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딧불이』처럼 이번 단편집도 단편 하나하나에 리뷰를 써보기로 했다. 규칙으로 정한 것도 아니고 꼭 그럴 필요도 없었는데 어쩐지 그렇게 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 해서 모두 내가 정하는 건 아니라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썩 실감이 나지 않는 말을 이럴 때 실감한다. 그렇지만 운명이든 우연이든 아무튼 그런 것에 전부를 위탁한 것은 아니고 서로 다른 단편들을 하나의 리뷰로 묶으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자꾸만 단편들을 통합하려고 하는 경향 같은 게 생겨났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단편들을 하나의 끈으로 꿰어버리니 꼭 유치원생이 만든 액세서리처럼 조잡해진 느낌이 들었다. 하얀 천 위에 각각 재료로 흩어져 있을 때는 꽤 그럴 듯했는데 막상 조합해서 하나로 묶으니까 영 볼품이 없어진 것 같다고 할까. 그럴 바엔 차라리 재료 상태 그대로 둬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 작품은 표제작인 <렉싱턴의 유령>이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처럼 실제 있었던 일을 이름만 바꿔서 썼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100% 창작일 것이다. 『회전목마의 데드히트』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튼 주인공인 ‘나’는 어느 날 케이시라는 인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게 되는데 꽤 보기 어려운 재즈 콜렉션을 가지고 있으니 흥미가 있으면 구경오라, 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재즈라면 절제력을 잃어버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케이시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지만 일단 그의 초대에 응한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당분간 머물게 되는데 새벽에 깨어난 어느 날 유령들의 파티를 목격한다는 이야기다. 마치 미스터리 소설 같고 실제로 그런 부분이 없다고 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이 소설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의 상실감이다. 케이시는 말한다. “어떤 종류의 사물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거야.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거지.” 여기서 케이시가 말하는 사물은 일단 ‘슬픔’으로 읽힌다. 그리고 다른 형태는 아마도 ‘잠’일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잃고 죽음과도 같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를 잃고 마찬가지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던 것처럼 슬픔은 시간과 더불어 소멸하지 않고 잠이라는 형태로 기어코 모습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하게 된다. 유령은 무엇이 형태를 바꿔서 나타난 것일까. 뉴잉글랜드 지방의 오래되고 품위있는 집을 가지고 있으며 마당에는 최신직 BMW가 주차되어 있는 반백의 남자. 심지어 직업은 건축가이다.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일단 그런 남자는 없고 실제로도 그런 남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주어진 정보로만 떠올리면 그는 딱히 뭔가에 아쉬울 것 같진 않은 사람처럼 보인다. 어마어마한 부자는 아니라도 돈 때문에 눈치를 볼 일이 있을 것 같진 않고 그렇다고 일에 쫓겨서 허둥지둥거릴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는다. 실제로도 그는 남에게 뭔가를 억지로 권유하는 성향도 아니고 많은 곳을 여행한 폭넓은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와 그 여유를 실감나게 해주는 말솜씨까지 갖추고 있다. 만약 이 세상에 완전한 중립지대 같은 곳이 있다면 그곳의 영주권을 가지고 있을 법한 사람이다. 그런데 함께 살던 동거인이 부모님의 사망으로 고향으로 돌아가고, ‘나’도 장편 소설 집필 때문에 만나지 못하게 된 몇 달 동안 케이시는 완전히 변한다. 머리는 정리가 안 되어 있고 눈밑의 그늘은 깊어졌으며 여기저기 주름이 보인다. 마치 중립지대에서 추방당한 사람처럼. 집에 혼자 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다면 집에 혼자 있다는 것, 그게 케이시를 바꿔버린 요인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보면 케이시는 집을 비우는 일에 어떤 두려움 같은 걸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가 케이시의 집에서 유령을 본 것은 케이시가 런던 출장으로 일주일 정도 집을 비우게 되었을 때 집을 봐달라는 부탁을 받고 머물렀을 때였다. 뉴잉글랜드 지역의 여유있는 중년들은 종종 자기 집을 남에게 빌려주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 개인적인 경우에 비추어 본다면 나는 누가 우리 집에 오는 걸 썩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다 초대할 일이 생겨도 반드시 내가 집에 있는 경우에만 그렇지 빈집을 맡기는 경우는 없다. 내가 없을 때 누군가 우리 집을 다녀가면 마치 온전히 내 것이어야 마땅한 어떤 공간에 1%라도 아니 0.1%라도 내 것이 아닌 부분이 생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케이시의 집에는 아버지가 남겨놓은 희귀한 재즈 콜렉션도 있다. 재즈 매니아에게 그걸 맡겨두고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운다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격이 아닐까. 두 사람은 알게 된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케이시에게는 누군가 집을 훼손할 지도 모른다는 공포보다 집에 아무도 없다는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이리라는 추측을 멈출 수가 없다. 왜일까. 왜 케이시는 집에 누군가 있어주길 바라는 것일까. 내가 빈 집에 누군가 들어오길 바라지 않는 이유는 앞에도 말했듯이 온전히 내 것이어야 마땅할 무언가에 타인의 지분이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꼭 누구든 좋으니까지는 아니어도 친밀한 누군가에게 집을 맡기는 건 거꾸로 집 안에 내 지분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지분이 생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여기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다, 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 케이시는 말했다. 자기가 죽으면 자기를 위해 깊은 잠을 자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지만 케이시의 말을 들으면 꼭 그렇지만도 않아 보인다. 하나의 죽음에는 그 죽음에 어울리는 마땅한 추모가 있어야 한다고, 케이시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확실히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죽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이라는 것을 상상하면 슬프다. 거기에는 뭔가 없어서는 안 될 무언가가 결락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유령이란 마땅히 받아야 할 추모를 받지 못한 자들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도 장례식장이 너무 조용하고 쓸쓸하면 안 좋다는 얘기가 있다 좀 시끄럽고 북작북작거려야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그 다음을 향해 갈 수 있는 거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 소설 속에서 ‘나’가 만난 유령들은 거실에서 음악을 크게 틀어두고 와인 잔을 부딪히며 신나게 파티를 즐기고 있었다. 