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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지닌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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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담긴 힘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정성껏 지은 이름을 건네주기도 하고, 반대로 누군가를 무력하게 하려고 이름을 빼앗기도 한다. 이름은 이렇듯 단순한 호칭을 넘어선 힘을 지닌 존재다. 결국 이름의 다른 이름은 곧 권리이자 사랑이며 정체성이다.다시 말해, 이름은 정확히 불리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의 주인에게 삶 속에 계속 발붙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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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담긴 힘은 과연 무엇일까.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정성껏 지은 이름을 건네주기도 하고, 반대로 누군가를 무력하게 하려고 이름을 빼앗기도 한다. 이름은 이렇듯 단순한 호칭을 넘어선 힘을 지닌 존재다. 결국 이름의 다른 이름은 곧 권리이자 사랑이며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 이름은 정확히 불리는 것만으로도 그 이름의 주인에게 삶 속에 계속 발붙이고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름과 함께 따라오는 고유한 정체성과 사랑은 한 번 뛰어든 삶 안에서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앞으로 헤엄쳐 나갈 힘을 부여한다. 결국 이름은 한 사람을 세상에 붙들어 두는 매우 강력한 언어 중 하나다.

 <이름의 빈자리에>는 이처럼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우리의 ‘이름’에 관한 책이다. 저자는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 속 인물들을 통해 이름의 의미를 탐구한다.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 이름 대신 역할로 불리는 사람들,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름은 한 사람의 기억이며 역사이고, 누군가를 인간답게 바라보게 만드는 첫 번째 언어다.

책에는 이름을 잃거나, 처음부터 이름을 갖지 못했거나, 자신의 이름을 되찾고자 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름의 부재가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게 됐다. 이름을 갖지 못한 존재들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에 의해 규정되거나 특정 역할로만 기억된다. 그저 누군가의 소유물, 전치사, 혹은 괴물 등으로 불릴 뿐이다. 분명 살아 숨 쉬는 존재이지만, 이름이 부재한 순간 온전한 개인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름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자신만의 이야기를 잃는 것과 다르지 않은 셈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이름이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삶을 담아내는 그릇임을 이야기한다.


P.67 마틴은 마틴을 죽이고 마틴이 되어 똑같은 삶을 살아 영생을 누리지만 젬마와 마틴은 미로에 갇혀 살았어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떠나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검은 봉투에 이름 없이 담겼어도 젬마와 톰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이름의 빈자리를 돌아보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확신하지 못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이름을 기억하고 불러주는 일은 상대를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인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이다. 이름은 단순한 단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과 기억, 관계가 응축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2장 <늦가을 무민 골짜기>에서 나타나듯, 누군가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상대를 자세히, 오래 봐와야만 할 수 있는 특별한 사랑의 언어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는 이름에 담긴 힘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픽 노블 <제가 좀 별나긴 합니다만...>에서는 자신의 고통에 이름 붙이지 못해 고통받는 이가 등장한다. 사실 앓고 있는 병명이 존재하든 그렇지 않든 받는 고통의 정도는 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병명을 아는 것만으로도 덜 불안하고, 덜 슬퍼한다. 그 이름이 내 고통의 이유를 설명하고, 이를 받아들여 존중할 동기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름이 주어진 순간부터 자신의 병은 숨겨야 할 치부가 아닌 받아들일 한계가 된다. 이를 통해 이름은 어떤 존재에 관한 사고의 틀을 180도로 전환하는 힘이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P.83 티티우를 만난 다음부터는 어쩌면 스너프킨은 여행길에서 만나는 이름 없는 존재들에게 노래 대신 이름을 지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귀찮아하면서도 짐짓 마음 자락을 내어주면서.


책을 덮고 나니 문득 주변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 그리고 그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일. 어쩌면 그것이 한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가장 오래되고도 따뜻한 방법일지 모른다.

이름 하나에 담을 수 있는 무수한 가치를 곱씹다 보면 이를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이 진정으로 빼앗긴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이름을 불리지 못한다는 것은 곧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권리를 빼앗기는 일이자, 한 사람으로 살아갈 힘을 잃는 일이기도 하다. <송곳니>의 아이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시녀 이야기>의 여성들처럼 이름 대신 역할이나 전치사, 혹은 괴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존재들은 비단 영화와 소설 속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무명의 상태로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익숙함 속에서 잊고 살았던 이름의 가치를, 해당 도서를 통해 되돌아보게 됐다.


P.248 결국 살려고, 살아가려고 여러 번이나 죽은 남의 이름을 주워 달아 붙이고 살았지만, 원래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르고 싶은 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정처럼 난장을 치면서도 진짜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 

YES마니아 : 골드 h*********6 2026.06.1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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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권혁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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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받는 것이 이름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명을 붙여주고, 출생 후에는 오래 살기를, 건강하기를,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이름을 짓는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부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이 세상에 당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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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면 가장 먼저 받는 것이 이름이다. 어떤 부모는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태명을 붙여주고, 출생 후에는 오래 살기를, 건강하기를, 훌륭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한 글자 한 글자에 담아 이름을 짓는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단순한 호칭의 부여가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가 이 세상에 당도했음을 인정하는 최초의 행위이자, 그를 사랑의 언어로 호명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렇다면 이름을 받지 못한 존재의 삶은 어떤 것일까. 이름 없는 자는 과연 온전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히 철학적 사변이 아니다. 문학과 영화, 시와 음악이 오래도록 씨름해온 물음이며,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도 어느 순간 불현듯 솟아오르는 질문이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층위에 닿아 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 크리처는 자신을 창조한 빅터 프랑켄슈타인에게 이런 말을 던진다.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이 한 마디가 독자의 가슴을 찌르는 것은, 이름의 부재가 존재 자체에 대한 부정임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빅터는 크리처를 창조했으나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생명을 부여했으나 이름을 주지 않았고,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나 세상 안에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름은 단지 글자가 아니다. 이름은 "너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선언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 존재를 향해 "나는 네가 여기 있음을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크리처에게 이름이 없었다는 것은 그가 처음부터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인간의 감정을 느꼈지만, 이름 없이는 인간 세계의 바깥에 서 있는 존재였다. 이름이 없다는 것은 관계의 불가능성이기도 하다. 이름은 타인이 나를 향해 뻗어오는 언어적 손길이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비로소 세계와 연결된다. 크리처가 오두막집 가족들을 몰래 관찰하며 가장 먼저 배운 것도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었다. 아버지, 아들, 딸.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는 그 작은 행위 안에서 사랑과 연대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훔쳐보며 자신에게는 그 어떤 이름도 없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 갔을 것이다.

