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은 국가나 사회의 조직, 형태 따위를 급격하게 바꾸는 일을 의미한다. 성공 여부에 의해 폭력이 정당화되기도 하고, 지금껏 존재해온 구질서 체제가 부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정당화된 권력 역시 현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는다. 1848년, 1968년, 인류는 두 차례의 세계혁명을 겪었으나 둘 다 실패했다는 Wallerstein의 말은 혁명의 어려움을 대변해준다. 하지만 인류는 결과만으로 살지 않기에, 실패는 실패 그 이상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실패할 가능성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행동하기도 한다. 그 행동이 실패로 끝났다 할지라도, 그 실패를 통해 무언가 변화를 경험한다면 그것 역시 또 다른 이름의 성공일지도 모른다. 1968년, 프랑스에서의 혁명은 분명 실패작으로 평할 수 있을 것이다. 혁명의 승자는 구좌파였다. 1981년 사회당 후보였던 미테랑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까지 권력 체제에 있어서의 변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좌파에게 실패한 혁명은 분명 치명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난 혁명을 통해 경험을 획득할 수 있었다. 21세기 들어 거세진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함께 우파 연합 정당에게 정권을 빼앗기긴 하였으나, 시간이 만들어준 역량과 함께 그들은 1980-90년대를 보냈다. 마치 우리나라의 70-80년대의 학생 운동 세력이 오늘날 정치의 패권을 잡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까나? 물론 저항의 역사가 오늘날의 행동까지 정당화시켜 주진 않겠지만 말이다. 지난 1968년의 변혁은 프랑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에서 존재했던 혼란에 대해 주목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성장 궤도에 오른 자본주의 체제는 모순을 경험하고 있었다. 알제리와 베트남에서의 전투는 잠시 잊었던 제2 차 세계대전의 악몽을 사람들에게 상기시켰다. 하지만 60년대에는 독일의 나치즘과 같이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연일 사망하는 인원의 대다수가 여성과 어린 아이들이었지만, 권력은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시키기에 급급했다. 저항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변혁을 꿈꾸는 이들이 모두 같은 방법을 취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거대한 힘을 창출하기 위해 그들은 중앙 집권적인 권력 구조를 필요로 했다. 하지만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시스템은 구체제의 유산이었다. 그들은 권위주의를 거부했지만 자신들의 체제가 권위주의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헤이든이나 두취케 등은 지도자 없는 운동의 지도자가 되려하는 모순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들은 외부의 적과 싸우는 동시에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했다. 트로츠키주의, 맑스-레닌주의, 노동자주의, 상황주의 등 수많은 분파들을 ‘신좌파’란 하나의 거대한 틀 안에 융합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주장한 이상 역시 구체적이지 못했다. ‘자주 관리’는 그 모호함으로 인해 이상이나 구호를 뛰어넘어 실제로 이어지기 힘들었으나, 이에 대해 그들은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했다. 지향하는 바가 구체적이지 못한 운동은 폭력 그 자체를 위한 것인 마냥 변질되어갔고, 결국에는 변혁 세력 내부의 또 다른 적을 양산하기도 하였다. 신좌파의 주장은 구체제에 병합되었다. 혁명은 낡은 사회구조와 그 안에 존재하는 억압을 해체시키는데 실패하였고, 오히려 구세력은 혁명이 주장한 변혁에의 욕구까지 끌어안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실패를 통해 프랑스 사회당은 재조직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이 소련 공산당과 분명한 선을 그을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었던 것 역시 68혁명의 힘이었다. 미국 역시 즉각적인 베트남전의 종전으로 이어지진 못했으나, 참여민주주의라는 새로운 흐름을 창출하는데 60년대의 경험이 큰 힘을 발휘한 것만은 사실이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은 권력을 향한 견제 세력이 충분치 못한 듯하다. 자본은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으며,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대학 구조조정은 학생 운동의 역량을 빼앗는데 일조하고 있다. 그 뿐만이 아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구분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모호하게 만들고 있으며, 각종 매스미디어는 변혁의 움직임에 색깔을 입힘으로써 대중이 객관적인 안목을 갖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 1968년 못지 않았을 1987년 6월의 경험은 아련하게만 느껴진다. 