그게, 아무도 추모해주지 않은 가운데 죽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추모하는 형식이라고 생각하면 어쩐지 숙연해진다. “내가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나를 위해 그렇게 깊은 잠을 자주지는 않을 거야.” 자기가 죽고 나서 천국에 가는 대신 유령이 되어 빈집의 거실에서 파티를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확실히 쓸쓸해진다. 아무도 진심으로 슬퍼해주지 않는 가운데 죽을 것 같은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유령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르겠다. 두 번째 작품은 <녹색 짐승>이다. 말 그대로 녹색 짐승이 나오는 이야기인데, 정원을 바라보던 여자에게 반해 저 깊은 지하에서 힘겹게 흙을 파서 올라왔더니만 정작 여자는 모질고 끔찍한 말을 해서 죽어버린다는, 어떻게 보면 동화 같고 어떻게 보면 괴담 같기도 한 이야기다. 처음에는 흙 속에서 나타난 녹색 짐승이 잠근 문까지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와서 여자가 얼마나 무서울까 싶다가 나중에는 이 녹색 짐승이 정말로 여자가 좋아서 여기까지 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의 거부와 끔찍한 생각 속에 고통스럽게 죽어간다는 점에서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지는 이입의 반전이 있다. 아주 짧은 단편인데 내 마음을 사로잡은 건 녹색 짐승의 다음과 같은 말이었다. “나는 저 아래 깊고 깊은 곳에서 당신을 사모하고 있었어어요. 그러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여기로 기기어올라온 거예요. 모두 말렸어요. 하지만 나는 참을 수 없었었었어요. 꽤 용기도 피필요했어요. 너 같은 하찮은 지짐승이 나한테 프러포즈를 하다니 뻔뻔스럽구나, 라고 하실까 봐서요.” 사람이라면 어떨까. 흉측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외모는 아니고 한 번도 나와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사는 인간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는, 마치 저 깊숙한 지하에 있던 것처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남자가 어느 날 내가 좋다면서 다가온다면. 여자가 아니라서 잘 모르겠지만 여자 입장에서는 잠근 문이 열린 것처럼 공포와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가만히보니 이 남자는 나에게 전혀 해를 끼칠 의도가 없다. 말 그대로 그는 단지 좋아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갑자기 내 안에 뚜껑이 닫혀있던 혐오의 쓰레기통이 열린다. 달군 인두로 눈을 찌르고 칼로 허벅지를 긋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저 남자가 날 좋아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 따윈 일말도 없다. 온갖 폭력과 폭언과 스트레스를 쏟아붓고 싶다는 생각이 본능적인 욕구처럼 끓어오른다. 물론 실제로 한 적은 없다. 그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저 남자는 고통을 느낀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는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점점 고통 속에서 작아지고 쪼그라들다가 마침내 사라져 버린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의 당혹감과 불쾌감은 꼭 겪어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난처하고 싫은 기분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런 일을 겪으면 아마 사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 들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기분은 당사자도 알고 있다. 녹색 짐승도 말했다. 뻔뻔하다고 생각할까봐 두려웠다고.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딱히 고민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있는 그대로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고 전혀 다른 성질과 형상으로 바뀐 채, 때로는 아주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해서 전달되는 것일까. 어쩌면 그것은 ‘원래’ 혐오스러운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예쁜 포장지로 리본까지 달아서 상대에게 줬지만 그속에 있는 것은 사실 끔찍하게 이를 데 없는 것이라는 걸 본인만 모른다. 그러나 상대는 그걸 보는 순간 그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곧바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이다. 여자가 단호하게 거부했기 때문에 그 다음이 어찌되었을 지는 알 수 없지만 녹색 짐승은 어쩌려는 생각이었을까. 정말로 ‘당신을 사모합니다’ 라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끝내려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혹시 여자를 자기가 살고 있던 저 깊고 축축한 흙 속으로 데려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던 건 아닐까. 사실 좋아한다는 말 자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 그걸로 끝이 아니라 좋아한다는 말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여자는 그걸 알고 있다. 좋아한다는 말을 받아들이고 결혼한 그녀는 지금 아무도 없는 집에서 남편이 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너무나 할 일이 없어 나무와 대화를 나눌 지경에 이른 그녀는 말하자면 식물화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녀가 녹색 짐승에게 쏟아낸 것은 바로 자기가 식물화되고 있는 것에 대한 분노와 혐오 아닐까. 아니 그녀는 어쩌면 스스로를 움직이고 말도 하지만 점차 푸르스름하게 변해가는 녹색 짐승으로 여기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가 쏟아낸 것은 결국 자기혐오인 것은 아닐까. 말하자면 이제 그녀는 자신의 어둡고 깊은 밑바닥에서 힘겹게 올라와 간신히 마음의 빗장까지 열고 ‘네가 좋아’ 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대고 온갖 혐오와 폭언을 쏟아낸 것이다. 자기애라는 건 혐오스러울 것까진 없어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거기에 대고 폭언을 가하는 건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녹색 괴물은 끝내 그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한다. 남은 것은 깊은 어둠뿐이다. 아마도 그녀는 그 어둠 속에서 오랫동안 울게 될 것이다. 어쩌면 눈물마저 말라버렸는지도 모르지만. 세 번째 작품은 <침묵>이다. 아마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에서였던 것 같은데, 학교 폭력에 관한 이야기라고 해서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었다. 막상 읽어본 <침묵>은 분명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으면서도 어쩐지 김애란 작가의 <서른>을 떠올리게 하는 면이 있다. 