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의 이러한 논픽션소설이 있었던가?? 세계 최초의 팩션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을 줄을 몰랐다. 내가 팩션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은 <다빈치 코드>와 같이 역사적 사실의 애매한 틈을 집요하게 파헤친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또 원체 <다빈치 코드> 이후로 같은 맥락의 작품들이 팩션이라 하면서 얼마나 많이 쏟아졌던가. 그러니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할 수 밖에. <인 콜드 블러드>는 당시에는 이제껏 소설 형식이 취하지 않은 노선을 택한 작품이다. 팩션의 원조. 작가는 자신에게 있어서 이런 기술적 방법을 택한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논픽션 노블이란 어리둥절한 장르는 독자에게 저널리즘 소설처럼 적나라한 고발을 하면서 동시에 문학적 향내를 풀풀 풍긴다. 일석이조의 극대화. 1959년, 캔자스 주의 홀컴이란 시골마을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농장주 클러터 씨를 포함해서 일가족 4명이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다. 각각 얼굴에 산탄총의 폐해를 입어 면상이 끔찍하게 훼손됐으며 손과 발은 기묘한 매듭으로 묶여져, 푸는 사람만 귀찮게 되게끔 당한 사건. 무자비한 범인들이 증거라고 남기고 간건 고작 마름모 무늬의 신발 밑바닥 디자인 뿐이다. 작가는 뉴욕타임즈 신문기사에서 이 살인 사건 접하고 흥미를 느껴 친구인 하퍼 리와 직접 그 마을에 찾아갔다고 한다.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사건과 관계된 온갖것을 조사했다. 주민들과의 인터뷰. 마을의 동향. 세상의 관심등...... 여튼 6년의 기록이 530쪽에 달하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호기심으로 이 책을 든 사람은 다시 조용히 책을 내려놓기 바란다. <인 콜드 블러드>는 살인 사건이 벌어진 시점에서 범인을 비롯한 온갖 관계자들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술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초반에 읽었던 불량끼 많은 두 남자, 딕과 페리가 이 잔인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장본인들이며 왜 이 두 녀석들은 그런 차가운 피를 가진 범죄자가 되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읽으면 된다. 작은 마을에 그런 잔인한 사건이 생기고 나서 마을 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시점에서 주민들은 우리들 중에 누군가 범인이 있지 않겠느냐 생각하며 서로간의 불신을 키워간다. 작가의 서술 특징인 인터뷰식의 전개에서 주민들의 증언을 듣다 보면 마을이 공포 분위기로 얼마나 싱숭생숭해졌는지 대번에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증언식의 기법(?)이 <인 콜드 블러드>가 여타의 작품들보다 출중하고 개성있는 면모를 과시한다고 생각한다. 사실과 허구를 좀처럼 구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진실이게끔 보여주는 힘 말이다. <인 콜드 블러드>는 작가의 철저한 객관적 시선의 표현 방법과 또한 작가 특유의 문학적인 표현이 더해져서 시너지 효과를 낳는 작품이다. 자못 딱딱해지고 지루할 수 있는 냉정한 시선을 감수성이 짙은 산문적 문장으로 탈바꿈 시켜 무척이나 매혹적이고 감정이입이 잘 된다. 책을 읽으면서 홀컴이라는 시골 마을이 단순히 지명 정도가 아니라 살아있는 유기체의 느낌을 받았다. 책의 후반부는 사형선고를 받은 딕과 페리 그리고 이 두사람을 사형집행하는 ''사회''의 이야기다. 띠지의 광고처럼 인간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을 만큼의 임팩트를 주는 부분인데...... 이 부분은 개인적으로 강렬한 느낌으로 남았다. 여러분들도 함께 맬 짐으로 남기며 일독을 권한다. |
