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기분 뭐라고 할까. 마음에 드는 작가 하나를 발견했다. 좋은 일이다. 하지만 반갑지 않다. 앞으로 이 사람이 쓴 소설이 나왔다고 하면 찾아 읽게 될 것이다. 숙제가 하나 생긴 셈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다. 내가 찾아서 할 일이다. 하지만 꼭 할 일이다. 그래서 부담스럽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며 혹시나, 했더랬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를 보니 역시나, 싶다. 이만교는 힘이 있다. 어쩌면 확인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 확인의 과정 속에 나는 이미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감각...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보며 떠올랐던 말이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에서 또한번 확인했다. IMF,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나 역시 첨단에 서있었다. 그때 나도 20년만에 소설을 한 편 썼더랬다. 연애소설이었다. 이사를 오며 일부러 버리고 온 졸작이었다. 되돌아보니 역시 잘했다. 소설을 쓰자면 이 정도는 써야 할 일이다. 이 정도 감각은 있어야 할 일이다. |
사실 이 책을 구입한 것은 한참 되었지만 제목만 보고는 동화책쯤으로 생각하고 중학교 학급문고에 꽂아두었었는데, 방학하고 집에 가져와 읽어보니 첫 장부터 일제 강점기 할아버지 할머니가 등장하더니 6.25 한국전쟁, 5.16 군사쿠데타 유신독재, 5.18 광주를 거쳐 IMF까지 격변의 한국 근현대사를 징하고 장하게 살아남은 한 가족의 ‘낙원구 행복동’ 이야기가 펼쳐졌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명확한 동네 이름을 알 수 없는 서울의 위성도시의 변두리, 시간적 배경은 IMF 구제금융 시절인 1990년대 후반쯤 되는 것 같다. 주인공인 ‘나’는 군대를 다녀와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는 대학생이니까 아마 대학 2학년이나 3학년쯤 되는 93학번이나 94학번 복학생일 것 같다. 나와 비슷한 연배이다. 얼핏 보면 청소년소설이나 역사소설 같기도 한 이 책의 주장르는 ‘휴먼다큐 블랙코미디 판타지’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후반 당시 가난하지만 보통의 도시 소시민들의 일상과 <응답하라 1994/1997>을 떠올리게 하는 익숙한 거리의 풍경들, 젊은이들의 풋풋한 연애와 대중문화 생활(머꼬네집에서 왕가위의 ‘중경삼림’과 디카프리오를 만날 줄이야!), 주머니가 얇은 노동자와 자영업자로 살아가기에 만만치 않은 요지경인 삶,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정’이란 것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의 진한 사골국 같은 가족 간의 우애, 있는 듯 없는 듯 그림자처럼 물러나 있지만 세월의 지혜와 담대함으로 생불(生佛)이 된 노인들에 대한 경외, 아기 예수가 강림한 것마냥 새생명 ‘머꼬’의 탄생을 축복하며 갖는 한 줄기 희망과 기쁨 등이 정의 넘치는 사회교과서나 눈물 짜는 인간극장이 아니라 장진 감독의 <킬러들의 수다>처럼 유쾌하게 그려지고, 남달리 지적이고 예리한 작가의 묵직한 통찰과 번뜩이는 기지는 유치찬란 초딩스러운 블랙코미디와 아무 때나 ‘짠!’하고 나타나는 판타지 유머로 한없이 가벼워진다. 작가는 일부러 작정이라도 한 듯이 한 페이지에 최소 한 번씩은 배꼽 잡고 깔깔거릴 웃음 한 줌이나 짠하게 찔끔거릴 눈물 한 방울의 덫을 촘촘한 레이더망처럼 설치해 놓았다. 애써 ‘이 정도쯤이야.’ 하고 안 넘어 가보려고 해도 바로 그 다음 장에서 만화 영화처럼 피용~ 당하고 만다. 나는 누구에게도 상처주지 않는 이런 유쾌하고 엉뚱한 순수명랑코믹 판타지를 너무 사랑한다. 특히 ‘사람 살리는 이야기’를 정치적이라며 은밀히 외면하는 수많은 위선들에 맞서 현실에 꼿꼿이 발 딛고 당당히 큰소리치는, 거기다 보란 듯이 한 술 더 떠서 끝내주게 웃기는 주인공들이라면 더더욱 응원하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귀여운 꼬물이 머꼬와 <머꼬네집>은 우리의 구원이자 신이다. |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경쾌한 제목의 글을 무척이나 재밌게 본 적이 있다. 발랄하고 통통 튀는 듯한 문체와 대사의 간결함,상상력에서 상상력으로 널을 뛰는 듯한 전개가 인상 깊었다, 그리고 가벼움까지. 바로 그 작가의 두 번째 장편 소설.
