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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프롤로그를 다시 읽으면 마음이 저린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 것처럼, 아버지는 아버지이고 딸은 딸일 따름이라는 인식에 도달하는 데 필요했던 수많은 공부와 성찰들… 책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요즈음의 기준으로 좋은 아버지는 아닌 것 같다. 자식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자식의 마음을 살피는 아버지이기보다는 종교의 이름 아래 어떤 보수적인 가치들을 따르기를 강요하는 아버지에 가깝다. 자기가 물려줄 것은 신앙이라는 가장 고귀한 것뿐이라는 사람. 그는 순종과 자기 포기라는 통치 수단을 자기뿐 아니라 가족 구성원들에게도 적용한다. 그런 집에서 태어난 딸은, 착하고 좋은 딸이 되고 싶은 어떤 천성을 타고난 딸은, 그 통치에 괴로워하면서도 순응하며 자라지만 세월이 거듭될수록 점점 혼란을 느끼고 방황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 책은 그런 아득했던 시간의 기록이고, 부모를 이해하면서 또 독립해 나가는 과정의 기록이다. 자녀로 태어나 부모의 양육 아래 방황했던 경험이 있는 이라면 (우리 모두가 어느 정도 그럴 테니)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부모님이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언젠가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부모이자 동시에 신앙의 안내자/스승인 이들의 명과 암을 인식하는 일은 더 큰 힘과 용기가 필요해서, 그걸 수행하는 저자에게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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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어법의 고점 인듯한 제목에 우선 끌렸다. 목사딸 vs 백팔배. 언뜻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지만 꼭 불자가 아니어도 백팔배는 할 수 있고 절에 갈 수도 있지~라는 생각에 어떤 내용일지 궁금했다. 즐겁게 라고 쓰지는 못하고 아프게 완독했다. 중반까지는 정말 "화" 가 나서 열이 확 올랐다. 부모와 목사라는 절대적 지위를 이용해 '가스라이팅' 을 넘는 '종교라이팅' 이라고 해야할지- 정신적/육체적 위력을 행사하는 부모 앞에서 무력한 주인공(?) 에게 화가 났고 때때로 그 안에서 내 부모의 모습이 보여 더 분노했다. 중반 이후 에세이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분연히 일어나 부모에게 저항하는 복수의 구조를 생각했다면 영화나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본 것이다. 현실은 그렇게 이분법 구조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책은 보여준다. 푸코, 버틀러, 심리학, 종교학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부분 부터는 분량을 나누어 새벽 시간, 정신이 비교적 맑을 때 읽어 나갔다. 읽으면서 '파도' 치는 상상을 자주 했다. 밀려 갔다 밀려 오는 파도. 그 파도에 마주 서서 온 몸으로 그것을 맞을 수도, 파도를 흐름을 서핑하듯 타서 넘을 수도 있다는 말을 이 책을 통해 글로 경험했다. 여기 언급된 부모님의 삶에 나는 이입하지 못했다. 신념이 중요하나 신념으로만 살수 없는게 인간이고 자신의 자녀에게 특히, 장녀에게 부과하는 막중한 심적 부담이 버겁게 다가왔다. 공부를 하며, 백팔배를 하며, 타투를 하며 나아가는 저자의 모습에서 점차 틀 안에 갇힌 나도 빠져 나오고 있다는 생각으로 변했다. 일갈하고, 해결하고, 시원하게 만드는 책도 중요하지만 사실 현실은 이쪽에 가깝지 않나 싶다. 지난하리 만치 천천히 흘러가며 파도를 타 넘듯이 변하기도 하고 제자리에 있기도 한 관계. 부모 와 자식, 종교 와 인간, 타자 와 나 를 돌아보게 하는 읽기였다. *마침 이 책을 펴낸 <온다프레스> 의 '온다' 가 이탈리아어로 '파도' 를 뜻한다는 문장을 책날개에서 보고 놀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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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성장한 저자가 부모에 의해 강제된 신앙의 삶이 어떠한지, 그런 삶이 어떻게 ‘자기파괴’로 치닫지 않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고백과 학제적인 보고서라 할 수 있다. 