우리 집에도 놀러 오던 아들의 같은 반 친구이다.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 공감과 부당하다는 느낌, 타인의 상황을 개선하고픈 욕망이 생겨난다. 이런 관계가 탄생할 수 있으려면 서로 알 수 있는 계기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닐 수 있어야 하고 어른들에겐 일자리르 제공하고 여가 시설을 이용할 수 있게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권은 이런 가능성을 차단하기에 바쁘다. p.107 지역적 접촉과 결합된 취약성은 합법적 체류의 기회를 높일 수 있는 한 가지 요인이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취약성과 정 반대적인 모습이다. 바로 영웅적 행동이기 때문이다. p.110 사회학자 노버트 엘리아스와 존 로이드 스콧슨은 1965년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에서, 사회적 불평등은 계층이나 인종만이 아니라 한 공동체에 거주한 기간에 따라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두 학자에 따르면 기득권자들, 그러니까 ‘오래 거주한 사람들’은 새로 들어온 주민들과 거리를 두고 전혀 접촉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기득권이 된 거주민들과 새로 들어온 아웃사이더들이 서로 나뉘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득권 집단은 아웃사이더들에게 그들의 ‘가장 나쁜’ 구성원의 가장 나쁜 특성을 갖다 붙이고, 반대로 자신들에겐 자기 집단의 ‘가장 좋은’ 특성을 갖다 붙인다. p.116 이주 그 자체는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이주를 불러온 상황이다. 그리고 그것이 ‘누구(p.117)에게’ 득이 되고 실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관점이다. 또한 우리가 이주를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는지도 중요하다. p.118 전체적으로 볼 때 이곳으로 새로 건너온 사람들의 가치는 경제 시스템 내부의 생산성으로 평가된다. ... 경제적 조건을 다 충족했다고 해도 우파 포퓰리즘 진영의 멸시를 피할 수 없(p.119)다. 이들은 이주의 정의를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흐려 부정적 분류의 범위를 최대한 확대한다. 그래서 이주민이 실직을 하면 사회 기생충이고, 노동 시장에서 열심히 일하면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뺏어 가는 도적이며, 자영업을 하면 남은 일자리마저 빼앗으려는 욕심쟁이라고 비난한다. p.120 근대는 ‘낡은’ 세계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이행이다. 산업혁명, 종교개혁, 계몽주의, 세속하가 그 시발점이었다. ‘낡은’ 세계에선 종교와 공동체, 질서와 안정의 가치가 지배했다면 ‘새로운’ 세계에선 종교와 국가의 분리, 공동체의 해체, 평등 의식의 성장, 개인에게 전가된 채임이 특징이다. p.128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에서 근대와 관련이 있는 적대감(p.128)은 두 가지 형태이다. 하나는 식민지 확장을 위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형태이다. 식민지라는 목적을 위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자체적으로는 문명을 건설할 능력이 없는 무능한 인간으로 멸시하며, 자원을 약탈하고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그들의 문화와 역사 전체를 무시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근대화로 인해 전통이 위험해진 집단에 대한 부정적 평가이다. 대표적으로 정치 권력과 돈, 제국주의 정신을 자랑하는 유대인과 경제적 활약이 눈부신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황색 위험’)을 꼽을 수 있겠다. p.129 요즘 들어 또 다른 두 가지 형태의 적대감이 두각을 드러낸다. 이번에는 근대화를 이룬 집단이 아니라 근대와 무관하게 정체성을 형성하는 집단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 히잡 같은 상징을 통해 다른 전통과 종교를 드러내는 행위는 긴장을 유발하고 정체성 상실의 불안을 야기한다. 마지막으로 인종 차별은 사회의 귀퉁이로 내몰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다. 특히 경제 위기와 노동 시장의 불안이 그런 두려움을 부채질한다. 대표적인 현상이 많이 인용되(p.129)는 백인 남성의 공포, 소위 ‘가난뱅이 백인’의 사고방식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근대에 동참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의 작동 방식은 거부한다. p.130 사회학자 빌헬름 하이트마이어는 ‘집단과 관련된 인간 혐오’에 대해 장기간 연구를 진행해, 사회적 지위가 낮을수록 장기 실업자에 대한 분노가 꾸준히 높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얼른 보기엔 좀 놀라운 결과이다. 사회적 지위가 낮으면 교육받을 기회가 적어 전문 지식을 쌓기 힘들 것이고, 그럼 당연히 실업할 위험성도 높다. 따라서 이들이야말로 실업자의 곤란한 처지를 누구보다 잘 이해할 것이다. 