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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본 뒤에, 사람들이 리뷰를 어떻게 썼는지 봤다. 인터넷 서점이라는 서점은 다 검색해봤다. 그 결과 안타까운 마음만 생긴다. 리뷰만 본 게 아니라 판매치도 봤는데, 속상해지기도 한다. 왜 이렇게 좋은 소설이 낮은 판매 지수와 적은 리뷰를 갖고 있는 것일까?
‘그녀의 나무 핑궈리’는 한수영의 소설집이다. 한수영이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 나도 그녀를 아는 건 아니다. 만나 본 적도 없다. 다만 한수영이 참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소설을 쓴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공허의 1/4’를 읽어봤다면 “그거 당연한 소리 아니야?”라고 말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는 그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녀의 나무 핑궈리’도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소설이다. 어설프게 위로하는 그런 건 아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은근슬쩍, 차가운 방 안에서 꽁꽁 얼고 있을 때 방금 다녀간 누군가가 남긴 온기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희미하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그것을 전해주고 있다.
첫 번째 소설 ‘나비’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우리 엄마 머릿속에는 나비가 산다.”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외할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엄마와 사는 아이의 눈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가난하다. 엄마는 밤늦게까지 힘든 일을 하고 높은 꼭대기에 있는 집까지 걸어 올라와야 한다. 그 아득한 풍경의 끝에서 아이가 있다. 아이는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가 어서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추운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마를 응원한다. 엄마는 피곤하기에 아이를 보듬어줄 겨를이 없다. 쉴 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출근준비를 엄마를 바라보는 아이, 반복되는 일상. 어찌 보면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지만 엄마의 머릿속에 나비가 살고 있다고 믿는 아이의 마음과 아주 은근히 표현되는 엄마의 애정,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 그 모든 것을 감정적이지 않게, 덤덤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표현한 한수영의 글 솜씨가 한데 어우러져 소설은 따뜻해진다. 상상만 해도 포근해지는 그런 소설이다. ‘그녀의 나무 핑궈리’도 그런데... 사람들은 왜 몰라주는 걸까?
내심 기쁘기도 한다. 이런 작가를 나만 알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그래도, 속상하기는 하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아니더라도, 조금만이라도, 글빨만큼 대우 받으면 좋으련만.
몇 개의 소설이 다소 뻔한 이야기를 보이는 허점 때문에 ‘공허의 1/4’보다 마음을 여는 것이 약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분명하게 말하면 ‘그녀의 나무 핑궈리’는 읽을 만한 한국소설이다. 사람들이 그것을 몰라주는 것이 아쉽다. 이 리뷰를 보는 사람이 있다면, 한수영이라는 작가가 있고 그녀의 소설이 썩 괜찮다는 것을 기억해서, 혹시 마일리지가 남을 때 ‘그녀의 나무 핑궈리’와 또한 ‘공허의 1/4’까지 사봤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것을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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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영작가님은 소설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자주 읽지는 않는 내가
정을 붙인 첫 국내 작가이다.
고등학교때 공허의 1/4을 읽고 말로 표현하지 못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용한듯 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묘한 느낌
표현력이 부족해서, 자세히 서술할 수는 없지만
내겐 참 좋은 인상으로 다가와서, 이 책을 구매하는 동기가 되었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한수영작가님을 알아줬으면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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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영씨의 소설은 내게는 너무도 친숙하고 가슴에 품고 싶은 소설이다. 벌써 공허의 1/4을 읽은지는 만 2년이 다 넘어간다. 그 책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은 가상의 인물이라기 보다는 주위의 아는사람의 이야기 같다. 그래서 소설속에 억지의 꾸밈이 없고 가난이나 외로움이나 슬픔을 구구절절히 표현하지 않고 한줄 한줄 읽어가는 문장속에서 읽어가는 순간 그대로 그대로 가슴속에 전해지는 소설이다.
그녀의 소설을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단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슬픔'과 '공허'이다. 슬픔이 슬픔에게 말을 걸 때 비로소 어쩌면 인간의 우울증이 치료될 수도 있다는 느낌을 가끔 주기도 한다. 더 깊은 슬픔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원래 그렇다는 것.. 그 슬픔 때문에 내 슬픔이 가려지고 소멸되는 것이 그녀의 소설을 통해 내가 얻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나무 핑궈리는 최근에 나온 소설이엇고 장편이 아닌 2002년 등단이후 계속 써온 단편이었다. 나비/ 벽/스프링벅/그녀의 나무 핑궈리/구리연/꽃이 지다/피뢰침/번지점프위에 서다 등등의 소설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다 슬프고 공허하지만 치유의 힘을 갖고 있다. 공지영의 소설속에서 아무리 가난의 문제를 이야기한다해도 와닿지 않는 그러한 상상속의 가난과 고독과 슬픔이 아니다.
