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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보자마자 질문 병(?)이 도졌습니다. 저자는 일본에서 저명한 과학자임에도 “과학적으로 옳다는” 것이 “착각”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과학자로서 자가당착(自家撞着)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옳음과 옳지 않은 것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착각에 빠지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 책은 이에 답하는데요. 풍부한 역사적 사례와 연구 결과를 근거로 설명과 주장을 친근하게 이야기하듯 펼칩니다. 책을 일반 독자를 위한 과학철학, 과학사회학 입문 혹은 교양서로 볼 수 있는 이유로 보였습니다. 본문을 살피면, 개인적으로 하나의 명제가 책을 이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전제이자 결론의 한 부분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과학적으로 ‘옳음’과 ‘옳지 않음’의 태도와 기준, 그리고 방법론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은 절대 혹은 보편 진리가 아니라 수정의 연속 과정이다.’가 그것입니다. 과학은 실험과 연구를 통해 증명된 가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데요. 실험자의 가치 판단과 연구 방법론의 변화는 ‘과학적 사실’의 수정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잠정적’이며, ‘과정’속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현재의 과학적 주장과 증명은 ‘수정’을 전제로 하고, 증명은 되었으나 ‘가설’일 수 있는 ‘열린 한계’가 있음을 말합니다. 이는 과학적 사실과 증명을 맹신하거나 절대 혹은 보편 진리로 ‘착각’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과학자는 사실 증명에 있어 ‘가치중립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학자 역시 인간이기에 온전히 ‘가치중립적 존재’ 일수는 없습니다. 개인 경험에 따라 ‘가치 편향’이 늘 존재합니다. 때문에 과학자는 자신의 가치관을 관리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가치관에 주의를 기울이고, 타인의 이해에 자신의 가치관이 투영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일입니다. 이는 과학적 ‘옮음’을 위한 길인데요. 여기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은 자신의 가치관 혹은 연구의 배경과 의도를 밝히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성찰’과 구체적·학문적 ‘대화’가 유용하고 필수적인 수단이라 말합니다. 저자는 마지막 9장에서 위 내용을 실행합니다. 자신의 실천을 ‘사례’로 제시합니다. 이는 이전 주장에 대한 신뢰를 두텁게 합니다. 더불어 과학적 옮음을 위한 방법론 학습에 도움이 됩니다. 저자는 과학적으로 옳지 않음을 설명하기 위해 ‘유사 과학’ 개념을 제시합니다. 과학이라 불리고 수용되나 과학이 아닌, 즉 ‘과학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 ‘종교 교리’ 등이 그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그 피해는 대중의 몫이고, 학살 혹은 기아, 인종우월주의, 그리고 인간성 파괴와 과학 발전의 퇴보 등의 ‘악’을 낳습니다.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책 속 사례는 ‘리첸코 사건’, ‘우생학’ 그리고 ‘지적 설계론’입니다. 먼저, ‘리첸코 사건’은 구 소련체제에서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던 ‘민중을 위한 유전학’이라는 ‘가면’을 쓰고 벌어집니다. ‘리첸코’는 학문적 공명심이 가득해 이미 학계에서 증명 불가로 판명난 자신의 이론을 고집합니다. 당시 독재자 스탈린의 정치적 목적 달성 그리고 언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왜곡과 과장’이 추가되어 그의 이론은 정책으로 채택되고, ‘이데올로기화’ 됩니다. 그 결과 국가의 경제 생산은 급감하고, 민중은 가난과 기아에 시달리며 죽음으로 내몰립니다. 또한 소련의 유전학과 생물학은 퇴보합니다. 둘째, ‘우생학’은 다윈의 자연선택설을 근거로 삼습니다. 번식을 위해 상대를 선택할 때, 우수한 종을 선택하며, 열등한 종은 도태된다는 ‘선택’ 이론인데요. 이는 ‘과학의 탈’을 쓰고 인간과 사회, 국가에도 적용되어 인종 차별과 청소(?)의 타당함과 함께 신분제와 소외를 합리화합니다. 나아가 특정인들을 향한 학살, 예를 들면 나치의 장애 독일인과 유대인 학살로 이어집니다. 셋째, 저자는 ‘지적 설계론’을 개신교의 창조론이라 정의합니다. 태초의 근원적 유전자에 대해 현재의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음을 근거로 하는데요. ‘설명할 수 없기에’ 지적 설계자, 즉 하나님의 설계와 계획으로 세상이 창조되었음을 주장하는 ‘과학의 모습을 한 종교 교리’임을 주장합니다. 미래에 증명 가능할 수도 있는 현재의 연구와 증명의 한계를 오용한 사례라고 말합니다. 