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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만을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으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하면서도 오랜 시간 상대에게 영향을 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는 어느 한 사람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말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르치스는 수도원에 남아 수도사의 길을 걷고자 하는 인물이다. 반면 골드문트는 감각적이고 충동적이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하다. 성향이 정반대인 두 사람은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상대에게서 발견하며 가까워진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수도원 생활이 그의 본성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골드문트가 잊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골드문트는 억눌러왔던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수도원을 떠나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헤세의 다른 작품인 『데미안』과 『싯다르타』가 떠올랐다. 『데미안』이 ‘나는 누구인가’를 찾아가는 과정이라면, 『싯다르타』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스스로 깨달아가는 과정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앞선 두 작품에서 던졌던 질문을 더욱 확장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하나의 정답을 찾기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두 인물을 통해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완성해가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골드문트의 여정은 『데미안』이나 『싯다르타』의 주인공들보다 훨씬 방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러 여인을 만나 사랑과 욕망을 경험하지만, 대부분의 관계는 오래 이어지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간다. 그러면서도 계속 누군가를 찾아 헤매는데, 그가 원했던 것은 단순한 욕망의 충족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잃어버린 어머니의 모습을 다른 여성들에게서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골드문트의 방랑은 단순히 자유롭게 떠도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길 위에서 겪은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죽음을 예술로 표현하면서 자신이 지나온 시간을 작품 속에 남긴다. 특히 조각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던 감정과 기억을 형태로 만들어낸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살아온 시간이 예술로 바뀌면서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예술은 그를 한곳에 붙잡아두지 못한다. 안정된 생활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다시 길을 나선다. 골드문트에게 중요한 것은 정착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을 경험하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가는 일이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는 사랑뿐 아니라 상실과 죽음도 함께 따라온다. 그러던 중 골드문트는 귀족의 연인과 관계를 맺은 일이 발각되면서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죽음을 앞둔 순간 그를 찾아온 사람은 나르치스였다.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가 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졌다는 점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다. 처음에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가 자신의 길을 찾도록 이끌어주는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나르치스가 이성과 정신, 질서의 세계를 대표한다면 골드문트는 감각과 욕망, 경험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골드문트 역시 나르치스에게 중요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통해 자신이 직접 겪지 못했던 사랑과 욕망, 고통과 죽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이끌던 관계가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가운데 어느 한쪽의 삶이 더 낫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나르치스에게 중요한 이성과 정신은 골드문트에게 부족한 것이었고, 골드문트가 지닌 감각과 경험은 나르치스가 직접 살아보지 못한 세계였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었지만, 오히려 그 차이 때문에 상대를 통해 자신에게 없는 부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도 떠올랐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세계의 부조리와 마주한다면, 골드문트는 삶 속에서 탄생과 사랑, 고통과 죽음을 겪으며 그것들을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인다. 두 작품의 분위기와 결론은 전혀 다르지만, 결국 인간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점에서 함께 생각해볼 수 있었다. 결국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 안정과 방랑은 서로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인간 안에서는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상대를 통해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발견했던 것처럼, 인간 역시 한 가지 모습만으로 이루어진 존재는 아닐 것이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처음의 질문, ‘어느 삶이 더 행복했을까?’에는 쉽게 답할 수 없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선택했느냐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어떻게 살아내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으로 변해가는가에 있는 것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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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MBTI는 무엇인가요 별자리는요? ....
재미로 한다지만 이런 질문들에는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어있습니다.
