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어언 500여년이 흘렀다. 마틴 루터가 로마 카톨릭의 의식적이고, 관람적이고, 판매활동 같으며, 직업적인 교회 활동 및 신앙 생활에 경종을 울리는 일을 저질렀다. 개혁이었다. 그런데, 루터는 모든 부분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그의 종교개혁이 실패했다거나 깎아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전포괄적인 개혁이 어쩌다 보니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분명히 신학적인 개혁임에는 틀림이 없다.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두번째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구조에 있어서의 개혁이다. 교회 구조적으로 신자들이 말씀에 따라 살 수 있는 구조를 만드려고 하는 것이 제 2의 종교개혁이다. [인상깊은구절] 성만찬의 변화 : 공동 식사에서 의식으로 예배의 변화 : 참여에서 관람으로 증거의 변화 : 관계에서 판매활동으로 리더십의 변화 : 은사를 받고 부름 받는 종에서 직업으로 |
|
1. 요약 。。。。。。。
기존의 집회 형태의 예배와 교회 공동체의 구성이 초래한 여러 문제점들의 대안으로 셀(cell) 형태의 교회를 제안, 아니 강력하게 주장하는 책이다. 저자는 ‘두 날개’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면서, 대그룹과 소그룹이 함께 교회를 이룰 때에야 가장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피력한다.(1장) 이어지는 장에서는 셀 교회의 정당성에 대한 성경적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마지막 3장에서는 신약 시대 예수님의 사역을 분석하며, 그 안에서 셀 교회적 요소들을 뽑아내 일종의 로드맵을 제시한다.
2. 감상평 。。。。。。。
저자가 지적하듯이 기존 대그룹 집회 중심의 예배와 교회 구성은 여러 약점들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교인의 관객화, 즉 사역에 참여하지 않고 단지 일주일에 한 번 예배에 참석하는 것으로 그치는 신앙양태이다. 어느 정도 규모가 늘어나게 되면 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또한 함께 늘어난다는 건 경제학의 상식인데, 그게 그대로 교회에 적용되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좀 더 자발성에 기초하면서도 조직의 함정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작고 역동적인 그룹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셀 교회가 바로 그것. 분명 타당한 지적이고 제안이다.
다만 이 책의 제목에서도 언뜻 예상할 수 있었듯, 사람들은 종종 자신이 발견한, 혹은 깨달은 해결책들이 유일한 것처럼 생각하는 오류를 저지르기도 한다. 이 책의 경우 셀 교회의 성경적 지지에 관한 서술을 통해 그런 모습들이 보인다. 책의 내용처럼 성경 역사에 등장하는 어떤 모습들은 셀 형태의 교회 공동체를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특히 구약의 경우는 전체 민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을 일관되게 강조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좀 더 타당하지 않을까. 선지자들과 경건한 지도자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거대한 공동체를 향해 사역을 해왔다.
신약에 관해서도 비슷한 지적을 할 수 있다. 저자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197~)를 통해서 전통적인 교회와 셀 교회를 대조하기를 원하지만, 사실 마르다와 마리아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셀 교회의 일원이 아니었던가? 고작 세 명 밖에 되지 않은 작은 가족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 부분은 교회의 크기나 구조에 따른 차이라기보다는 크던 작던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의사결정에 있어서의 다른 생각을 보여준다고 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또 ‘바울이 교회를 몸으로 설명하기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212)는 부분 역시, 많은 부분에서 교회를 성전(건물)으로도 설명하고 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문제의 원인을 구조나 체제의 탓으로 돌리는 발상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이런 진단은 체제의 전환이 (바르게만 이루어진다면) 얼마든지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낳는데, 이건 자본주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체제를 선택하면 된다는 식의 지나치게 단순한 의견처럼 보인다. 결국 문제는 사람이고, 마음이다. 따지고 보면 기존 형태의 교회들도 구역과 같은 소규모의 조직단위를 가지고 있고, 셀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들도 대규모의 회집이 존재하지 않는가? 이런 차원에서 책이 일종의 조직 관리법을 제시하고 있을 뿐은 아닌가 싶은 우려도 든다.
