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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시. 황동규 시인의 시집을 대하기 전에는 늘 설렌다. 그가 또 어떤 흥미로운 시 작업을 펼쳐 놓았을까하는 기대 때문이다. ‘풍장’의 연작도 그러하고, 불타와 예수의 대화로 이루어진 시 등이 그러하다. 황동규의 시적 발상에는 많은 사색의 흔적들이 묻어있다. 때론 극도로 서정적인 시들도, ‘사랑’앞에서 그것을 단순한 남녀간의 사랑만으로 치부해버리지는 않는 듯 하다. 또한 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황동규만의 언어가 흥미롭다. 내가 자주 쓰는 ‘홀로움’이란 단어 또한 황동규 시에서 빌린 것이다. 시작이 있을 뿐 끝이 따로 없는 것을 꿈이라 불렀던가? 작은 강물 언제 바다에 닿았는지 저녁 안개 걷히고 그냥 빈 뻘 물새들의 형체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리는, 끝이 따로 없는, 누군가 조용히 풍경 속으로 들어온다. 하늘에 별이 하나 돋는다. 별이 말하기 시작했다. - 홀로움(p.27)-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라 했던 그의 말을 기억한다. ‘홀로움’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 나와 있지 않은, 황동규만의 시의 언어이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홀로움’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다. 가만히 뱉어보면 그 의미 또한 쉽게 짐작되어지는 이 단어가 입에 붙는다. 왠지 애착이 간다.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지만, ‘혼자라는 것’을 문득 상기하게 될 때 느껴지는 우울하고 초라함은 마음을 가난하게 한다. 그러나 이제, 그 외로움 너머의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알듯하다. 형상을 넘어선 무상을 바라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한한 삶에 무한함이 깃든다. 까닭도 없는 그리움으로. 눈이 오려다 말고 무언가 기다리고 있다. 옅은 안개 속에 침엽수들이 침묵하고 있다. 저수지 돌며 연필 흔적처럼 흐릿해지는 길 입구에서 바위들이 길을 비켜주고 있다. 뵈지는 않지만 길 속에 그대 체온 남아 있다. 공기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무언가 날릴 준비를 하고 있다. 눈송이와 부딪쳐도 그대 상처입으리. - 연필화 (p.17) - 연필의 매력이란 그렇다. 조금은 흐릿하고 부드러운 것이 왠지 따스하고 정겹다. 보이지는 않지만 남아있을 것 같은 그대 체온처럼, 잡을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질감이 있다. 마치, 황동규 시인의 시처럼. 불을 끄고도 어둠 속에 얼마 동안 형광등 형체 희끄무레 남아 있듯이, 눈 그치고 길모퉁이 눈더미가 채 녹지 않고 허물어진 추억의 일부처럼 놓여 있듯이, 봄이 와도 잎 피지 않은 나뭇가지 중력마저 놓치지 않으려 쓸쓸한 소리 내듯이, 나도 죽고 나서 얼마 동안 숨죽이고 이 세상에 그냥 남아 있을 것 같다. 그대 불 꺼지고 연기 한번 뜬 후 너무 더디게 더디게 가는 봄. - 더딘 슬픔 (p.86)- ‘여운’이라는 것이 있다. 사라짐과 사라짐 이전의 것을 연결시키는 그 희미함이 앙팡지게 살아남아 감각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것에 수반되는 고통과 슬픔의 무게는, 이 감각이 얼마나 빨리 무뎌지느냐에 달렸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에 대한 애틋함의 깊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끓어오른 양은 냄비보다 천천히 달아오른 뚝배기의 열이 더 오래 가고, 한번에 타오르는 사랑보다 서서히 타오르는 사랑이 더 깊은 것처럼,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것은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더디지만 너무도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들. TS.엘리엇은 “시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라고 말했다. 모든 시가 그렇겠지만, 특히 황동규의 시는 내게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것이어서,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조용히 말 건내오는 시가 있어 행복하다. 정갈하고 담백하게 읽히는 시안에서, 삶과 시간 그 언저리의 것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렇게 황동규의 「꽃의 고요」는 이해되기 전에 전달된다. 삶과 죽음에 대하는 시인의 정서가 조금 더 녹녹해졌다. 꽃이 지면서 자신의 생을 완성하듯, 삶의 완성 또한 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는지 생각해본다. 꽃망울이 터지는 환희와 기쁨에 싸여, 우리는 정작 꽃 속의 고요함을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 고요한 생 앞에. 시여 터져라 생살 계속 돋는 이 삶의 맛을 이제 제대로 담고 가기가 너무 벅차다. 반쯤 따라가다 왜 여기 왔지, 잊어버린 뱃속까지 환하게 꽃핀 쥐똥나무 울타리. 서로 더듬다 한 식경 뒤 따로따로 허공을 더듬는 두 사람의 긴 긴 여름 저녁 어두운 가을바람 속에 눈물 흔적처럼 오래 지워지지 않는 적막한 새소리. 별 생각없이 집을 나설 때 기다렸다는 듯 날려와 귀싸대기 때리는 싸락눈을, 시여! - 시여 터져라 -
2007.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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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고요
최근까지 뇌에 관련된 책을 읽었다. 성격상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문장을 이해하든 하지 못하든 글자는 첫 글자부터 마지막 자까지 어떻게든 읽어보자는 전투적 태세로 임하는지라 그만 내 뇌에 과부하가 걸렸다. 아직 내공이 많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이번 주는 시집을 읽으며 나의 지친 뇌에 비타민을 급히 투여하기로 했다. 개인적 취향이겠지만 나는 황동규님의 시를 좋아한다.
