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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을 저지른 창백한 얼굴의 범죄자가 붉은 옷을 입은 법관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법관은 말한다. “‘어찌하여 이 범죄자는 살인까지 자행하고 말았는가? 강탈이나 할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그의 가련한 이성은 이 광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를 설득하려 들었다. ‘피라니! 이 기회에 최소한 강탈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앙갚음이라도 하지 않겠느냐?’”
과거 범죄자를 처벌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군주의 분노를 읽을 수 있다. 예컨대 국왕시해 미수범이자 루이15세의 시종무관이었던 다미엥은, 처형대 위에서 가슴, 팔, 넓적다리, 장딴지를 뜨겁게 달군 쇠 집게로 고문을 가하고, 그 오른손은 국왕을 살해하려 했을 때의 단도를 잡게 한 채, 유황불로 태워지는 고문을 거의 열 시간 가량 받고 시체마저 흔적도 없이 태워진다. 마찬가지로 오렌지 공 기욤의 살인범은 끓는 물속에 담겨지고, 수족(手足)이 잘려나가고 온몸이 불로 지져지는 고문을 무려 18일 동안 받게 되는데, 군주는 이처럼 처벌을 통해 성공적으로 복수할 수 있었다.
감시와 통제의 권력은 사법제도와 같은 거대한 영역, 범죄와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푸코는 성(性)이라는 일상적이고 미시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이를 찾아내는데, 바로 반(反)자위행위 캠페인이 그것이다.
푸코는 새로운 통치체제로의 변화를 언급하면서, 앞서 말한 ‘의도’의 문제를 상기시키는 것으로 강의를 마무리 한다. 새로운 권력에 맞물려 규율에 맞춰 길들여지고, 그러한 훈육을 스스로 내면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상적인 것의 장 즉 정상적인 의도를 갖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범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범죄자의 억제할 수 없는 ‘비정상적인’ 충동이다. 마찬가지로 자위행위와 관련된 담론들이 보여주는 것은 ‘비정상적인’ 성적 경향 혹은 성적 충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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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학기 내내 정성껏 정리한 노트가 완성되었을 때의 뿌듯함은 누구나 느껴보았을 것이다.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그 당시의 수업 분위기에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새록새록 떠오를 때의 들뜸, 그것이 바로 공부하는 재미가 아닐까.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지난 1974-75년 동안 강의된 내용을 정리한 이 책이 갖는 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많은 청중들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의 완벽한 정리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책은 강의에 선행해 이루어진 일종의 자기 정리인 것이다. 거기에, 이 책을 읽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콜레주 드 프랑스가 어떤 곳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이다. 이 곳에서의 강의는 일반인들에게 자유롭게 공개되며 무료이다. 시험도 없으며, 수강에 의한 학점이나 학위 취득도 없다. 게다가 이 곳에서 강의할 수 있는 교수는 프랑스 국가원수가 직접 임명한다. 강의의 내용에 대해 어느 누구도 통제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이런 점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할 수 있는 것은 일종의 특권이다. 당대의 유명한, 그 중에서도 선별된 학자들은 모두 이 곳을 거쳤고 푸코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다루어진 내용은 자유 그 자체이며, 푸코의 (초창기) 학문적 지향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광기와 비이성="">, <임상의학의 탄생=""> 등 60년대 초반에 쓰여진 내용들이 어느 정도 집대성(!)되었음을 이 책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푸코의 철학은 늘 나에게 절대적인 것에 대한 의심의 가능성을 불러 일으킨다.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 짓기에 의해 오늘날의 사회는 이루어지며, 우리 역시도 우리 자신과 다른 것들을 비정상의 범주로 몰아넣음으로써 우리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구분 짓기의 기제는 다수가 공유하고 더 나아가 권력에 의해 정당화됨으로써 정상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은 분명 사회적인 맥락을 띄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각 시대에 따라 ‘정상’으로 여겨지는 내용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중세의 페스트 환자에서부터 시작하여 19세기의 자위 행위를 하는 아동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비정상으로 규정한 범주는 실로 다양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웠던 것은 이러한 비정상에 대한 제재, 규제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의 인류는 견고한 체제를 갖추지 못했으며, 비정상으로 구분된 이들을 사회로부터 철저히 추방함으로써 정상의 순수성을 유지하려고 든다. 하지만 시간의 흐름과 함께 인류는 보다 견고한 감시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이는 권력의 분화 과정을 수반했다. 