실업이 개인의 책임(p.141)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이들이 더 실업자의 부정적인 태도를 탓하며,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실제로 많은 실업자들이 자신은 다른 실업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상황 탓에 일자리를 잃었지만 남들은 자기 잘못으로 그렇게 된 것이라며 자신과 남들을 구분한다. 동일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지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집단을 꾸릴 여지가 없어질 것이므로 실업자 조직을 만들어 사회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도 자동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p.142 경제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에게 쏟아지는 독선적 시선은 사회 통합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시선이 불평등 이데올로기를 자극하여 약자들에게서 특정 권리를 박탈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시적 성과와 경쟁(p.142)을 지향하는 사회에서 임금 노동을 통해 사회의 생산성에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방해 요소일 뿐이다. 이런 가파른 도덕적 경계선은 탈연대를 불러온다. 연대와 품위, 공감의 자리는 경제적 이해타산으로 넘어간다. 사회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는 집단에게선 권리를 빼앗기도 어렵지 않다. 실업자가 일할 마음이라고는 없는 이 사회의 게으른 기생충이라면 사회의 돈으로 그들을 지원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p.143 설사 의욕이 없고 타협의 의지가 부족해서 실업 상태인(p.145) 사람이 있다고 해도 대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정치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이다. p.146 실업 급여란 것은 애당초 연대적 재분배의 원칙을 따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연대 원칙을 기반으로 탄생한 이런 사회 영역에 이르기까지 시장 논리가 밀고 들어와버렸다. p.151 차별과 구분은 민주주의 사회의 안정과 결속을 해친다. 구분과 멸시가 우선시되면 사회적 불이익은 정치적 참여가 아닌 도덕적 분노를 낳을 뿐이다. p.153 새로운 기업은 경제 활력의 필수 요소이며 혁신의 주인공으로서 일자리를 창출한다. 따라서 경제의 지속적 성장과 발전을 위해서는 창업자 정신과 청년 기업 및 스타트업 지원이 꼭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이런 추세로 인해 책임이 노동 시장 정책에서 개인에게 전가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보호법 그 자체가 약화되지는(p.156) 않았지만 효력 범위가 줄어들고 적용 분야도 수많은 다른 가능성들로 쪼개진다. 사업 리스크나 수입 리스크 등 과거 고용주가 짊어지던 리스크가 이제는 소규모 자영업자 개인에게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p.157 변호사와 전문 자문의 도움을 받아 현행법의 법망을 요리조리 피하는 엘리트들의 무한한 기회는 사회적 위계의 자연법칙이라 부를 ‘준법정신의 중력’ 공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법의 비중은 땅에 가까울수록 무거워지고 위로 올라(p.186)갈수록 가벼워진다. 준법은 성공과 이윤 극대화를 선택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에 불과하다. p.187 우리가 우려해야 할 대상은 내 지갑을 털어 갈 소매치기가 아니라 우리의 세금(p.188)을 투자하여 날려먹는 엘리트들이다. p.189 국가에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안(p.189)기고 결국 국민 각자가 그 비용을 부담해야 하는 범죄인데도 말이다. 금융 범죄는 국가에 해를 입히고 경제 성장에 지대한 악영향을 초래한다. 이런 상황에서 밀려드는 난민들 탓에 예산에 구멍이 생겨 복지 비용을 삭감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제아무리 진지한 표정을 지어도 우습기 그지없다. p.190 모든 제품은 선언이다. p.213 상품은 남에게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기본 욕구를 충족하는 데 기여한다. 소비재는 근본적으로 자아의 확장이며,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 누구와 친하고 싶은지, 어떤 가치를 공유하는지를 반영한다. p.221 광고는 상품 이상의 많은 것을 판매한다. p.225 소비는 (바라는)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고 남들과 나를 구분하며 평균적인 대중이 따라오지 못할 저 높은 곳으로 나를 데려간다. 목표는 더 높은 집단에 소속되기 위한 불평등 조장 및 강화이다. 특정 소비재에 돈을 투자하지 않으면 가치가 떨어지고 기회가 줄고 심한 경우 중요한 인맥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소비는 항상 자유로운 결정이 아니다. 여성의 신체가 그러하듯 소비는 수많은 영역에서 사회적 강제가 된다. 최대한 소비를 조장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문제 부위를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p.228 우리의 일상적 구매 실천이 윤리적 소비 결정의 기회로 상품화된다. 윤리 그 자체가 소비 품목이 되어버린 것이다. ... 