저는 이런 궁금증의 시작이 10대 때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우연히 접하게 된 데미안으로 알게 된 #헤르만헤세 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는데요. 그는 인간의 내면과 성장, 철학 등을 평생 다뤘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어도, 그의 책들을 다 찾아서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 중 #나르치스와골드문트 를 수십 년 지난 지금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어렴풋이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어렸을 때는 정신과 사유를 대표하고 뭔가 깔끔하고 깊이 있어보이는 나르치스에게 끌렸던 것 같아요. 왠지 이것이 더 맞아보였기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이번에 읽었을 때는,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골드문트에게 더 집중했습니다. 그의 삶이 우리네 그것과 닮아서 낯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몸과 마음으로 직접 겪은 경험들은 결국 예술로 귀결되는 것도 무척이나 공감이 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시간 속에서 그만큼 성숙된 제 자신을 느낄 수 있었던 독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감성, 감각과 사랑, 예술, 자연으로 해석되는 골드문트와 이성과 정신, 사유로 말해지는 나르치스가 정말 다른 존재일까요? 인간 안에는 이것들이 함께 존재하고 있을 겁니다. 가능성에 대한 문제인거죠... 바로 이 점이 헤르만 헤세 문학을 깊이 있게 만들어주는 철학적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가능성을 선택하는 지는 개개인의 몫이겠지만, 꼭 한 가지일 필요는 없을 겁니다. 혼재되어 있되 질서와 아름다움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고, 그렇게 인생이 성숙해 지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 골드문트의 마지막을 보며 여운 깊은 감동이 남는 것을 보니, 역시 고전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만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이제 자주 봐야겠습니다.
[기억에 남는 문장] _그러나 골드문트와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유치하고 더 인간적인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속세를 떠나 손을 씻고 깨끗한 생활을 하며 조화에 가득 찬 아름다운 사상의 정원을 설계하고 안전한 꽃밭 사이를 몸에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거니는 대신에 무자비한 격류와 혼미 속에 몸을 던져 죄를 저지르고 그 쓰디쓴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국 좀 더 용감하고 좀 더 위대한 삶은 아닐까.
헐어서 너덜너덜해진 신발을 신고 숲속이나 시골길을 헤매기도 하고, 햇볕을 쬐고 비를 맞고 굶주리며 궁핍을 견디고, 관능의 향락에 놀아나다 그 대가로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는 것은 좀 더 힘들고 용기가 필요하고 희생이 따르는 고귀한 삶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보여주었다._p3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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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문트의 출발에는 ‘자기 자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놓여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수많은 가치와 기대를 물려받는다. 타인이 정해준 길을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기도 하고, 오래 반복된 명령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자아를 찾아간다는 것은 새로운 무엇을 획득하는 일보다 이미 자신을 이루고 있는 것들 가운데 무엇이 진정 자신의 것인지 식별하는 과정일 것이다. 골드문트의 방랑은 이런 의미에서 장소의 이동보다 존재의 이동으로 읽힌다. 정해진 삶의 바깥으로 걸어나간 그는 세계와 직접 접촉하면서 자신이라는 인간의 윤곽을 만들어간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차이는 서로 다른 앎의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나르치스가 사유와 분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한다면 골드문트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세계를 받아들인다. 몸과 사랑, 욕망과 고통, 자연과 방랑은 그에게 하나의 지식이다. 사유가 경험을 해석할 언어를 준다면 경험은 사유가 추상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정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이 있고, 경험만으로 의미를 얻기 어려운 순간도 있다.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의 미숙한 형태로 간주하는 순간 인간이라는 존재의 절반은 쉽게 누락된다. 이미선은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나타나는 에로스」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자신에게 없는 것을 향한 끌림이라는 플라톤적 에로스와 연결한다. 서로의 차이는 결핍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때 헤세가 그리는 조화는 두 극단을 희석하여 안전한 가운데를 선택하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나르치스는 정신의 사람으로, 골드문트는 감각의 사람으로 자신의 성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제거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방식의 삶에도 고유한 진실이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공존이란 서로의 차이를 좁혀 같은 곳에 도착하는 것보다, 그 차이를 보존한 채 상대의 삶까지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이를 얻는 일에 있다. 