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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 없는 방에서 시작된 운명 또는 삶
"전망 없는 방에서 시작된 운명 또는 삶" 내용보기
20대 초 어느 일요일 오후, 무엇 때문이었는지 무척 졸렸다. 그럼에도 나는 TV를 보고 있었는데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하는 사이사이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들이 지나갔고 푸른 하늘에 초록 나뭇잎이 살랑이고 있었다. 한 앳된 여인(헬레나 본햄 카터)와 옷을 답답하게 차려입은 남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시골의 어느 숲길을 어색하게 걷고 있었다. 졸린 눈으로 보기에도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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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 어느 일요일 오후, 무엇 때문이었는지 무척 졸렸다. 그럼에도 나는 TV를 보고 있었는데 눈을 떴다가 감았다가 하는 사이사이로 드레스를 차려입은 여인들이 지나갔고 푸른 하늘에 초록 나뭇잎이 살랑이고 있었다. 한 앳된 여인(헬레나 본햄 카터)와 옷을 답답하게 차려입은 남자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시골의 어느 숲길을 어색하게 걷고 있었다. 졸린 눈으로 보기에도 두 사람은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 쪽이 여자에게 맞지 않았다. 이것으로 끝이었다.

 

 

그러니까, 영화 <전망 좋은 방>은 나의 '불량한 태도'로 인해 제대로 보지 못한 영화로 남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이 영화는 혼자만 감추고 있어 언젠가 '양심고백'을 해야 할 일종의 '어두운 비밀'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지금껏까지 나의 삶에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는 하나의 단어를 나에게 심어주었다. '전망'이다. '전망 좋은 방'은 역시 20대 초 나에게 날아 들어온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 a room of one's own'과 함께 나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성취하여 지켜야 할 강령이 되었다. 나만의 방을 갖기 위해 투쟁했고 나의 방은 전망이 있는 방 'A Room with a View'이기를 고집해왔다.

 

 

이 영화에 대한 빚은 원작인 동명의 책으로도 이어졌다. 아무 때나 읽어서는 안 될 책, 내 인생에서 가장 평안할 때 읽어야 할 책으로 정해 놓았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볼지,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볼지 가끔 고민했지만 결코 어느 쪽도 섣불리 시작하지 않은 채 오늘까지 이르렀다. 이 책 혹은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무조건 피해왔다. 오롯이 나만의 방법으로 나만의 감각과 사유로 만나고 말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정해둔 금기 아닌 금기였다. 세월이 흘러 올해 9월의 어느 날, 별안간 이 책을 열었다. 수 세기의 봉인이 해제되면서 머나먼 20세기 초입의 피렌체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E.M.Forster의 『전망 좋은 방』은 피렌체의 아르노 강이 보이는 '전망'을 둘러싼 이야기로 시작된다. 사전 예약과 달리 전망이라곤 전혀 없는 방을 배정받아 잔뜩 화가 난 사촌지간의 두 여성 (루시와 샬럿)과 이들에게 자신들의 멋진 전망을 가진 방을 내주려는 두 남자 에머슨 부자가 등장한다. 영국의 전형적 인습과 교양에 얽매어 있는 여성들과 사고방식 및 생활면에서 이미 시대를 앞서 살고 있는 두 남자의 교류는 처음부터 삐걱거릴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계급'도 차이가 난다.

 

 

주인공 루시 허니 처치는 독특하게 매력적이다. 해외여행이라고는 이번 피렌체가 처음이고, 런던 근교의 전형적인 영국스러운 마을에서 자랐지만,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고 인생의 변화에 능동적인 인물이다. 적당하게 교양을 쌓아 적절한 나이에 괜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그 시대의 평범한 여자의 일생을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어서 반갑다. 스토리도 포스터의 소설 중 가장 로맨틱하다고 정평이 나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결혼에 얽힌 복잡다단한 해프닝들이 플롯을 끌고 가는 것은 아니어서 더욱 좋다. 여행이 있고, 자아의 발견이 있고, 종교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번뜩이며, 전형적 인물과 도발적 인물이 서로 엮인다. 1908년에 출간된 이야기이지만, 인물과 사건에는 식상함이 거의 없다. 진부한 사랑도 없고 자극적인 일탈적 사랑도 아니다. 어디에서도 봄직하지도 들음직하지도 않은 독특한 인물들이 넘쳐나며 이들이 한데 모여 만들어나가는 '인생'에는 신랄함, 유머, 고집, 유쾌함 그리고 낭만성이 교차한다.

