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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잔혹함을 넘어, 서로를 보듬는 세계를 향하여
"인간의 잔혹함을 넘어, 서로를 보듬는 세계를 향하여" 내용보기
《제노사이드 세계사》는 인류 역사에서 벌어진 23개의 잔혹한 대량 학살 사건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옮긴이의 말에서 깊이 공감하는 문장을 발견했다.“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인류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마주하는 고통스럽고도 엄중한 시간이었다.” (p. 5)저자는 ‘제노사이드’라는 말의 정의를 둘러싸고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
"인간의 잔혹함을 넘어, 서로를 보듬는 세계를 향하여" 내용보기

《제노사이드 세계사》는 인류 역사에서 벌어진 23개의 잔혹한 대량 학살 사건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 옮긴이의 말에서 깊이 공감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이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은 인류의 가장 어두운 심연을 마주하는 고통스럽고도 엄중한 시간이었다.” (p. 5)

저자는 ‘제노사이드’라는 말의 정의를 둘러싸고 중요한 화두를 던진다. 194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집단살해죄의 방지와 처벌에 관한 협약》은 제노사이드를 국민적·민족적·인종적 또는 종교적 집단의 전부 또는 일부를 파괴할 의도를 가지고 자행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저자는 제노사이드라는 개념을 처음 제안한 라파엘 렘킨의 문제의식을 이어받아, 사회적 집단과 정치적 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말살하는 행위 역시 제노사이드의 범주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제노사이드 사건들 사이에 놀라운 유사성이 존재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각각의 사건은 저마다 고유한 역사적 맥락과 특수성을 지닌다. 그러나 그 차이를 넘어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를 지워 온 절멸의 역사에는 반복되는 양상이 있다. 이 책은 바로 그 유사성을 드러내며, 인류가 되풀이해 온 폭력의 구조를 보여준다.


1. 신념과 권력, 탐욕이 만들어 낸 절멸의 역사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학살의 원인과 명분, 동기에서 발견되는 유사성이다.

첫째, 순수성에 대한 병적인 집착이다. 자신의 사회에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인종적·민족적·종교적으로 완벽하고 순수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욕망이다.

둘째, 토지와 자원을 향한 끝없는 탐욕이다. 다른 집단이 살아가는 터전과 그들이 가진 자원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행사한다.

셋째, 완벽한 사회를 건설하려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다. 자신이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그 구상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넷째, 잠재적 적을 제거하려는 공포와 안보다.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위협까지 과장하며, 상대를 제거하는 일을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로 정당화한다.

다섯째, 신과 신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배타적 신앙이다. 자신의 믿음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여기고, 다른 믿음을 가진 이들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다.

여섯째,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공포 통치다. 권력에 도전하거나 저항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을 무자비하게 탄압함으로써 지배 질서를 유지한다.

일곱째, 과거의 원한을 갚겠다는 복수심이다. 집단이 겪은 과거의 피해를 이유로 현재의 구성원들에게 집단적인 책임을 묻고 보복을 정당화한다.


책을 읽으며 이러한 동기들을 나름대로 세 가지 범주로 묶어 보았다. 

첫 번째는 신념이다. 신의 명령을 따른다고 믿든, 자기 민족의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고 믿든, 완벽한 사회를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를 따르든,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을 위해 자신과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절멸시키기도 했다. 자신의 신념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신념과 다른 사람의 존재는 존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제거해야 할 장애물로 바뀐다.

두 번째는 권력이다. 잠재적인 적이나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가능성이 있는 집단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권력자들은 자신이 가진 칼을 휘둘렀다. 저항할 수 있는 상대를 제거한 뒤에는 더 이상 자신에게 도전할 세력이 없다는 사실을 권력의 안정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행사한 폭력이 오히려 권력의 정당성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 번째는 탐욕이다. 토지와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그것을 차지하려는 욕망은 끝없이 이어진다. 자신의 몫을 늘리기 위해 다른 집단이 가진 것을 빼앗고, 그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며, 마침내 그들의 존재 자체를 없애려는 데까지 나아간다.