| 실화(fact)와, 현장에 내려간 기록자(writer)와, 그가 기록한 기록물(non-fiction). 실화와 기록물 사이의 거리와 그 사이에 가로 걸린 외줄을 건너는 작가의 시선, 이들이 이루는 긴장이 <인 콜드 블러드>의 독서 포인트이다. 이 작품은 끔찍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겪은 미국의 작은 마을을 취재하는 르포르타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작가의 형식에 대한 뚜렷한 자의식은 이 책을 ''저널리즘 소설''이라는 독특한 지점으로 인도한다. 이 작품이 소설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그저 ''뉴욕타임스''에 실린 동일한 내용의 사건을 다룬 기사가 전부이다. 그러니 당신이 읽은 것은 과연 무엇인가! 픽션(fiction)이 거짓으로 진실을 전달한다면, 작가는 냉정한 시선으로 사실(fact)을 전달하면서도 자신이 본 것보다 더 거대한 심상을 독자들에게 새겨넣는 데 성공한다. 이 작품을 보면 <텍사스 전기톱 살인마(맞나?)>와 같은 맥락의, 미국인들이 갖고 있는 공포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이 겪은 일련의 연쇄살인사건으로 인간에 대한 조건없는 믿음은 심각하게 훼손되고 이런 상상력은 야만에 대한 공포와 카니발리즘으로 확대되기 십상이다. 이렇게 공포영화의 소재로 차용될 법한 선정적인 사실 앞에서 트루먼 카포티는 냉정한 시선을 견지하며 한편의 놀라운 문학 작품을 완성해낸다. 한국에서도 영화 <트루먼 카포티>가 부디 얼렁 개봉될 수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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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새로운 읽기 경험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류는 종종 읽었지만, 이번처럼 실제 일어난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을 인터뷰 하면서 얻어진 자료들을 바탕으로 쓰여진 팩션류는 흔치 않았다. 더구나 작가가 범인들을 집요하게 인터뷰하면서 쓰여진 그들의 심리 묘사는 탁월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이 어느 정도 얹어졌겠지만, 범인인 페리와 딕을 처음부터 노출시키며 그들의 생각을 따라가는 방식은 새로웠고 흥미로웠다.
이러한 전개 방식으로 스톡홀름 신드롬까진 아니더라도 범인들이 잘못된 선택의 인과과정을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게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흔히 범죄 소설을 읽게 되면 피해자의 입장과 범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이유에 대해 많이 접하게 되지만, 범인들의 성장과정을 통해 그들을 들여다 보고, 우연이지만 그들의 필연적인 삶의 결과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번 읽기는 내게 많은 생각거리를 갖게 했다.
1959년 캔자스 주의 작은 마을 홀컴에서 일가족 4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평소 홀컴은 캔자스의 다른 지역 사람들이 '거기 바깥' 이라고 부를 정도로 외딴 지역이고, 그래서 많이 알려진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뜻밖의 끔찍한 살인 사건으로 전 지역을 떠들썩 하게 만들고 그 사건으로 홀컴은 사람들과 언론의 중심에 서 있게 된다. 피의자 클리터 씨는 평소 인근 마을에서 점잖고 예의바른 사람으로 알려져 있고, 그가 소유한 대농장의 농장주인데도 누구에게나 인심도 후하고 친절해 그 사건은 많은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으로 다가가게 된다. 이야기는 생전의 클리터 씨와 그의 아내 그리고 딸 낸시와 아들 캐년의 평소 모습을 마을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하나씩 들려주고 있다. 더구나 마지막까지 그들의 생전 모습을 본 낸시 남자 친구의 입을 통해 얼마나 평화롭고 평소와 다름없이 일상의 삶이 이어졌는지의 시간들을 들려준다. 몇 시간 뒤면 그들을 덮칠 죽음에 대한 어떤 그림자도 느낄 수 없이 평온하던 모습에서 그 사건의 끔찍함은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사건 이후 홀컴에선 이전과는 사뭇 다르게 서로가 서로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게 되고, 지금까지 가족처럼 믿고 서로 의지했던 이웃들이지만, 집집마다 자물쇠를 채우게 된다. 좀처럼 사건의 윤곽은 잡히지 않고, 클리터 씨에게 원한을 살 만한 그 누군가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면서 사건은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들 듯, 몇몇 시 이외에는 그 사건을 차츰 잊어간다. 하지만, 우연하게 이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된 한 수감자의 제보로 사건의 작은 실마리를 잡아가게 되면서 하나씩 풀어간다.