특정 병을 앓고 있는 이들을 하나의 마을, 섬 등에 가두고 그 안에서만 생활을 하도록 하고, 이들 집단을 감시하는 또 다른 집단을 설정하는 속에서 인간 집단은 감시 권력을 가진 자와 감시를 당하는 자로 양분된다. 이러한 권력관계는 견고해짐과 동시에 내면화됨으로써 그것이 권력관계인지 조차 눈치채기 힘들 정도로 변모해간다. 자신의 성적 타락(?)에 대해 성직자에게 고해성사를 행하는 그 순간 성직자와 성도 사이에는 위-아래의 권력구조가 설정된다. 아동의 잠자리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더 나아가 아동이 가진 모든 성적 욕구를 억압하는 위치에 서는 그 순간부터 부모는 아이보다 높은 위치에 서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억압 기제가 항상 온전히 작동했던 것은 아닌 듯싶다. 아동에게 밀착하여 그들의 성적 타락을 막길 기대되었던 부모들 중에는 근친상간의 유혹에 빠져든 이도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타락으로 인하여 비정상인의 범주에 속하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근친상간 행위는 아이의 욕구로부터 기인했음을 끊임없이 각인시킨다. 고해성사를 주재하는 성직자가 성도의 죄에 대해 직접적으로 묻지 아니하는 것 역시 비정상에 대한 강한 반발력 때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흥미로운 연구는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다. 물론 비정상의 범주가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오늘날의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짓는 기준을 발견하는 것, 더 나아가서 보다 강고해졌을 이러한 구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 자신의 몫일 것이다. 임상의학의>광기와> |
| 이 책은 순전히 제목 때문에 읽은 책이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비정상인인지 궁금했다. 니체에게서 계보학의 형식을 물러받은 미셸 푸코는 ''비정상''이라는 개념이 기득권자에 의해 규정된 허구의 개념이라고 말한다. 정신병자, 이방인 등이 격리되고 수용되는 것은 지배권력의 음모에 의한 것이라는 푸코의 진단은 가히 충격적이다. 한번도 이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는 나로선 엄청난 인식의 충격이었다. 그에 따르면 시대의 모든 보편 타당한 질서들은 기실 지배권력에 의해 편성된 허구체계이다. 즉 그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다. 그러므로 보편이란 개념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은 주류의 지배질서이고 체제법이라는 것이다... 심리학을 신봉하지는 않지만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왜 저자는 이런 책을 쓸 수밖에 없었을까를 생각한다. 단정지을 순 없으나 푸코의 인생에서 동성애가 차지하는 비율을 생각해보면 이 책의 탄생 배경에 대해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물론 단정이겠지만.... 끝까지 읽었음에도 아주 희미한 단상만이 남는다. 푸코가 변호하고자 하는 수많은 이방인들, 낯선 타자들... |
| 이 책의 무엇보다 큰 장점은 그의 강의를 직접 (듣지는 못하지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행히 그 당시 크게 발달했던 녹음기에 의해 보존된 이 강의들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물론 그의 육성과 손짓, 그리고 판서를 직접 마주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겠지만. 책의 내용은 앎과 권력의 문제, 즉 규율 권력, 규격화 권력, 생체 권력으로 압축되며, 교정 불가능자, 자위 행위자에 대한 사회의 훈육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저작을 읽어오신 분이라면 논의를 잘 따라가실 것이다. 강의란 책이나 논문과는 틀려서 강연자의 스타일과 앎의 깊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사실, 우리에게 근대를 대상화하고 또 비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다 준 것은 푸코에서 정점을 이루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그의 연구들은 실증적이고 구체적이면서 또 기존의 체제를 뿌리부터 와해시키는 힘이 있었다. 이 강의 속에서도 그런 힘의 근원들이 보인다. 기억에 남는 책이 될 것 같다. 지금 세 부류가 생각난다. 정상인들, 푸코, 비정상인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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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의 책은 밀림을 연상시킨다는 한 번역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독자라면, 이 책, [비정상인들]이라는 콜레주 드 프랑스의 푸코 강의록은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푸코의 육성을 듣지 못했던 독자들에게 콜레주 드 프랑스라는 프랑스, 아니 유럽 지성의 전당에서 푸코가 행했던 열정적인 강연을 체험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물론 콜레주 드 프랑스라는 우리에게 생소한, 혹은 경외심을 불러일으키는 지성의 장에 대해 우리가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푸코 역시 오히려 그런 미사여구에 치장된 자신의 강의록을 만약 생전에 접했다면, 그 특유의 웃음(냉소)으로 던져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책은 우리에게 푸코의 이전 저작들에서 볼 수 없는, 사유의 非체계성(아니 前체계성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이다), 원사료들을 읽어내는 푸코의 치밀한, 그리고 이단적인 독해방법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19세기에 작성된 정신감정서라는 문서를 읽어나가면서 시작되는 흥미로운 강의의 도입부에서, 푸코는 유럽인들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데카르트의 이성의 빛에 대한 이단적인 독해를 시도한다. 그 길은 물론 하나의 가설에 따라 논리정연하게 전개되는 길은 아니다..