저자의 주장은 단지 과학에만 한정된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가치 혼동 혹은 상실, 때론 착각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올바른 가치 판단과 형성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옳음’과 ‘진실’ 그리고 ‘옮지 않음’과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기준과 실천 전략으로 넓게 펼쳐 활용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또한 과학철학의 역할 혹은 연구 목적의 한 부분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독(一讀)을 권합니다. 특히 ‘착각(錯覺)’이 아닌 ‘진각(眞覺)’ 혹은 ‘정각(正覺)’의 삶을 살려는 이들에게. *이 글은 출판사가 관대한 마음으로 보낸 책을 읽고, 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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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해온 지바 사토시는 우생학과 리센코주의, 유전과 인간 행동을 둘러싼 논쟁, 백신과 진화, 생물 다양성과 대멸종에 관한 사례를 차례로 불러낸다. 서로 다른 시대와 분야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하나의 공통된 문제가 흐른다. 과학적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그것을 해석하며, 어떤 순간에 하나의 설명이 ‘옳은 것’이라는 권위를 얻게 되는가. 우생학의 역사는 그 과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인간의 능력이나 성향에 유전적 영향이 있다는 사실을 연구하는 것과, 그 사실을 근거로 어떤 인간이 더 우수하며 누구의 출산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전혀 다른 층위의 판단이다. 생물학적 사실에서 사회적·윤리적 당위를 곧장 끌어낼 수 없다는 사실은 여기서 중요해진다. 인간의 ‘있음’을 설명하는 지식이 인간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까지 결정해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사실에 관한 명제로부터 당위에 관한 결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그 사이를 메울 별도의 가치 판단이 필요하다. 과학이 사실을 설명하는 능력이 아무리 정교해도, 그 사실이 곧바로 어떤 사회가 옳은지까지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언어가 인간의 가치관과 권력으로부터 언제나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리센코주의의 역사는 과학적 주장이 정치적 이념과 결합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특정한 이론이 권력과 만나는 순간 그것은 하나의 가설을 넘어 국가가 승인한 ‘옳은 과학’이 되고, 반대되는 연구와 학문은 배제될 수 있다. 과학이 객관성을 지향한다는 사실과 과학자와 과학 제도가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에 어떤 가치가 개입하는지를 인식하고 그것을 드러내는 태도가 과학의 신뢰성을 지키는 데 중요하다. 과학철학에서도 가치중립적 과학이라는 이상은 계속 검토되고 있으며, 최근의 논의에서는 과학적 연구와 추론 과정에서도 사회적·윤리적 가치가 일정한 방식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는 견해가 널리 검토되고 있다. 2024년 매슈 J. 브라운의 연구 역시 가치중립적 과학이라는 이상을 둘러싼 최근의 논의를 검토하며, 과학에서 가치가 작동하는 방식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과학에 가치가 개입한다는 사실은 과학을 무너뜨리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그 개입을 자각하고 투명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더 까다로운 문제는 과학적 설명을 받아들이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특정 유전자와 폭력성 사이에 관계가 발견되면 ‘폭력 유전자’라는 이름이 붙고, 어떤 생물학적 특성과 행동 사이에 상관관계가 나타나면 그것이 개인의 성향이나 운명을 결정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하지 않는 순간 복잡한 인간은 지나치게 단순한 설명 속에 갇힌다. 과학이 편견을 걷어내는 도구가 될 수 있는 만큼, 인간의 기존 편견이 과학의 언어를 빌려 더욱 정교한 형태로 재생산될 가능성도 있다. 결국 과학적 사실을 왜곡하는 것은 무지한 사람들만의 일이 아니다. 자신을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사람 역시 자신이 믿고 싶은 결론 앞에서는 판단의 기준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다른 견해의 근거에는 엄격한 검증을 요구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연구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 역시 하나의 편향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말하는 의심은 꽤 번거롭다. 한 번 더 출처를 찾아야 하고, 연구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살펴야 하며,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구별해야 한다. 