누가 누굴 베꼈다, 라는 것은 아니고 고백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 이야기가 상당히 끔찍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것이 1인칭으로 이야기라서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판별한 기준 같은 게 부재되어 있다는 점 등에서 그렇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작품이 묘하게 닮아보이는 것은 거기에 말하는 이의 도덕성이랄까 혹은 중립성 같은 것이 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점이다. <서른>의 화자는 제자를 다단계에 끌어들였고 <침묵>의 화자는 폭행 가해자다. 그들은 자기가 한 행동보다 더 큰 결과를 감내해야 했다는 점에서 확실히 피해자라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온전한 피해자’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말하자면 두 이야기는 ‘온전하지 않은 피해자’들의 이야기로서 읽는 사람을 마음 편하게 무장해제하고 이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작품의 화자는 공항에서 ‘나’에게 이지메를 당했던 경험을 이야기한다. 화자인 오자와는 ‘나’의 관점에서 보면 침착하고 성실하며 누구에게도 뭔가를 강요하지 않는, 이른바 누구나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다. 그런 그가 20년 동안이나 권투를 해오고 있다는 게 신기해서 누굴 때린 적이 있느냐고 물었는데 오자와는 생각보다 심각해지더니 중학생 때 사실은 누굴 때린 적이 있노라고 고백한다. 아오키라는 동급생인데 특별히 자신에게 나쁜 짓을 한 적은 없지만 왠지 그냥 싫었다고. 적어도 자신이 보기에는 ‘자기’라는 것 없이 그저 타인에게 인정받기에만 급급한, 에고와 프라이드의 화신처럼 보여서 가까이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자기가 영어 시험에서 1등을 하자 그걸 가지고 아오키가 근거도 없는 비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오키와 말다툼을 하던 차에 끝내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 일은 그냥 그대로 묻혔지만 몇 년 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같은 반에서 이지메를 당해 자살하는 학생이 생기고, 권투를 했다는 이유로 오자와는 범인으로 의심받는다. 거기에는 예전에도 아오키를 때린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근거로 작용했다. 틀림없이 아오키가 이야기를 지어냈을 거라고 오자와는 믿는다. 선생님과 동급생들의 침묵 속에 오자와는 괴사해가고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등교하는 기차 안에서 아오키와 만난 오자와는 자기를 쳐다보는 아오키를 보며 자신이 아오키를 혐오하기보다 불쌍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저런 류의 인간은 결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떨림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결코 저런 인간에게 질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남은 학기를 무사히 버텨내고 다른 지역으로 진학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오자와는 말한다. 아오키 같은 인간은 싫지만 적어도 그 능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줄 알고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않는 결단력도, 사람의 마음을 교묘하게 움직일 줄 아는 것도 분명히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물론 좋아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자기가 정말 싫고 무서운 것은 아오키 같은 인간이 아니라 스스로 아무것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집단으로 행동하기를 좋아하는 종류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행동에 대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침묵하고만 있을 뿐이다. 오자와가 말하는 아오키 같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는 대강 상상이 간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집단에 기대어 움직이는 인간 역시 대강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겠다. 그러나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오자와 같은 사람이다. 오자와는 모든 일의 원흉이 아오키라고 확신하고 있지만 실제로 아오키가 무슨 일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시험에서 1등 했다는 사실을 비방했다는 것도 동급생의 자살이 오자와의 탓이라는 것도 오직 오자와의 짐작이고 추측이다. 오히려 분명한 것은 그가 그 추측에 근거해서 아오키를 때렸다는 것이다. 오자와는 아오키 같은 인물이 ‘자기’라는 것이 없고 남들에게 인정받기에 급급해서 이야기를 교묘하게 잘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고 하지만 적어도 ‘나’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자와는 자기가 말하는 아오키와 같은 인물이다. ‘나’는 아오키라는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자와의 말만 들으면 도저히 아오키라는 사람을 좋아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아오키가 정말로 오자와를 비방했다면,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오자와는 지금 ‘나’에게 아오키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나’는 아오키 같은 사람에게 속아서 아무것도 만들지도 못하고 책임지지도 못하는 인간 군상의 편에 서게 된다. ‘나’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침묵하고만 있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새삼 생각한 것은 처음에 느꼈던 대로 ‘온전한 피해자’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자와와 아오키 그리고 나머지 학생 집단은 오자와에 의해 각각의 뚜렷한 역할과 성질을 부여받고 있지만 그것은 곧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전혀 새로운 역할로 바뀌게 된다. 말하자면 선의의 피해자와 악의의 가해자 그리고 침묵으로 괴롭히는 다수의 무책임자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오자와는 오자와였고 아오키는 아오키였지만 현 시점에서 ‘나’에게 오자와는 아오키가 되어 있는 것과 같다. 권투를 배우고 누굴 때려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했을 때 오자와의 대답에서 문득 느낀 위화감과 같이 인간에게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면이 있고 알지 못하는 면이 있다. 그리고 그 낙차가 입체성을 만드는 동시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오자와는 영원히 오자와로서만 있는 게 아니라 아오키도 되고 집단 군중도 될 수 있다. 오자와는 자기가 무언가 분명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그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뿐이다. 겉으로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균형이 쏠려 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균형의 쏠림이 결과적으로 한 인간을 전혀 다른 인간으로 만드는 원인이 된다. ‘나’는 처음에 오자와가 아주 괜찮은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적어도 이야기를 들은 내 입장에서 본다면 오자와는 철저히 자기합리화적인 인간이다. 