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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생이 되어 모처럼 듣게 된 강의에 들떠 미술과의 미학 강의 청강을 시도했다. 주요 텍스트는 바로 이 책, 그런데 책 내용과 강의 내용이 똑같아서 청강을 포기했다. 미학을 '예술철학'이라고도 한다. 미학을 다룬 글들을 읽으면 읽을 수록 이 학문은 '예술'보다 '철학'에 기반을 둔 것임을 절감한다. 이미 예술작품을 두고 설명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 안에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용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었던 모습을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본다.
저자는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두고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 작품의 개념은 근대에 들어서야 생겨난 것이라는 의미이다. 시대에 따라 양식을 분류하여 그 틀 안에서 예술작품을 감상하기 시작한 것이 근대였다. 저자는 새하얀 미술관(또는 박물관) 벽에 일정한 프레임(액자) 안에 넣어져 보는 이의 시선 높이에 맞게 전시된 그림을 제도화된 시선으로 보는 행위, 그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것을 종용한다. 그래서 저자는 포스트모더니즘, 다다, 아방가르드, 팝아트와 같은 사조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는 것일테다. 개인적인 생각을 투박하게 표현하자면 미술은 고대엔 주술을 위한 것이었고, 중세엔 종교를 위한 것이었으며 근대에는 감상을 위한 것이었고 현대엔 사회 참여를 위한 것이 된 것 같다. 예술은 그 내용과 목적을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생각한다. 주술과 종교를 위한 예술도 감상하는 우리가 예술로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이 책은 미학 분야에서는 교과서 같은 책인가보다. 외국판 "미학 오디세이"를 읽는 느낌이었다. 일단 이미지와 텍스트가 동등하게 말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현대 미술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 내용으로 보았을 때 최근에 읽었던 "미술, 만화로 읽다"도 생각났다. 르네 마그리트가 파이프 그림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글을 쓰고 그 그림을 위해 미셸 푸코가 비평서 한 권을 썼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놀라움을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느낀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넘어서면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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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첫 번째 장을 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유명한 미술작품들에 대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심지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까지도.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때문에 인류의 유산이라고까지 칭송받는 그러한 작품들에 대해 감히 미술이 아니라는 전제를 던지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마도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의 작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하려고 하는 이 책의 주제일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우리가 미술작품을 접하는 태도 자체에 선입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예술작품 혹은 미술작품들을 우리가 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미지만을 쫓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경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술에 대해 지닌 선입관들 이를테면 고귀한 것, 지위, 진선미의 가치, 문명의 꽃등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래의 이미지를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며, 이러한 선입관들은 과거를 신비화 시키며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에 대한 개념과도 일치한다. 뒤샹은 자신이 만든 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미술작품인 조각이라고 칭했다. 즉, '샘'은 변기이긴 하지만 현재의 미술제도, 다시 말해 미술전시장에 전시함으로써 원래의 변기라는 기능을 버리고 재탄생되었기에 미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뒤샹은 아프리카의 제례용품들을 '원시미술'이라고 부르던 20세기 초반의 미학적 인식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Believing is Seeing> 중의 하나인 'Believing'이란 무엇일까. 존 버거는 자신의 책 <보는 방법 - Ways of Seeing>를 통해 현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언급한다. 버거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살아있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데올로기란 자연스럽거나 그럴법한 상태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지만 항상 유동적이기도 하며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맞아 형성되기도 한다. 