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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답사가고 싶은 길 중에 하나가 조선의 3대 천재라고 불린 최남선, 이광수, 홍명희가 일본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다녔던 도쿄의 길이다. 그들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절에 우리나라 문학을 새롭게 세우신 분들이다. 춘원 이광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장편소설인 무정을 썼고, 그 전의 고전적인 문체에서 근대적인 문체로 글을 바꾸어 우리말의 수준을 높이신 분이다. 그외에도 한글로 된 많은 소설을 통해서 조선문인협회장까지 하면서 조선의 문인을 대표한 분이다. 그리고 2.8독립선언문의 기초를 만들었고, 상해에서 독립신문의 대표를 맡으면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하지만 상해에서 조선으로 돌아온 이후에 일제의 요구를 들어어 학병소집 운동에 응하고, 신사참배하도록 하는 연설을 하였다는 이유로 친일문인으로 낙인찍혔다. 해방 후에는 북한으로 잡혀갔다가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한국문인협회는 최남선과 이광수의 호가 담긴 문학상을 제정하려고 하였지만 친일파라는 비난이 쏟아지자 이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이미 친일파로 분류된 김동인의 이름을 딴 동인문학상은 1956년부터 시상되고 있다. 이광수는 과연 친일파였을까. 아니 친일파라고 하더라도 그의 문학적인 업적때문이라도 문학상을 제정하고, 그의 역사적 역할을 인정해야 할까. 이 책은 춘원 이광수에 대하여 친일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에 대하여 부당한 점에 대하여 언급하고,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사람들의 편향성을 지적하면서 인간 이광수를 다양한 면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일제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일제 당시에 친일한 사람들을 어떻게 평가할까. 지금 우리는 그 시대를 겪어 보지 않고 인물의 행적만 가지고 친일 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은 친일이라는 것을 쉽게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춘원의 친일행위가 과연 골수친일일까 아니면 가장 친일일까. 춘원이 해방 후에 자기의 마음을 적은 '나의 고백'에서는 자신이 민족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친일을 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지만 자신의 비정의성과 비민족성을 자인하고 이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받겠다고 하였다. 반민특위의 조사에서도 춘원은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친일을 하였다'라고 말한 사실도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일본 유학중 학병에 소집되어 태평양 전선에 갔었다. 당시 김추기경은 이광수의 학병 지원 독려 강의를 들어싿. 그런데 그 강의를 듣고 이광수의 강의의 속뜻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지원해서 일본이 주는 밥을 먹고 전술을 익히고, 나중에 중국에 파병되면 우리 독립군에 합류해서 일본군과 사우자는 것이었다. 일본이 처음에는 조선인을 절대로 군대로 소집하여 전쟁터에 보내지 않았다. 1943년에 이르러서야 도저히 일본인만으로는 군대를 채울 수 없으니 조선 젊은이들을 징집하기 시작했다. 조선인들에게 군사기술을 가르치면 나중에 그 총부리를 일본으로 들이댈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나 급박해지니 조선인도 군대에 소집하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피할 수 없는 것이면 이 기회에 조선인들이 군사기술을 배워 나중에 일본에 저항하자는 뜻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되기 전에 조선총독부는 패망하기 전에 일본에 저항할 수 있는 조선의 지식인 3만 8천명을 사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날은 45년 8월 17일로 정해졌는데 그 전에 해방되어 간신히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일본은 미국이나 연합군이 조선에 상륙하기 전에 이들에게 투항할 수 있는 조선 지식인들을 학살하려고 리스트를 작성했다. 조병옥도 김을한도 이러한 사실을 증언한 바가 있다. 그런데 춘원이 엔도 정무총감과 관계를 통해서 당시 일본이 필승해야 한다는 취지의 논설문을 작성하여 조선총독부를 달랬다. 잔악한 일본군이 저항하는 중국인을 이미 1200만명을 사살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일본은 저항하는 집단을 모두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 해당자로 여운형, 송진우, 김성수 등이 있었다고 한다. 춘원은 조선 지식인들을 죽이지 말고 부일협력에 이용하라고 경무국장에게 설득하였다고 한다. 당시 죽지 않은 많은 지식인들이 해방후에 우리나라 발전에 엄청난 기여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춘원의 일생을 보면 초반에는 강한 독립정신으로 생활하였지만, 임시정부의 무능을 보면서 조선내로 들어와 민족개조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도산 안창호와 함께 수양회를 운영하면서 민족의 실력을 키우려고 노력하였다. 조선내에서는 조선총독부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아무런 활동을 할수 없었다.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친일의 모습을 보였지만, 계속 한글로 소설이나 글을 쓰면서 민족들에게 독립정신을 불어넣었다. 삼일절이라는 말도 이광수가 만든 말이다. 춘원을 친일파로 낙인 찍어서 교과서에서도 춘원의 작품은 사라졌다. 춘원 이광수를 악질 친일파로 볼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반일과 반미를 이념으로 삼는 종북주사파들은 춘원 이광수를 악마로 보는듯 하다. 이 책을 저술한 박인영 작가는 평생 신장 전문의로서 의사로서 활동을 하고 은퇴 이후에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글을 쓰신 분이다. 나도 은퇴하면 이렇게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의 글을 쓰면서 살아가고 싶다. 이러한 순간이 자신은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나는 이광수, 최남선, 홍명희가 도쿄에서 자신의 사상을 형성해 나가던 시절의 모습을 보고 싶다. 무너져가는 조선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 고뇌를 알고 싶다. 친일파라고 하여 그 사람을 너무 흑백으로 보는 것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역사의 모든 사람들도 잘한 것과 못한 것이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상황이나 심정도 고려해야 한다. 우리도 일제 시대 한가운데에 살고 있으면 어렵게 독립운동만 하고 있었을까. 살아가기 위해 부역해야 했던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2026. 8. 17. 걷는 변호사 조용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