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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라는 일상의 공간을 새삼스럽게 만드는
"아파트라는 일상의 공간을 새삼스럽게 만드는" 내용보기
상당한 애독자인 베프가 내게 <천 개의 문>을 선물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때여서 시간과 공을 들여 섬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름 일본 소설을 적지 않게 읽었는데, <천 개의 문>은 뭔가 특별했다. 금방 윤곽을 잡아내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특별함이라고 할까. 현대 일본인의 평균적 삶의 형태를 이렇게 세밀하게,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도쿄의 현대사가 눈앞에 펼쳐놓은 것처
"아파트라는 일상의 공간을 새삼스럽게 만드는" 내용보기

상당한 애독자인 베프가 내게 <천 개의 문>을 선물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는 때여서 시간과 공을 들여 섬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나름 일본 소설을 적지 않게 읽었는데, <천 개의 문>은 뭔가 특별했다. 금방 윤곽을 잡아내기 어려운 그런 종류의 특별함이라고 할까. 현대 일본인의 평균적 삶의 형태를 이렇게 세밀하게,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도쿄의 현대사가 눈앞에 펼쳐놓은 것처럼 그려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제 마흔이 되어, 5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한 지토세는 뜻하지 않게 시할아버지가 살던 40년 넘은 아파트에서 신혼을 살게 되면서, “다카하시 상자”를 탐색하게 되고 아파트 단지가 품고 있는 역사와 기억을 복원하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된다. 그러면서 작가는 주인공을 통해 도쿄 신주쿠 주변에 위치한 아파트 대단지-천 개의 문을 가진-,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집단적이고 일상적인 공간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그 공간을 개인적인 차원에서 유의미하게 만든다. (신주쿠 주변에 그런 대단지가 있다니…, 다음에 도쿄를 여행하게 되면 신주쿠 주변을 다시 둘러보고 싶다.)


플롯의 관점에서 인상적이었던 흐름을 2가지만 뽑는다면,

1) 주인공 지토세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다가, 예상치 않은 인물들이 등장해서 흐름을 차단하고 사라지는데, 전체적으로 잔잔한 이야기 리듬에 액센트를 준다고 할까.

2) 소설은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우연히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데, 일종의 서스펜스를 유지한 채 한참 뒤에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내 드는 작가의 솜씨도 좋았다. 그리고 어쩌면 소설 속 이야기 중에 가장 극적이고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지금까지 내가 읽은 일본 소설의 범위에서만 보면, 일본의 서민층을 다룬, 구체적으로는 도쿄의 서민층을 다룬 소설은 없었던 것 같다. (역자가 해설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실은 가난과 불확실한 미래를 안고 사는 인물들인데, 화자가 너무나 담담하게 객관적으로 공정한 자세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바람에 하마터면 중산층의 아늑한 삶으로 읽을 뻔했다. 줄거리의 방향은 다르지만 <리틀 포레스트>를 대했을 때와 유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읽고 난 지금, 한동안은 내가 사는 일상적인 주변을 새로운 의미와 감각으로 바라볼 것 같다. 내 삶을 지탱해주고 그 풍경 속에 내가 있는 데도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장소들을. 내가 사는 이 아파트가 내 삶의 소중한 공간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 내가 몸을 누이는 이 협소한 아파트가 갑자기 다정해 졌다고 해야 할까…


작가 연보에 따르면, 시바사키 도모카가 <돌아오지 못하는 탐정>으로 올해 요미우리 소설상을 수상했다는데, 우리말로 번역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l*********0 2026.09.3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