결국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는 쉽게 우리들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며, 또한 다른 것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것에 대해 도전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때의 '고정관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인간의 역사처럼 이데올로기는 그 누구도의 강요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며 또한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미술작품을 보는 시대적인 차이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단락에서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언급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이다. 즉, 그것은 다시 말해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는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기독교와 교황청의 권력을 시각화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작품의 개념과는 거리는 있었던 창작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개념 즉, 그 작품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되고 그 시각과 권위는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오늘날 잘 알려진 다빈치의 '해부학 스케치'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빈치에게 그 그림은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이었으며 보고 관찰하고 기록하던 지식의 수단일 뿐 이었다. 시대의 바뀌는 이데올로기는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1960년대 앤디 워홀은 '달러화'라는 화폐그림을 통해 현대의 추앙받는 존재인 스타 역시도 우리 사회에서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는 추상적인 영역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형태의 미술은 서구문화에서 개인이 자신의 인간성을 인식해 가는 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데 발맞추어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 역시도 18세기부터 그 근대적 의미, 즉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이전과는 다른 이 창작물들은 아프리카의 그것과는 다른 기본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아담의 창조'처럼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것도 아닌 미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고대의 예술은 배워야 할 지식이며 기술 혹은 기능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세까지도 계속해서 그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술이라는 용어는 현대적 의미의 그것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독립된 장르가 아닌 자유기예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신구논쟁을 통해 예술은 과학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고 서서히 예술이 과학과 같은 이성적 활동이 아닌 상상력의 소산이아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의식은 미학이라는 개념에서도 공존했다. 미학 역시도 18세기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 중에 하나였다. 근대적인 미학의 윤곽을 처음 세운 칸트는 자신의 책 <판단력 비판>을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은 자연과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연은 신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고 그에 비해 인간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 바로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초기 근대 미술은 근대 초기의 사회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진보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질서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근대 미술사는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재현에서 좀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점진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그림 '적, 청, 황의 구성'에서 수직과 수평, 세 가지 원색(적, 청, 황)과 흑백만으로 축소시키면서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시각의 본질로까지 환원시켰다고 생각했다. 즉, 추상미술만이 근대 세계에 걸 맞는 유일하고 특별 보편한 언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작품들의 나열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주의 사회와 유토피아의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미술은 그들의 바람대로 근대 세계의 보편적 언어가 되기보다는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신비하고 어렵기만한 주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은 오늘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이라는 근대를 열려했던 미술들의 실패로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대도시에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이라는 존재는 18세기까지 귀족층만의 특권이었던 오페라, 고전음악, 문학, 미술 등이 아닌 뭔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고급문화에 반하는 모더니즘 문화였지만 그것은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이름의 예술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20세기 초의 미술은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주제와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문화적 코드는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량생산이라는 전제하에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진술, 인쇄기술, 라디오,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미술이라는 전제하에 사각의 캔버스위에서만 행해지던 틀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한다.