이름을 처음부터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가진 이름을 빼앗기거나 왜곡당하는 경우도 있다. 영화 송곳니 속 세 남매는 아버지가 만들어낸 폐쇄된 세계 안에서 자랐다.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부를 때 큰애, 작은애, 아들 정도로만 지칭한다. 이름이 없다는 것을 아이들 스스로도 오랫동안 인식하지 못한다. 이름의 부재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세계 안에서 유일하게 이름을 가진 사람은 외부에서 들어오는 크리스티나뿐이다. 이름은 경계를 표시한다. 이름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 사이의 경계, 세계 안에 속한 자와 세계 바깥에 놓인 자 사이의 경계. 큰딸이 비밀리에 외부 세계의 비디오를 보면서 깨닫는 것도 바로 그 경계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름을 가지고 있고, 그 이름으로 불리고, 그 이름으로 서로를 알아본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 단순한 발견이 큰딸의 내면에 균열을 만든다. 큰딸은 스스로 이름을 짓는다. 부르스. 이소룡의 영어 이름에서 따온 세 글자. 동생에게 "날 부르스라고 불러줘, 그러면 내가 돌아볼게"라고 말하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서러운 순간이다. 이름을 짓는다는 것, 불린다는 것, 그리고 그 소리에 반응해 돌아본다는 것. 그 작은 순환 안에서 한 존재가 처음으로 자기 자신이 된다. 부르스라는 이름이 생긴 순간부터 큰딸의 얼굴에 비로소 살아 있는 표정이 깃든다.

그러나 이름이란 늘 붙들어야 할 것만은 아니다. 드라마 「왕좌의 게임」 속 아리아 스타크는 자신의 이름과 정체성에 극도로 집착하는 소녀다. 원수들의 이름을 매일 밤 기도처럼 중얼거리고, 자신이 아리아 스타크임을 잊지 않기 위해 매 순간 자신을 다독인다. 그녀의 스승 자켄은 이름 없는 자들의 세계에서 온 암살자다. 그는 아리아에게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 역설이 흥미롭다. 이름 없는 자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아리아는 수련 과정에서 수없이 맞으면서 "넌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 자신의 이름과 역사와 원한을 말할 때마다 채찍이 날아온다. 결국 그녀는 다른 얼굴로,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나는 아리아 스타크야"라고 외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리아가 된다. 이름에 집착하지 않을 때 이름이 살아난다는 이 역설은 정체성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이름에 사로잡혀 살 때 우리는 종종 이름이 가리키는 본래의 자기를 잃는다. 아리아가 "나는 아리아 스타크다"고 외쳐야만 자신을 확인할 수 있었을 때, 역설적으로 그녀는 아리아가 아니었다. 이름은 불려야 할 것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내려놓아야 할 집착이기도 하다.

김소월의 시 '초혼'은 죽은 이의 혼을 불러들이는 전통 의식에서 출발한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시인은 이름을 부른다.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부른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만큼 간절히 부른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관계를 지속하려는 의지다. 죽음이 가른 경계 너머로 손을 뻗는 행위다. 이름을 부르는 한, 그 이름의 주인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한, 그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남아 있다. 소월은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쓴다. 돌이 되어도 부르겠다는 이 선언에는 슬픔만이 아니라 이름의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 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노래 「플라워스」는 또 다른 방향에서 이름의 문제를 건드린다. 더 이상 나를 불러주지 않는 이, 나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않은 이를 향해 그녀는 말한다. "꽃은 내가 나 자신에게 살 수 있어. 내 이름은 내가 혼자 모래에 쓸 수 있어. 나는 네가 해준 것보다 더 많이 더 깊이 나를 사랑할 수 있어." 타인의 호명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그것이 상실 이후를 살아가는 한 방식이다. 우리는 타인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존재를 인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를 줄도 알아야 한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순간에도 나는 여기 있다고, 나는 이 이름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름은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키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삶에는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혹은 이름 불리지 못한 채로 지나간 시간들이 있다. 이름을 받지 못해 세상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존재들, 스스로 이름을 지어야 했던 이들, 이름을 빼앗기고 번호로 불렸던 이들. 그 이름의 빈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크리처는 이름을 갖지 못한 채 세상에 버려졌지만, 그 이름 없는 존재가 던진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라는 절규는 200년이 넘는 시간을 가로질러 지금도 우리 귓전을 울린다. 이름 없는 자의 외침이 이름 있는 모든 자들의 가슴을 찌른다. 영화 <송곳니>의 부르스는 아마 그 집을 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불러줄 친구 하나 없는 낯선 세계를 걸어가고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을 기억해주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 이름을 지은 것은 그녀 자신이었다.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세계와의 계약이다. 나는 여기 있고, 너는 나를 알아보고, 나는 그 앎으로 살아간다. 이 계약이 깨질 때, 이름의 빈자리는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상처가 된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 자라나는 것도 있다. 이름을 스스로 짓고, 스스로 부르고, 스스로 살아가는 힘. 부르스가 쇠망치로 자신의 송곳니를 스스로 부수며 웃었던 것처럼, 그 피투성이 얼굴의 미소 속에는 어떤 자유가 있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그를 이 세계에 붙잡아둔다. 기억한다는 것, 호명한다는 것은 그래서 작은 윤리적 행위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을 가진 자들이 있는 한,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부르는 일이 곧 살아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p****r 2026.06.0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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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름의 빈자리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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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이름도 안 지어줬어.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 39p난 이름조차 적지 못하고 책을 내야 했어요.한 글자 한 글자 온 힘을 다해 내가 썼는데도 불구하고 -44p-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야기하듯,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단순히 호칭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는 행위로도 이해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름의 빈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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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 이름도 안 지어줬어.