신념과 권력과 탐욕은 서로 분리되어 작동하지 않는다. 탐욕은 신념이라는 명분을 얻고, 권력은 공포를 이용해 신념을 강요하며, 신념은 권력과 탐욕을 정당화한다. 이 세 가지 동기는 수천 년의 인류 역사 속에서 서로 얽히며 반복되어 왔다.


2. 육체와 정신, 공동체의 정체성을 파괴하는 폭력

비뚤어진 욕망이 현실화되는 과정에서도 반복되는 양상을 발견할 수 있다.

  1. 비인간화: 피해자를 바퀴벌레나 쥐, 해충 등에 비유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부정한다. 이들을 제거하는 행위를 살인이 아닌 해충 구제나 정당한 방어로 인식하게 만든다.
  2. 조직적인 기아와 굶주림 유도: 식량과 생존에 필요한 자원을 통제하여 피해 집단을 굶주리게 하고 죽음으로 내몬다.
  3. 강제 이주와 죽음의 행진: 피해자들을 삶의 터전에서 강제로 쫓아내고, 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통과 죽음을 방치하거나 의도적으로 유발한다.
  4. 수용소 감금과 강제노동: 피해자들의 자유를 박탈하고 인간다운 생활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노동력을 착취한다.
  5. 성폭력과 강간의 무기화: 신체를 침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피해자의 존엄을 짓밟으며, 공동체에 공포와 굴욕을 안겨 준다.
  6. 직접적인 신체 훼손과 잔혹한 살해: 인간의 신체를 훼손하고 잔인하게 살해함으로써 생명을 파괴한다.
  7. 문화적 말살: 언어와 종교, 전통, 생활양식을 억압하거나 없애 피해 집단의 정체성을 파괴한다.
  8. 아이들의 강제 분리와 납치: 아이들을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떼어 놓고 다른 문화와 정체성 속에 편입시켜 집단의 미래를 훼손한다.
  9. 집단의 지도층과 지식인 제거: 공동체를 이끌고 문화를 전승하는 지도자와 지식인들을 제거하여 집단의 저항 능력과 재건 가능성을 약화한다.
  10. 선전선동과 공포 조장: 언론과 선전 수단을 통해 피해자를 악마나 적으로 규정하고, 그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는 공포를 주입한다.


이러한 폭력의 양상 역시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신체적 폭력이다. 신체 훼손과 살해, 강제 이주, 수용소 감금과 강제노동, 기아 유도 등은 피해자들의 육체와 생존 조건을 직접적으로 파괴한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몸은 존엄한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통제하고 착취하고 제거해도 되는 대상으로 취급된다.

두 번째는 정서적 폭력이다. 피해자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나타난다. 피해자를 인간이 아닌 해충으로 부르고 선전과 선동을 통해 악마화함으로써 가해 집단이 그들을 짓밟는 데 거리낌을 느끼지 않도록 만든다. 피해자들 역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처럼 여기게 될 수 있다. 성폭력과 강간 또한 신체적 침해를 넘어 피해자에게 심각한 정신적 고통과 굴욕을 안기고, 공동체 전체에 공포를 확산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특히 강간이 집단의 혈통과 정체성을 훼손하려는 의도와 결합할 때, 성폭력은 개인에 대한 범죄를 넘어 공동체 전체를 공격하는 폭력으로 기능한다.

세 번째는 문화적 폭력이다. 피해 집단의 언어와 종교, 전통을 억압하고, 아이들을 가족과 공동체에서 분리하며, 지도자와 지식인을 제거한다. 이는 단순히 현재의 구성원들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누구인지 기억하고 전승할 능력, 나아가 미래 세대를 통해 공동체를 이어 갈 가능성까지 파괴하려는 시도다.