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카소는 콜라주라는 형태를 창시한다. 이것은 서구회화의 획일적인 전통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유화물감과 캔버스의 통합은 대량생산된 재료의 활용과 도입으로 제동이 걸리고 순수회화의 성역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그의 시도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요소들 즉 대량생산된 재료에 의존했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후 피카소는 보다 독창적인 양식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현대적 의미로 이해해본다면 아마도 주체성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이해 될 것이다. 개인이 지닌 정체성과 창조성의 원천이었던 주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개념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비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술은 급격한 형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팝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제시되기 시작한다. 또한 틀에 박한 박물관, 미술관에서 탈피해 대안적인 전시공간에서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실험적인 시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 미술이라는 형태는 그러한 현대적인 형태를 지닌 새로운 형태의 미술과 순수미술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순수미술은 이제 일반인이 오히려 접근하기 힘든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순수미술이라는 형태가 비교적 한정된 이들의 여가활동의 한가지이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기초적인 학습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미술이 그 이전의 시대만큼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 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교차하기도 하며 늘 우리 곁에 있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미술을 보는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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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내에 독파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는 1주일을 두고 읽은 책이다. 몇 권의 미술사를 읽고 미술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러나 그 미술사들을 각각 또 다른 지평을 확장해 더 넓고 깊은 미적 감각에 파고 들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기 때문에 읽기를 포기할 일은 아니다. 이 책 역시 또 하나의 미술사이다. 특히 근대이후 미술에 관하여 집중적이며 박물관과 미술관사까지 언급한다. 미술은 근대이후에 생겨난 발명품이며, 원근법은 권력이 종교에서 왕권으로 이행하는데 무관하지 않다. 제도는 사물들에게 그 경계와 관행을 설정해 주고, 미술이란 교황이나 왕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재의 재능에 의해 탄생하는 것이다. 피카소와 브라크, 뒤샹의 작품들은 우리가 인식하며 재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며, 이상적인 본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자명하게 한다. 소쉬르는 언어가 인위적인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주장하였다. - 1910년대 시각적 문화, 언어적 문화 양쪽 모두에서 재현들이 불변의 자연 질서에 따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나타나고 이러한 재현들은 특정 순간에 특정 역사에 의해 형성된 관습과 다름없는 것이다. - 이 세계의 현상들이 영원불변한 본질의 그림자가 아니라 항시 변하는 역사의 일부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음악과 문학, 심리학, 과학에서도 일어났고 그 변수와 파장은 아주 넓다. 그 수많은 예 중 하나로는 이 때 등장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있다. 이 짧은 몇 개의 단락 속에 근대미술사가 녹아 있지 않은가. 무릇 지식인이라면 이정도 자명한 글 한 편을 내어 놓아야 마땅하다. 책을 쓴 저자의 글도 좋지만 글 상자 속 번역자의 글 또한 날카롭다. 역자는 글 상자 속에서 책을 비판하고 설명한다. ‘문명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진보하는 것이며, 인간이 그 발전의 주역이라는 역사주의적, 진화론적 세계관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자체의 발전과정을 다루는 정통 미술사의 방법론에 대해 비판적인 저자는 그 대안으로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다루는 마르크스주의적 방법론, 최근의 기호학과 구조주의를 받아들인 시각, 페미니스트적 비판 등을 적절히 혼합하여 이 책의 내용을 전재하고 있다. 운운…’ 그런데 글 박스 안의 글자들이 고딕체라 읽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흠이다(실제로 나는 그 글들 중 반도 읽지 못했다). 기실 역사에서 근대이후 현대까지의 사건 사고 사조 철학 예술 과학 다방면에 걸친 이 잡다한 정신사에 대하여 우리는 어지럼증을 앓고 있는 독자들이다. 누구하나 이렇게 명쾌하게 설명한 작가는 없지 않았나 생각한다.