 

 

 

영국의 전형적 지성과 태도를 대변하는 인물인 비브 목사가 에머슨(부자 중 아버지)을 평가하는 몇 문장만으로 보건대, 이 부자는(특히 아버지 에머슨) 이미 범상치 않은 비호감의 인물로 낙인찍혀 있다. '좋은 분입니다. 하지만 좀 피곤한 것도 사실이죠.(---) 처음 며칠 사이에 그분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하고 척지게 됐어요. 요령도 없고 조심하지도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무례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분은 자기 생각을 속으로만 간직하는 법이 없어요'

 

 

하지만, 에머슨에 대한 아들 조지의 의견은 완전히 다르다. 관습과 교양, 예의를 목숨만큼 중시하는 기존의 영국 사회의 암묵적 규칙을 무시하고 자신의 철학에 따라 살고 있는 지극히 바람직한 인물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친절을 베푸는 건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아버지를 기이하고 불쾌하게 여기거나 겁을 먹어요' 아르노 강의 전망을 가진 방을 흔쾌히 두 여성에게 양보해 주었지만,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례하다고 생각하고 호의를 받아들여 놓고서도 두 여성은 이 부자를 쌀쌀맞게 대한다. 영국과는 사뭇 다르게 자유로운 풍토가 확고한 이탈리아에서 그것도 르네상스의 본거지 피렌체에서 이성과 전통보다 인간미를 중시하는 인물들이 그렇지 못한 구시대적 인물들 사이에서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는 게다.

 

 

에머슨이 직접 밝히는 자신의 인생관은 시적이고 철학적이며 인간적이라 21세기의 나에게는 멋있기만 하다. 그러나, 20세기를 갓 넘어온 그들에게는 가히 '충격적'이었을 터이다. '우리가 바람에서 왔고, 그래서 바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걸 잘 알아요. 인생이란 영원한 평탄 속에 불거진 매듭, 얽힘, 흠집이라는 것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게 왜 불행의 이유가 돼야 하는 거요? 그저 서로 사랑하고 일하고 즐거워해야 하지 않소? 나는 이런 세상 한탄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이런 시대를 앞서가는 아버지의 아들 조지는 어떨까? 자신들 부자의 삶에 대한 태도가 타인들과 너무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데에서 오는 피로감 때문일까? 젊은 나이인데 세상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다. 아버지 에머슨에게서 요즘 부모들이 자녀에게 갖는 불안감을 읽을 수 있다.'지옥에 살고 있어. 저렇게 늘 우울해요' '저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는 녀석이 어떻게 우울할 수 있는 거요? 도대체 내가 뭘 더 해주어야 하는 거요? 녀석이 받은 교육을 생각해 보라고요. 인간이 신의 이름으로 서로 서로를 미워하게 만드는 미신과 무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랐어요. 그런 교육을 받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신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신을 이용하는 인간 군상에 환멸을 느껴 세상과 동떨어진 양상으로 살아오다 보니 어린 아들에게 예기치 못한 마음의 병이 생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 세상과 겉돌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자녀 양육은 잘한다고 해도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는 법) '세상이 녀석에게 맞지를 않아요' '이 세상이, 이 우주가 녀석에게 들어맞지 않아요'

 

 

 