무엇보다 거기에는 자신이 피해를 입은 이야기 밖에 없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쩌면 비방이라는 것은 혹은 타인에 대한 혐오와 멸시라는 것은 누군가에 대해 안 좋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겪었던 피해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닐까. 나는 나의 고통에 대해 말했을 뿐이지 누구를 나쁘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 이렇게 되면 고통받는 사람은 생기지만 고통을 준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있는 것은 단지 자기가 피해를 입은 이야기뿐이기 때문이다. 나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일이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된다는 것은 얼핏 전혀 엮여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사실은 나와 타인이 매우 단단하게 결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일부러 화살을 날리거나 창을 던지지 않고 단지 약을 마시는 것만으로도 나와 관련된 누군가를 고통스럽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나에게 약은 누군가에게 독약일 수 있으므로. 그러면서 나는 단지 약을 먹었을 뿐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아무도 가해하지 않은 가운데 피해자가 생기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좀 윤리를 강제하는 것 같지만 나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나의 고통에 대해 말하는 일에 경각심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 힘들어, 라는 말은 때론 너 때문이야,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네 번째 작품은 <얼음 사나이>다. 얼음 사나이는 정말로 얼음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니다. 차갑고 냉정하다는 은유도 아니다. 그냥 사람이지만 체온이 좀 차다. 그리고 추위를 거의 타지 않는다. 그러니까 특이체질을 가진 사람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확실히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는데 그건 그가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사람들의 과거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나’는 친구들과 같이 스키를 타러 왔다가 로비에서 만난 얼음 사나이에게 빠져 결혼한다. 체온이 조금 낮다는 건 별반 문제가 아니지만 아무래도 남들에게 ‘얼음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는 건 문제가 되어서 가족들은 ‘나’가 얼음 사나이와 결혼하자 왕래를 끊어버린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나’는 쓸쓸함을 이기지 못해 얼음 사나이에게 남극으로의 여행을 제안하고 마침내 남극에 도착하지만 그곳에서 자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 겨울이 닥쳐오고 활주로는 얼어붙는다. ‘나’는 자기가 앞으로 영원히 남극을 떠날 수 없으리라는 예감 속에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얼음 조각이 되어 떨어진다. ‘나’도 얼음 여자가 된 것이다. 이 작품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올린 건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영화『늑대아이』였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늑대인간과 만나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는다. 그러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죽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주인공은 시골로 내려간다. 그 뒤에 아이들이 자라면서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자기가 인간인지 늑대인지)을 가족이 함께 수습해서 세계와 조화를 이뤄간다는 이야기인데, 내가 인상적으로 봤던 부분은 이 세계의 것과 다른 세계의 것이 우연히 만나 결합했을 때 이 세계의 것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지 않고 반대로 다른 세계의 것이 이 세계에 남아 적응한다는 부분이었다. <얼음 사나이>와는 정반대다. <얼음 사나이>의 ‘나’는 얼음 사나이를 나의 세계와 조화시키는 데 실패하고 반대로 남극에 유폐된 채 얼음 인간이 되고 만다. 『늑대아이』가 좋았던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우리와 전혀 같지 않은, 이질적인 무언가가 나타나도 그것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관용이 이 세계에 존재한다고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유키가 늑대로 변한 것을 보고도 모른 체 해주었던 친구와 아메를 받아준 자연의 넓은 품은 인간과 자연이 대척점에 있지 않고 등을 맞댄 채 의지하고 있다는 것과 그렇게 우리가 누군가를 의지함으로써 만들어지는 마음의 공간은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넓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말하자면 『늑대아이』는 세계의 관대함과 무한함에 대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여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얼음 사나이>는 다르다. 모두가 이질적인 존재라고 기피한 얼음 사나이를 자기의 품으로 끌어안은 대가로 ‘나’는 이 세계에 남지 못하고 얼음 사나이의 세계에 유폐되고 본인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속성마저 잃어버린다. 『늑대아이』와는 정반대로 세계가 얼마나 좁은지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게 이질적인 존재를 받아들일 여유 같은 건 없다. 그런 존재를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네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다, 라고 이 이야기는 말한다. 마치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싶으면 이슬람이 되어라, 라는 것과 비슷하다. ‘나’가 원했던 것은 얼음 사나이와 함께 하는 것이었지 얼음 인간이 되어 남극에 유폐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현실적인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이질적인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성질의 일부를 바꾸는 것과 비슷하다. 말하자면 복잡하기 이를 데 없고 조율하기가 상당히 까다로운 기계에 약간의 결함이 생긴 것이다. 당장 사용하는데는 문제가 없지만 이대로 두면 부품이 마모되어서 계속 같은 부품으로 교체를 해주어야 한다. 문제는 이 결함을 없애려면 완전히 새로운 부품을 가져와야 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부품을 이식하려면 설계를 처음부터 새로 해야 하고 어렵게 조율했던 나사와 너트도 다시 다 풀어야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존에 있는 부품을 일정 부분 버려야 할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끝이 안 보이는 작업인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마모되더라도 그때그때 부품을 교체해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 이야기는 결혼한 여자의 보편적인 심정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유폐당한 여자의 메타포로는 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읽어버리면 마치 모든 것이 남자 때문이야, 라는 식이 되어버린다. 