무엇보다 불편한 것은 자신이 믿고 싶은 결론 앞에서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내놓은 근거만 의심하면서, 내 생각을 뒷받침하는 연구에는 쉽게 고개를 끄덕인다면 그것 역시 과학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 수 없다. 과학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정보를 많이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판단의 기준까지 검토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런 태도가 필요한 이유는 오늘날 과학적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기 때문이다. AI와 SNS를 통해 연구 결과와 통계, 전문가의 견해가 하루에도 수없이 흘러들어온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는 짧은 문장 하나가 복잡한 연구의 과정과 불확실성을 지워버린 채 유통되기도 한다. 한 연구의 결과가 하나의 사실로 압축되고, 하나의 사실이 다시 확신으로 변하는 동안 그 사이에 존재했던 조건과 한계는 사라진다. 정보가 빠르게 이동할수록 우리가 확인해야 할 것은 결론의 선명함보다 그 결론이 만들어진 과정인지도 모른다. 과학의 신뢰성은 모든 연구가 처음부터 완벽하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오류를 발견하고 수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데 있다. 실제로 과학에서 재현 가능성은 중요한 검증 장치이며, 심리학 분야의 대표적인 재현 연구에서는 기존 연구 100건을 다시 검증한 결과 원래 연구보다 효과의 크기가 절반 정도로 감소했고,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가 재현된 연구는 36%에 그쳤다. 한 번 발표된 결과가 곧 최종적인 진실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과학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내부에 남겨둔 채 앞으로 나아가는 지식 체계이며, 그 불완전함을 수정할 장치를 갖추고 있다는 데 힘이 있다. 따라서 과학을 믿는다는 것은 과학적 주장 앞에서 의심을 거두는 일이 아니다. 한 번의 연구보다 반복되는 검증을, 강한 확신보다 충분한 근거를, 내가 듣고 싶은 결론보다 그 결론이 만들어진 과정을 살피는 태도까지 함께 받아들이는 일이다. 때로는 답을 얻는 것보다 답을 잠시 보류하는 편이 더 정확한 판단이 되기도 한다. 조금 느리고 번거롭더라도 근거를 확인하고, 맥락을 살피고, 내가 가진 편견까지 의심하는 것. 그 불편함을 감수하는 동안 과학은 권위의 언어에서 다시 탐구의 언어로 돌아온다. ‘과학적으로 옳다’는 말은 생각을 멈추게 하는 마침표가 아니라, 오히려 살펴볼 것이 더 많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사실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고 누가 그것을 해석했으며 나는 왜 그것을 믿으려 하는지까지 살펴보는 것. 과학을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그 모든 과정을 귀찮아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어쩌면 과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가장 과학적인 자세는 무엇이든 쉽게 믿지 않는 법일 것이다. ✏️도서출판 부키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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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옳다는 말의 비밀 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옳다'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과학의 결론은 항상 잠정적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가설이라도 내일이 되면 더 나은 데이터에 따라 갱신될 가능성이 언제나 있는 거죠. 그래서 보통 가설은 '옳다'라고 말하기보다는 '이 근거를 통해 지지할 수 있다', '신뢰성이 있다', 또는 '데이터나 예측과 일치한다' 이런 식으로 표현합니다. 단지 현재까지 증거에 비추어 보아 가장 논리적으로 일관되고, 예측과 부합하며, 재현까지 가능한 설명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할 때 편의상 '옳다'라고 표현할 뿐이죠. 그래서 우리는 과학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여겨서는 안됩니다. 저도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지만 특정 내용, 특히 우주과학에 관련된 내용은 가르칠 때 상당히 조심스러워요. 교과서가 한 번 편찬되면 대개 7년 정도 사용하는데 그 사이에 우주과학은 눈부시게 발전을 하니까 교과서에 들어있는 내용이 맞지 않을 가능성이 있거든요. 과학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은 학문인 것 같아요. 객관적인 증거와 정보를 바탕으로 올바르게 분석하는 태도가 필요해 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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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탈을 쓴 오류를 파헤치기 위해 저자는 침착하고 명쾌한 시선으로 과학이라는 단어가 사회적으로 어떻게 오용되고 오독되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막연히 과학적이라고 신봉했던 것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퍼지며, 악용되는지를 냉정하게 짚어나간다. 