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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로마서를 제대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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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로마서, 풀어쓴 성경」이 출간되었다. 풀어쓴 성경 시리즈는 저자 강산 목사님이 철저한 원문 분석과 독해를 통해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직역하고, 여기에 권위 있는 국내외 번역본들과 탁월한 저자들의 주석 및 논문들을 참고해 중학생 정도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낸 개인 성경 번역본이다.저자 강산 목사님은 복있는 사람, 킹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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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로마서, 풀어쓴 성경」이 출간되었다. 풀어쓴 성경 시리즈는 저자 강산 목사님이 철저한 원문 분석과 독해를 통해 히브리어와 헬라어 성경을 직역하고, 여기에 권위 있는 국내외 번역본들과 탁월한 저자들의 주석 및 논문들을 참고해 중학생 정도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풀어낸 개인 성경 번역본이다.


저자 강산 목사님은 복있는 사람, 킹덤북스, 죠이북스, 좋은씨앗, 생명의 말씀사, 감은사 등 기독교 출판사의 원문 관련 감수 및 편집을 맡고 있으며, 복있는 사람 메시지 성경 번역 전체 과정 편집 및 감수를 한 탁월한 영성과 지성을 갖춘 귀한 목회자이다. 풀어쓴 성경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어서 로마서가 출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출간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를 만날 수 있어서 어느 때보다 감사하고 복된 시간이었다.


로마서는 크리스천들이 매우 사랑하는 말씀 구절들을 담은 성경이지만, 안타깝게도 몇몇 특정 구절들만 조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몇 개의 퍼즐 조각만으로는 그림 전체를 감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말씀도 부분이 아니라 전체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하고, 성경 전체 안에서 읽어야 하는데, 사실 대다수의 성도들은 로마서가 담은 그림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교회에서도 말씀을 정성스럽게 먹여 주지 않고, 예배 시간에도 성경 본문 안에서 주제를 잡아 설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성도들은 말씀을 잘 모르고 신앙생활을 한다. 믿음의 길을 가는 모든 성도들이 성경 말씀을, 그리고 특별히 로마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한 마음으로 잘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나의 부끄럽고 짧은 언어로 담는 것보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서문의 일부를 나누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 같아 나누어 본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p.10-12

로마서는 성경의 그 어떤 내용보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으로 간주되었고 특히 인간의 구원, 의로움, 은혜와 믿음의 교리를 완벽하게 규정하는 결정적인 텍스트로 추앙되었습니다. 물론 로마서는 귀하고 탁월한 성경입니다. 문제는 그 로마서 내용 자체보다는 로마서에 대한 일방적인 이해와 해석 및 적용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중세 가톨릭의 공로 중심적 구원 이해에 대한 안티테제(antithesis)로 로마서는 사용되었습니다. 아니, 곡용(曲用) 되었습니다.


(중략)종교개혁 이후의 많은 신학자들과 설교자들도 로마서의 몇몇 구절, 특히 3장과 4장, 그리고 5장의 몇 구절을 유독 붙들었습니다.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은혜로"라는 구호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공로 신학, 곧 인간의 선행과 성례 전 참여가 구원에 기여한다는 가르침을 반박하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정당하고 필요한 싸움이었습 니다. 루터가 로마서 1장 17절을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번역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춘 노력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그로 인해 시작된 개혁은 교회사에 남을 위대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부터 생겼습니다. 마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 적군을 향해 예리하게 벼려진 칼이, 전투가 끝 후 주변의 소중한 사람까지 상처를 입히는 도구로 사용된 것입니다. 로마서는 그렇게, 가톨릭이라는 특정한 상대를 향한 안티테제의 무기로 벼려진 이후, 새로운 시대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칼의 용도를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신칭의라는 하나의 렌즈가 로마서 전체를, 나아가 바울 신학 전체를,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는 유일한 렌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로마서는 마치 어머니가 반복해서 읽어 주시던 잠언의 그 몇 구절처럼, 문맥에서 뿌리 뽑힌 채 하나의 교리적 명제로 응고되고 말았습니다.