중간중간 작가는 범인인 페리와 딕의 사건 이전과 이후의 행적들을 교차 시키면서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들이 왜 그러한 범행을 하게 되었고, 범행후의 도피행각을 따라가면서 너무나도 살인에 대한 무감각한 그들을 보며 분노도 일게 되었다. 흥미로웠던 부분은 범인의 입을 통해 그들의 과거를 알아가는 것보다 가족들을 통해 밝혀진 범인들의 모습에서 하나의 일을 가족이라도 바라보는 시선이나 거거서 얻게 되는 생각들이 저마다인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도 알았다. 페리의 말처럼 자신에게 누군가의 따뜻한 관심이 있었더라면 그는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갔을까. 더구나 페리가 늘 원했던 음악이나 악기를 배우고 싶었던 열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면 그의 열등감은 살인이 아닌 다른 곳으로 표출할 수 있었을까. 우리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종종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을 놓고 그것에 대한 원인을 분석해 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행동에 대한 정당화로 과거의 자신의 무언가를 끄집어 내는 것은 아닐까. 더 끔찍한 삶의 상황에서도 그러함을 극복하고 훌륭하게 성장한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은가. 과연 그들, 역경을 딛고 일어선 사람들은 페리를 향해 무어라고 말 할지 들어보고 싶다.
또다른 범인인 딕의 경우처럼 무난하게 성장하면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대학 진학을 가난한 형편으로 포기하게 되자 자신의 삶이 추락하게 된 것이 살인에 대한 정당화가 될 수 있을까. 더 못한 상황에 있는 저마다의 사람들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진 않은 것처럼 딕의 경우도 성장과정을 통해 딕 자신이 안일한 태도와 자신의 욕망이 항상 자신의 형편보다 더 앞서가면서 그 차이를 엉뚱한 방향으로 표출시켰지 않을까 생각된다. 더구나 그들이 저지른 살인 사건은 아무 연관도 없었던 사람들에 대해 너무나도 우연히 계획되고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점에서 딕의 상황들이 더 잘 이해된다. 사형 집행이 되기 전 마지막 순간까지 딕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용서를 빌기보다는 탈옥을 꿈꾸지 않았던가?
[인 콜드 블러드]를 읽으면서 아무리 훌륭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남겨진 사람들에게선 그 사람에 대한 옳지 못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인간의 끔찍한 심리를 엿보게 되었다. 범인이 잡혀도 홀컴 마을의 주민들은 분명 그 범인 뒤에 또다른 누군가가 음해를 해 클리터 씨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다. 그러면서 애써 클리터 씨의 평소 적이었던 보이지 않은 누군가를 자꾸 캐내려고 하는 모습에서 자기 중심적인 사고의 끝은 어딜까를 생각해 봤다. 또한, 엄연한 사실 앞에서도 믿기 싫어하는 인간의 심리와 믿고 싶은 것만 믿고자 하는 우리들의 심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해 봐야 할까.
이번 작품을 통해 작가 트루먼 카포티의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시선에서 나온 심리 묘사의 탁월함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또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지금과는 조금 다른 보이지 않은 변화가 내게 생길 수도 있을 듯한 예감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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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믿을 수가 없다. 얼마 전 타블로의 학력위조 사건을 보며 무엇을 보여주던 본인이 믿는 것 외에는 모두 거짓으로 믿는 사람들을 보았다. ‘이건 이런 것입니다.’라 설명해줘도 그럴 리 없다 부정한다. 그 속엔 조작된 뭔가가 있을 것이란 의심이 앞선다. 예전엔 인간을 믿었기에 그 진심을 신뢰했다. 그 사람이 한 이야기에 생명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이젠 우리가 우습게 만든 이야기가 생명을 얻고, 언론을 통해 공론화 된다. 근거 없는 낭설도 모두 정설로 만들어버리는 세상. 이것이 부당한 세상인가.