소설을 읽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가 않았다. 파안대소의 미학. 미소의 미학이 아니라 쾌할하고 목청껏 드높여도 좋은 통쾌한 폭소의 미학. 웃으면 폐활량이 늘어나고 엔돌핀의 생성으로 건강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현대인의 건강, 독자의 건강을 생각하는 매우 공공적인 미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어머니, 형, 큰누나, 매형, 작은누나, 외할머니, 사돈어른까지를 한 식구로 하여 살아가는 집. 도시의 팽창과 함께 산좋고 물좋던 어느 변두리 지역에 위치한, 난개발 속에 도시 속의 섬처럼 고립되었으되, "결국 우리 가족은 먼셀 24색이나 TFT화면 따위로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저 아름다운 빛깔의 저녁노을과 마음을 눌러주던 평원, 그리고 그 어떤 에어컨이나 부채바람보다도 가늘고 길고 섬세하여, 한여름에도 냉랭한 애인마냥 차갑고 쌀쌀하기 그지없던 뒷산의 산들바람에 대한 권리들까지도 고스란히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활달한,나를 중심으로 한 이들 머꼬네집 사람들의 경쾌한 일상사. 미시적 일상들 사이로 끊임없이 솟아 오르는 애잔한 즐거움. "가스통이 터지면 119라도 부를 수 있지만 전화통에 볼나면 119도 못불러 이것들아!" 라고 외칠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들. 까짓거 지지고 볶고 희뻔득거리고 빽빽 울어대도 살아 있지 않은가, 라고 말하는 듯한 처연한 유머들의 연속. 하지만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롭고 냉소적인 시선. "일단 조재해준 약을 드셔보세요." 의사는 또 하나 마나 한 소리를 뇌까렸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질 수도 있나요?" 형수가 물었다. "저로선 장담은 못합니다. 그때는 좀더 큰 병원으로 가보셔야 될 거예요." 의사는 작은 병원에서나 내릴 수 있는 의견을 냈다. 큰 병원에서 근무하게 되면 왜 좀더 일찍 오지 못하셨어요? 하는 식으로 병의 원인을 찾을 작자일 게 틀림없었다. IMF와 함께 현재의 직장을 잃고, 다시금 옛날이 한 등급 낮은 직장으로 옮겨 가고서도 잃지 않는 이들 생명력 가득한 사람들의 일상사. "형과 작은누나는 전철역까지 걸어가서는, 전철이 역내로 들어올때쯤 철로로 뛰어내렸다. 그리곤 치달려오는 전철에 깔리지 않으려고 걸음아 날 살려라, 똥 빠지게 뛰고 또 뛰고 하는 방법으로 출퇴근을 해서 교통비를 아꼈다. 덕분에 아랫배가 쑥 꺼져 내려가고 심폐기능까지 강화되었다고 세 사람 모두, 그 중에서도 형수가 제일 좋아했다..." 그리고 생명있는 것과 없는 것을 모두 포함한 애정어린 유머. "멀건 대낮에, 혹은 오밤중에,식구들이 모두 밖에 나갔거나 아니면 다들 곤한 잠에 빠져서 사위가 적막한 때에, 집이 혼자서 덜덜덜, 몸을 흔들며 웃어대는 게 느껴지곤 했다. 웃겼던 순간들을 다시 생각하며 혼자 웃는 모양이었다." 이런 왁자지껄한 집안에 하나 또다른 즐거움으로 태어나자마자 웃음꽃을 잉태한,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사돈어른이 이게 뭐꼬? 라고 부른데서 연유한 머꼬의 탄생과 자잘한 성장의 기쁨. "한 달 전쯤 일어나 앉더니 지난 주부터는 붙잡히는 것만 있으면 잡고서 일어나는 거였다. 그러더니 어제부터는 붙잡아주면 걸음도 떼는 거였다.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지만, 이런 식으로 나가면 올해 안으로 날 수도 있을 게 틀림없었다.나는 베개에 녀석을 태워서 마루와 안방과 부엌까지 날아다니는 연습을 하루 열 번도 넘게 빼놓지 않고 시키는 중이었다..." '슬픔이 주량보다 많으면 누구나 지랄을 내는 법'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작가가 한바탕 만담으로 휘저어놓는,현대적 소시민의 코믹한 일상에 대한 나름의 공경이 잔뜩 배어 있는 소설이다. 안 보면 후회한다. |