이 응고의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고 또 무엇을 잃어버렸을까요? 먼저, 로마서가 본래 로마라는 특정 도시의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에,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 사이의 실제적인 긴장과 갈등을 배경으로 쓰인 '편지'였다는 사실이 흐려졌습니다. 9장에서 11장에 이르는, 이스라엘의 운명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루는 그 길고 격정적인 논증은 이신칭의 교리의 부록쯤으로 취급되거나, 심하게는 통째로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무엇보다 12장 이후에 나오는 공동체의 실천적 윤리, 곧 서로 다른 신앙의 확신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한 식탁에서 함께 먹고 서로 용납할 것인가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권면 역시, 신학의 본론이 끝난 뒤에 덧붙여진 도덕적 여운 정도로 축소되었습니다. 이신칭의라는 안티테제로만 짜맞춰진 로마서의 그림은, 정작 더 중요한 다른 퍼즐 조각들을 버리거나 무시한 채 완성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곡용은 로마서 안에서조차 특정 구절에만 조명을 비추고 나머지는 그림자 속에 방치하는 습관을 낳았습니다. (중략) 그 결과 로마서는 살아 있는 편지가 아니라, 특정 교단과 특정 시대의 교리적 필요에 봉사하는 텍스트로 굳어졌습니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곡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로마서의 잘못이 아니라, 로마서를 읽어 온 우리의 역사와 습관의 무게가 만들어 낸 안타까운 왜곡이요 곡용입니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p.10-12



서문을 읽으면서 나의 신앙생활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사실 나에게도 종교개혁과 같은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 있었다.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자주 의심하곤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엄격한 양육 방식에 길들여진 나는,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하나님 앞에서도 칭찬받을 일을 많이 해야만 버림받지 않을 것 같은 유기감에 시달리곤 했다. 그리고 뭔가 잘못할 때마다 깊은 죄책감에 빠지곤 했다. 그런 나에게 로마서 8장 39절 말씀이 유독 크게 다가왔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얼마나 안도하게 되는 말씀이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의 어떤 행동 하나로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으로 나는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당연히, 구원은 인간의 선행이 아닌 전적인 하나님 은혜이다. 하지만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라는 그토록 견고한 확신은 언제부턴가 나의 영적 긴장감을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게으르고 나태한 믿음으로 인도했으며, 나의 신앙생활을 병들게 했다.


하나님 말씀을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한 태도로 읽어 보면, 믿음은 단순히 지적 동의나 마음속의 확신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로부터 시작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분명하게 요구하시는 믿음의 기준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가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아니, 명령하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마음으로 확신하는 것만으로 믿음을 인정하신다면,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그토록 반복해서 엄중히 말씀하신 명령들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거듭 말씀하셨고(마5:43, 마5:44, 눅6:27, 눅6:35, 롬12:19),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라고 하셨으며(요일3:15), 나의 소유를 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셨고(눅6:30),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다(눅9:23).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다(마7: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가 나를 사랑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요14:21). 이 모든 명령은 결코 마음의 확신으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닌, 사람이 자신의 죄성을 이기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가능한 일들이다("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롬 8:13-14"). 또한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약2:17)


잠시, 자녀의 성장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부모는 처음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면서 부모가 베풀어 주는 은혜를 누리기만 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해 어른이 되었음에도 언제까지나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기만 한다면 부모의 마음은 어떨까?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암담하고 비참하고 가슴 아플 것이다. 부모는 자녀의 성장을 기다린다. 그리고 성장한 자녀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여전히 자신의 목숨을 바칠 수 있을 만큼 자녀를 사랑하지만, 이제는 성인이 된 자녀가 성숙한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한다. 물론 자녀는 부모의 은혜를 결코 갚을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소중하게 기억하면서 은혜받은 자답게 성장하기를, 부모는 간절히 소망한다.


성장하지 않고 같은 자리를 맴도는 자녀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몹시 비통하고 처참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오늘날의 성도들은 온통 '사랑의 하나님'에만 기울어져 있다. 늘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과 은혜만 누리고 싶어 한다. 설령 누군가 자신의 잘못된 신앙을 되돌아보려고 해도, 주위에서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는다.

"자유해! 우리가 이렇게 연약한 거 다 아시니까 예수님이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거잖아."

"은혜로 사는 거지, 연약한 우리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겠어?"

"괜찮아. 믿기만 하면 돼. 대신 두 마음으로 믿으면 안 돼! 확신 있게 믿어야 구원받는 거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니 얼마나 안도하게 되는 말씀인가? 많은 성도들이 로마서 말씀들로 큰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5)."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롬5:1)."