이제 상품의 용도는 욕(p.233)망 충족, 결핍 해소, 보상이 아니라 구매자가 스스로를 도덕적으로 착한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p.234 하지만 이런 생각은 제품 제작의 환경 영향만을 고려할 뿐, 진정한 환경 보호가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소비를, 제(p.235)품을 아예 포기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일 테고 나아가 더 지속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태도는 시장 친화적이지 않고 기업에 유익하지 않으며 소비 지향적 상류층의 자기 과시에도 별 도움이 안 된다. p.236 관건은 포장과 라벨이다. 채식주의의 기본 사상은 환경을 보호하고 동물의 고통을 줄이자는 것이다. 매우 강력한 정언 명령이다. 하지만 이런 도덕적 우월감은 앞서도 말했듯 특별한 특징이 아니다. 채식이 아니라 고기를 먹건 아유르베다 원칙에 따른 식사를 하건, 음식 전체가 신분의 상징이며 구별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오늘날의 영양 담론에는 어느 사이 종교적 측면까지 스며들어 있다. p.240 개인 차원에서는 환경 보호가 특권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독일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도 말했다. “먼저 먹어야 도덕도 있지.” 지속가능한 라이프 스타일은 먼저 그럴 능력이 되어야 누릴 수 있다. 남들보다 도덕적인(p.241) 인성을 갖추자면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일상을 친환경 기준에 맞추려면 지속적인 자기 교육과 굳건한 확신이 필요하다. p.242 하지만 더 나은 세상의 비건은 인간에 대한 관심과도 함께 가야 하지 않을까? ‘무지한 인간들’을 배제하는 독선적 경계짓기야 말로 1차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닐까? 환경과 건강을 생각하는 신중한 식습관은 교육 및 수입과 매우 긴밀하게 관련이 있다. ‘도덕적으로 비난받아야 할 사람들’에게 방어의 안전지대에서 걸어 나오라고 애걸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자신의 안전지대에서 걸어 나와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들여다보는 쪽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p.242) 정직한 공동체는 윤리적으로도 바람직해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는 물질적 차이나 교육 수준의 차이가 도덕적 불평등으로 이어지지 않고 서로 다른 시각을 관용으로 대할 수 있을 때 생겨난다. p.243 내향성을 흔히 수줍음과 혼동하기 쉽지만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수줍음은 사회적 판단에 대한 불안을 뜻하며 행동 차원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원한다면 고치려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내향성과 외향성은 존재의 핵심에 뿌리를 내린 인성 특징이다. 따라서 유년기, 교육, 직업 선택, 자기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 인간관계, 친구와 파트너 선택 등 삶의 거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p.251 우리 사회가 외향성의 특징에 맞추어 만들어진 만큼 내성적인 사람들은 자꾸만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p.261 내성적인 사람들의 특성을 경시하고, 그들을 너무 느리다거나 너무 수줍음이 많다거나 너무 자신감이 떨어진다고 인삭할 경우 그것 역시 일종의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한다. 사람의 특성이 ‘성공한’ 삶으로 이끄는 조건이 되면 그것은 개인의 일상적 기회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그런 특성은 태어날 때 이미 정해진다. 그러나 인종, 출신, 성별처럼 누가 봐도 명백한 특징들과 달리 내향성을 사회적 불평등의 한 범주로 보는 시선은 미미하다. p.262 일상의 순간을 자발적으로 기록하고 공개하는 행위는 포(p.277)스트모던적 감시 구조로 해석될 수 있다. p.278 “우리가 알아서 카메라를 살 것이고, 아무도 우리를 봐주지 않을까 봐 벌벌 떨게 되리라는 것을 오웰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 키스 로웰 젠슨 p.278 젊음은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문제이다. 따라서 젊음의 시기는 무한정 연장이 가능하며 사진 보정 작업 덕분에 시각적으로도 오래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 p.281 다채롭고 열린 민주주의의 기틀은 의견의 자유다. 그 말은 내가 동의할 수 없는 의견도 인권 규약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항상 관용으로 대해야 한다는 뜻이다. 관용이라고 해서 다른(p.288) 입장에 동조하라는 것이 아니다. 거슬리더라도 ‘남’의 생존권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당신하고 생각이 같지는 않지만 당신이 그 생각을 발언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내 삶을 바칠 것이오.”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한 의원(볼테르라는 주장이 많다)이 했던 말이다. 