『결혼은 미친짓이다』를 읽은 여파(?)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를 읽게 됐다. 제목이 내용을 압도했던 『결혼은 미친짓이다』와 여전히 심상치 않은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쉽고 재미잇게 읽히면서도, 웃음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보게 하는 그 무언가가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에 있었다. IMF! IMF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IMF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되었다. 누나의 갈비집이 망하고, 형의 주식은 종이가 되고, 나는 어학 연수를 포기해야 하고.....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그렇다고 살아계신다고 해서 그다지 사정이 나아지는 것도 아닌) 그냥 그런 집! 굳이 이야기를 하자면, 좀 많이 못 사는 집이 머꼬네 집이다. 많은 식구들이 하루 하루 살아가기가 버거운 우리네 많은 이웃들이 머꼬네 집으로 형상화 되었다. 머꼬네 집은 집 주위가 발전하는 동안에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머꼬네 집은 현재가 아닌 추억 속의 집인 것 같다. 현재 살기에는 너무 힘들지만, 되새겨보면 은은한 미소를 머금게 하는 그런 추억속의 집 말이다. 예전 모습 그래도, 그 모습을 지키고 있다. 어쩔 수 없이...하루 하루가 힘겨운 머꼬네 집에 두 손님이 찾아온다. 새로 태어난 머꼬와 나의 여자친구 해연....머꼬는 식구들에게 기쁨을 주지만, 해연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함으로써 식구들에게 아픔을 준다. 사랑하던 여자가 돈 때문에 내가 아닌 친구를 선택해도 나는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가난하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머꼬네 집은 가끔 놀러 가기만 좋은 집이다. 절대로 살수는 없는. 만약 내가 그녀에게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어머, 그래? 놀러만 갈게. 근데 살긴 싫어.' 『결혼은 미친짓이다』에서 경제적인 능력 때문에 다른 남자를 택한 그녀가 이 작품에서 해연이로 다시 태어난 듯하다. 누가 나에게 '머꼬네 집'에 놀러 오라고 한다면 어떤 대답을 하여야 할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된다. |
누구에게나 죽고싶을 만큼 우울한 날이 있다. 공연히, 이유도 없이 사는 것이 무겁고 짜증나고 칙칙한 날이 있다. 내게도 그런 날이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봤다. 이 책을 보고나서 어떻게 되었냐고? 짐작하시겠지만 난 이 책을 보고 완전 기분전환했다. 웃었고 감동했고 그리고 가슴뭉클했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현실적 어려움을 넉넉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가족들의 유머와, 서로를 바라보는 겨울 호빵처럼 따듯한 애정이 있다. 머꼬의 탄생과 아이 하나를 두고 울고 웃는 가족들의 사랑을 통해 생명의 고마움도 느꼈다. 여러말 할 필요없다. 재미있고 감동도 있고 가끔 깻가루처럼 뿌려져있는 사랑도 있다. 우울해서 죽고잡으면 이 책을 읽자. 책에 보내는 찬사 중 이것만큼 성대한 찬사가 또 있을까. |
"내가 가수가 되면 선배를 백댄서로 쓰겠어" 맹숙이 양손으로 머리를 묶어 맸다. 그리곤 웃음을 빼물고 물었다. "술도 별로 마시지 않고 어떻게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춤을 출 수 있어?" 새벽이었고, 내 옷은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고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슬픔이 주량보다 많으면 누구나 지랄을 떨게 되는 법이지, 뭐" 내가 중얼거렸다 소리도 없이, 거리의 불빛 속으로 내리는 그런 가는 비였다. 이만교,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 중에서