푸코의 논의를 통하여 이제는 우리에게도 친숙한..
우리가 생각하는 이성 vs 광기라는 대립구도는 고전주의 시대에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이야기나, 문명이라는 이름하에, 그리고 빛의 시대라는 미명 하에 광인들을 포함한 비정상인들이 이른바 '정상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사는 영역에서 추방되고, 감금되며, 나아가 그 감금은 단순한 추방이 아닌 페스트의 모델과 같은 끊임없는 주의와 관리기술에 의해 지식이 만들어지는 장이었다는 등등의 이야기는..
안락의자에 앉아 사색하는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러한 가설들(이제 하나의 이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은 끊임없이 고문서를 뒤지며, 흔히 자료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던져버리는 휴지조각에 계속 촉각을 곤두세우며, 이성과 합리성에 의해 비정상인으로 재단되었던 사람들의 숨겨진 육성을 듣고자 했던 푸코의 처절한 노력에 의해 발굴된 것이었다. [비정상인들]은 바로 그 과정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우리는 원사료를 접하면서 끊임없이 청중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는 푸코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간혹 검증하기 힘든 대담한 가설을 제시하기도 하고, 세부적인 사실에서의 오류를 다음시간에 청중에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물론 강의 자체가 하나의 일관된 논리에 의해 전개된 것은 사실이지만, 강의가 결코 늙은 교수의 빛바랜 강의록을 읽어나가는 것만이 아닌(한국의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강의실에서 한번쯤 경험했음직한), 청중에게 그리고 바로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의문의 주사위를 던지는 자세라는 점을 몸소 보여주는 푸코의 모습은 현대 한국사회의 죽어버린 대학의 강의실의 모습과 함께 씁쓸함을 던져주기도 한다.
따라서 이 책은 푸코의 다른 저작들보다 어쩌면 더욱 밀림을 연상시킬 지도 모른다. 푸코를 따라 끊임없이 증식되는 사유들을 헤치고 지나가면 하나의 길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푸코가 간 길일 뿐이다. 그 사료를 읽어내면서 우리는 전혀 다른 길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그건 1세계 유럽과 3세계 아시아(한국)이 가진 경험의 차이이다. 전혀 다른 길을 가면서도 끊임없이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견지하는 것, 그리고 두 길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서, 우리는 보르헤스가 산해경을 보면서 터뜨렸던 웃음의 의미를 깨달을 지도 모른다. 푸코의 이 강의록은 어떤 의미에서 바로 그런 가능성을 제시해주는 장이다. [인상깊은구절] 18세기가 '규격화의 효과를 내는 규율'에 의해 그리고 '규율-규격화'의 체제에 의해 새롭게 마련한 것은 아마도 억압적이 아니라 생산적인 권력이다. 거기서 억압은 뭔가 만들어내고, 창조하고, 생산하는 중심 메커니즘들에 비해 측면적·부차적 효과만을 내고 있을 뿐이다. 또한 18세기가 만들어낸 것은(18세기말 왕정, 소위 구체제의 사라짐은 정확히 이것의 결과이다) 상부구조가 아니라 힘들의 게임·분배·역동성·전략·효과 등에 통합된 권력이다. 그러니까 힘의 게임과 재분배에 직접적으로 투입된 권력이다. 18세기는 보존하는 권력이 아니라 자체 안에 변화와 쇄신의 원칙을 간직한 권력을 정착시켰다. 마지막으로 18세기는 무지(無知)를 이용하는 권력이 아니라 앎의 형성에 의해서만 기능하는 권력 유형을 만들어냈는데, 이것은 규율과 규격화를 통해서였다. 이때 앎은 권력의 결과이며, 동시에 권력행사의 조건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