골드문트가 사랑한 감각의 세계에는 아름다움과 소멸이 나란히 존재한다. 생을 깊이 경험할수록 그는 모든 아름다운 것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과 마주한다. 젊음은 늙고 육체는 쇠하며 사랑하는 존재는 사라진다. 아름다움은 지속되는 성질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라질 운명을 품고 있기에 지금 존재하는 것이 더욱 절실해지고, 소유할 수 없는 순간이기에 더욱 선명하게 감각된다. 생을 향한 골드문트의 열정과 죽음에 대한 감수성이 서로 맞닿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삶을 깊이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삶을 잃을 가능성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 된다. 그의 삶을 따라 반복되는 ‘어머니’의 이미지는 이 생과 죽음의 감각을 한층 깊게 만든다. 처음에는 잃어버린 한 사람의 기억이었던 어머니가 점차 여성과 자연, 관능과 탄생을 품는 원형적 존재로 확장되고, 그 안에는 죽음까지 들어온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힘과 그것을 다시 거두는 힘이 하나의 형상 안에 겹쳐지는 셈이다. 시작과 소멸이 하나의 순환 안에 놓일 때 어머니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찾아야 할 대상보다 인간이 태어나고 사랑하고 죽는 세계 전체의 형상이 된다. 골드문트가 평생 어머니를 향해 움직였다는 것은 자신의 근원을 찾아가는 동시에 유한한 존재로서의 운명을 알아가는 여정으로도 읽힌다. 이러한 무상성의 자각이 예술로 이어진다는 점은 작품에서 특히 아름답다. 예술의 충동에는 사라지는 것을 그대로 보내고 싶지 않은 인간의 욕망이 숨어 있다. 시간은 육체를 변화시키고 기억을 흐리게 하지만, 예술은 한때 존재했던 생에 형태를 부여한다. 그래서 골드문트에게 조각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수단보다 유한한 존재가 영원을 향해 시도하는 하나의 응답이 된다. 죽음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해도, 사랑했던 것의 형상을 세계에 새기는 일은 가능하다. 여기에서 헤세는 정신과 감각을 예술 안에서 다시 만나게 한다. 골드문트가 빚어내는 형상에는 그가 몸으로 통과한 세계와 정신이 추구하는 질서가 함께 들어 있다. 관능과 성스러움, 육체와 영혼, 순간과 영원은 예술 안에서 서로를 훼손하지 않고 한 형태를 이룬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생의 온기가 나오기 어렵고, 형식을 얻지 못한 경험은 시간과 함께 흩어진다. 예술은 이 둘 사이에서 경험을 기억으로, 기억을 형상으로 바꾸는 장소가 된다. 골드문트가 단순한 장인의 안정에 자신을 맡길 수 없었던 이유 역시 예술을 기술의 완성보다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우정은 서로의 부족한 절반을 채워 하나의 완성된 인간을 만드는 관계로만 읽기에는 부족하다. 타자는 나에게 없는 것을 대신 소유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내가 누구인지 더욱 정확하게 보게 하는 존재다. 자신과 다른 삶을 바라볼 때 자신의 선택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도 함께 드러난다. 젊은 날에는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의 본성을 먼저 알아보았다면, 시간이 흐른 뒤에는 골드문트가 살아낸 생이 나르치스에게 정신만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을 보여준다. 서로를 변화시키면서도 상대를 자기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깊어진다. 평생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온 나르치스에게 사랑은 사유만으로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고, 감각을 따라 살아온 골드문트에게 정신은 자신의 경험을 바라볼 또 하나의 시선이었다. 어느 삶도 홀로 인간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만남이 보여주는 것은 완벽한 합일보다 차이를 보존한 관계의 가능성이다. 상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를 나의 언어 안에 완전히 편입시키는 일이 아니라, 나의 언어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부분까지 그의 존재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오래된 작품임에도 지금의 삶과 맞닿는 까닭은 인간 내부의 양극성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역시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경험하고 싶은 마음, 자신을 지키려는 질서와 그 바깥으로 향하려는 충동, 영원을 갈망하는 정신과 사라질 순간을 사랑하는 육체를 함께 지닌 채 살아간다. 그중 하나를 선택해 다른 하나를 지워내는 것으로 인간은 온전해지지 않는다. 서로 다른 힘이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은 채 한 생 안에서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자신과 다른 타자의 삶을 통해 미처 살아보지 못한 영역까지 인정하는 것. 헤세가 두 영혼의 긴 순례를 통해 그려낸 성숙은 그런 넓이를 획득해가는 과정에 놓여 있다. ✏️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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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나에게 의미있는 책이다. 벌써 오래전 중학교때 전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 때 국어선생님이 선물이라며 건넨 책이 바로 이 책이다. 그 당시에는 '지와 사랑'이라는 제목이었다. 중학생이 읽기엔 어쩌면 많이 어려웠을 책이었기에 구체적인 내용은 생각나지 않았고,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인생을 통해 이성과 감성을 따라 사는 삶의 차이를 보여주는 책이라고만 기억했다. 나이가 들어 찬찬히 다시 읽어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르만 헤세가 전하는 철학적인 이야기에 좀 더 깊이있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그의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지금은 이해를 더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성적이며 냉철한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나르치스와 마음속에는 열망이 가득하지만 알지 못한채 수도자의 길을 걷고자 했던 골드문트는 우정이라는 사랑을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게 된다. 