여자는 남자를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했는데 남자는 거꾸로 그런 여자를 자기 세계 속으로 편입시켜 버렸다, 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해석일 수는 있어도 별로 유용한 해석은 아니다. 분쟁을 일으키는 해석은 텍스트뿐만 아니라 텍스트를 읽는 사람까지도 소모시킬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니 이 이야기는 남자에 의해 유폐당한 여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질적인 존재를 세계 속으로 수용하려다 추방당한 선한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읽겠다. 무관심과 냉대는 인간을 남극으로 보낼 뿐이라고. 그 정도로만. 다섯 번째 작품은 <토니 다키타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어떻게 이 소설을 쓰게 되었는지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하와이 체류 당시 빈티지 샵에서 마음에 드는 티셔츠가 있어서 샀는데 거기에 ‘토니 다키타니’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 왠지 토니 다키타니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고 그게 소설을 쓰는데까지 이어졌다고.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토니 다키타니는 하와이 의원 선거 후보였고 그 티셔츠는 선거용 티셔츠였다고 한다. 본인의 이름을 딴 소설이 나왔다는 걸 알게 된 실제 인물이 골프라도 한 번 치자고 초청했다고 하는데 가지는 않았다고. 토니 다키타니(실제 인물 말고 소설 속 주인공)보다 어떤 의미에서 더 인상적인 건 아버지인 다키타니 쇼자부로다. 이 남자는 재즈 트롬본 연주자인데 태평양 전쟁이 한창일 때도 상하이 나이트클럽에서 트롬본을 연주하며 열심히 여자를 만나고 다녔다. 전쟁이 끝난 뒤에 감옥에 갇혀서 아찔한 순간이 있긴 했지만 그때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이제까지 충분히 즐겼고, 어차피 죽으면 끝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재즈 연주자로 활동을 하는데 중간에 부인이 죽은 걸 제외하면 거의 불행이랄만한 것을 겪지 않고 살다가 죽었다. 일감은 충분했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으며 여자도 항상 있었다. 병으로 죽긴 했지만 딱히 고생한 적은 없다. 이래저래 속편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남자의 일생을 가만히 음미하고 있으면 거기에는 뭔가 중요한 것들이 누락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삶은 본능과 본능을 충족시켜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가 원한 것은 음식과 여자였고 그게 만족되면 그 다음은 별로 불만을 갖지 않았다. 불타는 애국심도 주위 사람들을 전쟁 속에서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건 없었다. 말 그대로 역사와 무관한 동물로서의 인간에 가까웠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죽음이 목적에 닥쳤을 때도 죽으면 끝이지 그걸로 불안해하거나 고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달리 말하면 어떻게 죽어야 할 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죽어야 할 지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한 번도 자기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생각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음식과 여자가 있고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면 그걸로 그만. 요컨대 문명의 첨단을 달리고 있던 20세기에 온갖 문명의 수혜를 받은 야만인이었던 것이다. 다키타니 쇼자부로를 보면 문명과 야만은 서로 대립관계가 아니라 무관한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높은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세상에 이로운 인간이 되는 게 아닌 것과 비슷하다. 어쩌면 문명이란 의식수준의 향상이 아닌 감각의 쾌락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온 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보다 맛있는 음식, 보다 자극적인 섹스. 다키타니 쇼자부로의 직업인 재즈 역시도 그렇다. 전쟁으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나가는 와중에 그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그 살인을 지휘하는 자들 앞에서. 이렇듯 감각의 만족이 전부이고 양심이나 도덕 같은 건 들고 다니지 않는 다키타니 쇼자부로지만 그런 그도 고장이 난 적이 한 번 있었다. 바로 부인이 아들을 낳고 나서 곧바로 죽었을 때다. 그때의 심정은 마치 ‘평평한 원반 같은 것이 가슴속으로 쑥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요컨대 가슴에 구멍이 난 것이다. 그는 자기가 느끼고 있는 기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명백한 상실감이었고 그 상실감은 그 후에도 사라지지 않아서 그는 여자라면 계속 안았지만 결혼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추측컨대 두 번 다시 원반을 가슴 속에 집어넣고 싶지 않아서이리라고 생각된다. 아내라는 존재는 이렇듯 감각의 만족이 인생의 전부였던 인간의 가슴에 구멍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여자와 아내는 바로 그런 지점에서 구분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마 아내가 살아있었다면 하나뿐인 아들의 이름을 토니라고 짓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당시 일본은 미군 점령지라서 혼혈은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키타니 쇼자부로가 아들의 이름을 토니라고 지은 이유는 말로는 당분간 미국의 시대가 계속될 테니까, 이지만 실제로는 이 아이를 버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예컨대 다키타니 뒤에 일본식 이름이 오면 아들은 누가 봐도 자신의 아들이 된다. 그러나 토니 다키타니가 되면 대체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일본인인지 미국인인지조차 불분명해진다. 그러니까 다키타니 쇼자부로는 이름에서 아이와 자신의 관계성을 없애버림으로써 바로 그녀의 어머니, 즉 자신의 아내를 망각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는 아내의 상실로 태어나 처음 겪는 기이한 고통에 처했고 그의 원래 성격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아들에게 술자리에서 아무렇게나 나온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기 자신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은 건지도 모른다. 과연 이름 덕분인지 토니 다키타니는 홀로 자란다. 친구도 없고 애인도 없다. 학창 시절에도 상위 대학을 갈 수 있는 핵심 과목들은 공부하지 않고 오로지 미술만 했다. 그리고 미대에 가서는 사상이나 의지가 담긴 그림을 그리는 대신 기계의 세부를 묘사하는 그림만 그렸다. 