영화 <부당거래>를 보고 나오며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진실은 행해지지 않고, 생성된다는 것이다. 요즘 한국사회가 그렇고, 한국 영화들은 어김없이 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방자전>, <시라노 연애조작단> 이 두 영화는 영화 속에서 만들어진 영화(설정, 각본)가 엄연한 진실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서 그 재미를 찾는다. <방자전>은 우리가 알던 <춘향전>이 결국엔 방자의 손에 의해 조작된 소설이었다는 설정이고, <시라노 연애 조작단>의 경우 사랑 역시 하나의 조작된 시나리오에 의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어찌 보면 섬뜩한 내용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진심이 아닌, 만들어진 공식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은 따듯한 웃음이 아닌 그저 만들어진 웃음으로 느껴진다. 한국의 관객이 가장 사랑했던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은 우리가 믿던 것들이 결국엔 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말해주는 것이다.
<영화는 영화다>는 영화와 현실의 모호함 그 경계에 대해 절묘하게 표현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강패’는 깡패지만 영화에서 깡패역할을 연기하고, 수타는 스타연기자지만 영화에서 사람을 진짜 때리는 깡패 짓을 한다. 영화는 이 두사람의 혼돈되는 역할놀이에 관심을 기울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역할에 대해 우습게 보고, 비난하지만 어느새 그 역할을 따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리고 영화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영화가 되는 영화의 클라이막스는 이상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 마치 꿈 좀 깨라는 듯 강패는 수타의 앞에서 깡패로서 본연의 자신을 보여준다. 영화는 다시 흑과 백의 차이처럼 두 사람을 구분하고, 강패는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인다. 허구와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꿈만 꾸는 이 시대의 삶. 그것이 영화는 영화다라고 꼭 말해주어야 하는 이유다.
TV속 요즘 유행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허구와 진실을 더욱 흙탕물 속으로 범벅 해 놓는데 열중이다. <우리 결혼 했어요>, <패밀리가 떴다>과 같은 리얼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은 마치 실제인 냥 연기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실일 수도 있다고 애써 믿는다. 아니 그러고 싶다. 실제는 짜진 각본대로 연기하는 허구의 세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시 진짜 사귀는 것은 아닐까? 혹시 진짜 리얼한 상태에서 하는 거 아닐까? 믿고 싶어지는 것이다. 도무지 믿고 싶지 않은 참혹한 세상에 대한 부정의 태도로 TV에 의지하는 것이다, 도무지 현실의 밑바닥을 받아들일 용기가 나지 않는 현 시대의 아이들에게 도망칠 수 있는 장을 마련한다. 그래서 현실과 쇼비지니스의 세계를 지속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참고해서 살아간다. 그리고 그 중심엔 허구의 진실화가 언론의 기사에 빈번하게 스며들며 우리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이슈가 될 만한 내용이라면 인터넷에 수 십 개씩 뜨는 찌라시 기사들은 진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추측하고, 과장하고, 왜곡된 정보들이 기사라는 진실의 장을 통해 제공되니 우리는 허구와 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을 수 없다. 거짓된 정보를 진실로 믿고, 그것을 통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길 원하는 심리가 영화, TV를 넘어 언론까지 스며드는 것이다.
영화 <부당거래>에선 잡히지 않는 살인마를 거짓으로 만들고, 검사가 그 시나리오를 쓰고, 형사는 그것을 감독하며, 기업은 그것을 직접 행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부당한 것은 이 모든 사실들을 왜곡해서 작성해 국민들에게 알려주는 기자에게 있다. 쉽게 펜을 갈기는 기자들은 잉크가 마르기 무섭게 기사를 지우고, 새로운 허구를 진실의 장에 전달해 대중을 흐린다. 대중 역시 살기 바빠 도통 그것을 따지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수용한다. 허구를 수용한 대중은 분노하고, 새로운 이슈거리를 재생산한다. 그것이 다시 언론을 통해 과장되어 새로운 펙트로 전송된다. 이 사회의 시스템을 이 영화는 정확히 관통하는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위기에 빠진 검사는 언론을 통해 거짓을 흘려 자신에게 집중된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한다. 언론의 정보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대중을 조롱하는 장면이다. 아무것도 진실이라고 생가할 수 없으니 우리는 세상에 일어나는 그 무엇도 믿을 수가 없다.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해봤자 TV프로그램과 거짓을 쓰는 기자의 말처럼 거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결국엔 믿을 건 내가 믿는 전제 그 하나고,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 마치 자신이 아는 것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인 냥 생각하는데 익숙하다.