다만 방만 바꾸었을 뿐인데 사상과 태도까지도 전염되어 온 걸까? 이제까지 영국의 공기에 완전히 물든 순수 영국 여성인 루시는 에머슨 부자의 영국스럽지 않은 자조 self-help 적인 태도를 현재는 기이하게 바라보고 있지만, 서서히 피렌체의 공기에 젖어들며 일종의 자각을 하게 된다. 피렌체란 중세의 암흑기를 내동댕이 쳐버린 도전과 새로운 발견을 표방한 르네상스의 땅 아니었던가! '루시는 중세의 여인을 표방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속박이 그녀에게 불만을 안겨 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아마도 후회하리라. 그날 오후 그녀는 특히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뜻에 반하는 무언가를 몹시 하고 싶었다.' 어쩌면 루시 난생 최초의 '모험'인지도 모른다. 혼자서 피렌체의 기념품을 사러 알리나리의 가게로 나선다. 피렌체의 풍경을 담은 엽서 몇 장을 사서 시뇨리아 광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다. 두 남자가 싸우다가 결국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칼로 찔렀고 이 남자는 하필 루시 쪽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녀도 그 죽은 남자와 함께 어떤 영적 경계선을 넘어 버린 것만 같았다. 얼마 후 루시가 눈을 뜬 것은 우피치 미술관의 아케이드 계단이었고, 조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험악한 사건 현장을 벗어나기 위해 그리고 둘만의 어색한 분위기를 떨치기 위해 두 사람은 아르노 강 쪽으로 가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며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이것으로 모든 일이 시작된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책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 장면이다.'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고 그는 그걸 기억했다. 한 사람이 죽은 것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일인가 일어났다. 그들은 이제 인격이 입을 여는 상황, 유년이 문을 닫고 젊음의 갈림길이 열리는 순간에 이르러 있었다.' 특히 조지에게는 인생이 바뀌는 절대적 순간이었다.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아마도 살고 싶을 겁니다'

 

 

이 시뇨리나 광장 사건 이후, 과연 작가 E.M.Forster는 루시와 조지 이 두 사람을 어떻게 이어낼 수 있을까? 계급도 다르고 인생관을 형성하는 삶의 배경도 다르고 둘 다 여행 중이라 언젠가 이 펜션을 떠날 것이고 영국에서 만날 이유도 없으므로. 남자 작가는 어떤 식으로 로맨스를 풀어내는지 사뭇 궁금해진다(포스터는 동성애자였기에 여성적인 접근에 있어서 전형적인 남성 작가는 아니지만). 곧 모든 사람이 동원되는 야외 소풍 장면이 그려진다. 굉장히 보수적인 이거 목사와 비브 목사가 주도하고 펜션의 모든 사람이 참여하는 대대적인 움직임이다. 도착하자 자연스레 무리가 나뉘어 흩어졌다. 루시는 엘리너 래비시( 독특한 소설가 또는 지망생)와 사촌 샬럿과 한 무리를 이루었으나 자리를 두고 마음이 맞지 않게 되자 비브 목사를 찾아 나선다. 마차를 몰고 왔던 이탈리아인 마부라면 목사의 소재를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성직자를 이탈리아로 뭐라고 하던가? Dove buoni uomini (좋은 남자들 어디에)?

Uno --- piu --- picolo (하나 ---더 ---작은). 좋은 남자 둘 가운데 키가 작은?( 이거 목사보다 비브 목사가 키가 작다)라고 물었고 마부는 자신 있게 안내해 준다. 마침 산에는 제비꽃이 가득 피었고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길은 소풍의 의미를 한껏 되살려준다. 그녀는 우울한 세계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이 길이 너무도 즐거웠다. 발걸음 하나, 나뭇가지 하나가 모두 소중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테면 새로운 세계로의 입성이다. 웬만한 로맨틱 스토리에서는 볼 수 없는 우연과 필연이 절묘하게 응집된 클라이맥스가 펼쳐진다. 이 시점에서, 독자는 아르노 강에서 '살고 싶다'라고 했던 조지의 선언이 뜻하는 바를 알게 된다. 루시는 여전히 확실히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정신세계가 새로운 영역으로 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책을 통째로 갖다 놓자면,

 

 

포스터의 언어로 한 번 더 읽어 보면,

 

 

 출처: E.M.FORSTER 『A Room with a View』, penguin classics

 

 

