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은 자랑스러운, 반은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나는 영화광이다. 일년에도 수백 편씩 영화를 소비하는 생활을 어언 이십 년을 해 왔다. 그러다보니 상영시간이 십 분도 채 지나기 전에 ‘아 이건 이런 종류의 영화이고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겠구나.’하는 느낌이 온다. 물론 찰리 카우프만의 작품이나 [지구를 지켜라]처럼 뒤통수를 호되게 치고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의 영화는 정해진 공식대로 움직인다. [페이퍼 문]도 영화를 굳이 보지 않아도 줄거리가 짐작이 간다. 1930년대 대공황기의 미국, 모두가 어렵던 시절에 모세스(라이언 오닐)은 농부들에게 사기행각을 벌이는 게 생계수단인 건달이다. 어느 날, 옛 여자친구의 장례식에서 그녀의 혼자 남겨진 딸 애디(테이텀 오닐)을 만나 그만 이 꼬마를 도시에 사는 이모집까지 데려다 주는 임무를 떠맡게 된다. 여지껏 자유롭다 못해 무책임하기까지 한 삶을 살아온 모세스에게 요 맹랑한 녀석은 어서 빨리 벗어나야 할 굴레일 뿐. 그런데 세상물정 모르는 줄만 알았던 애디는 여간내기가 아니어서 모세스를 협박하고 구슬리며 떨어질 줄을 모른다. 자, 여기까지만 해도 이미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뻔하다. 그렇지만 [페이퍼 문]은 단지 줄거리만 따라가자고 만든 영화가 아니다. 흑백의 화면은 낯설지만 아름답고 이 안 어울리는 커플의 사기행각은 귀여우면서도 가슴이 아파오며 주인공들 사이의 묘한 애정은 어느새 마음을 사로잡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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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실제로도 부녀관계였던 그들인지라 연기 호흡이 척척 맞는 건 신기한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러브 스토리]나 [배리 린든]에서의 별 개성 없는 연기를 기억하는 내게 타고난 거짓말쟁이이면서도 알고 보면 인정 많고 마음약한 사기꾼 역의 라이언 오닐은 낯선 충격이었고 귀엽고 천진난만하면서도 무섭도록 물질적이고 이기적이며 다른 사람을 이용하려고 드는, 그러나 의지할 곳 없는 고아 소녀의 쓸쓸함이 언뜻 언뜻 엿보이는 테이텀 오닐의 연기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감독인 피터 보그다노비치는 영화 평론가로 활동하다가 감독으로 데뷔해 [The Last Picture Show]같은 걸작을 남기기도 했지만 여자 친구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에 휘말리는 등의 연달은 악재로 영화계에서 멀어져 간 인물이다. 어찌 보면 진부한 이야기를 솜씨 있게 요리해 이렇게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을 만든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재능의 낭비였구나, 싶다. 같은 시대에 활동을 시작한 스콜세지나 코폴라가 지금도 환영받고 그들의 작품이 연구와 감탄의 대상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다. 잊혀지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감독, 너무도 아까운 영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