당신은 나에게 이름조차 주지 않았어 - 39p


난 이름조차 적지 못하고 책을 내야 했어요.

한 글자 한 글자 온 힘을 다해 내가 썼는데도 불구하고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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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수 시인의 '꽃'이라는 시에서 이야기하듯,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단순히 호칭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는 행위로도 이해된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름의 빈자리에>에서 등장하는 수 많은 이름 없는 존재들은 어쩐지 더 신경쓰인다. 


김춘수 시인의 대표작 '꽃'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이 시에서 이야기하듯,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단순히 호칭을 붙이는 행위가 아니라,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관계를 맺는 행위이다. 내게는 나름 특이한 취향이 있다. 나 역시 새로운 친구들이 내 마음에 들어올 때면, 그들과 나만의 암호와 같은 별명들을 지어주곤 한다는 것이다. 본래의 이름과는 전혀 상관 없는 별명이어도, 그걸 부름으로써 '우리'의 관계가 형성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름의 빈자리에>에서 등장하는 이름 없는 존재들이 어쩐지 더 신경쓰인다. 책은 <프랑켄슈타인>, <시녀 이야기>, <비바리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윤희에게> 등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생각하는 '이름'과 그와 관련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는 특히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었다. 누군가로부터 창조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름조차 받지 못한 외로운 존재. 자신을 괴롭게 만들고, 심지어는 제거하려고 한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통곡부터 하는 그의 이야기가 다소 마음 아프게 들렸다. 더불어 오랫동안 이야기되는 작품을 만들고도 이름 없이 책을 펴낼 수밖에 없던 작가의 이야기까지 겹쳐지며 '이름'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름조차' 받지 못했던 크리처의 슬픈 운명과 200년 넘게 인구에 회자되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이름을 창조해 소설을 써놓고도 '이름 없이' 책을 펴낼 수밖에 없었던 18세 미레 셸리의 기막힌 운명이 그 겨울, 내 맘속에 들이닥쳤다 - 4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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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익숙해져버린 탓에 가끔은 그것의 존재를 잊기도 하는 '이름'. 존재의 명패라는 큰 가치에 비해 어쩌면 너무 가볍게 고려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의 빈자리에>는 이와 같이 '이름'이라는 공통적인 소재로 다양한 작품을 흥미롭게 풀어낸 책이니, 여러분도 한 번 읽어 봤으면 좋겠다.



i*****t 2026.06.12.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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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가치와 소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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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빈자리에 #권혁란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_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처음 제목과 부제를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공포인가? 괴물에 망자라니. 하지만 그 사이에 여자가 있었다. 이 세 단어 사이의 관련성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그 다음 중에 쓰인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이란 말에서 좀 슬퍼졌다. 결국, 괴물로 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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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빈자리에 #권혁란 #한겨레출판 #하니포터 #하니포터12기

_괴물, 여성, 망자,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


처음 제목과 부제를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내용은 공포인가? 괴물에 망자라니. 하지만 그 사이에 여자가 있었다. 이 세 단어 사이의 관련성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리고 그 다음 중에 쓰인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이란 말에서 좀 슬퍼졌다. 결국, 괴물로 불리거나, 망자가 되어서도 제 이름으로 불리지 못했다는 것이니까. 그 와중에 여자도. 여자라는 이유로 호명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자신의 이름을 잃어버린 삶이라고 한다면, 이런 삶을 무엇이라 정의내릴 수 있을까. 여자로서 끔찍한 지점이기도 했다.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하도록 만든 책이 <이름의 빈자리에>이다. 그러면서 제목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됐다. 이름의 자리가 비어있다는 것이니, 어디에서라도 이름을 가져다가 채워넣어야할텐데, 어느 이름을 가져다가 넣으면 좋을까. 그 빈자리 채워넣고 싶은 이름들이 많아지겠구나, 싶었다.


 생전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스스로 지은 순간이다. 그 이름으로 불린 첫 순간이다. 큰딸은 지치지 않는다. 저 소리는 나를 부르는 것이다. 나를 부르면 얼른 돌아서서 마주보면 된다.(...) 이름을 부르고 대답하는 걸 하염없이 반복하는 두 사람, 이름 없'던' 자매의 얼굴을 나는 거의 울면서 보았다.(29쪽)


자신의 존재적 의미를 비로소 인지하게 된 순간의 감격이 얼마나 소중하고. 누구나에게 당연하게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는 것, 무척 고통스런 결과를 낳게 되더라도 그럼에도 기꺼이 감수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일이라는 것, 그래서 생명과 맞바꿀 정도로 간절하다는 것. 이름이 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름은 그 사람의 존재로의 인정인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존엄하고 숭고한. 어떤 것보다도 상위에 존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름인 것이다.


