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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장기인 변덕은 슬럼프를 견디는 유일한 무기다. 11월 초순, 맛보기로 살짝 내리곤 했던 첫눈이 올해는 유난히 펄펄 날려 르누아르와 함께 나름 고상한 슬럼프를 즐겼다. 빛과 색채의 조형화가, 르누아르. 화가의 작품을 마주대하는 기분이란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열차여행처럼 설레고 달콤하다. 창밖으로 흩뿌리는 함박눈까지 이 짙은 감성을 배가시켜주니 신선이 부럽지 않은 초겨울의 기막힌 하루. 저물어가는 아쉬움을 달래주는 르누아르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물랭 드 라 갈레트>는 생생한 관찰과 빛으로 번뜩이는 분위기가 완벽하게 압축된 작품이다. 춤과 소란스러움과 햇살과 야외 무도장의 흙먼지에 도취된 흥분된 얼굴들, 자유로운 포즈, 분홍 청색 검정 색조로 포착한 소용돌이치는 드레스에서 배어나는 리듬감, 열정적인 움직임, 드리워진 그림자, 흐르는 듯한 열기, 즐거움과 권태로움 등이 복합돼 있다. 또한 섬세한 표정에 갖가지 손 모양을 하고 느긋한 태도를 보이거나 열정을 불사르고 다 태워버린 듯한 무도회의 가엾은 여주인공들에겐 희망과 도취감, 절망적인 무료함이 함께 엿보인다. - 귀스타브 제프루아<제 3회 인상파전/1893년 12월 15일>
르누아르는 <물랭 드 라 갈레트>에서 직업모델들을 쓰지 않고 자기 친구들과 이곳에 자주 드나들던 몽마르트르의 몇몇 노동계급 여성들- 잔, 에스텔, 마르고- 을 등장시켰다(p53). 그의 친구이자 후원자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이 작품을 1877년 전시회 직후에 구입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1879년 [아르티스트]에 실린 한 논평에서 “르누아르의 최고작 중 하나인 이 매력적인 그림은... 카유보트 씨가 구매했다. 그는 이 그림을 부그로의 <비너스>와도 맞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라고 시사하고 있다. 부그로는 당시 유행에 편승하던 화가로서 인상파들은 한결같이 그의 그림을 경멸했다(p48). 화가입문의 탄탄대로
1841년 2월 25일,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재봉사였던 아버지 레오나르 르누아르와 양재사였던 어머니 마르게리트 메를레 사이에서 7남내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양친 모두 화가가 되려는 아들을 독려했던 덕분으로, 그는 13세가 되던 해 도자기 화공에게 견습공으로 맡겨진 이후로 줄곧 화가입문의 탄탄대로를 거친다. 1861년, 그는 프레데리크 바지유,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와 함께 스위스 화가인 샤를 글레스에게 본격적으로 그림공부를 배운다. 화랑이 적었던 당시 살롱전에서의 입선은 화가지망생들에겐 많은 특혜가 주어졌는데, 특히 그림을 팔 수 있도록 잠정적인 구매자들과 연결해주는 것은 그들에게 경제적 안정을 보장해주었다. 그러나 작품 자격을 심사하는 심사위원 대부분이 막강한 보수주의 성향의 예술원 회원들이었던 데다 비평가들에 의해 살롱전이 좌지우지되는 등, 살롱전의 예술 패권주의에 염증을 느낀 화가들은 출품을 거부하거나 낙선한 화가들끼리 의기투합해 낙선자전을 펼치기도 했다 . 평생 거물급 후원자를 곁에 두었던 행운아
르누아르는 부모를 잘 만난 행운에 이어, 78세로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주는 거물급 인사들과도 친분이 두터웠다. 파리의 부호인 르 쾨르 일가가 그랬는데, 화가인 쥘 르 쾨르와 건축가인 그의 형인 샤를 르 쾨르는 르누아르의 재능을 확신하고 초상화며 정물화 따위를 수시로 의뢰하는 등 적극 그의 첫 후원자가 돼주었다. 