특히 냉철한 관찰력으로 골드문트의 내재된 욕망을 이끌어내는 나르치스의 자극으로 골드문트는 잠재된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수도자의 길을 가기엔 너무 감성적인 자신을 이끌어내고 결국 세상밖으로 나온다. 골드문트의 사랑과 이별과 방랑 끝에 다시 만난 나르치스. 둘은 서로의 인생을 바라보며 어느것이 옳고 그른지의 판단을 하지 않고 서로를 받아들인다. 독자로서의 우리는 어쩌면 섣부른 판단을 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절제된 삶을 살아야 했던 나르치스의 삶과, 내키는 대로 어찌보면 사랑을 쫓아 방탕한 인생을 살았던 골드문트의 삶 중에서 어느것이 더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헤르만 헤세는 '지'와 '사랑'을 조금 극단적인 모습의 두 사람을 통해 대비시켜 보여주고 있다. 지와 사랑이 균형을 이루며 살 수 있다면 가장 바람직한 삶이라고 해야 할까? 책을 읽다보면 내가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떤 모습을 좀 더 중심으로 삼아 쫓아 살아왔는가? 늘 나를 억누르는 외부적인 환경을 탓하며, 내면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못난 나를 탓하며 억제된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닌지, 좀 더 자유롭고 싶었지만 결국엔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던 내 삶을 안타까워만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단편적인 삶마저도 순간순간 행복했고, 함께 나눈 사람들과의 다양한 종류의 사랑은 소중했고, 감사하는 마음을 남기게 된다. 같은 책도 읽는 사람의 나이와 환경과 입장차이에 따라 다양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만드는 책이었다. 사색의 계절, 독서의 계절에 읽기에 매우 적절한 책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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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최고 걸작 소설! - 뉴욕 타임즈-
사실 이 짧은 서평 안에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의 가치를 담아 내기는 쉽지 않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야 그 가치를 더욱 여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상당히 분량이 있는 편이며 장황한 대화들로 이루어져 있기에 심취해서 읽다보면 푹 빠져드는 재미와 묘미도 했다. 스토리가 상당히 흥미롭고 재미있게 구성되어 있다. 기승전결이 뚜렷하게 느껴지는 구성이다. 초반에는 살짝 지루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등장하고 서로 만나게 되며 관계가 형성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두 남자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 표현하고 있는데, 처음엔 이 단어 표현들이 당혹스럽고 그 의미가 무엇인지 와닿지 않았다. 문맥상 깊은 우정의 남자 둘 사이의 악수나 다독거림 정도로 판단되는 부분에서 애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어 이 또한 이질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와 사랑'과 동일한 책이다. 즉, 사랑이라는 단어가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남녀간의 사랑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깊은 우정 이상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도 우리가 사랑이라 표현하는 것처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사이의 사랑은 서로 존경하고 존중하며 특별하게 깊은 우정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저는 당신을 모르겠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시여, 당신은 세상을 사악하게 만드시고 사악한 질서 속에 놔두고 계십니다. 저는 집마다 골목마다 시체가 깔린 것을 제 눈으로 봤습니다. 부자들이 자신들 집에 축대를 쌓거나 도망치는 것을, 가난뱅이들이 형제들을 묻어주지 못하고 그냥 팽개쳐두는 것을, 그들이 서로 의심을 품고 유대인들을 가축처럼 때려죽이는 것을 (중략) 우리를 몽땅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릴 작성이시나요? p289 골드문트가 상당히 매력적이며 미남이라는 점에서 처음엔 뭔가 미덥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변에 그런 인물이 있지도 않고 연예인 중에서도 상당히 잘생긴 축에 속하는 사람으로 설정되어 있기에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설정이어야 이야기가 재미있게 흘러갈 수 있기에 어쩔 수 없겠다는 빠른 합리화가 이루어졌다. 주인공이 주인공 다워야 이야기가 재미있을거다. 어디에서나 사랑을 받고 여인들이 홀라당 넘어가기에 골드문트의 방랑기가 참 재미있게 보인다. 나르치스는 질서를 지키고 금욕과 이성이 중심인 수도자의 삶을 살고 있다. 골드문트는 이와는 대조되는 삶을 살았다. 감정과 본능에 충실하며 사랑하고 예술가의 삶을 산다. 이 두 사람의 대화 안에서 상당히 다양한 의견들이 오고간다. 정답이 있다기보다 그저 다른 각자의 삶이라 생각한다. 대화를 통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고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느낀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중심에는 골드문트의 어머니가 있다. 아름답고 자유로운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고 방탕한 삶을 살았기에 평이 좋지 않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부정적 평가를 했고 골드문트는 이에 정신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골드문트의 삶은 어머니의 삶과 많이 닮아았고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이러한 결핍은 다양한 여성들을 만나고 그 결핍을 채우는데 혈안이 된 것처럼 보인다. 여인들을 통해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했던 골드문트가 아니었을까.