○. 미술은 근대 - 지난 200년간 -의 발명품이다. 그대 이전의 사람들이 생산한 뛰어난 건물들과 물품들은 우리의 문화에 의해 차용되어 미술로 변형된 것이다.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다양한 제도들에 의해 형성되고 정의된다. 제도는 사물들에게 그 경계와 관행을 설정해 준다. 이는 액자틀이 그 안에 있는 것을 회화로 보게 만들고 좌대가 그 위에 있는 것을 조각으로 보게 만드는 것과 같다. ○. 우리 시각의 기층을 형성하고 있는 원근법은 근대의 ‘주체’ 인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원근법을 발명한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은 과학의 힘으로 세계를 고정화, 체계화시키려 했으며, 이것은 권력구조의 기반이 종교에서 절대왕권으로 옮겨가고 있었음과 무관하지 않았다. 원근법은 눈과 대상의 관계를 단순화시켜 주위의 사물로부터 일체의 영향을 받지 않고 격리된, 아무런 동작이 없는 사람이 보는 것과 같은 시각세계를 보여준다. ○. 위대한 근대미술은 이를 제작하려는 영감을 받은 한 사람의 창조자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영감은 천재성이라는 귀한 재능으로 인식되어 왔다. ○. 피에르 부르디외는 그의 책 ‘구별짓기 : 취미의 판단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에서 ‘취미는 계층을 구분하고 구분한 자들 구분시킨다.’라고 말한다. 취미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며 생산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미술과 문화의 소비가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양상을 관찰하였다.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순수미술을 감상할 줄 아는 것은 자신을 부각시키는 수단이며, 감상자가 어떤 사회적 계급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추상 화가들은 추상미술의 순수함과 완벽성, 조화, 균형이 관객들을 심오하게 감동시켜 이 그림들이 근대세계에 형이상학적 위안을 줄 수 있다고 믿었다. ○. 꼴라쥬를 만들기 위해 브라크와 피카소는 자신들이 생산하지 않은 요소들을 사용해야 했고, 그리하여 창조를 하는 미술가의 능력이란 그들 밖의 것 - 즉 그들 문화의 부화와 언어 - 에 의존하고 있음을 시인했다. ○. 꼴라쥬와 레디메이드들은 모든 재현의 형태 - 그림이든 단어든 제스쳐이든간에 - 가 문화적 언어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피카소와 브라크, 뒤샹의 작품들은 우리가 인식하며 재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며, 이상적인 본질로 존재하는 것t이 아니라 역사에 의해 형성되는 것임을 심오하고도 근본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 소쉬르의 중요한 공헌은 단어가 의미와 본질적인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면에서 언어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의미는 관습을 통해 창조되는 것이며 특정한 맥락과 지역사회, 그리고 역사라는 한계를 가진 것이다. 소쉬르는 언어가 인위적인 사회적 구축물이라고 주장하였다. - 1910년대 시각적 문화, 언어적 문화 양쪽 모두에서 재현이 불변의 자연 질서에 따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인물들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재현들은 특정 순간에 특정 역사에 의해 형성된 관습과 다름없는 것이다. - 이 세계의 현상들이 영원불변한 본질의 그림자가 아니라 항시 변하는 역사의 일부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이 변화는 음악과 문학, 심리학, 과학에서도 일어났고 그 변수와 파장은 아주 넓다. 그 수많은 예 중 하나로는 이 때 등장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원리가 있다. ○. 추상성을 실험하던 20세기 초 미술가들은 추상미술이 현대세계의 미학적, 형이상학적 구원이 아니라는 것도 깨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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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첫 번째 장을 열며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평가받는 유명한 미술작품들에 대해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심지어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까지도. 그렇다면 저자는 무엇때문에 인류의 유산이라고까지 칭송받는 그러한 작품들에 대해 감히 미술이 아니라는 전제를 던지게 했을까라는 질문에 우리는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마도 이 책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의 작가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가 말하려고 하는 이 책의 주제일 것이다.
원래 이 책의 원제는 <Believing is Seeing> 즉,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지만 우리가 미술작품을 접하는 태도 자체에 선입관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앞에서 말했던 예술작품 혹은 미술작품들을 우리가 접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던 '예술'이라는 단어에 대한 이미지만을 쫓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각자의 경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예술에 대해 지닌 선입관들 이를테면 고귀한 것, 지위, 진선미의 가치, 문명의 꽃등에 대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원래의 이미지를 오해하게 만든다는 것이며, 이러한 선입관들은 과거를 신비화 시키며 불투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것은 미술에 대한 개념과도 일치한다. 뒤샹은 자신이 만든 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미술작품인 조각이라고 칭했다. 즉, '샘'은 변기이긴 하지만 현재의 미술제도, 다시 말해 미술전시장에 전시함으로써 원래의 변기라는 기능을 버리고 재탄생되었기에 미술작품으로 본다는 것이다. 또한 뒤샹은 아프리카의 제례용품들을 '원시미술'이라고 부르던 20세기 초반의 미학적 인식에 대해 이렇게 언급한다.
