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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헌사
"실존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헌사" 내용보기
단편 산악소설 『산은 끝내 아무 말도 없었다』는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1m)의 거친 설원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숙명적 선택과 그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윤리적 파동을 치밀하게 탐색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조난과 생존을 다루는 산악 문학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현대 사회의 척박한 밀림 속에서 파편화된 인간 군상이 저마다
"실존을 갈구하는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연민과 헌사" 내용보기

단편 산악소설 『산은 끝내 아무 말도 없었다』는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1m)의 거친 설원을 배경으로, 한 인간의 숙명적 선택과 그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했던 윤리적 파동을 치밀하게 탐색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표면적으로 조난과 생존을 다루는 산악 문학의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현대 사회의 척박한 밀림 속에서 파편화된 인간 군상이 저마다의 실존적 상처를 치유하고 존재를 증명하려 분투하는 심리적 알레고리에 가깝다.  


소설의 서사를 추동하는 힘은 세 인물(P 대장, L, K)이 각자의 배낭 속에 쑤셔 넣고 온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에서 기인한다. 1998년 말, IMF 외환위기와 구조조정의 칼바람이라는 시대적 배경은 이들의 등반이 단순한 스포츠적 취미나 정복욕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팀의 연장자인 P 대장은 과거 아마 다블람에서 동료 상우를 잃었다는 영혼의 부채 의식과, 직장에서 밀려나는 노년의 무력감 앞에서 이번 등반을 자신의 생을 속죄할 ‘마지막 구원’으로 규정한다. 한편 L은 어린 시절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동생을 잃은 트라우마로 병적인 결벽증을 앓으며, 통제 불가능한 세상의 열패감으로부터 스스로를 건져 올릴 절대적 성취로서 아콩카과 정상을 갈망한다. 막내 K는 두 선배 사이에서 고뇌하면서도 거센 운명의 파도 속에서 표류하는 관찰자이자, 훗날 이 모든 비극을 기억하고 응시해야 할 증언자의 위치에 선다.  


작품의 갈등이 정점에 달하는 6,400m 인데펜덴시아 폐허 구간은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안데스 특유의 흉포한 돌풍인 ‘비엔토 블랑코’가 덮쳐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름 사이로 잠시 비친 햇살은 인물들에게 치명적인 유혹의 덫으로 작동한다. 세상의 인정과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이성을 잃고 질주하는 L과, 그런 동료를 사지에 버려둘 수 없어 또다시 자신을 던지는 P 대장의 선택은 인간 의지와 욕망의 충돌을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특히 P 대장이 L을 살려 보낸 뒤 홀로 눈보라 속으로 사라져 1970년대의 잊힌 피난처(1970 Refugio)에서 영면에 드는 장면은 비극적이면서도 숭고하다. 그는 산을 정복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온전한 책임과 희생을 완수함으로써 비로소 오랜 죄책감의 사슬을 끊고 내면의 평온과 해원을 얻는다.  


작가가 구축한 서사의 진정한 무게는 조난 사건 이후에 비로소 드러난다. 일상으로 복귀한 K와 L을 맞이한 것은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아니라, 세상의 무심한 수군거림과 살아남은 자 특유의 서늘한 부채감이었다. 다리에 영구적인 장애를 입고 산기슭 식당에서 채 비우지 못한 막걸리 잔을 앞에 둔 채 살아가는 L의 모습은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남긴 처절한 흉터다. 반면 K는 수십 년의 세월 동안 “우리는 왜 산에 오르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고통을 곰삭인다.  

이 지난한 고뇌는 26년의 세월이 흐른 뒤 설악산 공룡능선과 다시 찾은 멘도사의 등반가 묘지에서 장엄한 화해로 승화된다. 설악의 능선에서 P 대장의 유품인 붉은 룽타를 바람에 날려 보내며 “이제 짐은 내려놓으시라”고 읊조리는 K의 모습은, 비극을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응시해 온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영혼의 탈상(脫喪)을 보여준다.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산의 침묵’은 대자연의 냉혹한 무관심인 동시에 인간의 온갖 아집과 번뇌를 무화시키는 가장 준엄한 거울이다. 산은 인간을 시험하거나 이기려 들지 않으며, 오직 스스로 겸손을 잃고 과욕을 부린 자들이 그 침묵 앞에서 무너져 내릴 뿐이다. 작가는 거대한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숙명처럼,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짊어진 채 일상의 가파른 너덜지대를 묵묵히 버텨내는 현대인들의 실존을 향해 깊은 연민과 헌사를 보낸다.  

『산은 끝내 아무 말도 없었다』는 고산 등반이라는 극한의 시공간을 빌려 인간 존재의 존엄성, 욕망의 덧없음, 그리고 타인을 향한 윤리적 책임의 무게를 묵직한 문체로 길어 올린 수작이다. 산이 던지는 침묵의 언어를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진짜 정상이 어디인가를 서늘하게 되묻고 있다.  

YES마니아 : 로얄 j******e 2026.09.14.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