미국의 위대한 소설가 트루먼 카포티(Truman Streckfus Persons,1924.9.30 - 1984.8.25)는 한 마을의 살인사건을 취재하며 그 취재내용을 소재삼아 논픽션 소설을 쓰게 된다. 사실을 소설화하는 모순적인 작업. 그 이전까지 논픽션이라는 개념은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기자 출신이던 트루먼은 신문 한 귀퉁이의 작은 살인사건의 텍스트를 한 편의 소설로 불러 일으키는데 자신의 문학적 야심을 쏟아 붓는다. 그는 이 작업을 하는 도중에 심한 내적갈등을 겪게 된다. 그 이유는 범인 스미스에게 동정심과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과 닮은 부분이 너무나 많은 스미스에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낀 트루먼은 사실과 허구의 간극을 작품 속에서 매우느라 하루도 편히 지내지 못한다. 그는 문학적 위대함과 사실의 참혹함 사이를 오가며 소설을 작성했다. 그의 치우친 입장은 사실을 왜곡시켜 소설에 새겨 넣었고, 그 결과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논픽션 소설이 되었다. 이 작품으로 부와 명예를 한 번에 쥔 트루먼 카포티는 거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카포티는 서서히 죽어간다. 예전 같은 작품활동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삶의 의지를 잃었다. 뉴욕의 상류층의 생활을 즐기며, 미국 역사상 가장 위압적인 재능을 품고 있던 그가 더 이상 삶을 지탱하지 못했던 이유는 자신의 글에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작품에 느껴지는 트루먼 카포티의 고단한 고뇌의 흔적이 그것을 읽는 자의 마음을 움직인다. 기자 출신이었던 카포티는 사실과 소설 사이의 간극을 매워보려 했지만, 진실을 작성해야 한다는 기자의 정신과 허구를 작성하는 문학가의 간극을 매우지 못하고 무너졌다.
글을 쓰는 자라면 자신의 글 앞에 당당해질 수 있어야 하고, 다른 이에게 영감을 주는 언론인이라면 내 목소리에 생명을 걸어야 할 것이다. 믿을 것이 없는 세상에 진실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던 정보들조차 우리를 거짓으로 잠식한다면 더 이상 내 앞에 앉아있는 친구의 입술에서 썩은 기운을 느낄 것이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보여지는 진실을 의심하고, 거짓을 사실화하는 세상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세상엔 진실이 없다는 불신. 그것이 우리에게 놓여진 엄연한 사실들 앞에서 주저하고, 거짓투성이의 컨텐츠에 진실성을 부과하는 촌극을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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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저자인 트루먼카포티를 소재로 한 전기영화 '카포티'가 최근 국내에 소개되었다.
영화 관련 소개 내용을 보다가, 이 사람이 궁금해 졌다. 이 소설은 저널리즘에 기반한 소설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 소설은 1959년에 미국 캔사스 주 외곽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
... 그리고 이 사건은 카포티의 소설로 새로 태어났다. 결국 이 소설의 내용은, 어느날 일가족 네 명이 살해되었고, 범인이 잡혀 사형을 당했다,로 간단히 요약될 수 있다.
"아니,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500페이지짜리 보고서다.
매우 인상적인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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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픽션 노블'의 효시, 혹은 그것을 완성시킨 작품이라고 칭송받는 카포티의 야심작 '인 콜드 블러드'는 곧 살해당하게 될 '클러터 가족'의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마치 다른 차원에 서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치밀하고도 사실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 그들과 마주하게될, 그리고 그들을 끔찍한 불행으로 몰고갈 두 남자의 이야기가 교차 서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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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심리상태가 복잡하여 읽고있던 경제관련 서적을 모두 덮고 오랫만에 편한 마음으로 소설 책 한권을 읽자는 생각이 들었다.