저자와 문제의식은 함께 한다.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좀 더 친밀한 교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백번 동의한다. 그러나 워낙 변화무쌍하고 미묘한 인간들과 함께 하는 사역에서 절대적인 대안이라는 건 처음부터 없는 걸지도 모른다. 우린 다만 선한 싸움을 계속 해나가야 할 뿐. 물론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방법도 선하고 바르게 적용된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
|
<두 날개를 가진 교회> 전통적인 교회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의 교회를 향한 바램은 셀교회로서의 신약교회를 교회의 전통적 목적에 대한 대안으로 확인해준다. 그러한 신약교회 즉, 셀교회라 불리는 공동체를 확인하는 7가지 테스트가 있다. ①살아있는 유기체로서의 기관인가 ②성격ㆍ목적ㆍ능력에 있어 소그룹을 교회의 본질적 단위로 보는가 ③재생산 능력이 있는가 ④간단한 셀 지도력 구조를 통해 지속적으로 움직이는 단순성이 있는가 ⑤역동적 성장, 새신자 참여 전략, 조직적 번식 등 번식에의 소망이 있는가 ⑥성인개종자를 흡수해 성장하는가 ⑦정치ㆍ사회ㆍ경제적 박해에도 살아남는 능력이 있는가 예수님은 교회가 가장 기본적인 생명의 형태로 살아남도록 만드셨으며, 그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 소그룹 구조로 되는 곳마다 생존. 특별히 현시대 박해와는 거리가 먼 자유주의 국가에서조차 교회의 원리적인 구조로서 셀 단위를 회복시키신다. 셀교회의 특징 중 주요한 것은 모든 구성원들이 소그룹 내에서 사역하기 위해 훈련을 받고, 상호책임을 지며, 이렇게 움직이는 셀교회는 사회에 극적인 충격을 주고 자신들을 둘러싼 세상의 상처와 필요를 어루만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교회 자체이며 스스로 갱신하고, 목회 사역에 속한 것을 개혁하는 것이 아닌 목회의 결정적인 대안이다. <전환되어야 할 패러다임> 지도자 패러다임 – 전통적인 한쪽 날개뿐인 교회는 온갖 수고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올바르지 않은 교회의 상을 갖고 있으며 우리의 가슴 속에 있는 비전은 세상에 있는 교회의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신약교회에 속한 우리 마음은 전통적 교회 패러다임에 매여있었으며, 개인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신약성경적 체험은 교회의 전통적 프로그램들에 밀려 비판되고 배척당했다. 이제 교회에 관해서는 ‘진리를 숨기기보다 꿈을 깨는 것이 낫다’고 할 수 있으며, 죽은 모조품을 없애고 예수님이 그리신 영감을 드러내는 진짜 교회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교회 성장에 있어 얼마나 큰가가 아닌 ‘이 가운데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며 하나님이 그의 백성인 우리 가슴에 채워주신 비전을 행동으로 옮기면 된다. 성도의 소비자적 패러다임 – 교회 지체들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 없어 방관자(약 80% 또는 그 이상)로 자처하며 교회의 생명과 사역에 기여하지 못한다. 교회의 ‘관객화’현상은 콘스탄틴 황제의 대성당 패러다임 특징으로 인해 교회를 하나의 유기체가 아닌 조직체로 생각하게 하고 이러한 ‘대성당적인 접근 방식’이 교회의 소그룹 환경에 영향을 미쳤다. 사탄은 교회를 무력화시키고, 위의 80%에 드는 성도는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가 되어 20%에 드는 성도에 의해 섬김을 받는다. 교회 또한 성공을 인원수로 가늠하는 소비주의적 구조를 갖고, 교인이 자원이 되기보다 자원을 분배하는 창구가 되었다. 이러한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복음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고 가정 셀그룹이 그것을 따라 살아가기 위한 배출구가 되어야 한다. 종말론적 패러다임 – 인구폭발, 도시팽창, 사회적 소외, 교회 고립의 디스토피아적 환경으로 구성된 종말론적 패러다임을 하나님이 역사와 교회 속에 그리고 살아있는 부활의 현존과 강력한 능력, 영원한 목적 속에 살아계신다는 성육신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초반부만 내용을 요약했습니다. 감상을 적기보다는 이론적인 내용들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서요. ) |
|
난 이 책이 별로다. 너무 직선적인가? 저자가 글을 쓰게 된 영감은 성경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조직관리다. 셀이라고하는 것도 성경적이지 않다고는 말 못하겠다. 왜냐면 제자훈련 자체가 셀의 성격을 띄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신학적으로 보면 오류가 있다.(순전히 나의 주장이다.) 물론 나의 주장은 지금도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견해들 중 하나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교회조직을 셀으로 하면 교회가 성장한다고 한다. 물론 이 점에서는 동의한다. 왜냐면 셀은 괜찮은 조직관리 시스템이기 때문이다. 성장은 이런 방식으로 하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런 성장으로 만족하실까? 그리고 과연 교회의 사명은 성장만을 위한 것일까?