작은 존재는 바로 티티우가 된다. 티티우는 몇 번이고 새로 지어 받은 이름 '티티우는'를 소리 내어 불러본다. 티티우, 티티우. 둘이서 함께, 티티우, 티티우. 밤 숲이 다 울릴 만큼, 펄쩍풀쩍 점프하면서 외친다. 굉장한 이름이야, 티티우. 덤블링 하면서도,티티우. 저다지도 기쁠까.(80-81쪽)


기쁠 것 같다. 그동안 맛보지 못했던 경험을 이름을 얻은 후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부르게 되는,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부르며 기뻐하는 저 장면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또한 저 장면의 앞뒤로 더 이상 티티우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만큼 이미 이름을 얻은 후이니, 그 이후에는 이름을 위한 여행이 아닌 이제 진짜 자기 자신을 위한 여행을 시작했을 것 같다. 


별 거 아닌 것같은 이름이 갖는 무게와 그 깊이, 필요성과 소중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롭고 중요하구나. 이름이 그 존재의 가치를 어떻게 빛내줄 수 있는지, 그런 빛남을 우린 얼마나 인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는 시 구절이 생각난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비로소 다가가 꽃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이름이 그 존재를 존재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이름을 어찌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이름을 다시 불러보고, 다른 이들의 이름을 소중히 불러보게 되고, 여러 작품속에서 이름을 어떻게 부르고 있는지를 살피게 될 것 같다. 이제 한동안 이름을 신경쓰며 지내게될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하였습니다.

n*****0 2026.06.1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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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되지 못한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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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빈칸에 적어 넣었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왔는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타인이 부여한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면서부터였다. 내가 직접 짓지도 않은 이름이 과연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님께서 처음 이름 안에 담긴 뜻을 설명해 주셨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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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현듯 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 적이 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빈칸에 적어 넣었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들어왔는데도 말이다. 이런 생각이 든 것은 타인이 부여한 이름으로 나를 소개하는 일이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면서부터였다. 내가 직접 짓지도 않은 이름이 과연 나를 설명할 수 있을까. 부모님께서 처음 이름 안에 담긴 뜻을 설명해 주셨던 순간을 떠올려본다. 보배처럼 귀하고 상서로운 기운을 지닌 사람. 분명 좋은 뜻이지만, 나를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말 같지는 않다. 나를 드러낼 수 있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름의 빈자리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의 의미를 탐구하는 책이다. 저자는 영화, 책 등 20편의 작품을 인용해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이름의 자리를 다시 바라보게 한다. 특히 이 책은 이름을 빼앗기거나 끝내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을 조명한다. 

가령 영화  <송곳니> 속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다. 아이들은 집 안에 감금된 채 바깥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되고, 아버지는 이들에게 사물의 이름마저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잘못된 정보로 가득한 언어 수업에서 ‘여행’은 바닥을 만들 때 쓰는 재료가 되고, ‘바다’는 나무 팔걸이가 달린 가죽 의자가 된다. 

그러나 이 조용한 권력은 외부인이 몰래 가져온 비디오테이프를 통해 서서히 금이 간다. 큰딸은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바깥세상의 언어와 풍경을 마주한다. 그리고 자신에게 직접 '부르스'라는 이름을 붙인다. 스스로 지은 그 이름을 큰딸과 동생은 마주 본 채 몇 번이고 되뇐다. 이 장면이 전율처럼 다가오는 이유는, ‘부르스’라는 이름이 아버지가 축조한 폭력과 억압의 세계를 벗어나겠다는 그만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바깥 세계의 파편을 어설프게 빌려온 이름이지만, 이를 통해 그는 집 밖으로 나가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한다. 소개할 이름이 없었던 그에게 '부르스'는 세상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줄 최초의 언어인 셈이다. 이 외에도 저자는 이름 없는 존재들을 찾아 호명한다.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프랑켄슈타인> 속 크리처, 자신의 이름을 금지당한 채 아기를 낳는 존재로만 여겨지는 <시녀이야기> 속 여자들. 이들의 이름은 빼앗기고, 지워지고 결국 빈자리만 남았다. 

소설과 영화 속 인물들의 이야기이지만, 이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를테면 <프랑켄슈타인>을 쓴 메리 셸리 역시 자신의 이름을 포기해야 했다. 자신이 창조한 이야기가 세상에 발표된 순간에도 그의 이름은 책의 표지 위에 놓이지 못했다. 책을 읽으며 이름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거운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안에는 한 사람이 살아온 세계와 그가 원하는 우주가 전부 담겨 있다. 그러므로 이름을 빼앗는다는 것은 그의 세계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어쩌면 가장 폭력적인 일이 아닐까. 


이 책이 영화 속 장면을 불러와 이름에 관한 사유를 펼쳐 보였듯,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며 떠올린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영화 <레이디 버드>의 주인공 크리스틴은 자신의 이름에 싫증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새 이름을 붙인다. 이 이름에는 부모와 고향에서 벗어나 동부 대학에서 화려하고 근사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이 담겨 있다. 그가 꿈꾸는 멋진 삶에 '크리스틴'이라는 지루한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에 그는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고 명명한다. 

하지만 영화는 결국 주인공이 ‘크리스틴’이라는 본명을 다시 받아들이는 성장의 과정을 그린다. 그는 부정하려 했던 것들이 실은 자신을 이루는 중요한 일부였음을 깨닫는다. 특별해 보이기 위해 덧씌웠던 거창한 포장지를 걷어내고, 그 속에 가려져 있던 온전한 자신을 발견한다.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받아들인 크리스틴처럼, 이따금 낯설게 느껴지는 내 이름도 언젠가 나의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살아온 시간과 앞으로 살아갈 삶이 이 석 자에 더해져, 비로소 나만의 의미를 찾게 될 것이다. 