친구들과 교수들은 무시했지만 그의 이런 기술은 직장에서는 꽤나 유용한 것이 되어 젊은 나이에 토니 다키타니는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한다. 그러다 어느 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가 사랑에 빠진 상대는 열다섯 살이나 연하지만 그보다 더 두드러지는 특징은 옷만 보면 사지 않고는 못 견딘다는 점이다. 그래서 신혼여행 때도 유명한 관광지를 간 기억은 없고 하루 종일 부띠끄만 돌아다닌 기억 밖에 없다. 집에 있는 옷장으로는 공급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아예 방 하나를 드레스룸으로 만드는데 한 번은 그가 방에 들어가 옷을 세어보니 그 숫자가 약 700벌에 달했다. 구두나 핸드백 같은 액세서리를 포함하면 그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라는 건 없다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토니 다니타키는 결국 아내에게 조심스럽게 이제 옷은 그만 사는 게 어떠냐고 말하고 그 말에 공감한 아내는 사놓고 입지 않은 옷을 환불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교통 사고로 죽는다. 토니 다키타니는 주인 없이 700벌의 옷만 남은 방에 남겨진다. 700벌은, 너무 많다. 입기에도 많지만 기억하기에도 너무 많은 숫자다. 만약 7벌의 옷이 전부였다면 토니 다니타키는 그 7벌의 옷을 보면서 아내를 적당히 그리워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700벌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것이다. 7개의 슬픔이라면 그럭저럭 감당할 수 있어도 700개의 슬픔은 사람이 감당할 만한 숫자는 아니다. 결국 토니 다니타키는 아내와 똑같은 체형을 가진 여자를 채용해서 아내의 옷을 입어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주변 공기의 압력 같은 것을 조금씩 조정”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 여자는 혼자 남은 드레스룸에서 갑자기 울기 시작하고 그 여자가 왜 울었는지를 생각하던 토니 다니타키는 갑자기 방에 남겨진 옷들이 증오스럽게 느껴져서 채용을 취소하고 옷을 모두 버리기로 결심한다. 여자는 왜 울었을까. 어쩌면 그건 자기가 앞으로 남은 수명을 모두 다 살아도 영원히 이런 드레스룸을 가질 수는 없을 거라는 자각 때문이 아니었을까. 눈앞에 있는 옷들을 원하는 대로 입을 수는 있지만 그게 결코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자신은 옷걸이인 셈이다. 주인이 아니라 마네킹인 것이다. 그것이 곧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없으리라는 영원한 예감 같은 것으로 나타난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토니 다키타니는 그녀의 눈물을 보면서 아무리 그녀가 그 옷을 입는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네킹으로서의 역할일 뿐 절대 그 옷이 가지고 있는 압력을 느슨하게 만들어 줄 수는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그 옷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까지 아내라고 하는 존재의 압력을 생생하게 뿜어낼 거라고 그는 느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내의 옷을 모두 처분하고 나중에 아버지가 죽자 아버지의 유품 또한 모두 처분한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그의 아버지가 상실감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자기에게 토니라는 이름을 붙였듯 자신 또한 옷과 유품을 처분함으로써 상실감이 들어올 입구를 봉쇄해버렸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완전한 외톨이가 되었다. 유시민 작가가 쓴 항소사유서의 마지막 문장은 네크라소프의 시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문장이다. 토니 다키타니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기 위해 슬픔과 노여움을 불러 일으킬 모든 것을 치워버렸다. 그래서 그는 결국 사랑을 잃었다. 그의 아버지가 그랬듯이. 여섯 번째 작품은 <일곱 번째 남자>다. 태풍이 몰아친 열 살 무렵 친한 친구와 바닷가에 나갔다가 친구는 파도에 휩쓸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다는 고백록이 한 남자의 입을 통해 절절이 이어진다. 아무도 그를 책망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 사건 이후 그는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되어 아직 초등학교를 다닐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떨어져 다른 도시에 살게 되었고 지금도 혼자 살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공포는 내 뼛속까지 깊숙이 파고들어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친구가 그렸던 그림을 다시 보게 되고 거기서 용기를 얻어 친구를 집어삼킨 바닷가를 찾아 죄책감에서 벗어난다는 이야기다. 남자는 이야기의 끝에 이렇게 덧붙인다. 정말로 무서운 건 공포가 아니라 그 공포로부터 눈을 감는 것이라고. 왜냐하면 눈을 감은 사이 공포는 우리로부터 아주 중요한 것을 가져가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아주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이 이야기가 자신의 오래된 비밀을 털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 마지막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는데도 전혀 밝은 곳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남자의 이야기는 우리를 열린 곳으로 데려가는 대신 거꾸로 더 깊은 곳으로 몰아넣는다. 비밀을 털어놓을수록 더 깊은 비밀이 생기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나는 어쩐지 그게 이 작품의 제목인 ‘일곱 번째 남자’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왜 하필 일곱 번째일까를 생각해 보다가 문득 『세븐』이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이 영화는 기독교의 칠죄종, 즉 일곱 개의 죄를 모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을 추격하는 이야기인데 어쩌면 이 소설의 제목에 일곱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것도 바로 그 일곱 개의 죄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남자의 이야기 역시 자신이 유년 시절에 저지른 ‘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은 곧바로 ‘고백’이 아닌가. 내 추측이 맞다면 이 모임은 가톨릭은 아니더라도 고해성사의 형식을 빌려와서 서로의 죄를 털어놓는 종류의 모임일 것이다. 그러나 일곱 개의 죄라고 해서 일곱 번째 남자가 그 중 어느 하나의 죄를 저질렀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대하는 방식이다. 이 남자는 자신이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친구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고통받았고 최근에야 간신히 그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그걸 정작 들어야 할 사람에게 말한 적은 없다. 적어도 죽은 친구의 부모님에게 그 말을 한 적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그가 구원을 받은 것도 친구의 부모님에게 직접적으로 용서를 받은 게 아니다. 친구의 그림을 보면서 거기서 친구의 다정하고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느낌이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한 것이다. 