물론 이 세 가지 범주는 서로 명확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강제 이주는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는 동시에 정서적 불안을 안기고, 공동체의 문화와 정체성을 무너뜨릴 수 있다. 아이들의 강제 분리 역시 신체적·정서적·문화적 폭력이 중첩되는 사례다. 제노사이드의 폭력은 이처럼 여러 층위에서 동시에 작동하며 피해자들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집단의 정체성을 파괴한다.


3. 일상적인 욕망은 어떻게 절멸의 폭력으로 변하는가

 정리해 보면 인간은 신념과 권력, 탐욕을 동력으로 삼아 다른 인간에게 신체적·정서적·문화적 폭력을 가해 왔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들은 역사 속의 특별히 잔혹한 인물들에게만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의 일상에서도 그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노력한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서 인정받고 더 큰 권한을 얻기를 바라기도 한다. 경제적인 성공과 부를 부러워하며 그것을 위해 노동하고, 때로는 일확천금의 꿈을 꾸며 복권을 사기도 한다. 신념을 갖는 것, 권한을 얻으려는 것, 더 나은 경제적 형편을 바라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을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욕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욕구가 다른 사람의 존엄과 권리를 무시해도 된다는 믿음과 결합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다른 사람의 신념을 억압하고, 나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잠재적인 경쟁자를 제거하며, 나의 몫을 늘리기 위해 다른 사람의 몫을 빼앗는 일이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태도가 집단의 이념과 권력, 제도적 폭력과 결합하면 개인의 욕망은 다른 집단의 존재를 말살하는 거대한 폭력으로 확대될 수 있다.

일상의 욕구와 제노사이드 사이에는 결코 단순한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모든 욕망이 학살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며, 모든 갈등이 절멸을 낳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구를 절대화하고 타인의 존엄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가 집단적으로 확대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작은 언제나 거대한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 태도, 특정한 집단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시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선택에서부터 폭력의 가능성이 자라날 수 있다.

그렇기에 제노사이드의 역사는 먼 과거의 특별한 사건으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인간의 일상적인 욕망이 어떤 조건에서 타인을 배제하고 파괴하는 힘으로 바뀌는지 끊임없이 돌아보게 하는 경고이기도 하다.


4. 약육강식의 역사 앞에서 느낀 무력함

 저자는 수많은 사건을 기록하고 정리하며 그 안에서 반복되는 유사성을 찾아낸다. 그러나 독자인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떤 방향을 추구해야 하는가?

책이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나는 조금의 실망과 함께 깊은 좌절을 느꼈다. 어쩌면 저자는 독자에게 답을 강요하기보다 판단을 맡기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책을 덮은 뒤 내게 남은 질문들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의 역사는 결국 약자가 강자에게 짓밟히는 과정이었던가. 힘을 가진 자는 어김없이 그 힘으로 불을 지르고 칼을 휘둘러 왔는데, 그것을 막아 내고 이겨 낼 힘은 어디에도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역사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가 지식과 능력을 쌓고 힘을 기르는 이유는 결국 미래의 약한 누군가를 짓밟기 위한 것인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장악하는 동안 나는 무력했고, 또 비겁했다. 다른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무력했다. 그 대안을 스스로 고민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기를 기대하고, 답을 제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쉽게 비난하는 나의 모습에서 비겁함을 느꼈다.

나는 약육강식이 인간 사회에서 반복되어 온 현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이 따라야 할 유일한 질서라는 결론만큼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서 강자가 승리한다는 사실과 강자의 행동이 정당하다는 판단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잔혹한 역사 속에서도 약육강식이라는 논리를 거부할 근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5. 연약한 존재를 살리는 것은 누구인가

 부모가 되어 두 딸을 키운 지 8년이 되었다. 갓 태어난 아이들은 언제나 연약하고 무력했다. 부모가 목을 제대로 받쳐 안아 주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었고, 위가 작아 두어 시간마다 분유를 먹여야 했다. 분유를 먹인 뒤에는 트림을 시켜 주어야 했으며, 토한 것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질식할 위험도 있었다. 신생아 시절 아이들에게 매 순간은 그야말로 생존의 과정이었다.