그런가하면 1870년 전쟁 직후 알게 된 뒤랑 뤼엘은 바르비종파를 후원했던 미술상의 아들로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 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르누아르의 작품을 대량구매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더불어 아쉽게도 젊은 나이에 전사한 친구 바지유와 카유보트, 마네 등 동료나 선배화가들부터 작곡가 엠마뉘엘 사브리에, 비평가 테오도르 뒤레, <가제트> 발행인 샤를 에프뤼시, 미술품 수집가 폴 갈리마르, 부르주아 가문으로 출판업자 조르주 샤르팡티에의 부인, 조스와 가스통 베르냉 죈 형제 등 사회 각계각층의 재력가들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그는 대단한 행운아였음에 틀림없다. 1879년 살롱전에서 파란을 일으켰던 대형작 <사르팡티에 부인과 아이들> 프루스트는 사르팡티에 부인을 싫어했는데도 자신의 저서 [다시 찾은 시간]에서 이 그림에 관해 긴 묘사를 할애한 바 있다. 그는 “티치아노의 가장 아름다운 작품들에 비할 만한 감미로운 그림”에 찬탄을 금하지 못하면서 르누아르의 이 작품은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우아한 가정과 정교한 복장에서 풍기는 시정詩情”을 완벽하게 포착하고 있다고 주장했다(p65).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 여행의 소득과 결혼 그리고 가족
샤를 되동의 소개로 만난 후원자 폴 베라르의 와르제몽 저택에 가 환대를 받았던 르누아르는 그곳 저택과 멋진 정원을 배경으로 한 장식화를 그려주며 살롱전에 출품할 대형 작품의 구상을 위한 여행까지 하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그가 그르누예르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린 <베르느발의 조개잡이들>(1879)과 <사투의 노잡이들>(1879)은 <뱃놀이 일행의 오찬>에서 정점을 이루게 될 양식상의 발전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이후 카앵네 딸들의 2인 초상화를 끝내고 지쳐있던 그는 1881년 2월 말 파리를 떠나 알제리를 시작으로 이탈리아 여행에 나선다. 프레스코화의 대가인 라파엘로와 앵그르의 작품을 보고 싶단 열망에 응답하듯 평소 흠모하던 대화가들의 작품을 현장에서 감상하고 돌아온 이후 그의 작품들에선 고전주의적 색채가 물씬 풍긴다. 엄숙함과 웅장함 거기에 신비함까지 더해진 여신들의 정교한 멜로디가 흐르는 터치의 물결은 그가 작품의 기조로 삼았던 기존의 자연주의에서 탈피해 이상미의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이 시기 몇 점의 누드화로 화단에서 물의를 빚어 뒤랑 뤼엘을 비롯한 그의 후원자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입혀 그들을 파산위기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여행의 소득은 무엇인가? 그건 바로, 그가 기존화풍의 개혁의 서막을 여는 주역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1885년 3월, 아내 알린 샤리고가 첫아들 피에르를 출산, 나이 44세에 르누아르는 비로소 아버지가 된다. <뱃놀이 일행의 오찬> (1880~1881)에 나오는 르누아르의 친구와 모델들 가운데서 정확하게 신원을 알 수 있는 두 명뿐이다. 왼쪽 난간을 잡고 서 있는 노잡이는 알퐁스 프르네즈의 아들로 이 건물의 주인이며, 그의 옆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노는 여인은 젊은 양재사 알린 샤리고인데, 그녀는 훗날 르누아르의 아내가 된다. 이 그림에서 르누아르는 남자들에게 일부러 각양각색의 모자를 쓰게 함으로써 이 생기 넘치는 회합에 참석한 인물들의 복잡한 사회적 지위를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p75). <목욕하는 여인들>을 본 당대 사람들은 이 작품이 베르사유에 있는 지라르동의 <목욕하는 님프들>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이라고 말하곤 했다. 이 작품은 1887년 6월 뒤랑 뤼엘의 라이벌인 조르주 프티의 화랑에 전시되어 상당한 물의를 빚었다(p94). 공식적인 인정과 말년의 르누아르