반대와 인정의 결합에서 건설적 토론이 탄생한다. 관용적 태도만이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반박할 여지를 만들 수 있다. 무관용은 상대의 의견에서 존재의 권리를 박탈하려 한다. p.289 쉬지 않고 새로운 주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묵은 주제도 다시 따져보며 자신의 태도를 성찰하기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질서 유지의 기본 조건이다. 비판적 논의는 우리의 정치, 사회 시스템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오히려 활력을 선사한다. 자유주의의 기본 질서는 계몽주의를 통해 종교의 독점이 무너지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p.290 매사에 의미를 따지다 보면 우울해질 수 있다. 반대로 딱 정해진 세계관은 삶에 방향과 의미를 부여한다. 그렇기에 명확한 규칙 시스템은 엄청난 매력을 발휘한다.(p.290) ... 삶은 의례를 통해 조직되고 확정된 가치관과 행동 방식으로 채워진다. 그것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실존의 불안과 무상함을 망각하고 거부하게끔 만들기도 한다. p.291 자신의 세계관을 유지하는 데에는 확증적인, 다시 말해 자신이 옳다고 확인해주는 정보가 최고의 수단이다. 인간은 의도적으로 자기 시각을 반증하는 정보를 찾는다. 반대로 자신의 시각을 반박하는 사실들은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p.296 “저널리즘은 누군가 인쇄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을 인쇄하는 것이다. 다른 건 전부 광고다,” -조지 오웰 p.298 이제는 민주주의 사회까지도 불쾌한 인식을 거부하고 ‘대안 사실’로 진실을 뒤덮는다. ... 이로써 우리는 진실 공격의 새로운 형태와 마주하게 되었다. 진실과 거짓을 정하는 것은 독립된 사실과 의견의 다양성, 이성이 아니다. 정치권력이 진실과 거짓을 가른다. p.299 자유주의 질서가 유지되려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불확실성을 견디면서 쉬지 않고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자유는 치열하게 싸워 얻은 연약한 체계이다. 그 대가는 자기 책임과 쉼 없는 감시이다. p.300 정치에 관심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특권 행위다. 비정치적일 수 있는 것도 특권이기 때문이다. 비정치적이어도 괜찮으려면 ? 자신의 성별, 재산, 인종, 성적 지향 덕분에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어서 ? 품위 있는 삶과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p.300 다른 세계관을 인정하고 용인하며, 그것을 토론의 장으로 이끄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유지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p.303 견해는 지성적 관점이나 사실만을 바탕으로 확립되지 않는다. (p.305) ... 우리를 가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가치다. p.306 특권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불이익을 당하는 다른 집단을 경멸한다는 주장이 많다. 독선과 경시는 ‘하류층’인 사람들의 전형적인 태도라고 말이다. 그러나 엘리트라고 해서 남을 무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엘리트층에서 그런 현상이 더 두드러진다. 다만 사회에서 그들의 행동을 문제 삼지 않을 뿐이다. 해석의 권리가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자고로 역사를 쓰는 자가 어떤 역사를 어떻게 쓸지도 결정한다. 비관용과 불신과 경시를 ‘남에게’ 밀어버리면 자기 집단은 성가실 일도 없고 우월감까지 느낄 수 있다. 독선적 시선이 다시 한 번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p.309 이런 형태의 정체성 정치는 나르시시즘 성향을 띨 수 있다. 타인과의 연대보다는 자기 성찰을 더 채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체성의 다변화에 역점을 두다 보니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는 낮은 계층과의 연대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ㅡ 용어와 세계관을 남들도 인정하기를 바라는 엘리트들의 욕망으로 볼 수 있다. 인정하지 않으면, 그건 인신공격과 다름없다. 이런 식의 생각은 스스로 짊어진 피해자 역할을 정치의 영역으로 떠안고 가려는 경향과 함께 이들을 비생산적인 궁지로 몰고 간다. p.317 이주민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무조건 멍청하고 비인간적이라고 욕하며 사회적으로 배제해버리면 그들에게 남(p.317)은 공간은 한 곳뿐이다. 그들이 자기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익명의 투표소밖에 없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욕하는 태도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어떤 집단도 비방과 사회적 고립을 당하지 않는 토론 문화가 훨씬 바람직할 것이다. p.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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