YES마니아 : 골드 y*****2 2026.06.1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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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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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성적인 이름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신랄한 내용이나 냉소적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다.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라는 부제를 보며 반년쯤 전에 읽었던 [양양]이란 책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양양]은 가족 안에서 지워진 존재인 고모의 자취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로 가족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진 비석에 오직 고모의 이름만이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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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감성적인 이름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지 못했다. 어쩌면 조금 신랄한 내용이나 냉소적일지 모르겠단 생각을 했었다. '호명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해'라는 부제를 보며 반년쯤 전에 읽었던 [양양]이란 책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양양]은 가족 안에서 지워진 존재인 고모의 자취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에세이로 가족들의 이름이 모두 새겨진 비석에 오직 고모의 이름만이 없음을, 그리고 아무도 그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이름없는 여자'가 존재했음을 알리는 추적기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름의 빈자리에'를 앞에 두고 상실과 소외 같은 것들을 먼저 이어붙여 나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름의 빈자리에'에서 만난 이름들은 대체로 감성적이고 조금은 애틋한 존재들이다. 때로는 불행하기도 하지만 그를 돌아보는 시선에는 온기가 맺혀 있다. 대상을 감싸안는 연민에서 가끔은 멀어지기도 하고 결국은 함께 머물며 기대기도 했다. 남다른 이름으로, 그리고 종종 불리고 싶은 이름을 붙여서 살아온 저자가 모아놓은 이름들은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달라는 일치의 고백(94)이자, 차마 부치지 못한 편지의 첫 마디(84)이기도 하고, 영원히 떠나가는 이를 붙잡는 마지막 울림(132), 끝내 미결로 남아버릴 사랑의 이름(186), 오래된 필름 속에 박제된 젊음의 초상(234)이다.

" 서래와 동점. 서쪽에서 와서, 동쪽으로 점점. 불교의 전래 경로를 따서 지은 이름이라 하셨다. 190" 저자가 <헤어질 결심> 속의 서래보다 십여년은 더 먼저 서래라는 이름을 선점했음을 또렷하게 밝힐 때마다 얼마나 큰 애착을 가졌던 이름이었는지 느껴졌다. 사실 보는 입장에서야 누가 먼저이건 큰 상관은 없는데, 가끔 우리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확실히 인정받고 싶을 때가 있다는 점에선 공감이 됐다. 다만 살면서 어떤 언어로든 쉽게 쓰여지기 어렵고 비슷한 이름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이름을 가진 저자는 왜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려 했을까는 궁금해졌다. 이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기'는 다른 옷을 입는 것 같을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을까?

'다른 이름으로 살아보기'는 낯설수록 쉽고 가까울수록 어렵다. 이름을 바꾼 사람들의 오랜 주변인들은 버릇처럼 원래의 이름을 먼저 찾는다. '처음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가 다가와 하나의 의미가 되었'*던 순간이 전부인양, 때로는 악의적이리만큼 꿋꿋하게 본명을 부르곤 한다. 하지만 낯선 이에게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이름 바꾸기'가 유행처럼 번진 때도 있다. 택배나 배달음식을 받을 때 주문자에 곽두칠, 문근철, 조덕출 같은 이름을 붙이는 꿀팁이 여성들 사이에서 퍼져나간 것이다.* 여성임이 드러나 혹시 모를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기 쉬운 이름 대신 쎄보이는 남성적인 이름으로 불편한 상황을 피해보려는 시도였다. 이름이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정보와 공유하는 느낌이 있음이 새삼 와닿았다.

저자와 비슷한 세대이긴 하지만 조금은 차이가 있다고 느꼈던 부분이 '리버 피닉스'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였다. 90년대 학번 정도의 세대가 가진 리버 피닉스에 대한 탐닉, 예찬, 감탄, 갈망의 정서(234)를 어렴풋이 엿본 것 같았다. 리버 피닉스보다는 호아킨 피닉스의 영화가 더 익숙하고, 리버 피닉스의 동생이라는 수식이 아닌 호아킨 피닉스의 형으로 소개되는 쪽이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남매들이 리버, 레인, 섬머 일때 혼자만 호아킨이었다면 좀 섭섭하긴 했을 것 같다. "다들 보라, 노을인데 왜 나만 덕선이야!"* 하고 울부짖던 성덕선이 떠오른다.

책에서도 소개된 [프랑켄슈타인](32)을 작년 처음 읽어보았는데, 그에 대한 감상이 저자의 딸과 같았다. 우선씨일지 민진씨일지 모르겠지만, 그들과 같이 젊지 않아도 감상은 같을 수 있으니 피조물에게 느끼는 바가 갈리는 것은 온전히 나이탓은 아닐테다. 피조물의 마음이 악으로 채워진 원인이 아무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아서,라는 온통 원망과 불평, 증오로 가득찬 태도에서 지긋지긋함을 느꼈다. 날 사랑해주지 않으니 널 고통과 불행 속에 빠뜨리겠다는 공격적인 대응을 우린 뉴스, 사회면에서 너무나 자주 만나게 되지 않는가.

이름이 가진 의미와 기능들을 찬찬히 음미해보는 시간이었다. 평생을 흔한 이름으로 무감히 지내왔는데 가끔은 내가 불리고 싶은데로 이름 붙여보고 싶어졌다. 나에게 달라붙은, 이제는 나와 구분되지 않는 익숙한 이름을 벗어내면 좀 더 가볍게 살아볼 수도 있지 않을까? "넌 착하고, 똑똑하고, 중요한 사람이야.* 넌 무엇이든 될 수 있어." 응원해주는 것처럼 그 '이름의 빈자리에' 넌 어떤 이름으로든 불릴 수 있다고 이야기해주는 특별한 책이었다.