골드문트는 매우 매력적이고 잘생긴 청년이다. 매력적인 곱슬머리에 목소리도 좋아서 만나는 여인들마다 그에게 빠져든다. 유부녀든 처녀이든 두 자매 모두가 그를 사랑하고 흠모한다. 골드문트는 가진 것 없고 집도 없는 뜨네기 여행가이자 떠돌이 학생이건만 이 잘생긴 청년을 여인들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배고프면 빵과 우유를 기꺼이 내어주고 몸도 마음도 내어준다. 수도원에서의 생활에서 도망나와 떠돌이 인생이 시작되었다. 노숙을 하거나 헛간에서 잠을 청하기도 한다. 농부를 만나거나 안락한 성에서 머물기도 했다. 눈이 내리는 겨울 성에서 쫓겨나 떠돌이 동료인 빅토르를 만나 위험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골드문트는 점차 성장해 나간다. 스승 니클라우스를 만나 예술가의 기질을 발견하고 원하는 작품을 완성시켰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조각 작품에 담아내었다. 나르치스의 모습을 담아 작품에 요한이란 불렀다. 재능을 인정 받아 자신과 함께 하자며 스승은 권유했으나 골드문트는 다시 떠나기로 방랑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다시 방랑의 시간 속에 흑사병으로 죽은 이들을 목도한다. 수많은 이들이 흑사병으로 인해 쓰러졌고 고통 속에 죽어감을 보았다. 흑사병의 잔해들 사이에서 만난 레네와 집을 만들고 함께 살아간다. 그러다 레네에게 병과 죽음이 찾아왔고, 골드문트는 다시 떠난다. 골드문트는 귀족의 여인 아그네스를 만나 위험한 사랑에 빠진다. 그간 농익은 골드문트의 유혹으로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진다. 밤중에 궁성에 잠입해 백작의 애인을 만나다 백작에게 도둑으로 몰리며 체포되었고 교수형의 위기에 처한다. 그렇게 생을 마감하는가 했으나 뜻밖의 인물과 재회한다. 바로 나르치스였다. 나르치스의 권유로 그렇게 골드문트는 다시 수도원으로 돌아간다. 물론 수도자의 삶이 아닌 손님으로 말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리아상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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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고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함 헤르만 헤세의 작품 중 다른 책들에 종종 언급되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대해 읽고 싶던 참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표지의 두 그림이 어떤 의미인지는 책을 읽어가며 알게 되었다. 조각같이 경직된 건물, 자연과 어울러진 마을. 바로 이 책의 두 주인공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두 주인공의 MBTI 로 추정되는 INTJ 와 ISFP 의 차이를 생각하며 읽으니 더욱 흥미로웠다. 헤세의 책 중에서도 상당히 긴 편이라 단숨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그리고 책의 많은 부분을 골드문트의 바람둥이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것도 흥미를 다소 떨어트린다. 그러나 두 주인공이 만나 서로에 대해 이해하며 한 단계 더 성숙해 지는 과정을 보며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게 된다.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과와 성직자라는 두 주인공의 삶과 그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적당한 선이 아니라 궁극의 경지에 올라감으로써 가질 수 있는 고뇌, 그리고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는 친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성숙의 발판으로 삼는 것. 상당히 상징적인 책같다. 헤세의 작품은 역시 남다르다. 책의 마지막에 있는 헤세의 연표를 보며 이 책의 내용이 어떻게 해서 나왔는지, 그 자신이 얼마나 삶의 가치에 대해 고뇌를 하였는지를 느낄수 있었다. 자연스러운 번역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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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이버 책과 콩나무 카페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싯다르타>와 같이 말하면 입 아픈 고전 명작의 작가가, 자신이 '가장 원숙해진 시절의 작품'이라고 표현한 소설이라면 관심이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사실 헤르만 헤세의 소설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는 1인이지만 한번 읽어 보게 되었다. 소설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주축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된다. 나르치스는 나르시소스에서 유래한 이름이지만, 정신적인 측면 즉 이성을 표현하는 인물로 나온다. 골드문트는 크리소스토무스라는 가톨릭 사제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는 금욕주의자였으나 골드문트라는 캐릭터 역시 마음속에서 그와 같은 엄한 목소리를 듣는다. 처음부터 약간 골드문트는 나름대로 엄격한 면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 두 인물은 헤세의 또 다른 분신들이라고도 할 수 있다. 