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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후 부터는 산행할 기회보다는 바다를 찾는 일이 많아졌지만, 5.18광주의 그 일과 여러 운동권의 불만으로 입사전에는 산행을 즐기는 편이었다. 그것은 내 주위에 바다가 없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 내가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해서 바다에 푹 빠져있는 것은 아니다. 직장이라는 게 그럴 만큼 여유 있는 삶을 허락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전에 내가 산행을 즐긴 이유는 산에 미친 등반가와 같은 것이 아니었고 그저 막연히 산길, 산자락, 산의 숨결, 풀과 나무, 온갖 새소리, 하늘과 구름 등, 그런 것이 좋았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특히 산에 있는 바위를 좋아했었다. 나는 산에 오르면 오래도록 바위를 바라보기도 하고, 바위 위에 앉아 있기도 하고, 그리고 바위를 만져보며 그 촉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바위를 사랑한다. 지금도 그때 바라보던 바위들이 내 마음에 그리움처럼 들어앉아 있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공연히 바위는 눈물이다, 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내가 바위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바위는 침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중후하고도 변함없는 침묵에 나는 압도당하곤 했다. 그런 침묵 속에서 몇 억겁의 세월의 바람소리를 나는 읽는다. 혹은 많은 뇌성벽력이 세월의 굽이굽이마다 그를 할퀴고 지나가도 바위, 그는 얼마나 미동도 하지 않는가! 혀뿐만 아니라 행동마저도 그는 침묵하는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침묵하여 사시사철 자기 자리를 지킨다. 언제 보아도 영락없이 그 자리다. 불평 한마디 없고 하품 한 번 하지도 않는다. 비바람 눈보라 속에서도 표정 하나 변함이 없다. 연인들이 자기를 깔고 앉아서 진하게 속삭여도 털끝만큼도 투기하지 않는다. 목석같이 잠잠하고 말이 없다. 성경속에서 나는 이러한 위대한 침묵을 발견한다. 위대한 침묵은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회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짊어진다. 그러나 나는 안다. 바위를 둘로 갈라보면 그 가슴속에는 온갖 은구슬, 금구슬과 같은 아름다운 감정들과, 어떤 철학도 닿을 수 없는 지존한 생각들과,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뜨겁고도 순한 사랑과, 때로는 참으로 정당한 피눈물의 항변과, 인간으로써는 상상이 불가한 진한 고통과 상처, 몸부림이 곧 폭발할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결코 경솔하게 폭발하지 않으며, 나타내지 않으며, 천년 침묵으로 그 사실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바위인들 어찌 분통 터지는 일이 없으랴마는, 안으로 안으로 혼자 삭여 빛나는 보석으로 빚어지며 도살당할 양같이 말이 없다. 바위는 산새도 알아볼 수 없는 눈빛으로 이야기하고, 투박한 무표정으로 심오한 삶의 방법을 제시해 준다. 함부로 울고 웃고 나불거리지 않는다. 고독과 고통과 기쁨 따위도 초월하여 단지 묵묵히 눈감고 영원만을 살고 있을 뿐이다. 바위만이 푸른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 바위 등을 타고 수선을 피우는 개미 같은 인생들이 어찌 그의 삶을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인간들은 바위 앞에서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각, 감정, 언어, 행동은 너무 흔하고 천하다. 비열하고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은 느끼는 게 죄요, 생각이 죄요, 언어가 죄요, 행동이 죄다. 일생 죄 아닌 느낌, 생각, 말, 행동을 한 자 누구인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했지 않았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싯귀(詩句)에도 거짓이 고기비늘처럼 반짝인다. 인간의 가장 깨끗한 사랑도 탐욕이며, 인간의 가장 고상한 희생도 이기(利己)이다. 아무리 위대한 장군도 위정자도 바위 앞에 서면 왜소하기 짝이 없다. 오랫동안 바위를 바라보노라면 언제나 아픔을 느끼게 되고 주저앉아 회개하게 된다. 바위 곁에 서면 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