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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에두아르르베 #은행나무 에두아르 르베의 『자화상』은 말 그대로 작가의 자화상이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거울을 두고 마주하는 그 자신을, 자신의 삶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어떤 사건도 없고 사건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건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그의 모든 문장은 무덤하고 이 책의 모든 문장은 다음 문장에 의해 넘어가게 되고 그렇게 모든 문장이 그냥 넘어간다. 마치 삶처럼. 그가 시간을 넘기며 살았듯이 우리는 그의 문장을 넘기며 그를 본다. 이 책을 읽기 전 그의 또 다른 책인 『자살』을 읽었다. 그 책은 계속해서 '너'라고 칭하며 말하는데, 그것이 젊은 시절 자살한 친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작가 자신을 지칭하는 것인지 모호하다. 다만 『자화상』을 읽다 보면 『자살』 속 어떤 '너'는 작가였던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는 힌트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마치 추리소설처럼 『자화상』 속 등장하는 힌트를 통해 『자살』 속 '너'의 정체를 유추하고 있게 된다. 『자화상』은 작가의 자기소개서이자 자살을 한 현시점에서는 유서로 읽히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도록 이 책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p.42) 자화상은 흔히 그림을 떠올리게 되는데, 글로써 마주하는 자화상은 굉장히 흥미롭다. 이 책은 자서전도 아니고 그야말로 자화상이 맞다. “나는 파편을 쓴다.”(p.117) 이 책 속에서 나온 말이다. 정말로 그는 파편을 썼고, 이 책은 파편의 모음이다. 그렇기에 다음 문장에 어떤 파편이 나올지 모른다. 그래서 예측할 수 없다. 삶과 기억 그 자체인 것이다. “나는 내 묘비에 “곧 봐요”라는 비문이 새겨졌으면 한다.”(p.90~91) 그의 묘비에 “곧 봐요”라는 비문이 새겨졌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자살』을 쓰고 죽은 것처럼 정말로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으니까. 『자살』이 일종의 유서였다면 그 비문은 그의 예언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