두 사람은 수도원에서 만나는데 나르치스는 수도원의 금욕적인 수사이지만, 골드문트는 수도원을 떠나 여러 여인들과 만나 사랑을 나눈다. 완전히 달라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있는 것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존경하기도 한다. 서로의 삶을 윤택하게 하기도 하고 빈약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개인적으로는 그런 모습들, 이성과 감성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면서 한 인간 안에서 이런 이성과 감성이 어떻게 균형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쪽으로도 저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아야 하는데, 그 중심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 하는. 솔직히 헤르만 헤세의 소설은, 나에게는 한 번 읽고 단번에 이해가 잘되는 그런 류는 아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읽었지만, 다음에 다시 또 한 번 혹은 몇 번 더 여러 번 곱씹으며 읽어 보아야 할 것 같다. 😅 #헤르만헤세 #송영택 #문예출판사 #책과콩나무 #책과콩나무서평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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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이성과 감성, 이 두 가지가 혼재해있다. 완전히 감성적인 사람도, 이성적인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이 어딘가를 오갈 뿐이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흔들리곤 한다. 헤르만 헤세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작품을 통해 인간이 가진 두 가지 속성인 이성과 감성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게 한다.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질서를 지키고자 하는 나르치스와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자신의 감정을 따르는 골드문트의 대비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바는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효율, 이익, 가성비... 단어에 우대 등급이 있다면 현재의 세상에서 지극히도 대우받고 있는 단어들이다. 자신의 뜨거운 열정만을 따르는 모험과도 같은 일, 방황은 많은 사람들에게 후회할 만한 일, 치기 어린 행동으로 여겨진다. 이 책에서도 이성적인 나르치스와 대비되는 골드문트는 앞서 말한 효율, 이익, 가성비와는 영 먼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 엄격한 질서와 통제가 요구되는 수도원을 뛰쳐나와 수많은 사람과 사랑을 하고, 방랑을 하고, 예술적 체험을 하게 된다. 그런 골드문트를 보며 저렇게는 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들까. 책을 읽다 보면 그렇지 않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틀에 갇히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순수하게 따르는 인생의 항로는 너무나도 가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성을 추구하는 삶, 나르치스의 인생과도 삶이 나쁜 것도 아니다. 스스로에 대한 엄격한 규율과 통제 아래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확고한 가치관을 갖게 하고 삶의 위기가 오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한다. 그럼에도 골드문트에 더 깊은 관심이 가는 것은 우리들 대부분이 골드문트와 대비되는 이성적인 삶을 추구하는 쪽에 가깝고, 또 그러한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정답은 없다. 헤르만 헤세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의 이성과 감성이 조화를 이뤄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가 최근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싯다르타>를 감명 깊게 본 독자들이라면 이 책 또한 마음에 들어 하겠구나 라는 것이었다. 인물의 경험, 체험을 통해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끔 하는 헤르만 헤세의 의도가 이 책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도 분명히 담겨있다. 단편적인 답을 내리기보다는 입체적인 인물의 서사를 통해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끔 한다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라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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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개인적인 리뷰입니다. 얼마 전에 헤세의 작품 중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아》, 《싯다르타》를 한 권에 묶어 출간한 《스스로 깨어라》라는 책을 읽고 헤세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났다. 