“저는 옛 그림으로 돌아왔습니다, 부드럽고 경쾌하고 영원한...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고 18세기의 그림 양식을 따른 것입니다... 프라고나르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르누아르가 뒤랑 뤼엘에게, 1888년경(p101) 1890년대에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된 르누아르의 작품은 마침내 정부의 주목을 받아 1889년 파리 세계박람회의 일환으로 열린 프랑스 미술 백년전에 전시작으로 선정되어 11작품이 전시되는가 하면, 정부의 비공식적인 청탁을 받아 여러 점의 작품을 기증하기도 한다. <피아노 앞의 소녀들>의 유화 변형작 5점과 파스텔화 1점은 초창기 인상파 멤버 중 국가가 그림을 매입한 생존 화가로는 시슬레 이후 그가 두 번째였다. 이어 1894년 2월, 사망한 카유보트는 자신이 보유한, 세잔, 드가, 마네, 모네,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와 같은 친구들의 작품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하면서 인상파의 주가상승에 이어 그의 유언대로 그 작품들 중 40여점이 루브르 박물관에 안치되기에 이른다. 이때 카유보트의 집행자 대행을 보던 르누아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컬렉션 작품 중 한 점을 갖게 되는 행운을 쥔다. <피아노 앞의 이본과 크리스틴 르롤> 1897년 10월 르누아르의 화실에서 화가이자 수집가이며 음악 애호가인 앙리 르롤의 두 딸. 이 작품을 본 쥘리 마네는 크게 감명받았다. 그녀는 <주르날>에서 이렇게 적었다. “멋진 그림이다. 크리스틴의 표정이 매우 발랄하다. 이본의 표정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하얀 드레스가 훌륭하게 그려졌다(p103).
“이제 더 이상 팔다리에 의존할 수 없게 되고 보니, 대작을 그리고 싶네. 나는 베로네세의 꿈만 꾼다네. 그의 <카나에서의 결혼식>만 말일세. 그 얼마나 비참한지!“ -르누아르가 알베르 앙드레에게, 1919년(p121) 1919년 봄, 죽기 석 달 전 루브르를 방문했던 레콜레트에서의 그는 이미 병약자였다. 몇 년 사이 뒤랑 뤼엘과 베르냉 죈 화랑뿐 아니라, 미국,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까지 그의 최신작과 옛 그림들이 전시되며 프랑스 최고 화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르누아르는 60세도 안 돼 심한 류머티즘으로 인해 지팡이에 의존하는 고령의 노인이 돼버렸다. 1915년엔 아내가 죽고 두 아들마저 전쟁에서 부상을 안고 돌아오는 등 그의 마지막 10년은 의자에 의지해 흔들리는 손가락을 고정한 채 그림에만 전념한 길고 외로운 세월이었다. 언뜻 보면 과장된 인체에 투박한 색감이 예전 같지 않은 화가의 재주를 의심해 볼 법도 하건만, 실정을 아는 이라면 손떨림을 막기 위해 붕대를 감은 손으로 그려낸 말년의 그의 작품들에서 처연한 기품을 발견하곤 금세 눈가가 촉촉해질 것이다. 너무 많은 학식이나 너무 많은 인물들로는 사람을 생각하게 만들지 못한다(p127)던 르누아르는 자신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자부심을 자유분방하고 호탕한 삶에 그대로 투영해냈던 유일한 화가였다. 부록, 기록과 증언에 적힌 그의 입담은 살아생전 그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증명해준다. 그것은, 그 소소한 행복과 일상에서 구한 사고의 전환이 일구어낸 그의 작품이 울고 웃는 표정을 읽는 나의 행복과 맞닿아있다. 1913~1914년경에 그린 화려한 작품 <파리스의 심판>은 신화적인 테마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르누아르의 초기작들에 나오는 다이아나나 비너스들과 연결되어 있다. 이 그림은 한 석고부조 및 르누아르의 조각상 <승리의 비너스>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림의 오른쪽 끝에 르누아르의 모델 가브리엘이 보인다(p126).
볼라르의 부추김에 못이겨 르누아르는 마욜의 조수였던 리샤르 기노란 젊은이의 도움을 받아 조각에도 손을 댄 바 있다. 그것이 바로 위의 <승리의 비너스>(1914, 왼쪽)와 <빨래하는 여인 거상>(오른쪽)이다(p116).