가짜 과학이나 편향된 주장이 대중을 선동하는 방식, 그리고 대중이 쉽게 그 허구에 빠져드는 구조를 명확한 근거와 논리로 차근차근 해부한다. 이 책의 진가는 저자의 솔직하고 단단한 입장 표명이 담긴 마지막 장이라 할 수 있다. 앞서 가짜 과학의 위험성과 데이터의 왜곡을 객관적으로 나열했다면,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과학을 어떤 태도로 바라보아야 하는가에 대해 자신의 입장 표명과 주관을 명확히 밝히고 있다.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온갖 허구와 왜곡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가짜 과학에 휩쓸리지 않도록 개인의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개인적 의견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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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얼마나 무서운가' 라는 말이 있다. 감히 확신을 가지고 밀어부치며 자존심을 부리는 것은 사회적으로 무서운 일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스탈린과 짝짝꿍을 하며 미추린 생물학을 창안해낸 리센코가 그랬고, 미국의 우생학이 그랬다. 어느 과학자는 히틀러가 홀로코스트를 만들었지만 그것의 바탕엔 미국의 우생학이 있었다고 통렬하게 비난했다. '옳다' 라는 말은 도덕에 있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만 과학에 적용하면 그것이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보통의 과학자들은 '근거에 합당하다' 등으로 자신의 주장을 완전히 확신하지 않고 '확률이 ~~% 다' 등으로 최대한 사실에 부합하는 것만 말한다. 하지만 자신이 밀고 있는 가치관을 유사과학화하여 밀어부칠경우 그것이 이단 종교의 교주처럼 작용하여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정치가 자신의 세력을 위해 유사과학을 퍼뜨리는 과학자를 지원해주고 박수쳐줄 때 그 결과는 참으로 참담했다. 흉년이 왔지만 아무도 흉년이 왔다고 하지 못했고, 차별을 당했으나 감히 과학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에 입도 뻥끗 못했다. 창조론, 진화론은 어떨까? 태초에 인간이 갑자기 만들어졌다는 '창조론' 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미국 교과 과정에 넣기 위해 열심히 분투하다가 처참히 거절당하며 '지적 설계론' 이라는 교묘한 이름으로 바꾸고, 진화론보다 더 중요한 학교 이론으로 자리잡기 위해 '과학자' 로 위장하며 법과 싸워왔다. 허나 자신이 과학적인 것만 주장하는 척 하면서 같은 종교인들 앞에서는 '그리스도를 위해 싸운다' 며 본심을 드러낸다. 천주교로서 모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공적으로 교육하기 위해 법과 싸우는 것은 가치관이 심어지지 않은 아이들을 위해 조심해야 한다. '지적 설계론' 을 50개 주가 모두 채택하여, 그것을 잘못받아 들여 제 2의 우생학자가 나온다면, 그것은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 실제로 지적설계론자들 중 우생학을 지지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많다. 과거 과학자의 업적도, 루머나 악의적인 업적 탓에 완전히 매몰되버리고 만다. 분명 배울 점도 있는데도 '인성논란' 한 번에, 배울점마저 사라지는 것이다. 업적은 있으나, 악마이고 그렇기에 교훈은 없는 꼴이다. 우리는 과학을 보고 미래를 만들어 갈때 무엇을 조심하고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까. 우리 선에서 '감정' 에 길들여져 혹은 개인적인 '가치관', 나쁘게 말할땐 '아집' , '고집' 이 길러져 미래를 막는게 맞는걸까. 아니면 어디로든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객관적이고 다수적인 판단으로 눈을 열어두는게 맞는 걸까. ----------------------------------- 다만 이런 사실 또는 판단이 인간이나 사회에 영향을 끼칠 때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럴 때의 "옳음" 에는 윤리, 신앙 등에 근거한 바람이 겹친다. 또는 입맛에 맞는 규칙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려는 권력욕이나, 방해가 되는 도덕 규범을 파괴하려는 사악한 의도가 스며들기도 한다. 이러한 소망, 욕망, 가치관이 때때로 과학의 세계에 거짓 "옳음" 을 끌어들인다. 과학에 거짓 "옳음" 이 대두하고 만연하면 끔찍한 결말이 닥친다는 사실을 역사는 이미 증명해 보였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는 이런 위험한 시대의 문턱에 서 있는지 모른다. 불행한 세계의 도래를 막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거짓 "옳음" 이 어떻게 유도되는지 이해하고, 가치관에 따라 "옳음" 이 어떻게 손상되고 위장되고 악용되는지 알아두는 것이다. _ 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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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은 자폐증을 유발한다. 인간도 품종개량이 가능하다 폭력과 범죄를 부르는 유전자가 따로 존재한다. 