무언가 꿈꾸기 두려워지는 요즘, 과거를 되돌아보는 나의 행위가 과거로의 침잠이 아니길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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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의 총합이듯이, 지금 현재의 우리의 정치체제, 문화, 경제, 는 과거의 그것의 총합이다. 과거의 모든 것이 지금의 체제를 구성하고는 있지만, 모든 순간이 현재를 만든 중요한 요소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순간이 지금의 우리를 만든 가장 큰 사건들일까? 아마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1910년, 1945년, 1950년, 1980년, 1987년, 1997년, 2002년, 2007년 등이 떠오를 것이다. 식민지배와 전쟁, 그리고 민주화, 월드컵, 그리고 다시 경제적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현재 우리 체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들이었다.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내가 세계사를 잘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들의 현재 체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은 1968년 이 아닐까 싶다. 1968년의 세계체제는 미국 패권의 확대가 저지되는 일련의 저항들이 일어난 해이다. 미국이 베트남에 침공했고, 그 참상을 미디어가 전 세계로 전파시켰다. 그리고 경제적 성장과 동시에, 인권에 대한 감수성 역시 풍부해진 청년들은, 베트남 민중의 참상에 동감했고, 전 세계적인 반전 시위가 일어났다. 이웃나라 일본 역시 반전 시위가 일어났고, 미국이나 서유럽, 쿠바 등지에서 젊은이 들이 일어났다. 모든 시위가 그러하듯이, 시위의 화살은 전쟁만을 겨냥하지 않았고, 사회의 다양한 모순들을 겨냥하며 확산되어갔다. 전쟁을 겪은 세대의 사회적 인식은 상당히 보수적인 것이 사실이다. 1950년 전쟁을 겪은 한국사회도 그러했고, 세계대전을 겪었던 유럽인들과 일본인들 역시 엄격한 보수주의의 분위기속에 살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 이후 세대는 그와는 반대로 자유로운 분위기를 중시하고, 경제적 성장보다 참살이를 열망했다. 시위는 그런 사회분위기까지 철폐하자는 분위기로 나아갔다. 68운동의 책은 이 운동이 발생한 여러나라를 비교학적으로 고찰한다. 독일 서유럽, 미국, 쿠바, 일본 등지에서 일어난 이 운동들이 각자의 사회체계에서 어떤 과정들을 밟아가는가에 관해 이야기 한다. 책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 운동의 한계점을 정확히 지적한다. 모든 체계를 거부하려는 이 자유로운 운동은, 운동의 체계까지 거부해버리는 운동으로 전락해버리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운동의 체계까지도 거부해버리면, 운동의 동력은 쉽게 상실해 버릴 수 있으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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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적군파를 다룬 영화 <바더 마인호프>를 보고나서, 궁금한 점이 있어 이 책을 골랐다.
이 책은 흔히 68운동이라 칭하는 1968년이래의 서유럽과 미국의 저항운동을 연대순으로 약 5년간 다루고 있다. 이 세계적인 현상의 중점에는 공통적으로 베트남 반전운동이 있지만, 1848년의 경험이 있는 서구 유럽에서는 정치적 색채가 강하며, 좌파 정당의 전통이 없는 미국에서는 문화운동의 모습이 더 강하게 드러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여하튼 당시 청년이었던 68세대가 성장하여 서구의 현 정치세력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이들 세대의 원체험을 역사적으로 빠르게 맥을 잡아보기에 적당하다. 또한 현재 우리나라의 386세대와 비교하여 보는 재미도 있다.
하지만, SDS JCR SED,,, 이런 약자로 등장하는 각 조직명이 잘 와닿지 않아서 몇번이고 페이지를 뒤로 넘겨서 확인해야 했고, 마오 주의, 트로츠키 주의 등 각 신좌파들의 이념적 차이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없어 이들의 주장와 입장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 등 서구세계 중심이어서 프라하의 봄도 조금 서술되고 지나가고, 제 3세계의 경우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사진 한 장으로 끝이어서 아쉽다. 곧 더 두껍고 자세한 다른 책으로 이 부분을 더 읽어 보아야겠다.
책은 사진이 풍부하여, 같은 시기 다른 공간을 오가며 저항의 모습을 그려주고 있어 68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게 해준다. 다시 강조하는데, 이 책은 초보용이다. 나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선 독자들은 이미 다 아는 내용이어서 책값이 아까울 수도 있다.
"항의에서 저항으로!"라는 반베트남전의 표어는 언제 보아도 늘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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