<< 예술에 관한 르누아르의 말, 말들 >> 예술의 첫 번째 개념과 관련해 내가 근본원리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불규칙성’이다. 가서 다른 사람들이 생산해 놓은 것을 보라. 그러나 본질을 제외한 그 어떤 것도 베껴선 안 된다. 당신의 것이 아닌 어떤 기질을 습득하려 애쓰다 보면 당신이 하는 것 가운데 특징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게 될 것이다. - 장 르누아르, 나의 아버지, 1958(p141)
<< 르누아르와 그의 모델들 >>
모델은 다만 거기에 서서 날 그리로 잡아 끈다. 모델은 자기가 없었다면 내가 창안할 수 없었을 것들에 과감하게 덤비게 해주며, 내가 지나치게 멀리 가면 과정을 돌아볼 수 있게 도와준다(p143).
<< 화가들의 눈에 비친 르누아르 >>
그리는 법도 모르면서 잘 그리는 화가, 그가 바로 르누아르다... 요술을 부리듯 아름다운 점 하나, 애무하는 듯한 빛 한 줄기로도 충분히 표현을 한다. 뺨엔 마치 복숭아처럼, 귓전을 울리는 사랑의 미풍을 받아 가벼운 솜털이 잔잔하게 물결친다. 앵두 같은 입술은 한 입 깨물고 싶고 진주 같은 미소 속엔 작고 희고 예리한 아이의 치아가 드러난다. - 고갱
일단 시도했다 하면, 인생을 대하는 자신감과 겸손한 기질 덕분에 그는 관대하게도 스스로 자기 존재를 드러냈다... 그의 작품을 보면, 뛰어난 재능으로 축복받고 그 재능에 감사하고 그것을 소중히 여겼던 한 화가를 만나게 된다. - 마티스
카녜에서 그림을 그리는 르누아르(1903~1907년경)
1918년 레콜레트의 화실에서 찍은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그의 모델 카트린 에슬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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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Auguste Renoir)
프랑스의 화가.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했다. 이탈리아 여행 후 담백한 색조로 선과 포름을 명확하게 그려 화면구성에 깊은 의미를 쏟은 고전적인 경향을 띤 작품들을 그렸다. 그 후 인상파에서 이탈해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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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빛과 색채의 조형화가란 부제목이 너무 잘 어울리는 화가다.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부친은 재봉사였으며 모친은 양재사로 부부는 아들의 재능을 키워주려고 노력한다. 국립 미술학교에 입학하며 그림을 배울 기회를 갖는다. 스위스 화가 클레르의 화실에서 공부하기 시작하며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와 친구가 된다. 클레르의 화실에서 나오고 국립 미술학교도 그만둔 르누아르는 살롱전에 입선이 되며 그의 재능을 알아본 르 쾨르 일가는 그의 최초의 후원자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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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전에서 낙선한 작품들을 따로 모아 전시회를 갖자는 이야기가 번번이 흐지부지 되었지만 1874년 전해 12월 말에 결성된 '소시에테 아노님'이 결성되어 첫 전시회를 열었고 대성공을 거둔다. 마네를 뺀 드가, 세잔, 시슬레, 피사로 등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였으며 모네의 그림 '인상, 해동이' 제목을 빗대 한 비평가가 '인상파'란 말을 붙여 부른 게 계기가 되어 명칭으로 굳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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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는 재력가와 함께 세계일주를 하고 돌아온다. 당시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일본풍이 상당한 인기를 끌었는데 르누아르는 일본 여행을 했지만 같은 시대 화가들 중 일본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비싼 일본부채를 그림으로서 당시 유행에 단 한 번 굴복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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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르누아르의 그림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도시의 젊은 여성들을 주로 그린 르누아르는 전원적인 분위기에 평온한 조화감을 가진 그림을 주로 그렸는데 그림에서 느껴지는 나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에 빠져들게 만드는 그림이다. <피아노 앞에 앉은 소녀들>은 선적인 드로잉 기법을 더욱 유려한 붓질로 대체했던 이른바 '진주빛' 시기의 대표적인 그림이다. 1891년 말 혹은 1892년 초에 르누아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파리에 새로 생긴 뤽상부르그 미술관(활동 중인 화가들의 작품을 소장하려는 목적으로 건립됨)에 걸 수 있는 그림을 주문받았다. 르누아르가 그린 다섯 점의 그림은 중산층 가정생활의 내밀함을 완벽하게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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