 그때마다 이 연약한 아이들을 살린 것은 부모였고, 가족들이었으며, 작은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는 주변 사람들이었다.

두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한 마을의 도움을 받은 것만 같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작고 여린 아이들에게 사랑스러운 눈길을 보냈고, 때로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이 부모 두 사람의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 시간들을 통해 배웠다.

 그 경험을 돌아보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를 어여삐 여기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 또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논리로만 인간을 설명한다면, 갓 태어난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하지도, 자신을 지키지도 못하는 존재가 어떻게 자라나 자신의 삶을 꾸릴 수 있게 되었을까.

 물론 부모와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돌보는 데에는 애정뿐 아니라 책임감과 사회적 관습, 상호 의존의 관계도 작용한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를 모두 고려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을 제압하고 자신의 몫을 늘리는 방식으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살아가고, 또 다른 누군가를 돌보며 살아간다.

 인간은 타인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돌봄을 먹고 자라나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 사실은 약육강식의 현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인간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우리는 힘으로 다른 사람을 제압할 수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 다른 사람을 지탱할 수도 있다. 타인의 연약함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 연약함을 보듬어 줄 수도 있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후자의 가능성을 경험했다. 인간 안에는 타인을 파괴하는 힘뿐 아니라 타인을 살리는 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6. 인간의 무도함을 넘어, 서로를 보듬는 세계를 향하여

결국 인간의 무도함을 막아 내는 힘 가운데 하나는 인간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저지르는 여러 층위의 폭력이 멈추기 위해서는 서로를 이해하고 다독이며, 서로의 다름 속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타인의 고통을 나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나와 다른 사람에게도 나와 다르지 않은 소중한 삶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만으로 모든 폭력을 막을 수 있다고 낙관할 수는 없다. 개인의 선의가 권력의 남용과 조직적인 폭력을 언제나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로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려면 그것을 뒷받침하는 제도와 공동체의 노력도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견제하고, 국민에게 주권을 부여하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의견이 공존할 수 있는 제도적 틀을 제공한다.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모든 폭력과 차별을 없애 주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도 일어날 수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는 다수결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며, 소수자의 권리와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원칙을 함께 지켜야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고, 타인의 연약함을 자신의 연약함과 연결해 바라보며,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과 다르지 않은 삶의 모습을 발견할 때 우리는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갈등을 해결할 가능성을 넓혀 갈 수 있다.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우리와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일 마음의 크기를 키우고, 그들 또한 우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대화하고 서로를 가르치며 배워야 한다.

 물론 모든 차이를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갈등이 대화만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때로는 타인의 폭력으로부터 자신과 공동체를 지켜야 하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워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상대방의 인간성을 부정하고 존재 자체를 없애는 것을 당연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이 똑같아지는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은 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계일 것이다. 나와 다른 부분을 잘라 내어 없애는 대신, 서로의 차이를 하나의 퍼즐처럼 맞추어 가는 세계 말이다.

 나는 여전히 인간의 역사에 반복되어 온 잔혹함을 이해하기 어렵고, 그것이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다. 다만 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앞으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세상이 언제나 선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비정하게 살아야 한다고 결론짓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강자가 약자를 짓밟아 온 역사를 배우는 것은 우리 역시 강자가 되어 누군가를 짓밟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과거와는 다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다.

 그것이 내가 역사를 가르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학생들에게 세상의 잔혹함을 숨기지 않되, 그 잔혹함을 인간의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알려 주면서도, 그럼에도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싶다.

 서로를 이해하고, 약한 이를 보호하고, 타인의 존엄을 지키려는 노력이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때로는 실패할 것이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서로를 짓밟는 것이 세상의 유일한 이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간에게는 서로를 살리고 보듬는 능력 또한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너와 나의 다른 부분을 퍼즐처럼 맞추어 나가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그 길이 오래 걸릴지라도.

지난한 갈등의 과정을 거쳐야 할지라도.

d*********3 2026.10.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