그렇다면 이 책의 원제 <Believing is Seeing> 중의 하나인 'Believing'이란 무엇일까. 존 버거는 자신의 책 <보는 방법 - Ways of Seeing>를 통해 현실 이데올로기에 대해 언급한다. 버거가 말하는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우리의 살아있는 관계'로 묘사된다. 이데올로기란 자연스럽거나 그럴법한 상태처럼 보이는 것을 말하지만 항상 유동적이기도 하며 특정한 역사적 순간을 맞아 형성되기도 한다. 결국 효과적인 이데올로기는 쉽게 우리들 인간에게 받아들여지기도 하며, 또한 다른 것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아무런 것에 대해 도전받지도 않는다. 그것은 그때의 '고정관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오랜 인간의 역사처럼 이데올로기는 그 누구도의 강요도 없이 사라지기도 하며 또한 새로운 것이 생겨나기도 한다. 바로 그것이 미술작품을 보는 시대적인 차이의 이데올로기일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은 무엇을 말하는가
첫 단락에서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언급된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는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의 일부이다. 즉, 그것은 다시 말해 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배경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의 창조'는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정치적 권위를 위한 도구였으며 기독교와 교황청의 권력을 시각화한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작품의 개념과는 거리는 있었던 창작물이었던 것이다. 결국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개념 즉, 그 작품에 대해 절대적 권위를 가진 미술가에 의해 창조되고 그 시각과 권위는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에 미술작품이 아니라고 단언했던 것이다. 오늘날 잘 알려진 다빈치의 '해부학 스케치'역시 마찬가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빈치에게 그 그림은 세계를 이해하는 수단이었으며 보고 관찰하고 기록하던 지식의 수단일 뿐 이었다. 시대의 바뀌는 이데올로기는 현대에 와서도 그대로 적용되기도 한다. 1960년대 앤디 워홀은 '달러화'라는 화폐그림을 통해 현대의 추앙받는 존재인 스타 역시도 우리 사회에서 의미와 가치가 만들어지는 추상적인 영역 속에서 탄생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형태의 미술은 서구문화에서 개인이 자신의 인간성을 인식해 가는 방식이 혁명적으로 변화하는데 발맞추어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 역시도 18세기부터 그 근대적 의미, 즉 천재적 개인의 독창적인 산물이라는 의미를 지니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 이전과는 다른 이 창작물들은 아프리카의 그것과는 다른 기본적으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져 있으며, '아담의 창조'처럼 종교적인 배경을 갖고 있지도 않으며 정치적인 선동을 위한 것도 아닌 미적 아름다움을 지닌 것이다.
고대의 예술은 배워야 할 지식이며 기술 혹은 기능이기도 했다. 그것은 중세까지도 계속해서 그러한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르네상스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술이라는 용어는 현대적 의미의 그것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독립된 장르가 아닌 자유기예의 하나로 인식되었다. 17세기 말 프랑스에서 일어난 신구논쟁을 통해 예술은 과학으로부터 분리되기 시작했고 서서히 예술이 과학과 같은 이성적 활동이 아닌 상상력의 소산이아는 관념이 싹트기 시작한다. 이러한 의식은 미학이라는 개념에서도 공존했다. 미학 역시도 18세기말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개념 중에 하나였다. 근대적인 미학의 윤곽을 처음 세운 칸트는 자신의 책 <판단력 비판>을 통해 순수한 아름다움은 자연과 예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즉, 자연은 신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고 그에 비해 인간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움이 바로 예술이라고 평가했다.
초기 근대 미술은 근대 초기의 사회를 이루는 유기적이고 진보적이고 자기반영적인 질서를 재현하고 있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이 되면서 근대 미술사는 사실적이고 환영적인 재현에서 좀 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이미지로 점진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한다. 몬드리안은 자신의 그림 '적, 청, 황의 구성'에서 수직과 수평, 세 가지 원색(적, 청, 황)과 흑백만으로 축소시키면서 그림의 구성요소들을 시각의 본질로까지 환원시켰다고 생각했다. 즉, 추상미술만이 근대 세계에 걸 맞는 유일하고 특별 보편한 언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러한 추상적인 작품들의 나열은 그들이 꿈꾸던 이상주의 사회와 유토피아의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상미술은 그들의 바람대로 근대 세계의 보편적 언어가 되기보다는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이해하고 감상할 줄 아는 신비하고 어렵기만한 주제로 남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들은 오늘까지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과 추상미술이라는 근대를 열려했던 미술들의 실패로 이름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을 거쳐 19세기가 되면서 유럽의 대도시에는 노동자 계층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주어진 여가시간이라는 존재는 18세기까지 귀족층만의 특권이었던 오페라, 고전음악, 문학, 미술 등이 아닌 뭔가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요구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고급문화에 반하는 모더니즘 문화였지만 그것은 대중문화라는 새로운 이름의 예술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20세기 초의 미술은 대중문화와 대중매체라는 주제와 연관 지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문화적 코드는 새롭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대량생산이라는 전제하에 발전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사진술, 인쇄기술, 라디오, 영화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미술이라는 전제하에 사각의 캔버스위에서만 행해지던 틀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시도가 행해지기 시작한다.