하지만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 하심)'라는 교리적 가르침만 강조되면서 성도들은 믿음을 너무 쉽고 가벼운 것으로 오해하게 되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원자이심을 믿습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거나 마음속으로 확신하기만 하면 끝단다고 생각한다. 많은 교회에서 초신자들이 "당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 가는 것을 확신합니까?"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기만 하면 '구원에 합격'된 것으로 인정한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게으르고 나태한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고, 은혜만을 부르짖으며 삶으로 열매 맺지 못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크리스천은 말뿐"이라는 비웃음을 받게 되었다.


지난날 은혜만 부르짖던 나의 신앙생활을 떠올려 본다. 나만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질 만큼,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기적 같은 일들을 수없이 보여주시며 은혜를 주셨고 많은 것들을 채워 주셨다. 그렇게 분명한 은혜를 누렸음에도 나는 주기적으로 번아웃에 시달렸고 비슷한 문제로 자주 넘어졌다. 종종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기도 했지만 금세 낙심했고 고단해졌다. 교회 안에서 참여한 이런저런 봉사들과 교제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만남들 가운데, 나의 신앙생활은 의무감에 사로잡힌 무겁고 버거운 것이 되었다. 오히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 속에서 성취감을 만끽하는 동안 하나님 앞에서 한없이 교만해졌고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마저 잃어버렸다.


나는 정말로 변화되고 싶었다.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소망 없는 나를 보며, 하나님 앞에서 오만방자하게 움직이던 모든 일을 내려놓고, 내 믿음의 현주소를 진실되게 들여다보았다. 하나님 자체이신 말씀을 가볍게 여기며 읽고 싶은 부분만 읽던 태도를 버리고, 성경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렵고 힘든 말씀도 외면하지 않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꾸역꾸역 읽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읽을 때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왜곡되게 알고 있는지, 하나님 뜻을 어쩌면 그렇게도 몰랐는지 계속 깨닫게 해 주셨다. 또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계속 알려 주셨다. 그리고 말씀을 문자적으로 읽고 감동받는 데서 끝내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말씀에 순종하며 살기 위해 지금도 계속 몸부림치고 있다.


나의 믿음은 아직도 어린아이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지만, 매일 말씀을 읽고 기도하면서 거짓 없이 진실한 태도로 하나님 앞에 서는 시간이 늘어나니 조금씩 영적으로 민감해지는 것을 느낀다. 일상 가운데 일어나는 문제와 사건 속에서 감정과 생각의 노예가 되어 경거망동하지 않고, 왕 되신 주님께 묻고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니 영적 비밀을 깨닫는 감사와 기쁨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나 자신이 변화되니 주변 사람들에게 해 줄 말이 달라지고, 오랜 친구들과 매일 말씀을 읽고 나누는 기쁨도 누리게 되었다.


솔직히 여전히 나의 믿음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눈을 뜨는 동시에 죄를 짓고, 잠을 자는 동안 꿈에서도 죄를 짓는다. 그러나 나는 감히 이렇게 외치고 싶다. 믿음은 단지 마음속 확신에서 머무르는 것도 아니며, 종작없이 이런저런 열심으로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기록했듯이(롬1:5, 롬16:26) "신실한 믿음의 충성(Pistis)"을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서문의 끝부분을 나누려 한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p.12-15

이러한 곡용은 로마서의 문맥뿐만 아니라 단어와 개념 하나하나에도 그대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라는 단어를 우리는 너무 쉽게 '예수'라는 고유명사 뒤에 붙는 종교적 존칭, 곧 기름 부음 받은 분을 가리키는 형식적 호칭 정도로만 읽어 왔습니다. 그러나 로마라는 제국의 심장부에서, 카이사르가 '퀴리오스', 주(主)라고 불리고 그의 형상이 동전마다 새겨져 있던 그 시대에, '그리스도'라는 선포는 결코 종교적 수식어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진정한 왕, 곧 세상의 참된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선언하는 정치적이고 우주적인 신분 고백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첫머리에서 예수를 '그리스도'라 부르며 편지를 시작했을 때, 그의 청중은 그 이름 안에서 로마 황제의 권위와 정면으로 맞서는 또 하나의 왕적 주권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울림을 잃어버린 채 '그리스도'를 그저 습관적인 호칭으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로마서가 처음부터 던지고 있는 가장 대담한 선언 하나를 놓치는 셈입니다.


