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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시에서 18시까지 네 시간동안 받는 민방위 훈련. 그저 자거나 말거나 신문을 보거나 말거나 코를 골거나 말거나 핸드폰으로 집에 있는 여편네와 전화통화를 하거나 말거나 아무도 상관하지 않는, 구민회관에 모인 민방위 아저씨들 틈에서 책을 읽는다. 백은하의 『무지개에는 왜 검은 색이없을까요?』라는 제목도 요상한 책을.
사격장의 사로에 장판을 깔아놓고 그 위에 예비군 아저씨들 엎드려 쏴 자세로 누워주세요, 소리치던 조교를 잠깐 그리워 한다. 엎드려 쏴 자세로 누운 예비군들에게 그 착실한 조교들은 총을 한 자루씩 곱게도 가져다 주었고,그렇게 아홉발인가 여섯발인가를 쏘고 나면 조심스럽게 수거해 갔더랬는데(비록 총기사고로 인한 아주 잠시동안의 호사였다고 하기는 하지만).
즐겨보던 잡지인 <나이고 싶은="" 나="">(페이퍼 류의 인터뷰 전문 잡지로 햇살 좋은 날 반지하 집에 파묻혀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먹으면서 보면 딱좋은 책이었는데 아무래도 이삼월 중에 폐간되지 않았나 싶다)와 <씨네 21="">에 종종 기사를 쓰는 백은하라는 이름이 퍼뜩 떠올라 샀는데 같은 인물인지는 잘 모르겠다. 전남이 주활동 무대인 걸 보면 아닌 듯 하다.
모두 아홉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책은 새빨간 바탕에 꽃술 내지는 입술 내지는 어정쩡한 하트 문양이 그려진 표지를 가지고 있다. 언뜻 보고 고르기에 매우 유혹적인 책이다. 하지만 소설은 집약되지 않은 주제와 색과 성의 이미지의 삐걱대는 결합 등등으로 썩 훌륭해 보이지는 않는다.
「무지개에는 왜 검은색이 없을까요?」 - 정신병원에 갇힌 나, 주미를 죽인 나, 스칼렛 오렌지, 첫사랑 선우, 주미와 선우의 섹스, 성의 상실, 어머니의 실종.
「생은 조용한 꿈」 - 은비, 토파즈 반지를 훔치다. 화련, 은비가 훔친 반지의 대가를 지불해 도둑의 위기로부터 구하다. 은비, 친구 상효와 밥먹다. 상효, 기범과의 사이가 먹먹하다. 상효, 칼날을 통해 재훈에게 가고 프랑스 레스토랑의 주인이 되다. 칼날,은비와 동거중인 여왕 화련에게 토파즈 반지를 선물하다.
「파란 피」 - 오차원의 세계. 콩나물 사나이와 난나와 데모나. 상상속의 공간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다,그것은 가장 사랑하는 착한 여자를 죽음의 제물로 바쳐야 하는 것.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어머니이다.
「모나의 집은 어디인가」 - "...관능을 향해 돌진하지 않는, 발기하지 않는 남자의 몸, 그것은 식물성이다." 현서, 상엽과의 섹스. 주눅든 상엽의 금방 시드는 성기. 상엽은 떠나고 현서는 여자의 성기(크게)와 남자의 성기(왜소하게)를 소재로 한 작품을 졸업작품으로 내려다 실패.재현과 함께 병준(남자의 몸)을 드로잉. 여자와 남자. 여성의 예술적 시각, 얼마나 사회의 편향적 선입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죽음의 유혹은 꽃으로부터 시작한다」 - 할머니의 죽음. 동생 승훈의 전화. 어머니의 기독교 양식의 장례와 매사 고모의 출현. 신탁을 받은 여인들.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자와 그것을 거부하고 의지 속에 살아간 자. 노란 나방, 담배, 초경, 무속. 이미지의 남발이 눈을 어지럽힌다.
「붉은 사과가 푸르게 변한다」 - 석륜사 법연 스님과의 섹스.'너는 이미 샤먼'이라고 말했던 마리안느의 기억. 뉴욕에 있는 마리안느의 죽음을 운명처럼 알게 되는 나, 남주. 존재를 찾아가는 또는 자신에게 찾아온 존재의 의문을 풀어줄 매듭푸는 손길 찾아가는 소설.
「시실리」 - 삼족고 아줌마가 놓아주던 이름모를 주사약. 그 아줌마의 아들 기석의 자위. 스무살 기석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음습한 나, 인경의 나이. 현재의 인경이 겪는, 죽음에 이를 것도 아니면서 줄기차게 따라 다니는 완치불가능의 병.
「크레타를 묻지 마세요」 - 집약되지 않음. 서른셋 유부녀 유진. 첫경험 민규는 십년만에 돌아와 유진과 결혼한다. 그리고 주환. '크레타를 묻지 마세요'라는 시. 알 수 없는 무엇은 묻지도 말라는 이야기인가.
「팝팝 비디오」 - 발레에서 인터액티브 비디오 아트로 전환한 세희.한 편의 비디오 아트를 구성하고 무대에서 실현하기까지의 과정.전통춤의 현대적 복원, 미술과 춤이라는 두 예술 양식의 결합.
제목들은 무척 재미있는데, 소설의 내용이 그 재미를 따라잡지 못해 아쉽다. 저자 여성으로서 가지는 말못할, 그러하니 글로 쓰거나, 아님 그래서 글로 쓰여지는 성적으로 음습한 통과의례의 기억들이 너무 구차스럽게 거론된 것은 아닌지, 약간의 의구심 든다.일독을 권하기에는 역시 미흡하다. [인상깊은구절] 반역의 피가 흐르는 그녀들은, 살아남은 것이 죄가 되는 5월이면 청바지 입기 운동을 벌이는 도시 한복판에 시실리라는 안전 지대를 만드어 놓고, 그 음탕한 공기를 마시며 피를 삭이고 있었다. 여자들은 누구나 조금씩 피로했다. 잿빛 승복을 입고 싶거나, 예술가가 되고 싶은 여자들이었다.씨네>나이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