내 다른 여느 책들처럼 사실 구입한 건 반년도 전이었던 것 같은데, 같이 보려던 카포티라는영화와 함께 슬그머니 먼지가 쌓여 있던 걸 꺼내 들었던 게다.
이 책에 붙은 타이틀은 이러하다. 최초의 팩션소설
아마 당시로서는 꽤 충격적인 시도였을 것이라 본다. 더욱이 반성 또는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는 싸이코패스인 살인자 둘이 이야기이니 말이다.
하지만 팩션(논픽션)이라는 것이 근래는 흔한 장르가 되어버렸고, 사실보다 더 사실 같은 드라마와 소설들이 난무하는 시대가 되다보니, 이런 반세기 가까이 흘러가버린 지난 일들은 어쩌면 소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이란 어쩌면 존재에 대한 유지란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유전자, 자신의 기록, 자신에 대한 생각과 추억. 자신의 기억과 추억을 함께했던 이들 또한 시간이 흘러 무덤으로 사라졌을때, 그 존재는 소설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일까.
기나긴 자연의 영역과 시간 속에서 명멸하는 개개의 생명의 존재는 얼마만큼의 의미가 있는 것일지.
때로는 삶의 허무함과 때로는 그런만큼의 치열함이 번갈아 가슴을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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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이라는 장르가 다 이런것인지?
소설이라기보다 시사 다큐 같은 느낌을 많이 받았다.
책이 처음 배송되어 왔을때 엄청난 페이지 수에 압도 당했고,
나름 홍보도 빠방하게 하길래 재밌을까 하는 마음에 책을 들어,
끝까지 읽었다. 진짜 끝까지 읽었다. 산 돈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읽었다.
책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 일가족 살인사건을 보던 주인공,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해 취재를 떠난다.
아하 그때 범인은 이렇게 했구나, 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느꼈구나-
하고 더 자세히 자세히 알게 되고, 이야기는 끝난다.'
전형적인 미국식 재연 프로그램 - 옛날에 인기있었던 긴급구조 911이라던가,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하는 온갖 사건 사고 프로그램을 책으로 읽는 느낌이다.
영상으로 하면 1시간 짜리 다큐멘터리로 끝나겠지만,
책으로 쓰다보니 535페이지나 왔네 그려. 허허허.
다큐멘터리 플로우 차트식으로 쓰자면
마을 사람1(가명) : 처음에는 아무도 이상한 점을 못 느꼈어요.
담당 경찰관 XXX씨 : 처음 갔을땐 정말...말을 이을 수 없었죠.
(누군가가 촬영한 듯한 핸드 카메라 영상이 나오면서-)
나레이션: 사람들은 모두 소리를 지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느낌?
그냥 다 내용을 알겠는데 질질 끄는 듯한 진행이 너무 답답했다.
답답하다 못해 답답했다. 535페이지를 수십번 집어던지고 싶었을 정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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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혹은 거짓, 픽션 오어 논픽션.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허구를 다루는 소설의 형식을 빌어 사실을 전달해주고 있는 새로운 장르의 책이다. 간략히 줄여 '논픽션 노블'이라고 불리우는 이 기법은 저널리즘의 방법론과 소설의 작법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 소설이지만 소설로 그칠 수 없는, 저널이지만 저널로 그칠 수 없는 '글'이다.
1959년의 미국 캔자스 주의 작고 조용한 동네 홀컴에서는 일가족이 무참하게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도대체 왜.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 더군다나 마을 주민들로부터 신망을 받고 있는 좋은 분들이 모두 살해당했다. 뉴욕타임즈의 기사를 보고 <앵무새 죽이기>의 저자 하퍼 리와 함께 이 작은 마을로 달려온 트루먼 카포티는 이곳에 머물며 사건의 진행과정을 보게된다. 그들이 이 마을에 머무는 사이 두명의 범인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두 살인자의 살인동기와 과정, 삶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고, 보고 듣고 겪은 모든 것을 기록하였다. 음성 녹음을 통해 재생하지 않고 카포티는 오로지 자신의 기억에 의존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엮어냈다.