'믿음'이라는 개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믿음을 한 사람이 어떤 명제에 대해 지적으로 동의하거나, 마음속으로 확신을 품는 정도의 개인적이고 내면적인 사건으로 축소시켜 왔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용한 그 헬라어 단어, 즉 '피스티스(πίστις)'는 고대 세계에서 훨씬 더 무겁고 관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한 왕에게 바쳐지는 신하의 충성이며, 언약 관계 안에서 끝까지 저버리지 않는 신실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가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를 왕으로 인정한다는 지적 동의에서 멈추지 않고, 그 왕에게 삶 전체로 충성하며 신실하게 붙어 있는 존재 방식까지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으로"라는 그 유명한 구호도, 신실함과 충성이 빠진 채 그저 머리로 동의하는 것으로만 축소된다면, 바울이 본래 담아내려 했던 풍성한 의미의 절반도 채 전달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와 믿음이라는 두 단어만 되짚어 보아도, 로마서를 바로 읽는다는 것이 단순히 몇몇 구절을 뽑아내어 조직신학의 명제로 삼는 작업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참된 바로잡음은, 그 구절 하나하나를 로마 교회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속에 다시 세우고, 편지 전체의 흐름 안에서 그 자리를 찾아 주며, 나아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어지는 성경 전체의 진리의 물줄기 속에서 그 구절이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함께 살필 때에만 비로소 발견되는, 깊고도 풍성한 의미의 회복입니다. 그것은 몇 개의 구절을 오려 붙여 만든 교리집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통의 편지를 편지답게 읽어 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의 간절한 소망은 이제부터라도 로마서가 왜곡되고 편향된 교리서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영감을 받은 바울의 마음이 로마 교회에 전달된 편지로 다시 읽히기를 바랍니다. 결국 이것은 로마서 자체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저 멀리 16세기 유럽의 특정한 전투 속에서 벼려진 시대착오적인 안티테제의 칼날에서 우리가 함께 돌이키는 회개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 칼을 내려놓을 때에야 비로소, 로마서 그 자체가 본래 말하고자 했던 참된 테제, 곧 갈라진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부르시고 온 세상을 향해 신실하게 다스리시는 그 왕의 복음이 다시 온전히 정립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바로 그 본래적이고 더 이상 곡용되지 않은 로마서라는 편지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데에, 저의 이 번역이 아주 작은 징검다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강 이편에서 저편으로, 교리적 방어의 언어에서 살아 있는 편지의 언어로 건너가려는 이들이 발을 디딜 수 있는, 작지만 흔들리지 않는 돌 하나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 돌을 딛고 더 많은 이들이 로마서의 진짜 목소리, 곧 갈라진 공동체를 향해 화해와 은혜와 신실함을 노래한 바울의 그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헬라어 문장들과 주석들을 붙잡고 아픈 허리를 견뎌 낸 수많은 시간들, 무릎을 끓고 사랑하는 성도들과 한국 교회를 위해 부르짖었던 기도의 간절한 시간들이 작게나마 열매를 맺는 그 기쁨을, 맨 처음 로마서를 썼던 바울과 그리고 이 귀한 편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함께 나눌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해 봅니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p.12-15