루시와 조지의 제비꽃 장면을 샬럿도 보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루시와 샬럿은 둘만의 비밀로 간직하자고 약속하고 서둘러 로마로 떠난다. 여기에서 세실과 그의 어머니와 합류하여 여행을 하고 이야기의 무대는 런던 근교 루시의 마을로 옮겨간다. 루시는 다시 영국의 관습과 전통에 둘러싸인 원래의 생활로 돌아오고 세실과 집안끼리의 친밀에 의한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교양과 지성을 중요시하며 살아온 탓에 세실은 오만하기 그지없고 이기적이다. 마을의 말썽거리인 빌라 한 채를 두고 세입자를 정하는 일에 세실이 간섭하면서 그동안 잊혀있던 에머슨과 조지 부자가 등장한다. 세실은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에머슨 부자와 우연히 말을 터게 되었고, 마침 이들이 시골의 작은 집을 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선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빌라 주인을 골탕 먹이려는 생각에 일을 복잡하게 만들 요량으로) 이들이 이사 오게 한다. 루시는 여전히 '제비꽃 사건'을 찜찜하게 여기고 있는 데다가 자신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조지를 다시 만나게 되어 불편하다. 그러나, 작은 동네에서 새로 이사 온 이웃은 루시의 집으로 초대를 받게 되어 있었고, 세실은 이들 셋이 함께 있는 자리에서 '웃기는' 소설을 읽어준다. 앨리너 래비시의 책이었고 세실은 '전망'에 관한 어느 대목을 이야기한다. 조지는 전망에 관한 에머슨의 의견을 말하며 이 책을 대화의 주제로 계속 살려간다.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완전한 전망은 하나뿐이래요. 우리 머리 위로 올려다보이는 하늘의 전망 말이에요. 땅 위에서 보는 전망들은 다 그걸 어설프게 흉내 낸 거래요.' '그리고 사람은 두 부류도 나뉜다고도 하셨죠. 전망을 잊어버리는 사람들과 작은방에 있을 때도 그걸 기억하는 사람들로요.' 그래서, 에머슨 부자는 피렌체에서 자신들의 멋진 전망을 루시와 샬럿에게 흔쾌히 내주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하늘의 전망은 어디에서도 흉내낼 수 없고 자신들은 어디에서나 전망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앨리너 래비시의 책은 전망만을 다룬 게 아니었다. 제비꽃과 남자와 여인의 이야기도 있었다. '장황한 사랑의 선언은 하지 않'고 ''그녀를 확 끌어안았다'라는 장면을 세실이 소리 내어 읽고 있는 가운데 깜짝 놀란 루시는 '세실에게 표정을 들킬까 봐 그녀는 조지에게 고개를 돌렸다. 조지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부리나케 이 상황을 종료시키기 위해 루시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고 제안, 마침 세실은 책을 두고 왔다며 루시와 조지를 잠시 떠나는데... 이 좁은 길에 들어서자 조지가 루시에게 다가왔다. 루시는 '두 번째로 키스를 당했다'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음을 직감한 루시. 앨리너 래비시가 그 제비꽃 상황을 철저하게 알게 된 것은 바로 샬럿이 죄다 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루시는 샬럿을 나무라며 함께 조지를 압박하여 쫓아내 버리기로 한다. 그러나, 조지는 거침없는 사랑의 선언을 해 버린다:

 

 

'당신 정말로 그 남자와 결혼할 생각입니까? ' 당신은 바이스씨하고 살 수 없어요. 그 사람하고는 친지 정도로 지내야 해요. 그는 사교 모임이나 지적인 대화의 상대로 제격일 뿐, 친밀한 관계에는 걸맞지 않습니다. 여자하고는 더 말할 것도 없죠' ' 그 사람은 사물, 그러니까 책이라든가 그림 같은 것들하고는 별문제 없지만, 사람하고는 결코 잘 지낼 수 없는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어디서나 그렇게 사람들을 골탕 먹이고 있습니다' ' 그 사람은 여자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아요. 유럽을 천년 동안 붙잡아 매둘 부류의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보다도 제 사랑의 방식이 더 낫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당신이 내 품에 안겨서도 당신 자신의 생각을 하기를 원합니다' ' 나는 그 남자가 죽은 뒤로 계속 당신을 좋아했어요. 당신 없이는 살 수 없어요.(---) 이 세상이 온통 물과 햇빛에 감싸여 눈부시게 반짝일 때 다시 당신을 만났어요. 당신이 숲에 들어왔을 때 나는 달리 중요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았어요. 나는 외쳤어요. 살고 싶어서, 내 인생에 기쁨을 줄 기회를 잡고 싶어서' '루시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명백해요, 지성의 관점에서 중요한 건 사랑과 젊음입니다'

