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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가 멸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권력층의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로 눈물겨웠다. 하지만 한 번 형성된 내리막길을 되돌리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고려는 분명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원의 강력한 지배는 고려의 정체성마저 흔들어놓았다. 원나라의 문화는 오늘날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무차별적으로 도입되는 외국 문명 마냥 퍼져나갔다. 곳곳에서 원에 아부하는 이들이 등장했으며, 심지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원에 바치는 이들도 있었다. 이는 왕이라 하여도 다르지 않았다. 고려는 국가로서의 최소한의 주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원나라의 권력 투쟁의 결과에 따라 고려의 왕은 결정되었다. 언제까지 왕으로 재위할 수 있는가의 문제 역시 원나라 측에서 결정했다. 그것은 극도의 혼란이었다. 물론 굳이 찾으려면 긍정적인 면도 찾을 수는 있었다. 기존의 공고하던 신분질서가 문란해진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은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왜 누구는 다른 누구보다도 높은 지위를 차지해야만 하는지…
신돈은 이런 혼란의 시기를 살아간 인물이다. 어머니는 창녕에 있는 옥천사라는 절에 속한 노비였다. 소년은 동족을 노예 삼는 고려라는 나라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키워나갔다. 시체를 묻는 매골승으로서 그가 접한 죽음들 그 어디에도 신분의 제약은 없었다. 비천한 신분인 그가 받아야만 하는 사회의 냉대는 말 그대로 인간이 만들어낸 허물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불교 교리는 차별이 없는 사회를 구축할 수 있는 힘을 가르쳐 주었다. 지공의 설법을 통해 그는 노비라는 신분이 그에게 가져다 주는 고통으로부터 해탈코자 노력했다. 공민왕은 그의 개혁을 펼치기에 적절한 동반자였다.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고려 왕실이었지만, 여전히 고려라는 국가 체제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왕에게 기대는 것은 그의 비천한 신분을 가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왕의 스승으로서 그의 지위는 점차 공고해졌고, 어느덧 그는 공민왕의 개혁정치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다.
양인이었으나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이들을 해방시켰다. 전면적인 신분제의 개혁이 아니었기에 이를 미온적이라 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예제에 기반한 경제력을 중시하는 유학자들의 지지는 개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근본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기득권을 약화시키는 것을 신돈의 목적이라고 본다면 이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세상을 꾸리기 위해 공민왕을 이용했지만, 공민왕 역시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신돈을 이용했다. 조일신, 안우, 이방실, 김득배, 홍언박, 김용에 이르기까지… 홍건적과 왜구로부터 고려를 보호하는데 공을 세웠던 수많은 이들이 그러했듯, 신돈 역시 공민왕에게는 소모품이었다. 신돈이 개혁의 주체로서 자리잡으면 자리잡을수록 공민왕은 신돈의 권력을 견제했다. 대대적인 숙청이 행해졌고, 신돈에 대한 냉혹한 역사의 평만이 오늘날 남게 되었다.
물론 신돈을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수많은 부녀와 사통한 사실은 당대에도 그러했지만 오늘날에도 정당화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소유물로 남기지 않음으로써 불교의 ‘공’사상에 걸맞은 삶을 살다 갔으며, 그에 대한 역사의 평은 불교에 적대적인 유학자의 시각에서 쓰여졌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신돈을 전면에 내세웠지만, 신돈의 삶에 대한 것 못지 않게 고려 후기의 역사를 상세히 다루고 있다. 주체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을 상실한, 슬픈 국가 고려의 모습을 만났다. 위기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신돈이 개혁을 시도한 영웅이었는지 권력을 꿈꾸던 반란자였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가 꿈꾸던 사회가 현실화되었더라면 우리의 현재는 또 달라지지 않았을까? 상상은 언제나 즐겁다. 비록 역사는 상상을 허락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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