* 시 [꽃] - 김춘수
*'쎄 보이는 곽두팔 씨'가 필요한 세상 [아시아경제 20190404]
*드라마 <응답하라 1988> 2015
*영화 <헬프> 2011


>>> 이 서평은 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게시되었습니다


m******j 2026.06.1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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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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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권혁란씨는 자신에 대해 책표지에서 "불문곡직, 용띠"라고 소개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는 이 사자성어는 세상이 정한 복잡한 잣대나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방향과 자리를 찾아 거침없이 걷겠다는 주체적인 선언으로 들린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서 일하며 잡지와 책을 만들었고,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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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권혁란씨는 자신에 대해 책표지에서 "불문곡직, 용띠"라고 소개한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다는 이 사자성어는 세상이 정한 복잡한 잣대나 타인의 시선에 연연하지 않고 오직 나만의 방향과 자리를 찾아 거침없이 걷겠다는 주체적인 선언으로 들린다.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에서 일하며 잡지와 책을 만들었고, <엄마의 죽음은 처음이니까>, <엄마가 되기 위해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등의 책을 써내왔다. 


'인간에게 이름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서 출발하는 인문 에세이다. 저자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을 넘어 개성과 사회적 맥락, 그리고 특별한 관계성이 교차하는 정체성의 집약체라고 말한다. 소설, 영화, 시, 노래 등 장르를 넘나드는 20편의 작품을 통해 호명되지 못한 자들의 슬픔과 이름을 찾으려는 열망을 톺아보며 이름이 남긴 자국을 섬세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름이 특이해서 학창시절 선생님들에게 자주 이름을 불렸던 나로서는, 이름이 없는 1부 무명의 존재들이 그저 비극으로만 느껴졌다. 그렇게 이름을 빼앗기거나 부여받지 못한 존재들의 고통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2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짓고 호명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물이든,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 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p.54)


3부에서는 죽은 자의 이름을 부르는 남겨진 이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김소월의 시 <초혼>을 인용하며 “나는 선채로 이대로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죽어도 좋을 이름이, 어디 있기는 했던가.”(p.138) 자조한다. 그러면서 “산 자는 죽은 이의 이름을 ‘설움에 겹도록 부를’뿐이다. 부르다가 죽을 이름을, 어쩌면 부르다가, 부르다가 내가 살 이름을.”(p.139)이라며 흩어지고 사라질 것들을 붙잡아 이 책에 남긴다. 4부는 타인이 준 이름의 맥락을 이해하고자 하고 마지막 5부에서는 이름과 존재가 일치하는 '나'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 책과 함께하는 동안 김춘수 시인의 ‘꽃’이 맴돌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사랑이 존재에 마법을 거는 시, 정도라고 해석했던 나는 이름에 천착해온 글들이 처음에 그렇게 의미있게 다가오진 않았음을 고백한다. 무명의 슬픔과 고통, 호명하는 사랑, 죽음을 넘은 이름의 의미, 근원으로서의 이름, 그리고 그 이름으로 살아내는 것이라는 책의 구성을 따라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주체성, 정체성, 온전한 내 자신에 이르러 있다. ‘엄마’와 ‘아내’라는 타이틀에 빼앗겨 갈 곳을 잃은 ‘나’를 찾는 여정의 첫 걸음을 이 책과 함께 하기를 추천한다. 


#이름의빈자리에#하니포터#하니포터12기#한겨레출판사#권혁란


f****j 2026.06.1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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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잃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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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름이라는 기호 아래에는 타인과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이름보다 각자가 선택하고 만들어 온 삶의 방향을 따라 살아간다. 『이름의 빈자리』는 인간에게 있어 이름이 지닌 의미를 탐구하는 한편, 다양한 작품 속에서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이름을 잃고 살아가는 무명의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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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이름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른 삶을 살아간다. 이름이라는 기호 아래에는 타인과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어진 이름보다 각자가 선택하고 만들어 온 삶의 방향을 따라 살아간다. 『이름의 빈자리』는 인간에게 있어 이름이 지닌 의미를 탐구하는 한편, 다양한 작품 속에서 자의에 의해 혹은 타의에 의해 이름을 잃고 살아가는 무명의 존재들을 불러낸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삶의 흔적과 이름의 빈자리가 무엇을 말하는지 되묻는다.


이름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끝내 지워지지 않는 고유함과 삶의 흔적은 단지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한 것일까. 『이름의 빈자리』가 소환하는 수많은 인물들은 그렇지 않다고 답한다. 그들은 이름을 잃었음에도 기억하고 사랑하며 상처받고 욕망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이는 이름의 부재가 곧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이름이 비워진 자리는 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되묻게 만든다. 결국 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이름이라는 표식이 아니라 그가 살아온 시간과 기억, 그리고 삶의 흔적이다.


여기서 자연스레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개명을 한 나와 이전의 이름으로 살아가던 나는 과연 다른 사람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 이름 아래 축적된 기억과 경험, 그리고 삶의 궤적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이름이 타인으로부터 주어진 표식이었다면, 지금의 이름은 스스로 선택한 삶의 방향을 담아낸 표식에 가깝다. 이름이라는 외피는 달라졌을지라도 그 안에서 살아온 존재는 이어진다. 새로운 이름은 과거를 지우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더 온전히 설명하기 위한 언어다. 그런 의미에서 『이름의 빈자리』는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 결국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연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대한 해석이다. 이 작품은 여름날의 찬란한 첫사랑을 그린 영화로, "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그러면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부를게."라는 대사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처음 이 대사를 들었을 때는 사랑의 절정을 표현한 낭만적인 고백 정도로만 여겼다. 그러나 『이름의 빈자리』는 이를 이름과 존재의 관계라는 측면에서 새롭게 읽어낸다.