 

 

 

이때 마침 루시는 세실이 테니스를 함께 쳐달라는 프레디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을 듣게 된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바뀐다. '지금까지 어떻게 한순간이라도 세실을 참았다는 말인가? 그는 정말로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바로 그날 밤 그녀는 약혼을 파기했다. 상황이 뚜렷하게 보이는 날들이 있어요.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에요. 사태가 분기점을 넘어가는 순간들이 있어요. 오늘이 바로 그런 순간이에요.' 루시는 세실에게 단호한 '파혼 선언'을 단행한다. 세실은 예상과 다른 다른 반응을 보인다. 골치 아픈 후유증을 남기지 않고 순수히 떠나준다. 계단 꼭대기에 잠시 멈춰 선 그는 체념한 자의 굳센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고, 그 모습은 잊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사랑을 떠나는 순간만큼 그에게 어울리는 사랑의 순간은 없었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여성이 파혼을 했다는 것은 평생 독신으로 살 수도 있음을 감수하는 일이었다. 루시는 후회하지는 않지만, 장차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아마득한 문제를 벗어나기 위한 그 어떤 계기가 필요했다. 자신을 위한 도움의 손길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고 있는) 엘런 자매가 그리스와 아마도 콘스탄티노플로까지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루시도 이들과 동행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출발을 코앞에 둔 어느 날 밤, 루시는 비브 목사관에서 홀로 남아 있는 아버지 에머슨을 만나게 된다. 예정된 '운명'의 순간이었다. 조지는 루시와의 일로 낙심하여 런던으로 떠나면서 아버지에게 피렌체에서 최근까지 루시와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일을 다 털어놓았다. 루시를 사랑한다는 자신의 심경까지도. 동시대의 방식과 맞지 않게 지나치게 솔직하고 직설적인 에머슨, 한치의 망설임 없이 '루시에게 조지와 결혼하라'라고 설득한다.  사랑의 서사를 열광적으로 읊는노인을 만나는 것은 이 책의 독특한 매력 중 하나이다. 

 

 

 

'나는 녀석에게 항시 사랑을 믿으라고 가르쳤어요. <네가 사랑을 느끼면 그건 진실이란다>라고 말요. <열정은 장님이 아냐. 열정이야말로 눈이 밝지. 네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여자는 네가 진실로 이해하게 될 유일한 사람이란다>라고도 말했어요'

' 이제 아가씨는 물러나기에는 너무 멀리 갔어요. 나한테는 이제 시간이 없어. 그래서 사랑이나 우정, 시(詩) 같이 세상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 아가씨가 결혼을 통해 얻는 것들을 누릴 수가 없어요. 분명한 건 조지하고 함께라면 아가씨가 그런 것들을 찾으리라는 것, 그리고 아가씨가 녀석을 사랑한다는 거예요. 그러니 아들놈하고 결혼해요.(---)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어질 수 없어요.(---) 경험을 통해서 나는 시인들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아요. 사랑은 영원합니다.

 

 

 

루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앨런 자매와 여행을 떠났을까? 책은 어느덧 마지막 장으로 접어든다. <중세의 종말>이라는 서사적이며 함축적인 제목과 함께 이 책의 첫 장의 제목이자 무대였던 피렌체의 펜션 베르톨리니가 나온다. 첫 장면에서 에머슨 씨가 루시에게 양보했던 '전망 좋은 방'이 등장하는데... 루시와 조지가 함께 있다. 창밖으로 펼쳐진 아르노 강을 내려다보면서 말이다. 그것도 루시가 조지의 양말을 깁고 있다. 설마?