작가가 된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형성된 누군가의 표현의 글들, 말들, 기억에 남은 것들로 인하여 제 언어로 충분히 소화해 내어 소설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알고도서도 표절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겟으나 너무도 많은 책을 보고 많은 영화를 본 사람들이 어느 새 자기 안에 들어와 타인의 글과 말과 언어가 어느 새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여 자리를 잡게 되는데 그것을 자신만의 목소리로 구분하여 또다시 재구성한다는것은 정말 타고난 글쟁이가 아니라면 쉬운일이 아닌듯하다.
세상의 모든 식상한 표현속에서 나는 최윤의 글을 통해서 그 것을 벗어버렸고 한수영의 글을 통해서 온전히 소설속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첫번째 단편소설 나비에서는 어머니의 삶의 이야기를 아이의 눈을 통해 바라보는 것이다. 아이의 현재의 삶이 어머니와 무관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이의 정신적 의지 그리고 어머니를 향한 초등학생 4학년 짜리.. 육체적 성장이 더딘 한 아이가 어머니의 상처름 보듬어가는 이야기이다. 가난했던 어머니, 어머니로 부터 상처받았던 어머니 과거와 현재의 이어지는 전개도 참으로 멋진..글이다...
두번째 소설 '벽'의 경우에는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스스로 만든 벽에 갇혀버리는 것 같은 이야기인데... 집을 짓고 고치고 갈고 만들고..하는 일을 멈출수가 없었던 아버지.. 집나간 형의 이야기... 그 모든 이야기들...
그리고 그녀의 나무 핑궈리는 연변족여인이 한국으로 결혼을 와서 겪는 이야기.. 그녀의 삶의 방식들을 어느 몬난이 잡종 똥개의 시선으로 읽혀져 내려가는 소설이다. 만자씨의 삶.. 우리의 동포이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만자씨 이야기.. 뭐랄까 사회적 문제이기도 한 이 문제를 지극히 개인의 삶에 맞추어 전개해가는데 때로는 사회현상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의 통해서 우리가 겪게되는 일들...
그리고 구리연...../ 전화선을 연결하고 맨홀밑이나 전신주 위가 자신의 무대인 어느 젊은 노동자의 이야기.. 한 여인을 만나고 아이를 놓고 아이를 잃고, 그로인하여 정신을 놓아버리고자 도박에 미친 아내를 찾아가는 이야기.. 구리선으로 뭐든지 만들 수 있던 한 노동자.. 그리고 아내가 죽고..자신도 어두운 맨홀 구멍안에서 죽어가던 이야기....
여기까지 읽는 동안 내내 한 편 한 편을 다 읽어가면서 내내 훌쩍 거렸는데.. 피뢰침을 읽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슬픔이 몰려왔다. 마음과 몸의 거리는 그토록 먼 것인가. 그녀의 손길이 닿은 것이라면 모든 것을 다 갖고싶어했던 그 남자. 정신병자라기 보다는 닿을 수 없는 그녀에게 다가가는 그남자의 삶의 방식들.. 단지 그녀의 옆모습을 보다가 우연히 보게된 정맥이 다 보이는 듯한 귓볼에서 목선까지 내려오던 그모습을 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그의 어린시절.. 닿을 수 없고 다가갈 수 없는 그사람의 삶의 이야기와 죽음의 이야기들....
그리고 번지점프....
다양한 직업군과 다양한 성별로 이루어진 그녀의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모두가 일컫는 문명의 시대에 저머다의 상처와 슬픔이라는 거름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작가가 많은 책을 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써온 소설들을 보면서 그녀는 소설속의 주인공들을 어떻게 만들고 어떻게 그것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일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슬픔과 외로움과 고독... 피뢰침에서 그랬다. 늘 그에게는 끝없는 외로움뒤에 끝없는 그리움이 그치지를 않았다고...그래서 그렇게 외로웠는지 알수는 없지만... 그런그런 소설의 이야기이다.
슬픔을 멀리한다고 인간이 슬픔과 멀어질 것도 아니요. 슬픔이라는 것이 개인마다 다 다른 이런 삶속에서 가끔은 한수영씨의 소설을 만나고.. 지금 나의 삶을 돌아보고.. 힘을 내어보고... 사랑하고.. 달려가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