그렇다보니 자녀의 입장에서 비단 종교 문제가 아니더라도 수용적이지 않은 부모와의 관계로 부터 느꼈던 고통과 상실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동시에 양육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지금 자신의 양육방식이나 훈육이 자신의 의도와 다른 결과를 자녀에게 줄 수 있음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무엇보다 푸코와 라캉 그리고 지젝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의 이론과 연결지어 학제적으로 자신의 문제와 방법을 고찰해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물론 개신교인 입장에서 아니면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자기치유 과정으로 봐도 좋을 것 같다. 고백하자면 책을 읽는 동안 지금 열거한 여러 시점이 계속 바뀌게 되었다. 초반에는 딸을 두고 아버지는 강압적으로, 어머니는 교묘하게 ‘네가 원한 것’이라 말하는 부모의 모습에 불편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기로 결정한’ 저자의 선택이 의아하게 느껴졌다가 중반부를 지날수록 왜 저자가 동생과 달리 떠나거나 반항하기 보다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추위를 느끼려고’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살면서 ‘착한 딸’ 콤플렉스에 빠졌던 이들이라면 납득이 쉬울 것이다. 특히나 서울대를 나온 부모님, 오갈데 없는 이들을 가족처럼 보살펴주며 낳은 자식이 아닌 이들에게 자발적으로 엄마가 되어주는 헌신 그리고 처절할 정도의 자기부정과 비움에서 숭고함마저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백팔배인가. 나는 오랜 시간 부모님의 ‘금욕주의적 엄격성’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나를 ‘나’로 살지 못하도록 억압했다고 말이다. (…) 하지만 ‘전복’이 필요한 대상은 금욕적 삶 자체가 아니었다. 이것이, 푸코가 말한 ‘자기를 배려하고 돌보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포기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문제였던 것이다. 203쪽 저자는 그저 느끼고자 한다. 이전에 할 수 없었던 ‘세상의 기쁨’ 혹은 세상 그 자체를 그저 느끼기로 마음 먹는다. 백팔배도 이런 선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부모님이 개신교인 이라서 반항을 위해 타종교에 빠지는 것은 이미 해봤고, 그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무의미한 일인줄도 이미 알았다. 그러니 그저 할 뿐이다.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 온전히 ‘나’로 살아가기 위해 백팔배를 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오랜 세월 온전한 확신이 없어, 교회를 다녔던 지난 날의 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리고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더 신앙과 관련된 활동을 마치 저자의 어머니처럼 부드러운 말투로 그러나 일순간 공격적으로 아이를 대하는 내 모습도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라캉의 ‘속지 않는 자가 길을 잃는다’를 주해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속는 자’는 본인이 자진한 것이니 계속 속아도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기꺼이 속는 자가 그 상태에 머물러 있게 되면, 그 또한 이를 정당항화 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진정으로’ 기거이 속는 자는 자리한 곳에 계속해서 머물면 안 된다. 147쪽 책 제목은 목사인 아버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불자가 된 듯한 뉘앙스지만 책을 읽으면서 종교와 인간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책인 것은 분명했다. 무엇보다 저자의 심리변화나 성장과정을 보면서 무언가를 부정하려고 할 때, 그 상대가 부모일 때 자신의 자리를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가이드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런 이유로 서평의 시작과 끝이 어쩌면 애매하게 두리뭉실 해졌는지도 모른다. 그저 처음부터 꼭 직접 한 자 한 자 읽어보고 스스로의 삶과 시도했던 방식과 비교하고 방법을 찾아가면 좋겠다. 저자가 언급했던 법륜스님의 말처럼 ‘내 문제’라면 상대가 아닌 내게서 답을 찾아야한다. #목사딸의백팔배 #이정은 #종교학 #자기배려 @onda_pres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