오늘날 SNS와 영상 미디어에는 과학의 외피를 두른 유사과학과 음모론, 교묘한 혐오 논리로 넘쳐납니다. 개인의 불안을 파고 드는 것을 넘어 정치와 국가 정책까지 위태롭게 흔들어 놓습니다. 이 책 <과학적으으로 옳다는 착각>은 바로 이러한 유사과학과 음모론 등의 진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과학의 역사는 언제나 순수한 진리 탐구의 길만 걸어온 것은 아닙니다. 스탈린의 입맛에 맞춰 생물학계를 숙청하고 농업을 파탄낸 리센코주의, 인종차별과 학살을 자연의 법칙으로 합리화했던 우생학, 현대의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 등등 저자는 이러한 충격적인 역사적 사례들을 낱낱이 파헤치며 거짓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유통되는지 추적합니다.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진실을 왜곡하는 가장 위험한 혼란은 과학지식 체계의 결함이라기 보다 지극히 불완전하고 비과학적인 인간이 과학적 사실을 수용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감정과 입맛에 따라 재단하고 왜곡하였기 때문으라 생각하였습니다. 맹목적인 믿음을 버리고 인간 본연의 비과학성과 불완전한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자기성찰이 필요하다 생각합니다. 미디어에 범람하는 가짜 과학과 유사과학을 구별하는 방법을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드립니다. 이 리뷰는 출판사의 책 제공으로 작성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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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으로 옳다는 착각』은 과학이라는 이름이 어떻게 권위가 되고, 그 권위가 때로는 정치적 목적이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특히 리센코의 사례를 통해 이데올로기에 맞는 설명이 ‘옳은 과학’으로 선택되고, 반대되는 견해가 배제되는 과정을 살펴보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 책을 읽으며 가장 많이 생각한 것은 과학이 언제나 가치 중립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었다. 과학적 사실 자체와 그것을 해석하고 사용하는 인간의 판단은 완전히 분리되기 어렵다. 어떤 연구를 중요하게 볼지, 어떤 결과를 강조할지에도 사회적 맥락과 가치 판단이 개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과학을 불신하자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을 더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처와 근거를 확인하고, 반대되는 설명을 검토하며, ‘과학적’이라는 말 자체를 권위처럼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읽고 나니 과학적 사고란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 상태보다 근거를 묻고 자신의 판단도 다시 점검할 수 있는 태도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과 유사과학,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경계가 궁금한 독자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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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과학적' 이라는 말이 주는 신뢰와 권위가 어떻게 왜곡되고 악용될 수 있는지를 날카롭게 파헤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깊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가짜 과학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퍼지며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히 분석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비판적 사고와 의심을 통해 과학의 진실과 허구를 구분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워줍니다. 책에서 강조하듯이, 과학을 단순히 무작정 믿어야 한다거나 반대로 무조건 의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 잡힌 의심과 깊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체가 보다 올바른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건강한 판단을 하도록 돕는 근간이 됩니다. 읽으면서 '우리는 생각만큼 똑똑하지 않다'는 문구가 크게 와 닿았습니다. 그만큼 끊임없이 배우고 의심하며 스스로 점검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습니다. 과학적 사고와 비판적 사고를 결합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키워 나가야겠다는 결심도 생겼습니다. 현대인의 정보 홍수 속에서 필수적인 교양서로서 큰 도움이 되는 책이라 생각하며, 누구나 한 번쯤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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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그야말로 정보의 홍수입니다. 