 

 

 

'남편이 된 조지는 열렬한 고마움에 휩싸여서 - 이 남쪽 나라에서는 모든 감정이 열렬해진다- 어리석은 젊은이를 위해 그토록 수고한 모든 사람과 사물들에게 축복을 내렸다'

 

 

 

결국 루시는 조지와 결혼을 선택했고 지금 두 사람은 자신들의 인생을 완전히 바꾼 운명의 땅 피렌체로 신혼여행을 와 있다. 허니처치가에서는 두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고, 루시가 독신으로 살기를 은근히 바랐던 비브 목사도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초월한 사랑을 이루어낸 루시와 조지에게는 큰 문제가 되질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에 따라 행동하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결국 우리에게 돌아올 거예요'라고 일축해 버린다.

 

 

 

반면, 두 사람의 관심은 샬럿에게 모아진다. 책의 모든 갈등과 긴장이 해소되는 대단원에서 그간 '깊은 의미는 없을지 몰라도 적어도 깊은 기묘함은 감추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던, 가난한 노처녀 샬럿이 소환되는 것은 흥미롭다. 알고 보면 루시의 결정적인 장면마다 함께 있었고 조지와 루시의 비밀스러운 장면마다 등장했던 사람은 오직 샬럿뿐이었기 때문에 의외의 주요 인물이다.

 

 

'당신의 사촌 언니는 처음부터 그걸 바라고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가 이렇게 되기를 바랐어요.(---) 그 여름이 지나가는 동안 그분은 당신이 나를 잊지 못하도록 했어요. (---) 처음 두 번은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그날 저녁 목사관에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 또 한 번의 기회를 얻었어요'

 

 

솔직히 결말이 나의 기대에 못 미치는 점도 있다. 어차피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어 있었고, 남녀의 결혼이라는 식상한 장치로 행복을 갈무리하기 때문이다. 루시는 그리스로 떠나 더욱 대차고 독립적인 사람으로 거듭 태어나고, 조지는 사랑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그는 상당한 애서가이다) 하여 다른 의미의 삶을 찾고...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어느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우연히 재회하여 허심탄회하게 옛날을 술회하는 것... 이런 식으로 간다면 어떨까? 이 역시 진부한 전개일라나.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사상가요 실천가이기도 했던 작가 포스터도 결혼으로 끝내는 것을 두고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구시대적인 결말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지지하는 계급 타파와 인습에 맞서기를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한다. 계급을 넘어서는 사랑은 20세기 초 영국에서는 상당히 획기적인 소재였을 테다.

 

 

오랜 세월 묵혀 왔던 이 책에 대한 '숙제'를 수행하고 나니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다. 한편으로는 나만 아는 비밀이 하나 사라진듯한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얄궂게도. 잔잔한 감동을 안고 영화도 찾아본다. 책 속의 장면들을 영화에서는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특히 아름다운 피렌체와 런던 근교의 풍경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또한, 이런 생각도 든다. 나의 20대의 그 옛날 이 영화를 보았고 책까지 읽어 버렸더라면 내 인생에서 사랑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고. 이런 러브 스토리를 알고 있고 이런 캐릭터들이 이렇게 쏟아 놓는 어록을 일찌감치 꿰차고 있었더라면, 이 생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함부로 사랑을 운운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사랑이란 결코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불꽃 축제 같은 게 아니라는 '진실'을 한참 전에 터득한 후, 이제서야 이 책을 읽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아무런 열망이나 꿈 없이 '영화 속 사랑'을 열심히 바라볼 수 있는 나이에 이른 것도 역시 다행이다. 그저 '전망 좋은 방'을 바랄 수 있어 행복하다. 책의 결말을 붙들고 지나간 페이지들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어 본다.

 

 

젊음이 그들을 감쌌다. 파에톤은 열정의 응답과 사랑의 획득을 힘차게 노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정신에 떠오른 사랑은 좀 더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노래는 사라졌다. 강물이 지난겨울의 눈을 지중해로 안고 가는 소리가 들렸다.