그래서 찾아본 책이 이번에 문예출판사에서 나온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이다. 이 책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은 내용이 없었다. 분명히 읽었던 기억은 있는데 도대체 어떤 내용이었는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이렇게 기억이 나지 않는지, 궁금증이 커져갔다. 수도원에서 만난 두 명의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예전에 읽었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그때도 이 두 사람이 대변하는 삶의 방식, 성격, 특성을 보면서 나는 어떤 쪽에 가까운지 꽤 진지하게 고민했는데 이번에도 역시 동일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물론 요즘에는 MBTI로 자신의 성격, 특성을 확인하는 간단한 방법도 있지만 결국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파악해야 정확한 자기 평가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런 점에서 문득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고 할 때, 이는 지, 정, 의를 모두 포함한다는 기독교적 관점이 떠올랐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대변하는 이성과 감정, 어느 한 쪽으로만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 둘 모두, 거기에 의지까지 더해진다는 이 진리가 결국 이 책에서도 동일하게 다가왔다. 우리의 내면에는 이성적인 면만, 혹은 감성적인 면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지 않나? 모든 일에 냉철한 사람도 자기 자식 앞에서는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고, 언제나 감정적인 판단을 내리던 사람도 삶의 엄청난 굴곡 앞에서는 모든 이성을 총동원해서 이를 넘어서려고 한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면 안 된다. 그저 우리와 조금 다르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책을 덮으면서 다시 한 번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이전과는 달리 이성과 감정이 조화를 이루고, 몸과 마음이 하나 되어 세상에서 조화로운 삶을 살고 있을까? 아니면 여전히 나의 한 면만을 고집하며 다른 이에게도 이를 강요하는 삶을 살고 있을까? 혹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방화하고 있는 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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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자유로운 느낌으로 써 내려간 내용입니다 > 학창시절 고전에 빠졌던 때 < 지와 사랑 > 이라는 제목으로 만났었던 헤르만 헤세의 소설. 사실 그 당시에는 꽤나 어려웠던 기억에, 지금 다시 읽는 시점에서는 처음 읽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얼마나 기억에서 지워졌으면 후에 <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을 때, 동일한 책이라는 사실조차 몰랐을까... 그렇게 처음인 듯 아닌 듯 성인이 되어 다시 읽어본 느낌은.. 여전히 조금은 어렵지만 다 읽고나면 여운이 남고, 두 주인공 특히 골드문트의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이성과 지성을 겸비한 냉철한 나르치스와 감성적이고 뜨거운 열정을 가슴에 품은 어린 골드문트. 수도원에서 이 둘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서로간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그들의 관계는 생각했던 것과 같은 동성애적인 사랑으로 확대되지는 않는다. 비록 나이차는 얼마 되지 않지만 나르치스는 이미 성숙한 인간으로 비춰진다. 그에 비해 골드문트는 풋내나고 여리고 감정에 쉽게 휩싸이는 인물이다. 그렇기에 세속에 빠져 여러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도 결국 방황의 길을 택하게 되는데, 처음 수도원에 들어와서 나르치스를 만났을 때의 그 순수하고 여렸던 골드문트가 성에 눈뜨고 본능에 집착하고, 떄론 광분의 모습도 보이고 순간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하다. 골드문트 곁에 계속 나르치스가 있었다면 과연 골드문트의 인생은 어땠을까도 생각해본다. 두 인물 가운데, 나르치스쪽에 더 끌리는 것은 나만은 아닐 듯 하다. 초반에는 너무 차갑게 느껴졌었는데 책장을 덮을 즈음엔 굉장히 매력적인 인물로 성큼 다가온다. 골드문트의 인생에 비해 나르치스의 인생은 거의 다뤄지질 않아 그 점이 아쉽기도 하다. 이 책을 과연 10대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10대 때 읽고 어려워서 크게 기억에 남지않는 혹은 포기한 고전을, 성인이 되어 다시 읽으면 새로운 느낌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그 중 하나이다. 옛날 제목도 좋고, 지금의 제목은 주인공이 직접적으로 느껴져서 좋다. 훗날 좀 더 나이가 들어 다시 한번 읽어보고 싶은 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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