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여성들의 활동범위와 위상은 언제나 남성적 역사성의 주변에 머물러야만 했다. 그리고 근대화의 역군이 남성들의 성취를 보좌하거나 그 노고를 위무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졌다. 근대화 과정에 있어서 남성들은 과거 그들의 권위의식을 바탕으로 역사와 함께 권위를 지니게 되지만, 여성들은 남성의 역사에 묻혀 사라질 뿐이었다. 이러한 여성들이 사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근대사의 특이성에 의해 여성의 존재는 여전히 그 특이성의 볼모로 잡혀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한국 남성의 심리 기정 깔린 여성관은 당연히 남성 기득권 사회의 구조와 관성적 형태의 상식으로 각인 되었다. 그러나 김영민은 『자색이 붉은색을 빼앗다-낮게, 부드럽게』에서 여성은 강한 비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풀과 같은 존재임을 역설하고 심층근대화의 주체 세력으로 낮은 목소리를 내고 있음을, 그리고 그것이 곧 실현 될 것임을 주장한다. 우리의 근대화가 급속한 템포로 수입과 이식에만 분주했기 때문에 근대화의 정신 문화적 측면이 비교적 소홀히 다루어졌다. 그리고 그 결과 광범위한 공적 합의에 의해 사회 운영의 원리와 철학이 구성되기 어렵게 된 것이다. 특히 우리 사회의 가부장적 남근 중심주의는 그 완악함이 도를 넘어선다. 남성 접대부 고용 금지법 시행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에게 밤마다 추행을 당하는 여성 접대부들이 두 눈 부릅뜨고 있는데 어떻게 "남성" 접대부 고용 금지법을 이토록 자연스럽게 시행할 수 있는지. 때문에 이 법령은 동시에 여성의 자리와 그 사회적 위상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보고일 뿐 아니라 세계화를 떠들며 부풀어 있는 우리 사회의 근대화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추문이다. 작가는 이런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여성의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물질적, 남성 중심적 근대화를 인문학적 감성과 성숙으로 제어하고 보완할 '심층 근대화'를 주장하면서 여성들이 근대화의 벽을 뚫고 인문적 성숙의 경지를 생활 현장 속에서 구체화하며 심층 근대화를 실현시키기를 주장하고 있다. 특히 20대의 여성에게 고하는 '스물 몇 살의 여성들에게'에서는 부박한 인구의 하나가 되어 상업주의적 유행을 뒷받침하는 통계치로 전락하고 있는 그들에게 동정적 혜안과 협조를 구하면서 성찰의 문화와 심층 근대성을 향한 인문적 세력의 바람으로 '자본과 함께, 그러나 자본을 넘어 살아가는 인간' 이 기를 펴는 세상으로 바꾸자고 촉구한다. 또한 '혼인도 인문학적으로'라는 글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혼인이 문화 잡탕주의적 타성에 젖어 있음을 비판하고 인문적 성숙을 통해 '제도와 함께, 그러나 제도를 넘어' 살아가자고 주장한다. 물론 20대 여성이 우리 대중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매우 크고 현재 대중문화가 문화적 잡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스물 몇 살의 여성들을 비판한 것과 혼인이 보통 주체자인 20대 여성들의 사고 방식에 행해지는 것을 고려해 보면 우리 사회의 남성적 권위주의가 꼭 20대 여성들만의 생각 없는 삶에서 비롯된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는 이 부분을 '선애'와 '여성이 몰아올 희망'에서 여성의 가능성을 역설하면서 그 비판의 여지를 없애고 있다. 전입주부임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와 헤겔을 읽으며 인문학 공부를 해온 선애씨와 한 여대 강연에서 학생들이 남자의 부재감 없이 나름의 성취를 향해 조금씩 견실하게 나아가는 모습에서 남성과는 다른 여성서의 한 단면을 조용히, 그리고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우리 여성들이 숨어서 낮고, 부드럽게 음 세대를 살아갈 보다 큰 자아의 탄생을 골몰하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풀과 같은 모습으로, 숨죽이고 있지만 차츰 그 숨결은 거칠어지고 그 음성은 명료해져 가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글쓴이의 글쓰기 방식이나 문장구성이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글쓴이처럼 주부 '선애'씨가 인문학을 공부하는 모습은 나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리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남성과 여성, 근육과 살을 넘어선 진정한 인간 찾기가 가능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동거에 관한 글에서 '어느 체제가 더 자연스러운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질서와 통합의 겸제 대신, "위험한 삶"을 향한 자유를 누릴 만큼 성숙했는가'라는 질문은 비단 우리 사회의 여성의 역할과 위상뿐만 아니라 내 삶 자체에 대해서 다시한번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과연 내가 추구하는 위험한 삶은 무엇이고 그것을 향한 자유를 누릴 만큼 성숙했는가 하고 말이다. |
