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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룰 그리고 바르트와 같이 읽는 요한계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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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를 깊은 깨달음과 고민으로 몰아넣은 책이다. 잘 모르던 사람 얘기를 듣고 고민하진 않는다. 고민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낯선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사람을 좋아하면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엘룰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고, 엘룰은 바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엘룰의 변증적 성서해석과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이 만나고 있다. 내 고민은 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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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를 깊은 깨달음과 고민으로 몰아넣은 책이다. 잘 모르던 사람 얘기를 듣고 고민하진 않는다. 고민을 일으키는 것은 내가 좋아하던 사람의 [낯선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 사람을 좋아하면 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엘룰은 내가 좋아하는 인물이고, 엘룰은 바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책은 엘룰의 변증적 성서해석과 바르트의 객관적 화해론이 만나고 있다. 내 고민은 엘룰을 통해 만난 바르트와 물려있다. 우선 이 책이 준 독특하고 뛰어난 인사이트부터 살펴보면... 첫째 요한계시록의 구조에 대한 분석과 그 구조에서 그리스도 성육신의 중심성이다 (바르트적이지...). 중심인 8-14장을 전적으로 성육신 사건으로 해석해낸다. 그리고 그 연관구조로서 그 앞의 역사에 대한 그림과 그 뒷부분의 심판의 부분을 엮어내고 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은 5장에서 22장에 걸친 반복적 구조에서 벗어나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준다. 둘째, 계시록의 심판을 십자가 사건과 연관시킨 부분이다. 중심부인 8-14장의 해석에서 하늘에서 내리는 심판은 온전히 그리스도위에 쏟아진다. 우리가 당할 심판을 그가 대신 하시는 [그리스도의 열정]의 고난이다. 그리스도위에 인간전체가 당할 고난이 쏟아진다.(그 채찍, 인간의 분노와 광기, 하나님의 유기, 십자가) 그리고 우리는 이 역사적 사건의 침묵자가 된다. 셋째 국가권력과 그 지배에 대한 이해이다. 수많은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뛰어넘어, 국가(첫째 짐승)와 그 지배시스템(둘째 짐승)에 대한 이런 통찰은 사실 어느 누구의 책에서도 볼 수 없는 큰 전망(perspective)를 준다. 우리의 시대 역시 세계대전 시대 못지 않게, 국가 논리위에 휘둘리어 살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니까...미국은 또다시 팔루자를 폭격했다. 넷째 천년왕국에 있어 인간행위의 의미들에 대한 통찰이다. 그리스도이후에 사단의 매임과 다시 풀려남 사이의 기간을 교회시대로 본 것은 [무천년설]과 유사하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인간책임의 절대적 의미]의 기간으로 본다. 마치 에덴동산이 회복된 것과 같이 더이상 역사의 책임이 악한 권세에 있지 않다. 비록 그가 위협하긴 하지만... 인간은 이 시기에 자유롭게 하나님의 사랑을 선택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살 수 있다. 성육신으로 인해 인간의 책임이 회복된 것이다. 사단은 하늘에서 번갯불처럼 떨어졌고 다시 인간은 하나님 앞에 두번째 선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삶에 의해 그 진실성이 검증될 것이다. 하지만, 내겐 이 책안에 비판적으로 고려해 보아야 할 주장들도 없지않다. 첫째 엘룰은 십자가사건이 무효화시킨 심판이 인간 위에 임할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인류전체에 대한 대재앙이 주제인 계시록은 그래서, [선택의 문제]에 봉착케 한다. 엘룰은 심판의 대상이 되는 선택이 [권세와 타락의 결과]와 같은 영적인 것이라 해석한다. 물론 그랬으면 좋겠다. 그러나, 성경자체와의 충돌, 심지어 계시록 자체와의 충돌은 어찌할까. 정죄와 둘째사망은 결코 인간에게 임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그 구절들을 게속 읽어봐도, 다른 부분들과 비교해보아도 무리다. 심지어 이런 구절에 손대지 말라고까지 계시록은 경고한다. 둘째, 십자가사건에 의한 은혜의 편만성을 주장하다보니, 인간책임의 무효화까지 가게 된다. 인간의 의는 쓸모없는 것이라는 논리의 확장이, 인간의 모든 책임도 무효하고 의미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인가?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간 아브라함의 믿음도, 먹고 죽을 떡을 선지자에게 대접한 과부의 믿음도, 생활비 전체, 아니 목숨 전체를 던져넣은 가난한 과부의 믿음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라는 면에서 의미가 없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표로 세우신 것이외의 이 성경의 인물들은 아무런 다른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하진 않는 것일까? 