책의 분량은 가벼운 추리소설로 생각하고 읽어나가기엔 꽤나 두껍다. 본문만 526쪽에 달하는 이 소설(?)은 카포티가 이 책에서 밝히고 있듯 100% 사실만을 바탕으로 하여 꾸며진 소설이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조합하여 하나의 줄거리가 있는, 마치 실제로 사건 현장에서 카포티가 직접 사건을 목격이라도 한 듯한 이 소설은, 살해장면이나 배경의 세밀한 묘사와 살인범들의 내면에 숨어 엿보는 듯 자세한 심리묘사로 사건의 현장감을 더해주고 있다. 마치 카포티의 눈을 빌려서 사건현장에서 그들을 몰래 지켜보는 듯 하다. 카포티는 비록 마을에 체류하며 이런저런 객관적인 정보들을 수집하고, 범인들과 인터뷰를 함으로써 풍부한 자료수집을 했다고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미 상황종료된 사건에 대해 이만큼 실감나게 재현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으리라. 마치 영화를 보는 듯 하다.
살인은 왜 일어났을가? 누가 이들을 살해했을까?
이 책을 통해서는 여러가지 분야의 다른 주제들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하나는 사형제도에 관해서. 사형제에 대해서는 기본적으로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지만, 과연 이와 같은 무자비한 자들에게도 사형을 면케해주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내 자신에게 다시 던져볼 기회를 주었다. 우리사회에서 발생하는 흉악 범죄 행위들에 대해 신문쪼가리의 작은 기사를 통해 접하게 되는 그 사건의 체감온도는 제로에서 왔다리갔다리. 그러나 현장에 있었을 피해자에게는 체감온도 200도 였으리라. 그럴 때보면 기본적으로 사형제 반대다 라는 입장은 너무나 쉽다.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았으니까.
왜 살해 당햇을까, 살인 동기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은 사건을 체험하지 않은 자들이 당연히 갖게 되는 첫번째 궁금증이지만, 현장에 있었을 피해자들에겐 쓸데 없는 질문이라는 것. 그것은 무의미하다.
두번째는 앞서 이야기한 허구를 담고 있는 소설이란 장르와 객관화된 사실을 담아야 할 리포트 혹은 기사의 어울리지 않는 조합. 이런 책은 처음이었다. 아 이렇게 조합도 가능하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 책.
세번째는 인간의 性에 관한 물음. 섹스가 아닌 성품에 관한 물음. 인간은 선한 존재인가, 악한 존재인가. 아주 오랜 시절부터 시작되어온 고리타분한 질문이지만 아직도 모를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 중 한 가지. 두 범인의 가정환경과 배경으로 보아 두 사람의 잘못이라기보다 사회의 잘못이라고 탓을 해야하는 걸까. 사회의 잘못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등등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인 콜드 블러드>는 단순히 소설로서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것은 내용면에서 형식면에서 내게 많은 충격을 주었고, 새로움을 경험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많은 주제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이 책 그 자체만으로 놓고보았을 때도 그 작품성은 인정되지만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의미있었던 책이다.
카포티 자신은 네 살 부모의 이혼을 겪었고, 이후 어머니의 재혼으로 트루먼 카포티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학교를 다니다 열 일곱살에 중퇴를 했고, 신문사 사환으로 일했으며, 독특한 옷차림으로 주목을 받기도 했다고. 소설이 서서히 여러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고, 사교계에서도 한 인물 했으며, 연극, 영화, 전기, 뮤지컬에도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그다. 그리고 <인 콜드 블러드> 이 책으로 대박을 터뜨려, 그는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쥐게 되었다. 그러나 약물중독의 합병증으로 생긴 간질환으로 생을 마감하다. 그의 나이 61세. 다양한 일을 하며 또 사교계에서 재미도 맛보며 인생을 즐겼던 그는 작품 하나를 남겨두고 떠났다. 대개 '작품'이라 칭송받는 작가들이 사후에 그 업적을 인정받아 살아생전에 이런저런 명예와 부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하는 반면, 그의 경우는 모든 것을 다 누리고 갔으니 후회없으리라. 영화 <카포티>에서는 저자가 직접 나서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과정을 보여준다고 하니 카포티 개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 나를 포함하여 - 영화를 보면 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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