| "..이 갈래는 보기(플라톤)=>듣기(헤겔,하이데거)=>읽기(쉬라이에르마허,가다머)=>쓰기(로티,데리다)=>걷기(?)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서양철학사의 맥락..."[성숙의 인문학,혹은 일리들의 잔치] 기절하는 줄 알았다. 보기,듣기가 뭔지도 모를뿐더러 쉬라이에르마허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던 나같은 독자는 책의 초입에서 질려버릴 수 밖에 없었다. 작가의 대해서나 그의 인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그저 세간에서 얻은 호감을 지닌 독자로서 그저 경악이었다. 그는 '사상가들을 절묘하게 모자이크'하며 글을 쓴다. 정말이지 대체 한페이지에 사람이 몇이나 나올까 세고 싶은 심정도 들었다. [표절은 토막살인]이라는 강박 때문인가, 아니면 스스로 인물을 인용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나같은 독자가 그런 인용에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단순함의 소치인가? 작가는 절대로 쉽게 이야기를 전개하지 않는다.(사족이지만 서평을 쓴 일간지 기자가 과연 그의 책을 읽었을까하는 의심이 든다)인문학적 글쓰기'가 무엇인지 개념조차 없는 사람이지만 이건 아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냥 산행을 즐기니 참 좋다라고 했으면 족할 것 같은데 '물의 시대에서 나무의 시대'로 전환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어려운 한자어, 희한한 철학개념, 낯선 철학자들... 글이 각종 매체에서 대중을 상대로 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의 글은 대중과의 대화를 포기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 정도이다. 물론 그는 기본철학에서 비난받을 분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글쓰기는 불친절하고 때론 오만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체계적이고 인문적인 사고'에 대해 어떤 강박이 있는 것 같다. 만약 "당신처럼 수준 낮은 독자는 내 글쓰기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할 말이 딱히 없지만 내가 지불한 경비와 시간을 감안하여 이 정도 불평을 할 권리도 있겠지 싶은 생각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글쓰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말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
| 어느 사회에나 많은 문제들이 존재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여성 문제에 대한 것들은 참으로 오묘한 경우가 많다. 여성이 인간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시절도 있었고, 오랜 시간 극심한 차별과 희생의 대상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사회, 문화, 경제에 이르는 전 분야에서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많지만, 오랜 시간 그 해결에 있어서는 늘 여러 가지 딜레마에 빠지곤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출산과 육아로 인해 사회생활에 지장을 받고, 승진이나 임금에 있어서도 남성에 비해 차별받는 것들, 이러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모습만이 내가 생각했던 여성문제의 전부이다. 그러나 김영민의 글 ‘낮게 부드럽게’를 읽으면서, 내가, 아니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 왔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것이야말로 여성문제를 포함한 우리 사회 전반에 존재하는 문제들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전체 구조가 교시/잡담, 낮/밤, 배꼽 위/아래, 겉/속, 정돈/혼란, 식의 이중성으로 짜여져 있다는 주장은 정말 동감할 만 했다. 그리고 그동안의 급속한 산업화, 냉전주의, 집체주의가 ‘교시-낮-겉-정돈’이라는 남성적 축을 이루었으며 한국 여성들은 제자리를 얻지 못하고 가정의 내조자, 접대의 외조자로서 존재할 뿐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이분법을 뛰어넘어 인간을 되찾는 일이야말로 우리들의 과제라는 지은이의 말은 큰 깨달음을 주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성’의 담론이 또 하나의 이분법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성들이 ‘숨어서’, ‘차분하게’, ‘낮은 목소리로’ 다음 세대를 살아갈 보다 큰 자아의 탄생에 골몰했다는 것은 여성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존재로 다시 한 번 타자화 하는 것이 아닐까? 오늘날의 많은 여성들, 특히 20대 초반의 여성들 스스로가 표피 감성에 의해 좌우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나 역시 ‘스물 몇 살의’ 여성으로서 ‘성찰의 문화’를 자생시키는 능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음을 느낀다. 결혼과 사랑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막연한 환상이나 낭만 또는 형식적 제도에 얽히는 단순한 것이 아니라, 관계의 현실을 실질적으로 좌우하는 인문적 성숙의 역학에 유의해서 동거와 결혼에 대처하는, ‘제도와 함께, 그러나 제도를 넘어’ 살 수 있어야 하겠다. 이렇게 나는 또 한번 결혼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형식적이고 화려하기만 한 결혼식을 올리고, 열 쌍 중 네 쌍 이상이 갈라선다는 우리나라의 결혼 풍조는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다. 그래서 결혼은 인문학적이어야 한다는 지적은 정말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었다. 전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었지만, 차분함과 부드러움을 특징으로 하는 ‘여성성’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에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이것을 ‘동양 사상’이 환경문제 해결의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했다. 낮고 부드럽다는 것을 꼭 여성성으로 규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태풍을 비껴가면서도 그 바람과 함께 어울리는 길’은 부드러움을 지키는 것(守柔曰强)은 우리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