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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 대한 3인 3색 시집 - <흑백다방 >, <위험한 독서>, <푸른고집>
흑백다방 - 김승강 시집 / 열림원 위험한 독서 - 박현수 시집 / 천년의 시작 푸른고집 - 이재무 시집 / 천년의 시작
언어의 변화가 곧 세상의 변화라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산을 오를때 경험할 수 있는 풍경의 변화를 생각하면 된다. 산을 오르면 사람들은 높이를 얻는다. 높이를 얻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이 달라보인다.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그대로 인데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이 단풍으로 물들면 우리는 사색에 빠진다. 가을은 몸 안밖의 사색을 불러 일으키는 계절이다. 그 가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은행나무 - 시인 김승강, 시집 <흑백다방>중에서...
창원소방서와 은마아마프를 양쪽으로 하고 경남도청 청사까지 이어지는 도로의 양쪽 은행나무 가로수는 가을에 잎을 떨어낼 때 내 명령이 있어야 잎을 떨어낸다. 늦은 가을 내가 길 안으로 들어서면 길 양쪽에 도열한 은행나무들은 조용히 내 움직임을 주시한다. 내가 제법 차가워진 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헛기침이라도 할라치면 겁 많은 놈들은 잘못도 없으면서 뜨끔 놀라 찔끔 잎을 몇 개 먼저 떨어내고 만다. 나는 제법 엄숙해져서 길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며 은행나무들의 열병을 받는다. 내가 지나가면 내가 지나온 내 뒤쪽의 나무들은 기다렸다는 듯 차례대로 일제히 포도 위로 잎을 떨어 낸다. 나는 모르는 척하고 길 끝까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가능한 한 천천히 걷는다. 길 끝에서 마침내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그새 세상은 완전히 바뀌어 있다. 그 많던 잎을 달고 있던 나무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알몸으로 서 있고 길 위에는 노란 은행잎 천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은행잎들을 청소부처럼 쓸어가기 시작하면 내 생의 가을은 비로소 또 한 장의 막을 내린다.
- 시를 읽는 독자마다 저마다의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의 느낌은 이렇다. 찬바람에 옷깃을 세우며 나를 옭아매는 것이 쉬운 나와 달리 차례로 잎을 떨구어 알몸이 되는 은행나무의 모습이 어쩐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은행나무가 보여주는 가을은 지나 온 상처 보듬어 가며 겨울을 맞이 하는 모습으로 보여 더 어른스러워 보인다.
타작
- 시인 박현수 , 시집 <위험한 독서> 중에서...
옛줄기는 버려지고 깨알들은 마당에 가득하다 사고전서를 털어놓은 듯한 이 어휘들의 집적, 가시덤불에서나 옥토에서나 어디에서나 싹틀 것이다. 싹트는 쉼표로 일어나 들판마다 새로운 문장들을 늘여 놓을 것이다. 밤새 읽어도 지루하지 않는, 풀빛 만연체의 입심에서 새 문법이 패기 시작할 것이다. 그대 돌아와 시냇물로 밑줄 긋고 묵상할 시간
- 가을의 수확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타작을 해본 경험으로 비추어 보면 또 한번의 씨뿌리는 계절이기도 하다. 타작할때 이리저리 흩어지는 씨앗은 줄기를 벗어나 또 한번의 땅을 만난다. 물론 겨울을 버텨야 하는 과제가 있긴 하지만 땅을 만났다는 건 씨에서 씨앗으로 탈바꿈 했음을 의미한다. 그런 마음을 시인을 글로 옮겨 글에서 새 문법을 만들고 새 글을 쓰기 위해 묵상이라는 씨앗을 안에 심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가을 - 시인 이재무 , 시집 <푸른고집 >중에서..
반짝이던 소음이 가라앉고 저녁의 들숨날숨 손에 잡힐 듯 환한 창가에 앉아 큰 귀가 큰 소처럼 서서 가을 속으로 걸아가고 있는 한 나무를 오래도록 바라다본다 저 나무는 참으로 바르게 시간의 주인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지난 계절 환희의 알몸으로 시들고 지친 내 오후의 생에 넓고 시원한 그늘 드리웠던 저 나무에게 그러나 나느 한바가지 물 한 삼태기의 거름 져 나른 적 없다. 나무라고 해서 어찌 인욕의 시간이 없었겠는가 바람이 불고 많은 비가 내리고 또 종아리 다녀가는 회초리처럼 가문 날의 폭염이 그의 생의 멱살 움켜쥘 때도 저 나무는 크게 표정 바꾸지 않고 제 생의 영토 고스란히 지켜오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저 붉은 잎은 울림이 큰 느낌표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슬픔이 지혜를 가져오듯 깨달은은 몸을 부려야 가까스로 인색하게 찾아오는 것. 푸르게 젖어가는 수백 수천의 푸르고 붉은 등 가지마다 내걸어 길 밝히는 내 오랜 정인 물끄러미 바라다 본다.
- 가을을 온 몸으로 맞이하는 나무의 변화는 마치 허물을 벗는 것처럼 보인다. 그 허물이 한 때는 그 나무를 빛내던 줄기였고 나무를 외부로 보호하던 보호막이였지만 이제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떠나 보내야 하는 허물이 되어 버렸다. 한자리에 서서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시인은 자신의 과거를 되돌려 본다. 그 시간을 함께 걸어온 오랜 정인이 있다는 건 손 잡고 느낄수 있는 또 하나의 나무이자 나의 줄기가 있다는 것이므로 나무보다는 조금은 외롭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3인 3색으로 살펴본 가을에 대한 시집에서 '가을'은 상처를 보듬고 나아가야 할 현재의 모습으로 이야기되는가 하면 또하나의 발아의 시점 혹은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찾아오는 가을의 의미는 지금의 나의 삶과 나의 감정에 따라 총천연색의 세상단풍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가오는 가을 시집으로 다시금 마음 시원한 산책을 해보는 건 어떨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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