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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산만한 프로그램이지만,미처 몰랐던 상식을 알아 가는 재미가 있어 종종 챙겨 보는 방송이 있다.제페토 할아버지가 피노키오에게 배를 건넬 때 피노키오의 반응을 묻는 것 역시 그 프로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그리고 이어지는 호기심이 결국 원작을 챙겨보게 만들었다.^^) 거짓말 하면 코가 길어지는 아이 정도로 알고 있었던 피노키오였다.그런데 껍질을 깍아주지 않으면 먹지 않겠단다..정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을까,당시 분위기도 그랬을까..나는 피노키오란 아이가 퍽 버릇(?)없는 아이로 느껴지기까지 했다.그런데 원작을 찾아 읽으면서 ..생각은 달라졌다.배의 껍질을 깎아 달라고 한 것이 그렇게 버릇없는 행동이였던 걸까? 심지어 버릇없게 요구하지도 않았다.(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에서...) 오히려 그런 피노키오의 모습을 보고 나쁜버릇이라고..단정짓듯 말하는 제페토 할아버지에게서 야속함이 느껴졌다. 해서,지인에게 톡을 보냈더니...자신은 제페토 할아버지마음이 이해된다고 했다.뭐든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하고,학교에서는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어쩔수 없는 상황이란다...
'피노키오' 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그러나 거짓말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사실(?)말고 아는 것은 없었다.심지어 피노키오하면 개구장이로 그려진다는 것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그런데 어른이 되어 읽은 동화라 그랬을까 느낌은 너무 달랐다.목수이긴 하나 조각 할 수 있는 변변한 나무토막 조차 없을 만큼 제페토 할아버지는 가난했다.심지어 다소 괴팍한 성격도 있어서 나무토막을 주러 온 이웃 안토니오와 별명을 부른다는 이유로 몸싸움까지 하지 않던가..그런데 안토니오 역시 순수(?)마음으로 제페토 노인에게 나무 토막을 주는 것도 아니였다. 이런 부분까지 내 시선에 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다. 무튼 나무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듯 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를 숨기고 선물인냥 제페토할아버지에게 주고 떠난다.피노키오와 제페토 할아버지의 인연이 시작되는 시점은 여기부터였다.그리고 이후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는 줄거리가 그려진다.거짓말과 멋대로의 행동이 반복되는 과정 속에 반성도 하지만 또 다시 원래의 개구장이 아이로 돌아온다.그럴때마다 어른들의 목소리는 너무 일반화된 말들 뿐이였다.어디 그 뿐인가 도와달라고 할때 매몰차게 외면하는 경우도 있지 않던가,이런짓을 했으니 너는 반드시 그런 아이일거야..라면서...자신을 믿어주는 이들과 약속을 번번히 어기면서 결국 당나귀까지 되어버리게 되면서 피노키오는 조금씩 성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너는 왜 그렇게 거짓말을 하는 나쁜 친구의 말을 믿은 거야? "왜?...왜냐하면 다람쥐야 난 아무것도 모르는 꼭두각시이기 때문이지..그리고 마음이 없기 때문이야.아! 내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어머니처럼 날 사랑해 주고 날 위해 많은 것을 해 준 요정님을 버리지 않았을 텐데(...)"/204쪽
요즘은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고루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그러나 어느 정도의 결핍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입장에서 피노키오의 일탈은 마냥 개구장이에 철없는 모습으로만 다가오지 않았다. 할아버지 말을 듣고,학교에서 공부를 한다고 해서 그가 착하고 훌륭한 아이가 될까? 또 다른 의미에서 꼭두각시가 되는 건 아닐까...지금 교육현장에도 '마음'을 가르치기는 쉽지 않을테니 말이다.산전순전 겪지 않고도 피노키오가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해 갈 수 있었다면 바랄게 없었겠지만,어른의 눈으로 보면 일탈에 가까운 수많은 행동을 통해 그는 '가치'를 깨닫게 된 것 같다. 상어의 몸 속으로 들어가 아버지를 구해오는 과정은 성서 '요나'가 떠오르게 하기도 했고..동화가 씌여진 당시 교회 신부들이 피노키오 이야기가 반란을 일으킬수 있다고 걱정할 만 하다는 설명에 나 역시 공감했다. 학교 가지 않아도 모험을 통해 자신이 성장하고 결국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결말을 맺고 있으니 저마다 자신의 유토피아를 꿈꿔보게 되지 않을까 꼭두각시가 아닌 진짜 사람으로..읽는 동안 너무 교과서적인 교훈을 주는 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어른의 시선이 아닌 피노키오의 시선으로 읽노라면,피노키오..를 거짓말하면 코가 길어지는 아이..정도로만 기억하지는 않게 될 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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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은 어른답게, 아이도 어른답게
아이를 키우다 보면 예전부터 전해내려오는 육아 방식에서 가부장적 사회 분위기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기가 안아줄 때는 안 울다가, 내려놓으면 울 때 우리가 가장 많이 듣게 되고 하게 되는 말! '애 손탔어. 너무 안아주믄 안돼'이다.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란 말이라 아무런 생각없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말인데 이제 아이를 키우다 보니 그 말은 그야말로 어른들의 입장에서 생긴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안아 달라는 것은 그 상태가 평온하고 좋다는 말이고, 그래야 더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말인데, 어른들은 아기를 계속 안아주면 또 안아줘야하니 고생이라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말하는 어른은 아무도 없다. 그냥 이유는 '애가 버릇 나빠질까봐'이다. 아기들을 많이 안아줬다고 버릇 나쁜 아이로 자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른들은 내 팔이 아파서 아기를 안 안아주는 것은 절대 아니며, 다만 아기가 스스로 감내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자기 합리화를 이유로 들이대는 것이다.