특히 매일 새롭게 업데이트되는 기술 뉴스와 인공지능, 그리고 각종 미디어 콘텐츠들을 접하다 보면, 무엇이 검증된 진실이고 무엇이 교묘하게 포장된 거짓인지 판별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짐을 느낍니다. 『과학적으로 옳다는 착각』은 바로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대에 우리가 반드시 장착해야 할 비판적 사고의 렌즈를 제공해 주는 책입니다. 이 책은 진화학, 유전학, 생태학의 구체적이고 흥미로운 역사적 사례들을 들며 '유사과학'과 '음모론'이 어떻게 탄생하고 확산하는지 치밀하게 추적합니다. 백신과 자폐증의 연관성이나 우생학적 편견처럼, 언뜻 들으면 과학적 사실 같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오류와 차별을 품고 있는 주장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과정이 무척 통쾌하면서도 서늘하게 다가왔습니다. 과학이라는 이름이 정치나 사회적 혐오와 결합했을 때 얼마나 무서운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과거의 사례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날 SNS와 영상 매체를 통해 무분별하게 퍼져나가는 가짜 뉴스들을 우리가 어떤 태도로 수용해야 하는지 실질적인 해법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맹신과 편견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데이터와 논리를 바탕으로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새기게 되었습니다. 과학적 사고력을 기르고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얻고 싶은 모든 분께 이 책을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작성한 서평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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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단으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살면서 유독 대화가 겉도는 상대들이 있다. 나에게는 창조론을 확신하는 사람들이 그렇다. 애초에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전제부터 다르니, 아무리 논리를 쌓아도 접점을 찾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된 것은, 그들이 믿는 것이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과학의 언어를 정교하게 흉내 낸 유사과학이라는 사실이었다.
저자 지바 사토시는 도호쿠대학에서 진화생물학과 생태학을 연구해온 학자로, 이 책에서 "과학적 옳음에 대한 위협"이라는 개념을 중심에 놓는다. 그는 창조과학과 지적 설계론을 포함해 백신 반대 운동, 우생학, 여섯 번째 대멸종론 등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주장들을 진화학과 유전학의 역사 속에서 하나씩 해부한다. 겉보기에는 과학의 언어를 빌렸지만 실은 이데올로기와 권력, 감정에 잠식된 담론들이 얼마나 쉽게 사회를 잠식하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소련의 리센코 사건이다. 유전학 대신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가짜 이론을 밀어붙인 결과, 수많은 과학자가 숙청당하고 소련의 생물학은 수십 년을 후퇴했다. 저자는 이것이 결코 과거의 일회성 비극이 아니라 "누구든 리센코가 될 수 있다"는 구조적 위험이라고 경고한다. 좌우 이념을 가리지 않고, 미디어와 대중의 열망이 결합하면 언제든 재현될 수 있다는 지적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결국 "사실"과 "가치 판단"을 혼동하지 말라는 것이다. 저자는 데이비드 흄의 존재당위 문제와 자연주의적 오류를 빌려, 과학적 사실로부터 곧바로 도덕적 결론을 이끌어내려는 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한다. 왼손잡이 단명설이나 배란기 여성 선호 연구처럼, 부실한 데이터가 편견과 결합해 그럴듯한 과학처럼 유통되는 사례들은 그 위험성을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경제학을 공부하며 통계와 수치를 다뤄온 입장에서 이 책의 문제의식은 남의 일 같지 않았다. 원하는 결론에 맞춰 데이터를 취사선택하는 유혹은 어느 학문에나 도사리고 있고, 재현성 위기라는 표현이 남 얘기로 들리지 않았다. 저자가 강조하는 "자기성찰"과 "입장 표명"은 비단 과학자만이 아니라 데이터를 다루는 모든 이가 새겨야 할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나니 문득 궁금해졌다. 이 책이 다루지 않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유통되는 유사과학은 또 무엇이 있을까. 혈액형으로 성격을 판단하는 믿음이나 특정 음식이 만병을 통치한다는 주장들은 과연 이 책이 말하는 "과학적 옳음에 대한 위협"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작은 리센코를 무심코 지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에게 되묻게 되는 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