서로의 이름을 바꾸어 부른다는 것은 단순한 애정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한 존재를 자신의 내면 깊숙이 받아들이고, 동시에 자신의 존재 또한 상대에게 내어주는 행위다. 책에서 이를 "한 존재를 내 속으로 받아들이는 일, 나를 한 존재의 속으로 온전히 들이미는 일"이라고 표현한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이 장면은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를 담아내는 그릇임을 보여준다. 또한 이름을 공유한다는 것은 결국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가장 깊은 형태의 사랑일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름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이름 너머에 존재하는 인간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이름은 우리를 부르는 표식에 불과하지만 우리를 완성하는 것은 그 이름 아래 쌓인 기억과 관계, 그리고 삶의 흔적이다. 그래서 이름이 비워진 자리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존재하며,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끝내 지워지지 않는다.

n******1 2026.06.08.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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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란 예언을 살아내며 | 권혁란 <이름의 빈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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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에 대해서라면 참 할 말이 많다. 태어나자마자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고 평생 불려야 하는 것. 그렇기에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다. 내 이름은 ‘오금미’다. 성도 흔치 않은데 이름은 더 특이해서, 살면서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받아 적기 어렵고 발음하기도 까다롭다. 또박또박 발음해도 사람
"이름이란 예언을 살아내며 | 권혁란 <이름의 빈자리에>" 내용보기


이름에 대해서라면 참 할 말이 많다. 태어나자마자 당사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지고 평생 불려야 하는 것. 그렇기에 이름은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이정표다. 


내 이름은 ‘오금미’다. 성도 흔치 않은데 이름은 더 특이해서, 살면서 나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다. 받아 적기 어렵고 발음하기도 까다롭다. 또박또박 발음해도 사람들은 ‘근미’나 ‘금희’로 알아들었다. 


오랫동안 내 이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내 이름은 어느 나라 문자로 써도 마찬가지로 어렵고 발음하기도 어려웠다. 또박또박 한 글자씩 발음하지 않으면 받아 듣고 받아쓰는 모든 이들이 다르게 알아 들었다. (p. 184)


학창 시절의 내게 이름은 총체적 난국이자 짜증의 원천이었다. 국어 시간에 ‘오금이 저리다’는 표현이 나오면 선생님과 학우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고, 걸핏하면 호명되어 본문을 낭독해야 했다. 훗날 지하철 노선도에서 ‘오금역’과 ‘미금역’을 연달아 발견했을 때는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주목받는 걸 즐기는 성향이라면 축복이었겠지만, 나는 눈에 띄지 않길 바라는 내성적인 아이였다. 내 성정과 달리 이름은 늘 타인의 뇌리에 각인되었고, 그것은 늘 스트레스였다. 인생이 유독 안 풀리던 어느 날, 사주 카페에서 “이제는 쓰면 안 되는 불용 한자”라거나 “사주와 충돌하는 이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삶의 굴곡이 정말 이름 때문인 것만 같았다. 


한 존재의 삶은 거의 모두 이름과의 투쟁이자 불화였고, 그리움이자 서글픔이었다. (p. 8)


그러나 이름은 뒤고 숨고 싶을 때 핑계가 되어주었을 뿐,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 성인이 되어 개명할 기회가 있었지만 결국 이름을 지키기도 했다. 내 이름의 진짜 속뜻을 알게 되어서다. ‘금처럼 귀하고 높은 자리에 우뚝 서서, 그 자리에서 너 자체로 아름답게 빛나라’. 할아버지는 손녀의 삶에 커다란 포부를 심어주는 축복을 담아주셨고,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한 순간 나는 이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름의 빈자리에>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이들의 서사가 담겨 있다. 이름조차 없이 지워진 사람, 이름은 있으되 차마 불리지 못한 사람, 혹은 아무렇게나 막 지어진 이름을 가진 예술 작품 속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저자의 깊은 통찰로 재해석된다. 


이름은 그저 누군가를 지칭하는 단순한 언어가 아니었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음을 증명하는 발화의 도구이자 정체성이다. 또한, 이름의 뜻대로 앞으로를 살아가라는 예언적인 선언이었다. 나는 방황하는 인물들을 보며, 결국 타인에게 올바르게 호명당함으로써 존재 가치를 실현하고 싶어 하는 열망을 보았다. 저자가 말하는 ‘이름의 점성’이란 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는 거대한 지표인 셈이다. 


일일이 호명할 것이다. 이건 다시 쓰면, 나는 하나하나 그들의 이름을 불러보겠다는 다짐이다. 일삼아 조근 조근. 내킬 때마다 글씨로만. 왜냐하면 다시는 입 벌려 소리를 내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면서 그들의 이름을 부를 일은 없을 테니까. (p. 85)


이름을 사랑하고, 때로는 상처받고 증오하며, 결국에는 기억하고 추모하는 삶의 과정 속에서 내 이름에 얽힌 사연을 깊이 톺아본다. 그리고 소망한다. 내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지 않기를, 그리고 이름처럼 나의 욕망을 거스르지 않고 당당하게 위로 걸어가 아름답게 빛나기를.


