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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사라진 자리, 고요하고 평온한 순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머무는 시간. 침묵은 그저 말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침묵은 너무도 다채로운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의미까지 동시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침묵은 결코 수동적인 상태에 머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돈을 지불해서라도 얻고 싶은 평온이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일상적으로 감당해야 하는 소음 때문에 누릴 수 없는 사치가 되기도 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상대를 침묵시킴으로써 자신의 힘을 행사하고, 반대로 약자는 침묵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도 있다. 말하지 않는다는 동일한 행위가 어느 순간에는 억압의 결과가 되고, 다른 순간에는 저항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침묵의 의미는 침묵 그 자체보다 누가, 언제, 무엇을 위해 침묵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침묵이라고 믿었던 순간에도 완전한 침묵은 좀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극도로 조용한 공간에서는 오히려 자신의 몸이 내는 소리가 선명해지고, 소리 내지 않고 책을 읽을 때조차 우리의 뇌는 문장을 일종의 소리로 받아들인다. 겉으로는 아무 소리도 없는 독서의 순간에 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가장 깊숙이 듣고 있는 셈이다. 침묵하려 할수록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소리가 모습을 드러낸다는 역설은 무척 인상적이다. 예술에서 침묵이 작동하는 방식 역시 흥미롭다. 음악에서 음과 음 사이의 멈춤이 다음 소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고, 그림 앞에서 언어가 물러난 자리에는 감각과 감정이 들어선다. 말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이 있다. 침묵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말과 소리가 차지하던 자리에 다른 무언가가 들어올 공간을 만드는 행위인지도 모른다. 이 책의 가장 큰 재미는 이렇게 하나의 주제를 붙잡고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생각을 끊임없이 뻗어나가게 한다는 데 있다. 음악과 문학, 경제와 계급, 권력과 폭력, 과학과 신체, 독서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이야기는 ‘침묵’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축을 중심으로 새로운 관점을 다채롭게 펼쳐 보인다. 한 가지 주제를 이토록 다양한 층위로 뒤집고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개념 하나가 얼마나 많은 질문을 품고 있는지 발견하게 하는 것. 그것이 『침묵』이 주는 가장 큰 지적 즐거움이었다. 이 책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침묵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침묵은 소리가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미처 듣지 못했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비밀스러운 순간인지도 모른다. #침묵 #지식산문 #복복서가 #인문에세이 #책추천 *도서증정 @bokbokseoga_publishing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