집에 돌아와보니 혜연이 보낸 편지가 와 있었다. ....중략.... 그러나 그 어떤 편리와 안락과 배움의 열정도 형네 집에서의 따뜻했던 추억만큼은 못하다고, 비록 좁고 작고 사방에 금이 가긴 했지만 형네 집만큼 궁금증과 신비와 이상한 일이 많이 도사리는 집은 그곳에서는 찾을 수 없을거라고, 언제나 이곳이 많이 그리울 거라고 적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곳에서의 외로움을 이겨내게 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외로울때 마다 형과 형네 집을 기억하고 떠올린 덕분일거라고, 형에게 진심으로 미안하고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었다. 이만교, <머꼬네 집에 놀러올래> 중에서
쓸쓸한 농담, 재미있는 슬픔. 재미있게 읽었음. 추천함. 24ㅇ훈 |
인생살이의 고난함이 꼭 진지하고 무겁게 말해져야 되는 것은 아니다. `어이없이 부모를 잃은 다섯 남매'라는 소재는 왕년에 인기 있었던 휴먼 다큐멘터리 <인간시대>에서 시청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을 만한 아이템이다. 사실 1997년에 방영된 MBC 미니시리즈 <일곱개의 숟가락>은 부모 잃은 다섯 남매에게 모질게도 다가오는 불행 때문에 시청자들을 꽤나 울렸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원작인 김수정의 만화『일곱개의 숟가락』은 독자들에게 울음이 아닌 웃음을 준다. 웃는다고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이만교의 장편 소설 『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는 『일곱개의 숟가락』과 비슷한 맥락에 있는 작품이다. 으레 무거움이 연상되는 소재를 작가는 웃음 속에서 이야기하려 한다. 때는 웬만한 보통 사람들이라면 허리띠를 꽉 조여 맸을 IMF. 작가의 손은 IMF가 서민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훑어 지나간다. 캘리포니아로 어학 연수를 떠날 계획에 설레던 `나'는 당연히 그 꿈을 포기한다. 와이셔츠 공장에 다니던 어머니의 근무 환경은 1970년대로 돌아갔으며 작은 누나와 형의 월급은 당연히 대폭 삭감된다. 갈비집으로 호황을 누리던 큰 누나는 파산해버리고 설상가상으로 살 집이 없어진 사돈까지 함께 살게 된다. “수돗물 잠그고 샤워해라, 코드는 뽑아 놓고 텔레비전 봐라. 양말은 뚫린 채로 신어라...” 어머니의 잔소리는 서너 배로 는다. IMF로 더 칙칙해져 버린 생활을 작가는 다르게 묘사하고 싶어한다. “치달려오는 전철에 깔리지 않으려고 걸음아 나 살려라, 똥 빠지게 뛰고 또 뛰는” 식의 과장된 묘사가 그러하며 시장에 내다 팔 나물을 캐러 휴전선까지 넘었다는 외할머니와 조카 머꼬에게 “환장할 정도로 맛있을 뿐만 아니라 언제까지나 줄지 않고 계속 단맛을 내는 매우 신기한 요술 사탕”을 준다는 황당한 이야기가 그러하다. 엄연한 불행을 희석하는 예쁜 여자 친구와 귀여운 조카 머꼬의 존재가 그러하다. “벽에 기대어 만화책 보듯이 읽어나가는 것이 더 좋으리라”, 심지어 이 소설을 “만화책으로 엮는 것은 어떨까”라는 작가의 말처럼『머꼬네 집에 놀러 올래?』라는 것이 작가의 바람이다. 신산스럽기는 마찬가지, 웃음을 약 삼아 즐겁게, 즐겁게 갈 일이다. |
어두운 현실을 어둡게만 바라본다면 그곳에서 웃음을 찾기가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안그래도 현실이 어두운데 자신마저 그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결국은 나에게 다가오는 것은 파멸뿐이다는 생각이 든다. 힘들 대일수록 그냥 한번 하늘을 원망했다고 웃으면서 끝내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그냥 묵묵히 자기가 해야할 일을 찾아서 하고 있으면 언젠가는 자기 인생에도 빛이 나지 않을까..하지만 이렇게 낙관적으로만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어려움도 많다. 하지만 자신이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머꼬네 집처럼 언제나 가족이라는 커다란 등받이가 있기 때문에 힘든 현실도 극복이 되는 것 같다. |