친구의 그림을 일종의 성물로 삼아. 일곱 번째 남자는 그때 그 사건으로 자기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얼핏 들으면 그건 죽은 친구를 가리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그 중요한 것을 최근에 다시 되찾았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말한 중요한 것이 정확히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자기 자신이거나 평온한 꿈 정도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게 친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이제까지 공포와 죄책감에 시달렸던 이유는 친구가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친구가 죽으면서 자신의 일부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해범을 주님의 손길 아래 용서하려고 찾아갔던 여자는 뜻밖에도 이미 스스로를 용서한 범인과 마주하고 굳어버린다. 범인은 자신의 죄를 신에게 빌었고 신으로부터 용서받음으로써 이미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 것이다. 이 순간 여자는 결코 누락되어서는 안 될 자신의 무언가가 송두리째 사라진 듯한 충격을 받고 이후 그 결여된 공간을 납득하기 위해 방황한다. 말하자면 <일곱 번째 남자>는 바로 이 범인의 자기 고백과 유사하다. 거기에는 타인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고통과 듣기에 따라서는 눈물이 날 것 같은 절절한 구원의 과정이 있다. 그러나 그곳에 타인의 고통은 없다. 남자의 이야기 속에서 친구는 파도 속에서 광기 서리게 웃으며 자기를 데려가려고 하거나 혹은 그림 속에서 온화하게 미소 짓고 있을 뿐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실제로 친구가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었다면 느꼈을 것은 바로 그 공포와 두려움이었을텐데도. 말하자면 남자의 이야기에는 오로지 자신의 고통과 자신의 구원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가 자신의 비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비밀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는 듯한 이유가 아닐까. 자기가 문제를 제시하고 자기가 답을 말하는 사람을 보면 이래저래 복잡한 생각이 든다. 그건 아마도 저 사람에게는 무슨 말을 해도 곧이 들리지 않을 거라는, 자기완결성에 대한 일종의 허망감일 것이다. 이 작품의 남자는 뭔가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스스로 진단하고 해답을 찾아냈으며 나중에는 그 의미까지 추출하고 있다. 말하자면 비밀을 말하고 있다고 하지만 조금도 열려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며 남자가 한 마지막 말. 공포를 향해 눈을 감아버리게 되면 우리 안에 중요한 무언가를 줘버리게 된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지칭적이다. 자신이라는 존재를 타인이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 해석해버리는 것은 타인에 의한 자기 상실을 경계하는, 이른바 자기가 자기가 생각한 사람이 아닌 전혀 다른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공포로 눈을 감아버리는 것과 같다. 그 결과로 그는 빛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 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죄는 잘못을 저지른 자를 징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만은 아니다. 죄는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알려주고 죄책감과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선한 본성을 지켜내게 한다. 일곱 번째 남자는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 할 때까지는 인간적이었지만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 나아가 그 고통을 마치 공포에게 강탈당한 무엇인 것처럼 말할 때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 된다. 처음 그 자리에 모인 일곱 명은 모두가 인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번째 남자가 이야기를 마친 지금 어쩌면 그 모임은 악마의 회동이라고 불러야 옳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작품은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다. 이 작품은 『반딧불이』에서 읽고 리뷰도 썼기 때문에 넘어가려고 했는데 혹시나 해서 봤더니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가 아닌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였다. 쉼표 하나 차이잖아,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후자는 고베 대지진 후 자선 목적으로 열린 낭독회에서 전자를 읽고 너무 길다고 생각해서 조금 줄인 수정본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같지만 길이가 짧아졌고 내용도 조금 다르다. 전자와 후자를 비교하면서 읽어볼까 싶기도 했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서 그냥 읽었다. 이 작품은 하나의 이야기 안에 얼핏 무관해보이는 다른 이야기가 삽입된 이른바 액자형 소설이다. 주인공은 귀가 아픈 사촌동생을 병원에 데려다주고 동생이 진료를 보는 사이 식당에서 식당에서 기다리다가 문득 오래 전 친구와 함께 친구의 여자친구를 문병갔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 친구는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진료를 보고 나온 동생과 점심을 먹고 둘은 버스정류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를 기다린다. 다시 그때 친구의 여자친구를 병문안하러 갔을 때의 기억이 난다. 빈손으로 가기가 좀 그래서 초콜릿 상자를 샀었는데 해변에 두고 떠드는 사이 다 녹아버렸다. 동생은 주인공을 향해 괜찮냐고 묻는다. 주인공은 괜찮다고 대답한다. 딱히 그럴 이유도 없는데 불쑥 뭔가가 생각날 때가 있다. 그것은 현재라는 맥락과 무관하게 지면을 뚫고 솟아오르는 이야기다. 그건 기억일 수도 있고 어쩌면 오래 전에 보았던 쇼 프로그램의 한 장면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나 상관없다. 다만 그 이야기가 지금 이 순간에 솟아올랐다는 것은 ‘지금’ 할 말이 있어서, 라고 나는 생각한다. 말하자면 그냥이라는 건 없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왜 죽은 친구와 함께 친구의 여자친구를 만나러 갔던 기억을 떠올린 것일까. 나는 친구의 여자친구가 지은,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라는 서사시부터 시작하려고 한다. 언덕 위에 여자가 사는 집이 있고 그 주위에는 장님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다. 장님 버드나무의 꽃가루에는 수면 효과가 있어서 파리들은 다리에 꽃가루를 묻힌 뒤 여자의 귓속으로 들어가 여자를 재운다. 그런 다음 속에서 살을 갉아먹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적우적. 실로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지만 여자친구가 그리고 있는 이미지 자체는 별로 끔찍하지 않다. 겉으로 보기에 여자는 그저 잠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평온하게. 