요즘은 종종 검색창에 내 이름을 쳐본다. 화면에 나와 같은 성과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뜨는 것을 보면 묘한 안도감이 든다. 완전히 혼자는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과 내 특별함이 오롯이 나만의 외로운 무게가 아님을 다행스러워하며 슬며시 미소 짓는다.

r*******7 2026.06.0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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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의 빈자리에, 호명되기를 거부한, 불릴 수 없는, 나를 부르라는 요청에 깃드는 응답.
"이름의 빈자리에, 호명되기를 거부한, 불릴 수 없는, 나를 부르라는 요청에 깃드는 응답." 내용보기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이름은 의미를 담는다. 이름은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로 가득한 말이다. 이름은 대상 없이는 붙여지지 않는다. 불러질 대상이 없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이든, 부재로 떠나갔든, 무엇으로 빗대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그리고 호명하는 이 스스로에게 존재의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의 세계에 '
"이름의 빈자리에, 호명되기를 거부한, 불릴 수 없는, 나를 부르라는 요청에 깃드는 응답." 내용보기

*서평도서제공: 한겨레출판


 이름은 의미를 담는다. 이름은 인간이 무언가에 대해 떠올릴 수 있는 것 중 가장 의미로 가득한 말이다. 이름은 대상 없이는 붙여지지 않는다. 불러질 대상이 없는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존이든, 부재로 떠나갔든, 무엇으로 빗대든.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곧 상대에게, 그리고 호명하는 이 스스로에게 존재의 존재-함을 확인시키는 일이다. 그의 세계에 '이름'의 존재를 명확히 자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그렇다면 만일, 이름이 그 주인에게서 뜯겨나갔다면, 불릴 사람이 이름을 두고 떠나버렸다면, 갈 곳 잃은 부름만이 여기저기 정처없이 나돌아다닌다면, 존재하되 이름으로 불릴 일이 없다면, 눈 앞에 멀쩡히 있는데도 이름이 없으므로 부를 수도, 지칭할 수도 없다면. 이름의 빈자리에 무엇이 놓이는가. 이름과 존재의 틈 사이에는 무엇이 깃드는가. 또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이름이되 이름이 아닌 것, 그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오롯한 자기이기를 부정당하는 사람들에게 이름이란 무엇인가.


 p.40 〈프랑켄슈타인〉 그는 창조주라면 주어야 할 애정, 관심과 사랑부터 먹을 것과 보호에 이르기까지 아무것도 주지 않았다. (…)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해줘야 하는 첫 번째 일,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조차 지어주지 않았다. 크리처가 괴물이 될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은가.


 p.54 〈시녀이야기〉 세상 만물에 이름을 짓고 이름을 붙여주고 부르고 불러주는 행위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의미 부여이자 애정 표현이다. 이름을 지어 호명하고 지칭하면서 관계가 결속된다. 마음의 밀도를 보여줄 수 있는 고도의 정성이 깃든 의례이기도 하다.



 그들이 진짜 이름을 갖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이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그 빈 자리에는 무엇이 고이고, 흐르며, 스쳐지나갈까. 저자는 영화와 소설, 드라마를 오가며 창작물 속 이름 없는 존재의 형상을 불러낸다. 그 빈 자리, 이름을 뺏겼고 이름의 기회를 박탈당했기에 부재로 취급되는 존재들과 이름에서 벗어나고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이들에게서 내가 비춰본 것은 이름 대신 '무언가'로 붙박여버린 이들의 모습이었다. 그 이름은 그들의 것이 아니다.


 다시금 이름의 의미를 고민한다. 불리지 못할 이름을, 답할 이 없는 이름을 떠올리며 곱씹는 그 의미는 필경 한 존재를 세상에 자리하게 하는 힘이자 존재하도록 마련된 자리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제대로 불러주지 않는 이름, 이름으로 불릴 수 없는 이… 그것들은 모두 한 존재를 그의 세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것과 같지 않은가. 이 무슨 처참이란 말인가.


 p.168 〈그 여자는 화가 난다〉 그녀가 어렵사리 친부모를 이해할 수는 있겠으나 '춘복'이나 '마야 리'가 엄마를 아빠를 언니를 마침내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리운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 거라 생각한다. (…) 책장을 덮으며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한마디를 포옹처럼 보냈다. 춘복이를 버려요. 한국 이름을 기억하지 말아요. 그래야 당신이 살 수 있어요.


 p.247 〈허공에의 질주〉 아서도 '나의 인생'을 찾고 싶은 것이다. 자꾸만 변하고 바뀌는 이름과 정체성에서 지쳐버린 것이다. 결국 살려고, 살아가려고 여러 번이나 죽은 남의 이름을 주워 달아 붙이고 살았지만, 원래의 자기 이름을 잊지 않은 것이다. 부르고 싶은 것이다. 대성통곡을 하면서, 주정처럼 난장을 치면서도 진짜 이름으로 불리고 싶은 것이다.



 이는 곧 진짜 이름을 위해 분투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나의 진짜 이름이 아니라는 감각, 이름이 곧 족쇄가 되는 삶이 있다. 모멸을, 맞지 않음을 이름이라 여기기를 강요받는 이들이 있다. 같은 세상에서 제각기의 투쟁에 존재 자체를 걸고 맞서는 이들을 생각한다. 빼앗길 수 없는 이름, 호명-됨의 의의를 생각한다.


 온당한 이름-됨을 고민하는 지금, 몹시도 사랑해 마지않는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다. 선언이자 정의인 그 말을. 내가 여기, '이 자'로 있노라, 나를 이렇게 부르라. 당신의 세계에 이로써 거하겠다는 말, 무엇으로도 부서질 수 없는 '것'의 상징일지 모른다. 이 무겁고 찬란하며 뜨거운 의미를 누군가는이렇게 말했다. Call me Ismael. 세계는 여기서 시작된다.


 p.67 〈비바리움〉 마틴은 마틴을 죽이고 마틴이 되어 똑같은 삶을 살아 영생을 누리지만 젬마와 톰은 미로에 같혀 살았어도 서로의 이름을 불렀고 떠나는 길을 눈물로 배웅했다. 검은 봉투에 이름 없이 담겨졌어도 젬마와 톰이라는 이름은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았다.


 p.250 〈허공에의 질주〉 "내 이름은 대니, 피아노에 목숨 건 녀석이지." (...) 처음으로 제대로, 잘 버려진 것이다. 자신의 진짜 이름과 그 이름을 불러줄 사랑하는 사람과 진짜 피아노와 함께. 대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인생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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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7 2026.06.0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