우리는 단지 "난 그 사람이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라는 감정에 머무르는 것으로 사랑을 정의 내리지 않는다. 진짜 사랑에 빠지면 사랑하는 대상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이 정말 좋아하는 행동은 무엇인지, 그 사람이 진짜로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세심하게 관찰하고 또 물어보면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아무리 바빠도 시간을 쪼개어 나의 시간을 내어주고,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무엇이라도 더 주고 싶어 한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걸까? 나 자신을 포함해 오늘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 그 자체이신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정말로 싫어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역자들은 '일'을 하느라 너무나도 바빠서, 정작 가장 중요한 말씀을 연구하고 성도들에게 먹이는 데 온 마음을 다하지 않는다. 수많은 행사와 프로그램 준비를 위해 성도를 모으기에 급급하고, 설교 준비를 위해 겨우 성경을 펼치는 목회자들도 많다. 강단에서는 서로 사랑하자고 선포하지만 사역자들끼리 서로를 견제하고 시기한다. 말씀에 관해 질문해도 잘 모르고, 행위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라는 교리만 반복한다. 성도들이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말씀을 여과없이 전해 주기를 망설이고, 눈앞에 있는 성도의 영적 상태가 뻔히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성도들도 늘 듣던 것만 듣고 알던 것만 알면서 '구원의 확신'만 붙들고 평생을 살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어서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고 확신하면서 잘못된 삶의 습관을 회개하거나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주일마다 예배에 꼬박꼬박 참석하지만, 교회 문밖으로 나가면 세상과 똑같이 살아간다. 세상 사람들이 보고 듣고 먹고 마시며 열광하는 것에 똑같이 반응한다. 수많은 정보를 줄줄이 꿰고 있지만 정작 하나님 말씀에는 무관심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그 자체이신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하는데 도무지 성경을 펼치지 않는다. 행여 말씀을 읽는다 하더라도 말씀대로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는다. 늘 하나님을 '주님'이라 쉽게 고백하면서도 왕이신 그분께 순종하지 않는다.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봉사하지만 사랑의 대상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는 교제하지 않는다. 모이면 짝을 지어 흉보고 시기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한다. 지식이 많아지니 기준만 높아져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데 빠르지만, 정작 스스로의 민낯은 모른 척 회피한다. 서로를 사랑하지도,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결코 특정한 누군가를 저격하거나 비난하고 싶어서 쓰는 글이 아니다. 나에게는 그럴 자격이 조금도 없음을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신다. 이 모든 게 다름 아닌 지난날 나의 모습이었고, 내가 보아온 수많은 성도들과 사역자들의 모습이었다. '은혜 아니면 살 수가 없지...'라고 습관처럼 말면서 늘 합리화시키고 변명해 왔던 날들을 생각하면 너무나 부끄러워서 어디론가 숨고 싶다.


수많은 봉사와 사역들도, 전도를 위한 프로그램도, 성도의 교제도, 모두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지만 가장 우선되어야 할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없이, 맹목적으로 은혜만 부르짖는 분주한 삶은 신앙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성도들과 자주 만나 함께 밥을 먹고 교제하며 서로 위로의 말을 건네도,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니 결국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한다는 것은, 행동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도 아니고, 노력하면 완벽해질 수 있다는 뜻도 아니다. 생명을 내어주시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신 사랑하는 주님께 사랑으로 화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믿고 순종하며 충성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처음과 끝에서 "신실한 믿음의 충성(Pistis)"을 강조했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1장 5절

바로 그런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는 은혜와 사도의 사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은혜로운 사도의 직분을 받은 이유이자 목적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온 우주의 유일한 왕이시고 주인이신 메시아 예수님께 신실한 믿음의 충성과 순종을 드림으로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함입니다.


「로마서, 풀어쓴 성경」 16장 26-27절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으로 기록되었다가 이제는 명백하게 나타나 실제가 된 그 복음의 비밀의 계시(구원의 계획)로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 함께 신실한 믿음의 충성과 순종을 우리 모두의 주인 되신 메시아 예수님께 드리도록 역사하신 분(하나님)께,


즉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주신 유일하시고 지혜로우신 바로 그 하나님께, 영원한 시대까지 무한한 영광을 올려 드립니다. 아멘!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알아서 주님과 가까워지고 싶은 성도들에게 「로마서, 풀어쓴 성경」을 꼭 추천해 주고 싶다. "로마서의 진짜 목소리, 곧 갈라진 공동체를 향해 화해와 은혜와 신실함을 노래한 바울의 그 목소리를 온전히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저자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지길 기도한다. 그래서 '맨 처음 로마서를 썼던 바울 그리고 이 귀한 편지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흡족해하시며 기뻐하시기를 나 또한 간절히 기도한다.


그동안 강산 목사님의 설교와 풀어쓴 성경 시리즈 덕분에 말씀을 바르게 읽고 태도를 기르는 데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또한 다양한 좋은 번역본을 읽는 습관도 얻을 수 있었다.(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지만, 말씀을 옮기는 과정에서 필요한 번역과 해석에는 한계와 오류가 있을 수 있다. 물론 번역의 한계가 있다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본질적인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어려운 구절을 깊이 이해할 때는 원문과 여러 번역본을 통해 문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조금이라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헬라어 원문의 단어 하나, 전치사와 접속사 하나까지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쓰시는 강산 목사님께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를 전하고 싶다. SNS와 스마트폰, 미디어를 절제하면서 무려 5년 동안 로마서 원문과 치열하게 씨름하며 사랑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신 목사님의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c*********9 2026.09.30. 신고 공감 1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