뭐랄까,,, 감성 언어로 이성의 자각을 불러온다고 해야 하나? 그의 시를 읽으면 감상에 젖는 대신 항상 생각에 잠기는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내가 황동규 시인의 시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우리 학교에 첫 부임을 해 오셨던 선생님께 첫 사랑 이야기를 해달라고 쫄랐더니 난 이 시가 참 좋아 하시고는 갑자기 시를 낭송하셨다. 그것도 암송으로 말이다.
뭔가 재미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잔뜩 했던 우리가 선생님께 당했다고 해야 하나?
그때 선생님께서 들려준 시가 황동규님의 즐거운 편지였다.
시를 암송하고 나서 선생님이 뭔가를 말씀하셨던 것 같은데,,, 지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는 부분이 정말 멋지지 않으냐고 우리에게 반문하시던 선생님의 표정뿐이다.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가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답거나,,, 혹은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또는 그냥 무심히 걷다가도 그날 조금 부끄러운 듯,,, 우리를 보고 사소함으로 누군가가 나를 불러줄 때의 행복함을 아느냐고 물으시던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아니,,아니,,이제 선생님의 얼굴도 잊은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니 내가 떠올리려 애쓰는 것은 그날 그 사소함이 누군가에겐 그토록 소중한 것이 될 수도 있음을 내가 처음으로 깨달았던 순간일 지도 모른다.
사소함!! 나도 이제 그 사소함이 사실은 사소한 것이 아님을 아는 나이가 되었다. 사실은 어떤 위대한 순간보다 그 사소함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어한다.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이 소중해지고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부를 수 있음에 눈물이 날 만큼 행복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정작 오늘 이야기해야 할 시집은 제쳐두고 웬 추억놀이? ㅎㅎㅎ
그래,,,다시 시집으로 돌아와서,,,,, 시집 꽃의 고요 를 읽어보니 시가 좀 많이 무겁더라. 마음을 쉬고 싶어 가볍게 읽고 싶었는데 또 생각에 잠기게 한다.
시인이 뭔가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동규님의 시는 가볍지 않아 좋아하긴 하는데 이 시집은 읽으면서 자꾸 갸우뚱했다. 죽음,,그리고 인생,,삶,, 무엇보다 종교적인 색채도 너무 짙다. 그래서 조금은 이질감도 느껴지고,,,,
표현도 조금만 더 절제되어 있었으면 좋아겠다는 바람도 있었고,,, 뭐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이다. 요즘은 다들 뭔가 말하기 곤란할 때면 개인적 취향이라는 핑겟거리를 잘도 활용하던데 지금 딱 내가 이용해 버리네,,,
그래도 아쉬우니 꽃의 고요는 다시 읽어보자.
꽃 지는 소리가 왜 이리 고요하지? ;;;;;;;;;;;;;;;;;;;;;;;;;; 음,,후렴이 아닌데!
이번 시집에 나오는 시들은 대체로 상징이 너무 많기도 하지만 비약도 크기 때문에 우뇌보다는 좌뇌를 열심히 활용해야 한다.
마지막 구절 음,,,후렴이 아닌데!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뭔가 간질 간질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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