피노키오를 보면서 그런 불편한 마음을 많이 느꼈다. 우선 피노키오는 전적으로 제페토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토막이다. 오직 그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피노키오는 아버지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는데 말을 듣지 않는다. 피노키오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마다 여지없이 그에 따른 체벌이 가해진다. 그것은 인위적이지 않은 것처럼 전개되지만, 기성세대의 욕망을 여기저기 박아 넣은 것에 불과하다.
피노키오는 학교를 가기 싫어했던 그당시 대부분의 아이들을 대변했다. 하나뿐인 외투를 팔아 책을 산 아버지의 숭고한 희생을 비웃기라도 하듯 피노키오는 그 책을 팔아 극단의 연극을 보러간다. 물론 이때문에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는 사회적 응징이 뒤따른다. 철없는 아이들을 대변하는 것이 피노키오라면 그에 대한 응징을 하는 부모를 대변하는 것은 그를 둘러싼 환경 그 자체이다.
어른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하나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을 때마다 너는 그에 따른 응징을 받게 될 것이니, 무조건 시키는 대로만 하면된다.'
산업혁명의 시기에 피노키오가 살아 남는 법
피노키오는 단순히 부모 자식 간의 구도를 반영하던 것을 넘어서 사회 기득권과 피지배 계층의 모양새를 반영한다. 카를로 콜로디가 피노키오를 발표한 시기는 19세기 말로 한창 근대 학교가 세워지던 시기다. 농사만 짓던 노동력을 공장으로 데려와 일을 시키려다 보니 훈련이 쉽지 않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스템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는지 사실 지금 우리나라 교육의 대부분이 그 형태를 띄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 당시 기성세대 혹은 기득권자들이 원하는 것은 새로운 노동력들이 군소리 없이 학교에 와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만큼의 교육을 듣고, 군소리 없이 공장의 부속품으로 장착되는 것이었다. 교육이 존재의 본질을 파헤치거나 삶의 의미를 생각한다는 배부른 생각은 공장 쓰레기통에 쳐박히고, 오직 기계 부속품으로 필요한 공부만 계속된다. 이러한 시스템이 공고해지기 위해서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생각조차 해서도 안되며, 대열에서 벗어나겠다는 열망을 가져서도 안되며, 필요없는 것을 배우려고 해서도 안된다. 그저 컨베이어 벨트에 올라 주는 것만 먹고, 입히는 것만 입고,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어야 한다. 피노키오는 대열을 이탈하려는 철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 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책을 보면서 피노키오가 나무토막인 것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했으면 그 고통스런 응징에 이미 죽었어야 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상의 체벌은 가혹하다.
피노키오는 어떻게 사람이 됐을까?
피노키오는 이야기 마지막 즈음에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됐다는 것은 피노키오가 개과천선 했다는 뜻일까? 안타깝게도 아니다. 피노키오가 사람이 된 이유는 열심히 일하고, 말 잘듣고 밤에는 공부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 구성원으로서 결점이 없이 모난 구석을 다 깍아 내버린 후에 드디어 사람으로 되는 것이다.
무비판적으로 이 책을 보면 그냥 재미있다. 과거에 내가 부모님을 속 썩였던 생각도 나고 그 때 부모님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안타까움도 들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더 자세히 본다면 이 책은 그 어떤 책보다 치밀하게 권위적이다. 권위에 저항하는 피노키오의 그 어떤 행동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율성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다.
너무 치우치게 동화를 본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분은 꼭 한번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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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키오>는 어린 시절 중앙문화사의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 중 한 권으로 읽었던 동화다. 지금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를 읽고 보니, 그때 읽었던 동화 역시 완역본이었다. <피노키오>에 대해서는 운이 좋았다. 같은 전집에서 축역본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린이로서 <피노키오>를 읽을 때는 이렇게 부모님이나 선생님 말을 안 들으면 큰일난다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피노키오 친구였던 가엾은 심지의 운명을 슬퍼했던 기억이 있다. 기껏해야 학교 안 가고 놀고 싶어했을 뿐인데, 당나귀가 되어 농가에서 혹사당하다가 숨지는 운명이라니,지나치지 않은가. 아무리 우화라지만 이 장면은 슬픔을 넘어 공포스럽기까지 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유감스럽다. 이 작품이 발표되던 19세기 후반을 떠올려 본다. 학교와 공장 등 이전에 없던 근대 제도가 자리 잡아가는 유럽 사회가 필요로 했던 어린이(유년노동자)의 모습이, 제페토 아빠를 부양하면서 성실한 아이로 변모한 피노키오의 모습에서 어른거린다. <피노키오>의 본문에서는 학교가기 싫어하거나 공부하지 않는 게으른 어린이는 감옥이나 병원밖에 갈 곳이 없다는 이야기가 두 번이나 나온다. 병원과 감옥 모두 근대 사회를 강제하고 유지하는 장치가 된다. 이 작품을 근대 유럽 사회의 우화적 단면, 또는 '근대 어린이 만들기'의 텍스트로 삼아 접근하고, 행간에 숨겨진 은유와 풍자를 분석하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피노키오> 이야기가 당시 사회를 다양하게 은유하거나 풍자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른의 말에 순종하고 사회의 법규에서 일탈하지 않는 삶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 크게는 선행에는 보상이 따른다는 교훈을 준다고 본다. 물론 그 틈새에서 자신에게 의미있는 무엇을 찾아낼지는 각자의 몫이기도 하다. 다시 읽은 <피노키오> 이야기에서 취할 점이 없지는 않았다. 조건없이 믿어주는 사랑의 힘을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다. 끝까지 용서하고 품어주는 사랑이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는 기억할 만하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