소시민들의 이야기이다. 솔직히 나는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화가나고 이런 글을 보면서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 그리고 학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젊은딜을을 볼때마다 마음도 아프고 화도 난다. 이들에게는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부모님에게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도 없이 이들은 없는 상황 속에서 착하게 그리고 열심히 사려고 노력을 했었다. 하지만 왜 고통은 이들에게만 와야만 한다는 것인가..매일 매일 세금을 어떻게하면 적게내고 자식대대로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어 부자가 부자를 만드는 그런 상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면 더 부자가 되어가는 것일까..참으로 아이러닉한 세상이라는 것을 느낀다. |
되는 일도 없고 가슴 한 켠이 답답하던 때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뭔가 재미있는 게 없나 하고 어슬렁거리다 범상치 않은 이 책의 제목을 접하곤 단순히 몇 시간을 때우기 위해 냉큼 집어들었다. 이 작가의 전작을 무척 통쾌하게 읽어내려간 기억을 되살리며 첫장을 넘겼는데 그 후로부터 두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흘러가 버렸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희생된 주인공의 집은 빌딩숲에 갇혀 예전에 즐기던 아름다운 풍경들과 바람, 빛 들을 모두 잃게 된다. 그러나 가난이 웬수라고 했던가... 큰누나부부와 작은누나, 형 내외, 어머니, 게다가 나이들어 치매를 앓으시는 외할머니까지 여덟식구가 알콩달콩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겉만 훑어보자면 꽤 슬픈 이야기다. 가난이 만들어낸 비극 쯤을 상상하며 계속 읽다보면 생각지도 못한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이들 가족들은 가난을 비관하지만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름대로 그 상황 속에서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고나 할까? 형이 주식으로 분가할 돈을 모두 잃는다거나, 외할머니가 아무도 모르는 새 돌아가신다거나, 큰누나 내외가 갈비집을 말아먹고 사돈할머니까지 대동하고 이 집에 돌아오는 상황 등은 말로만 들으면 무척 우울한 상황이다. 그러나 인물들은 이 우울한 상황에서도 막내동생의 어학연수를 축하하러 여행을 떠나고, 큰누나의 임신에 온갖 촉각을 기울이고,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놀러오면 너무나 반가이 맞아준다. 가난한 삶 속에도 즐거운 일상이 있고 이것이 인생이라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이 소설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머꼬는 바로 이런 행복한 집에 태어난 아기이다. 누이의 임신 이후 온가족이 기다렸던 아이인 만큼 모든 식구들이 머꼬를 사랑하고 서로 보살피려 한다. 가끔은 만화처럼 과장된 장면들이 마구 등장하지만 이 또한 작가의 상상력으로 보고 즐기면 그 뿐이다. 이런 진지한 주제에 왜 그런 우스꽝스런 광경을 결합시켰냐고 물으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고 깨달음을 얻으라는 말을 해주고플 뿐이다. 머꼬네 집은 결코 우울하거나 슬프지 않다. 그래서 외할머니의 죽음도, 사돈할머니의 죽음도 담담히 받아들인 채 그들을 기억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얌체같은 큰형내외의 분가가 얄밉긴 하지만 그것 또한 어떤가!!! 어떤 집에서나 이런 인물 하나쯤은 있는 것을... 진지한 주제를 가볍고 유쾌하게 접근해나가는 작가 이만교의 솜씨는 여전하다. 그리고 여성에 대한, 어머니에 대한 진지한 시선 역시 다른 몇몇의 남자작가와는 다른 점이라 마음에 들었다. 작가 말마따나 작가와 친구가 되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게 이처럼 즐거운 일이라는 걸, 그래서 읽고 난 후 여운이 남는다는 걸 간만에 꺠우쳐 준 책이었다. 이것이 이만교의 신작이 기대되는 이유다. 아!!! 머꼬네 집에 놀러가고 싶다!!! [인상깊은구절] 녀석도 외삼촌인 줄 알아보고는 활짝 웃으면서 반갑다고 엉덩이까지 들썩대는 거였다. 그것이 녀석의 인사법이었다. 늙어빠진 인간들이 만나면 건성으로 나누는 그런 악수하고는 질이 다른, 그것은 정말이지 선승들의 활기 같은 멋진 인사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