이 점에서 [오직 은혜로]와 더불어 [오직 믿음으로]를 같이 말한 종교개혁자들의 강조점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은혜의 자리에 믿음이 같이 있어야한다. 셋째, 이런 생각 발전의 배경에는 똘레랑스를 위한 [타종교와의 화해의 필요]가 깔려있다. 더 이상의 종교분쟁은 우리가 갖는 이성적 하나님 상(image)과 충돌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종교간 충돌의 기저엔 독선적 유일주의가 있으므로 그 뿌리를 교정하자는거다. 과연 그럴까? 성경이 말하는 바를 부분적으로 접고, 이성적으로 좋은 것(그것을 현재적 성령사역이라 부르던, 십자가 사건 이후의 인간이성의 해방이라 부르던)을 따른다면, 그런 진리가 우리를 이끌 자격이 있는 것인가? 상대적이고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진리라면 그리고 성경의 해석이라면, 우리 본성을 따라 필요에 따라 또 이리저리 왜곡되어져 가진 않을까?. 논리적 귀결이나 현실적 필요가 진리자체를 바꾸려해선 안된다. 화목하고 사랑하는 일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갖는 것과 구원의 방향 자체를 돌리려는 것은 다른 문제인 것 같다. 생전에 바르트 자신은 왜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미루었을까? 미루는 것도 답변이다. 우리가 대답할 문제인가 생각해 볼만하다. 칼 라너의 답변을 바르트가 몰라서 내뱉지 못한 건 아니리라... 바르트의 답변은 하나님을 우리가 만나 아는바로는, 너무 은혜롭고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이다. 어떻게 엄하고 잔인한 심판이 있을까? 그러나 여기까지다. 내 아버지의 나에 대한 사랑을 느껴 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의 세상에 대한 판단을 배워 알 뿐이다. 우리 입맛에 안 맞아도 어쩔 수 없다.우리가 의논해서 결정하면 그렇게 되는건 신학이고, 신앙은 우리 결정권 밖 심지어 그리스도의 결정권 밖에 있었다. 그래서 아들이셨을까? 완성의 시간은 이곳에 사셨던 그리스도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분은 깨어있으라고, 성문밖에 내어쫓기는자들을 통해 우리 정신을 번쩍 들게 하실 뿐이다. 엘룰을 좋아하는 나로선 엘룰이 이런 한쪽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변증법적 반대를 이루어 구원의 하나님은혜에 대한 더 감격스런 신앙고백이 있게 하려 한건 아닐지,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다. 분명 이런 예수님의 죄인사랑은, 우리맘 속에 있는 의인의식을 깨고, 믿음을 자기의로 삼는 교만을 무너뜨린다. 오직 그분을 구주로 고백하는자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나(죄인이 구원받는다는) 부정적으로나(죄인이 구원 받지 못한다는), 여전히 이성으로 받이들이기 어려운 사실임에는 틀림없다.
s***y 2004.11.08. 신고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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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끄 엘룰,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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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끄 엘룰은 특이하다. 레지스탕스 운동과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다는 그의 이력이 특이하고 자본론에 심취해있던 사람이 마르크스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개종 이후로 현대문명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비평하는 법학자이면서 사회학자라고만 알고 있던 사람이 성경 주석을 썼다는 것도 나에게는 특이한 모습 중의 하나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런 책이 몇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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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끄 엘룰은 특이하다. 레지스탕스 운동과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다는 그의 이력이 특이하고 자본론에 심취해있던 사람이 마르크스를 버리고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것도 특이하다. 개종 이후로 현대문명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비평하는 법학자이면서 사회학자라고만 알고 있던 사람이 성경 주석을 썼다는 것도 나에게는 특이한 모습 중의 하나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이런 책이 몇 권이나 된다고 한다. 그가 쓴 요한계시록에 관한 책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쓴 책 역시 특별할 거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과연 이 책은 다른 책과 다르다.