현대 미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피카소는 콜라주라는 형태를 창시한다. 이것은 서구회화의 획일적인 전통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오게 된다. 유화물감과 캔버스의 통합은 대량생산된 재료의 활용과 도입으로 제동이 걸리고 순수회화의 성역은 파괴되기 시작한다. 그러한 그의 시도는 미술가들의 능력이 자신이 창조하지 않은 요소들 즉 대량생산된 재료에 의존했다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이후 피카소는 보다 독창적인 양식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그것을 현대적 의미로 이해해본다면 아마도 주체성에 대한 연구라는 주제로 이해 될 것이다. 개인이 지닌 정체성과 창조성의 원천이었던 주체라고 하는 자유주의적 인간개념을 시각적으로 훌륭히 비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술은 급격한 형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순수미술 뿐만 아니라 팝 아트,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다양한 형태를 통해 제시되기 시작한다. 또한 틀에 박한 박물관, 미술관에서 탈피해 대안적인 전시공간에서 비디오 아트,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실험적인 시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 미술이라는 형태는 그러한 현대적인 형태를 지닌 새로운 형태의 미술과 순수미술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예전과 달리 순수미술은 이제 일반인이 오히려 접근하기 힘든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순수미술이라는 형태가 비교적 한정된 이들의 여가활동의 한가지이며,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기초적인 학습의 한 과정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순수미술이 그 이전의 시대만큼 문화에 끼치는 영향력이 약함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대중과 함께 호흡하고 교차하기도 하며 늘 우리 곁에 있는 우리가 쉽게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적 의미의 미술을 보는 시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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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술'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미술창작의 의미 및 문화 전반이라는 방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작품의 예를 통해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미덕을 지닌 책이다. 예술 전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자신을 알기 위해-어떤 의미에서는 존재하거나, 나 자신으로 실존하기 위해서-사람은 문화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며 문화적 코드와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자신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저자는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예술에 대한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예술은 예술가 개인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어떤 것이므로, 예술이라는 것 역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창작되고 이해되는 어떤 것이 된다. 그래서 저자는 과감하게도 '모나리자'도, '아담의 창조'도 미술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이 제작되었던 당시에는 '미술'이라는 개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술'이라는 개념은 근 200년 동안 발명되어 사용된 개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본질적인 것'에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대중문화가 하다못해 사람들의 침대속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대에 미술이란, 그리고 예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현대는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구분이 모호해지고 순수예술이 더이상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세상이 된 듯하다. 그러나 저자는 '미술은 때로는 대중문화와도 교차하거나 결합하는, 매우 강력한 하위문화 중 하나다. 또 최상일 때, 미술은 풍부한 표현과 아름다움, 그리고 엄격한 사회비판을 제공한다.'고 한다. 대중문화와 순수예술에 대해 엄격한 구분을 두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 거부감을 표하면서도 순수예술이 지닌 성역에 대해서는 명백한 선을 긋고자 하는 의도가 보인다. (물론 그 경계가 상당히 모호하게 보이긴 하다.) 결국 이 책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를 창작하는 것은 자신 외부에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방식에 달려 있다.'는 것인 듯하다. 좀더 간단히 말하자면 결국,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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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을 처음 입문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권하고싶은 책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있는 미술품들... 사실은 그것들은 관상용의 미술이 아니다.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하게만드는 문구지만... 책을 찬찬히 읽어나가다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연하다고 여기고있는 것들이 사실은 당연한게 아니라는거... 기막힌 발상의 전환이 아니라 어찌보면 원래의 모습을 우리가 외곡하고 보고싶은대로 보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어렵고 깊이 있게 느껴지는 미학이라는 분야를 쉽고 빠르고 그리고 재미있게 만들어주는 미학 입문서. 더불어 수많은 인문학까지 두루 맛볼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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