 

 

영화의 '제비꽃' 장면

 

 시계방향으로, 루시 조지 샬럿 그리고 세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s********e 2020.10.10.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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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는 예술이다” 라는 심상치 않은 카피와 포스터가 잊혀지지 않는 영화 <전망 좋은 방>은 같은 제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85년 영화라니 언제 보았던 걸까. 어린 마음에 새겨졌던 로맨틱한 분위기와 부풀린 치마를 입은 여자들과 전원풍경 정도만 기억하는 채로 이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그 유명한 '전망'이 나의 허니문에서도 로맨틱했던 피렌체라는 것도 까맣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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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키스는 예술이다 라는 심상치 않은 카피와 포스터가 잊혀지지 않는 영화 <전망 좋은 방>은 같은 제목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1985년 영화라니 언제 보았던 걸까. 어린 마음에 새겨졌던 로맨틱한 분위기와 부풀린 치마를 입은 여자들과 전원풍경 정도만 기억하는 채로 이 이야기를 다시 만났다. 그 유명한 '전망'이 나의 허니문에서도 로맨틱했던 피렌체라는 것도 까맣게 몰랐고 운명적인 연인 사이에 잠시 끼어드는 답답한 약혼자 역할을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맡았었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국작가로 꼽히는 E.M. 포스터의 소설 [전망 좋은 방]은 사랑하는 마음은 숨기고 예의를 갖추는 것이 최선의 미덕이라고 강요하는 시대에 피어난 아름답고, 조심스러우면서도 용감한 러브스토리다.  

 

생기발랄한 기운을 얌전하게 다스리도록 길러진 영국 아가씨 루시는 피렌체 여행 중에 전망 좋은 방을 양보하는 조지를 만난다.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성큼 다가서는 낯선 감정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비꽃이 가득 피어난 들에서 갑작스런 키스(영화 카피의 바로 그 아트 키스!)를 나눈 후에는 도망치듯 로마로 여행지를 황급히 변경한다. 이 사랑에서 달아나려는 루시의 시도는 이후에도 다른 남자와의 약혼, 그리스 여행 계획 등으로 몇 번이고 반복되는데 이 소설은 끊임없이 자기감정을 부정하는 연인을 통해 '거짓' 속에 감춰진 진심을 읽는데 매력이 있다. 이런 시대에 태어났다면,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읽는데 얼마나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해야 했을까.

 

“내 말을 믿어요, 허니처치 양. 인생은 눈부시지만 또 힘든 거요. (중략)

사랑하는 사람들은 헤어질 수 없어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요."

            (조지의 아버지가 혼란에 빠진 아가씨 루시에게 하는 말. 292-3p)

 

모든 사람의 축복을 받지는 못하지만 결국 루시와 조지가 행복한 연인으로, 한 쌍의 부부로 맺어지기까지 사랑의 단 맛, 쓴 맛, 한 번에 삼킬 수 없는 오묘함을 낱낱이 드러나는 가운데 연인을 향한 주변인물들의 은근한 응원-응원조차도 은근하다. 마지막 순간 조지의 아버지를 제외하면-도 이야기에 생기를 더한다.

 

정작 이런 이야기를 쓴 작가 자신은, 연보 상에서는 언제나 사랑을 잃은 사람처럼 보여서 가슴이 아프다. 삶에 영향을 끼쳤다는 연인의 이름이 적지 않게 언급되는 걸 보면 포스터는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연인들은 포스터가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먼저 죽거나, 아이의 대부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면서 머물다 떠났다. 연민과 함께, 영화로 만났던 그의 다른 작품들([인도로 가는 길], [하워즈 엔드])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상한 취미일까.

i*****2 2010.06.03.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옛추억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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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본 영화가 그리워서 책을 봤다. 영화와 원작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장면들이 글자들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아 오히려 책에 몰입하게 된다.  하찮은 연애담이 이토록 품격있게 그려지다니.. 너무나도 욹어먹었지만 그래도 역시 새로... 그 누구도 정답을 모르기에 이토록 영원한 변주가 가능한 주제 그 이름하여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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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본 영화가 그리워서 책을 봤다. 영화와 원작을 분리시켜 생각하려 해도, 자꾸만 장면들이 글자들과 겹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서인지 영화가 세세하게 기억나지 않아 오히려 책에 몰입하게 된다. 

하찮은 연애담이 이토록 품격있게 그려지다니..

너무나도 욹어먹었지만 그래도 역시 새로...

그 누구도 정답을 모르기에 이토록 영원한 변주가 가능한 주제 그 이름하여

사랑.

유쾌하고 발랄하게 그려진 작품중 최고인듯.

s***y 2007.03.18.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