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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소용돌이, 송시열과 대적한 윤선도와 윤증
"당쟁의 소용돌이, 송시열과 대적한 윤선도와 윤증" 내용보기
고등학교 국어시간 때 배우길 조선시대 문학은장가(가사)로는 송강 정철이고, 단가(시조)하면 고산윤선도를 꼽는다고 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윤선도의 '어부사시사'나 '오우가' 그리고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작품은 열심히 외워서 시험을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정철과 윤선도를 시인으로  이름을 새기고 있었는데,역사책을 읽다보니  이 두사람 모두 단순히 시인으로서만이
"당쟁의 소용돌이, 송시열과 대적한 윤선도와 윤증" 내용보기

고등학교 국어시간 때 배우길 조선시대 문학은
장가(가사)로는 송강 정철이고, 단가(시조)하면 고산
윤선도를 꼽는다고 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나 '오우가' 그리고 정철의
'사미인곡' 같은 작품은 열심히 외워서 시험을
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정철과 윤선도를 시인으로  이름을 새기고
있었는데,역사책을 읽다보니  이 두사람 모두 단순히 
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정치사에서도 굵직한 족적을 
남겼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과정에서 정치인 정철에 대해서는 크게 실망하게 됐지만
'조선의 정쟁4- 예학논쟁,노론과 소론' 편을 통해 정치인
윤선도에 대해서 새롭게 조명하게 되는 기회를 갖게 됐다.

현종 대 예송 논쟁과 관련해서 논쟁의 중심에 선 인물은 송시열이었다.
당대 예학의 대가였던  송시열은 효종이 승하한 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나하는,
복제논쟁에서 1년의 기년복을 입어야 주장하고 나섰다.
효종이 종통을 이었지만 아들로는 차자이기 때문에 그래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남인이었던 윤휴와 허목이 나서서 효종이 승통을 이었기에
장자로 대우해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맞서면서
조정의 공론은 1년설과 3년설로 양분됐던 것이다.

당시 송시열은 산당(山黨)의 거두였고, 서인의 거두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어서 송시열의 의견으로 대세가 기울어져갔다.
그런데도 송시열의 논리를 과감하게  반박하며  상소를 올린 인물이
바로 윤선도 였다.
윤선도는 송시열의 주장은 왕조의 종통과 적통을 혼란케 해서
사직을 위태롭게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고, 결국 이 상소로 말미암아
일흔도 훨씬 넘은 고령에  귀양을 떠나게 됐던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에는 광양으로 이배됐다 다시 2년 뒤인 현종 8년 여든한살이 
돼서야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런 뒤에는 보길도에서  은거하다
여든 다섯의 나이로 파란 많은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었다.

논쟁의 대세가 송시열 쪽으로 기울어가는 와중에서도 윤선도는
자신의 유불리를 따지지 않고,  임금께 진언했던 것이다.
'자신의 상소가 송시열을 내쫓지는 못하더라도 경계하는
뜻은 충분히 됐을 것'이라면서 상소를 올린 것이었다.

송시열과 대적했던 또 다른 인물로 윤증이 있는데,
윤증은 송시열과 벌인 '회니시비'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는 한 단초를 제공한 사건이었다.
'회니시비'는 윤증이 부친 윤선거의 묘갈명을 송시열에게
부탁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윤선거의 과거 행적을
못마땅하게 여긴 윤선도는 마지 못해 묘갈병을 썼다.
그러자 윤증이 윤선도에게다시 고쳐줄 것을 부탁했고,
송시열이 이를 거절하면서 사제지간이었던 두 사람 사이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 일로를 걸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인들은 자신들이 분열하는 것을 막고자,
송시열과, 윤증을 조정에 기용하는 화합책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그리고 송시열과 윤증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고, 이일로 더 이상 서인은
 존재하지 않게 됐다.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게 된
것이다.

이후 숙종이 윤증에게 대사성, 이조판서, 찬성 벼슬이 내리지만
윤증은 여전히 관직에 오르지 않았고, 우의정을 제수해도
출사하지 않았다. 고향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닦았고 후학을
길러냈던 것이다.
그렇게 86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며 초야에 묻힌 것이었다.

현종과 숙종조 시기는 논쟁과 환국의 시기였다.
현종조의 두차례에 걸친 예송논쟁과 공의(公義)사의(私義)
논쟁이나 숙종조의 남인과 서인, 서인과 남인, 다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과정에서 권력을 좇는 사대부들의 행태를
씁쓸한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소신을 버리지 않고 벼슬에 연연하지 않는 올곧은 선비
정신과도 대면하게 된다.

윤선도와 윤증에 대한 평가에 대해선 물론 비판이나 이견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윤선도와 윤증이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권력과 멀리 떨어져 말년을 평화롭게 맞이했던 것에서
송시열의 삶과  대조가 됐다. 송시열은 세자 책봉 문제로
여든 넘은 고령에 사약을 받고  삶을 마쳤던 것이다.





 


YES마니아 : 로얄 e****0 2011.10.20. 신고 공감 7 댓글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