얼굴색도 그리 나빠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속에서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조금씩 갉아지고 있다. 나중에 남자가 그녀를 찾아오지만 이미 그녀의 속은 텅 비어버린 상태가 되고 만다. 친구는 주인공에게 병원에 혼자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주인공과 같이 병문안을 가기 전에는 여자친구를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지은 이 이야기는 우선 자기 자신의 심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이야기로 읽힌다. 네가 찾아오지 않는 동안 나는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상할대로 상해있었다, 아마 이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이 이야기에는 반전이 있다. 수술을 한 여자친구는 그 후 별 일 없이 퇴원하지만 친구는 자살한 것이다. 말하자면 여자친구가 지은 이야기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친구의 이야기가 된 셈이다. 장님 버드나무든가 파리 같은 것을 옆으로 밀쳐놓고 나면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중요한 것을 끊임없이 파괴당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여자친구의 병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수술을 했고 병원에 입원해 있고 환자복도 입고 있다. 그러나 친구의 병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것은 가슴에 어긋난 뼈를 제자리를 돌려놓는 것과는 아예 다른, ‘죽음에 이르는 병’이었음에도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주인공은 오히려 그때 환자복 사이로 드러난 친구의 여자친구의 가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새하얀 여자친구의 가슴을 쳐다보느라 친구의 새까만 가슴을 알아보지 못한 그에게 그날의 기억은 오랜 죄책감으로 남아 있다. 주인공이 이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마 두 가지 때문이리라고 생각된다. 하나는 동생에 관한 것이다. 동생은 겉으로는 멀쩡하고 공부도 잘하는 편에 속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병을 알아주지 않는 사이 그 속에서는 뭔가 중요한 것이 파괴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치 그날의 친구처럼. 자꾸 시계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서 친절하지만 건성으로 대답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어쩌면 나는 지금 두 번째 친구를 만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주인공은 생각했던 게 아닐까. 다른 하나는 바로 자신에 대한 것이다. 원작과 수정본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화자, 즉 주인공의 심정 묘사가 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도쿄에서 일을 그만두고 내려온 뒤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올라가서 일을 할 생각이었으나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고 무엇을 해야 할 지도 전혀 정하지 못한 상태다. 귀가 아픈 동생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역시도 아무렇지 않다고 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여기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이 한가로움이 여유가 실제로는 한가로움도 여유도 아닌 자기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 무엇이라는 걸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겉으로 큰 별 일이 없어 보이지만 속에서는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 자기만의 상처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지 그 위험성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지는 않다. 그곳에는 죽음의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문병을 가는 사람과 남들이 이해해주지 않는 병을 앓으면서도 형을 걱정하는 동생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죄책감을 안고 있는 주인공이 있다. 요컨대 이것은 멀쩡한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을 위로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다. 상처를 가진 자가 상처를 가진 자를 위로해주는 이야기인 것이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1995년의 고베를 염두에 두고 쓴 이야기라고 밝혔다. 내 모자란 언어로는 이렇게밖에 쓸 수 없다. 이 작품은 윤리적이다. 2025년 6월 18일부터 2025년 6월 23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
「렉싱턴의 유령」
|
|
어느 날 문지혁 작가님이 운영하시는 채널 보기드문 책 인생이라는 링 위에서 / 무라카미 하루키 침묵 단편 소설에 대한 콘텐츠를 보게 되었다. 렉싱턴의 유령 이 단편소설은 이미 수년전 읽었던 책이었지만 문지혁 작가님의 해설이 더해진 콘텐츠는 내게 또 큰 울림을 주었기에 https://www.youtube.com/watch?v=A6OBwmEexaY 책을 구매할 수밖에 재독, 삼독을 할 수밖에 처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 장편소설에 빠져있었다. 그러다가 단편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그리고 올해는 에세이와 여행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런데 이 렉싱턴의 유령이라는 단편소설은 묘하게도 여운이 오래 남았다. 잘 읽히고 재미도 있지만 단순하지 않은 책, 깊이가 있는 책이라 묵직함이 남는다. 생각이 얼키고 설킬때면 하루키 작가님의 단편소설을 찾게 된다. #연말리뷰 |
| 위 제목과 같은 이유로 구매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침묵이라는 다소 무거워 보이는 제목과 대략적 내용에 이끌리어 다른 단편 소설은 어떤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구매해서 사서 읽어보았네요.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명성에 맞게 아주 짧은 단편인 녹색짐승이라는 제목의 소설도 인상적이고 독특했네요. 한번 쯤 가볍게 읽어 보기 좋습니다^^ |
|
그의 단편집의 세계는 간결하고도 무척이나 방대하다.
렉싱턴의 유령이라는 제목으로 편집된 단편집.
하루키의 애독자라면 누구나 읽었을 법한 책.
그런데 이 단편은 웬지 서글픔을 담고 있다고 생각된다.
유령들의 파티를 보았던 작가.
유령들은 과거의 영광과 환희를 미처 버리지 못한 채 아직도 머무는 것이 아닐까.
녹색 짐승의 사랑고백은 정말이지 서글픔의 극렬한 표현이다.
과연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중에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의 자신을 녹색 짐승
처럼 느끼지 않고 자신감으로 어깨를 당당히 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물질만능주의의 시대는 어느덧 우리의 사랑마저 돈으로 물들인다.
얼음사나이의 여인의 사랑도 서글프다.
다르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요즘에는 대체적으로 소외라는 코드일 것이다.
쉽게 그의 책을 읽어나가면서 마침내 책을 덮고,
그 후에 드는 여러가지 생각들.
그것은 아마도 우리를 하루키 애독자이게 하는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