그렇다면 성장이 교회에게 주는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성장은 정상적인 교회에서는 당연히 일어날 것이다. 성장을 일어나지 않길 바라면 그 또한 비정상이다. 그러면 어떠한 성장이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회심'이 있는 성장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회는 이런 '회심'된 사람이 모여서 이룬 모임이라고 나는 정의하고 싶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이런 '회심'으로 인한 건강한 성장이 일어난다.
회심에 의한 성장이라면 그 회심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을 알면 교회성장의 주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간파할 수 있다. 회심의 주체는 사람일까? 아니면 하나님일까? 사람이라고 하면 '이단'이라고 정죄받아야 한다. 회심을 주관하는 대상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원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이중예정'이냐, 아니면 '예지예정'이냐의 여러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그 논란을 뒤로 하고도 회심의 주체는 하나님이라는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조직관리를 통한 성장은 교회 성장본질에서 벗어날 개연성이 다분하다. 왜냐면 그 안에 핵심인 '회심'을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많이 데려다 놓으면 회심한 줄 아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믿음이 없어도 교회에 다닐 수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을 진정한 성장으로 봐서도 안된다. 회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힘으로는 조작할 수 없다.
필자의 주장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나를 '전도무용론자(傳道無用論者)'라고 오해을 받기 충분하다. 다음 내용으로 이런 오해를 벗길 원한다. 전도는 분명 해야되고 불신자도 교회에 데려와서 '진리의 복음'을 듣게 해야 한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진정한 성장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셀 조직은 여기까지 우리가 노력하면 그 사람들은 꼭 회심을 하고 그렇게 해서 배가성장을 통한 엄청난 '부흥'(?)을 경험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인 예배와 셀조직을 통해서 두 날개를 얻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고 모인 이후 회심시키고 구원받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3장 7절-8절이 이를 강하게 뒷받침 해준다. "심는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 뿐이니라...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 상을 받으리라" 우리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영역은 바로 전도하고 그들이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을 전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이 회심하고 안하고는 '주님'께 달려 있다는 것이다.
만약에 교회에 10명에서 100명의 교인이 됐다면 그 교회의 성장을 90명의 성장이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중 회심한 사람들의 비율이 20%라면 바로 진정한 교인은 18명밖에 성장하지 않은 것이다.
두 날개로 날아오르는 교회는 교회에 사람들을 데려오기 좋은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성장의 황금키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나의 논지다. 앞으로 열심히 전도하고 효율적인 방법들은 찾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주체가 되시는 생명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주권 앞에 경외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한 순간 부어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비상하신 나타나심'을 경험하며 진정한 죄의 각성과 회개가 일어나고 엄청나게 회심하는 놀라운 사건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