 

그 다름의 첫 번째는 그가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보는 방식에 있다.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내용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사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요한계시록을 구조화시킬 때 저자는 ‘7’이라는 숫자를 눈여겨보았다. 일곱 봉인, 일곱 나팔, 일곱 잔 같은 것들이다. 이것들은 누구라도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쟈끄 엘룰은 이것만 본 것이 아니다. 그가 본 진짜 중요한 것은 책의 서두 에 나오는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이야기이며, 맨 뒤에 나오는 이야기에도 특이한 일곱 숫자 구조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앞에 나오는 사례들처럼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또 ... 보니..”(19:11, 17, 19, 20:1, 4, 11, 21:1)라는 표현이 일곱 번 반복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은 또 다른 일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한계시록이 일곱 수 이야기로 구성된 다섯 부분으로 구성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중심(가운데 일곱 이야기의 가운데인 12장)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야기가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8:1-14:5)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뒤따라 나오는 장(章)들에서도 성경의 순서를 따르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구조화시킨 주제에 맞는 순서를 따라간다. 평소에 1장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하는 책들만 보던 나에게는 8장부터 시작하는 이런 시도가 낯설어 보였지만 그에 앞서서 구조를 잡아주고 긴 설명을 붙인 것은 나 같은 독자들을 위한 배려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미 학계에는 요한계시록을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 있다. 쟈끄 엘룰은 그들의 학문적 성과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전통적인 해석들은 어떤 것을 보더라도 다 비슷비슷하다. 그것들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엘룰은 진부한 것들로 취급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정치적인 힘과 이데올로기 같은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은 그가 법과 사회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특별한 관점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황제 숭배를 요구하는 제국의 억압 같은 것을 경험하기 어려운 오늘의 상황에서 돈이나 정치나 이데올로기 같은 것들이 얼마든지 교회와 성도들로 하여금, 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무릎 꿇게 하는 것을 볼 때 요한계시록에서 저자가 본 것이 이 시대에도 적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저자가 쟈끄 엘룰이니만큼 개인적으로 저자의 주장을 대하면서 어려웠던 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역사와 심판, 새 창조라고 하는 주제들로 나아가면서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점이었다. 오랫동안 믿음을 구원의 방편으로 이해해온 나로서는 저자의 이런 주장이 지나치게 파격적인 결론으로 보였다. 쟈끄 엘룰이 이런 확신을 갖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렇게 해야 사랑을 본질로 하는 하나님의 성품이 용납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만약에 하나님이 사람을 심판한다고 하게 되면 그 자체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 저자의 신념인 것 같다. 그래서 그가 보는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항상 세상을 이루고 있는 구조와 조직, 나라와 정치 혹은 돈, 도시, 기술 같은 것들에 집중된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엘룰이 다른 학자들의 주장을 시큰둥하게 여기면서 자주 생각지 않은 해석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문제가 될 필요는 없지만 정작 엘룰이 내놓는 특이한 해석이 저자 자신도 증거를 내놓기 어려운 가설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나를 어렵게 했다. 그의 제안이 때로는 신선한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이 확증되지 않은 가설에 머물게 될 때 독자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지 막막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제목에 있는 것처럼 <요한계시록 주석>이다. 여느 주석처럼 저자는 구절들이 안고 있는 중요한 사상과 가르침을 풀기 위해서 애를 썼다. 그렇지만 이 주석은 보통 주석이 한 절 한 절 장절(章節) 표시를 하면서 본문을 풀어주는 친절을 보이는 형태를 따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엘룰은 요한계시록을 하나의 사상으로 엮은 책처럼 주석을 쓰고 있어서 마치 주석이 아닌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따라서 성경 본문을 비교하면서 그의 생각을 맞춰보려고 한다거나 책장에서 아무 때나 빼서 참고서로 사용하기에는 이 주석 사용에 상당한 불편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엘룰이 이런 식으로 책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이 여느 주석처럼 한 절 한 절 쪼개서 분석하는 것은 계시록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얻어내는데 도움이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엘룰은 요한계시록이 전체로 읽혀져야 한다고 확신하며 각 부분도 전체와의 관계에 의해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확신하고 있다)

 

어쨌거나 엘룰은 지금까지의 주석서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몇 가지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이 결점은 21쪽에 있는 각주에서 잘 서술하고 있다) 그와는 다른 관점의 요한계시록 주석서로 이 책을 쓰려고 한 것 같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충분했고 나에게도 계시록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점으로 보게 했다는 의미에서 도움이 되었다.

YES마니아 : 로얄 k*****h 2010.09.08.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