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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이 형편없었던 이들은 정부군에 밀려 결국 밀림과 산악지역으로 퇴각하고 말았지만 북미자유무역협정에 정면으로 도전한 이 사건은 국내외적으로 큰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 주목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 바로 사파티스타 부사령관이자 대변인인 마르코스인데, 놀랍게도 그는 원주민이 아니라 스페인계 백인이었다. 당시 검은 스키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이들 농민 반란군을 이끌었고 지금도 이끌고 있는 마르코스는 중산층 인텔리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1957년 부유한 가구상의 아들로 태어나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에서 수학하기도 했으며 한때 니카라과대학에서 강의도 했던 그의 본명은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 하지만 그의 본명은 이제 잊혀진 이름일 뿐이다. 이미 오래 전에 마르코스로 새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학시절 부정부패로 얼룩진 정치와 벼랑끝 위기로 내몰린 경제를 목격한 그가 자신의 출신계급이 보장하는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치아파스의 원주민 마을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1984년경. 1910년대에 활동한 전설적인 멕시코 혁명운동가 에밀리아노 사파타의 이름과 정신을 따라 그 당시 결성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에 합류하면서 그는 자신의 길고 긴 본명도 마저 버리고 마르코스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편리한 도시생활에 익숙해져 있는 창백한 얼굴의 지식인이 고도 2천 미터가 넘는 험준한 산악지대와 음습한 밀림에서 검은 복면을 쓴 채 암약하는 게릴라로 다시 태어나는 일이란 육체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도전이었으리라. 하지만 그곳에 사는 마야족 원주민들 사이에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민중의 지혜를 하나하나 배워 나가면서 그는 차츰 강인한 게릴라 전사이자 현명한 반란군 지도자로 변모해간다.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쉽지 않았을 그 변모의 과정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감동적인 책이다. 마르코스가 반란군의 지도자로서 결단의 순간에 처할 때마다 마야족 원주민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는 이야기들을 그에게 들려주었고, 또한 그가 절망과 슬픔과 좌절과 혼돈 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때에는 그와 어깨를 나란히 맞대고 거친 산길과 습한 밀림을 함께 걸으며 길을 찾아주었던 것이다. 예컨대, 마르코스가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반대하는 무장 투쟁을 벌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한참 고민하고 있었을 무렵인 1992년,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그에게 조언했음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이들이 주고받은 대화를 통하여 우리는 사파티스파 민족해방군의 1994년 무장 봉기가 안토니오 할아버지로부터 들은 이런 가르침에 입각해서 계획되고 결행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것이 착 가라앉아 고요할 때, 산에선 폭풍우가 몰아닥친다네. 개울물은 불어나 세차게 흐리기 시작하고, 골짜기께로 물줄기를 틀기 시작한다네.” 담배 한 모금을 빨더니 그가 말했다. 비 내리는 철이 되면 강은 맹렬한 기세로 흐르고, 붉은 갈색 채찍처럼 거칠게 요동치고, 강 밖으로 거대한 진동이 지진처럼 땅을 뒤흔든다. 이런 힘은 강기슭에 떨어지는 비로부터 오지 않는다. 산에서부터 내려온 실개천이 바로 강물에 힘을 준다. 강물은 모든 것을 부순다. 강물은 땅을 갈아엎어 새롭게 만든다. 그 강물은 옥수수가 되고, 콩이 되고, 부드러운 치즈가 되어 밀림에 사는 이들의 식탁에 오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투쟁이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내게 말한다. “힘은 산에서 생겨난다네. 그러나 물이 아래에 이르기 전에는 그 힘이 보이지 않지.” 나는 그에게 이제 전쟁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냐고 묻는다. 그는 내 질문에 이렇게 덧붙인다. “이제야말로 강물의 색깔이 바뀔 시간이네.”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침묵하더니 내 어깨에 팔을 짚고 윗몸을 일으킨다. 우리는 느릿느릿 걸으며 되돌아온다. 그가 내게 말한다. “자네들은 실개천이라네. 우리들은 강물이고……. 자, 이제 내려오게나!” (38~40쪽) 이처럼 ‘스승의 가르침에 감화를 받아 성숙을 이루고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는 제자’라는 고전적인 주제는 자칫 잘못하면 자기도취적인 과장이나 합리화, 기껏해야 계몽적인 성격의 우화나 통과제의적인 익숙한 일화들로 채워지기 십상이다. 하지만 위에 인용한 글에서도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듯이 이 책은 그런 책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들은 고대 마야 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는 신화적 상상력과 독특한 비유와 심오한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서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를 매혹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마르코스는 그런 이야기들을 단순히 소개해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울림과 여백이 풍부한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장으로, 자신이(더 나아가 우리가) 서 있는 지금, 여기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지니는 의미까지도 진지하게 자문하고 성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느끼게 되는 더 없는 아름다움과 깊은 감동은 바로 이렇게 고대 마야 문명으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옛이야기들을 오늘날 지구상의 그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현대의 우화로 재창조해낸 마르코스의 놀라운 연금술에 힘입은 바 크다. 주의해서 읽지 않는다면 자칫 이 책의 주제를 놓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연금술이 창조해낸 아름다움과 감동은 대단하다. 하지만 마르코스가 바라보고 있는 지점이 그 아름다움과 감동 너머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가 힘겨운 게릴라 생활 틈틈이 노트북 컴퓨터로 이런 글들을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또 그 글들을 모아서 책으로 펴내는 것이 그가 무슨 문학적 야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귀중한 피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하여 언어를 무기로 택한 새로운 투쟁 전략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공들여 펴낸 책을 저작권료 한 푼 받지 않고 한국어로 번역 출판할 수 있도록 허락한(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그런 내용을 담아 보낸 그들의 편지 전문이 공개되어 있다)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원하는 바는 다만 자신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지구촌 곳곳에 널리 알림으로써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물결에 저항하는 전세계적인 공동전선을 형성하는 데에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혁명가로서 지적 성장을 이루게 된 과정과 그 내용을 고백하고 있는 자전적인 성격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농민 반란군 지도자로서의 마르코스 자신의 철학과 사색과 생활 모습보다는 마야족 원주민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와 행동과 의미 해석에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터이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들려준 ‘밤과 별에 대한 이야기’의 말미에 적어놓은 것처럼, 이러한 그의 겸손 역시 안토니오 할아버지로부터 배운 것들 중 하나이리라.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꺼져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빛나는 이들은 스스로 꺼진 이들로 인해 밝게 빛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빛날 수 없다. (70쪽) 마르코스라는 지도자 별이 빛나게 하기 위해서 땅의 사람인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스스로는 꺼지는 별이 되기를 자처한 것이었을 텐데, 그 꺼져버린 별에게 바쳐진 이 아름다운 한 권의 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안토니오 할아버지, 즉 땅의 사람들(민중)이야말로 사실은 드러나지 않은 역사의 주체라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지혜로운 원주민 노인으로 등장하는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마르코스가 게릴라 생활을 하면서 실제로 만나 대화를 자주 나누었던 실존 인물인지 아니면 그의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서 창조된 가공의 인물인지를 따지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존 인물이든 가공의 인물이든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마야족 원주민의 대표이자 농민의 대변인이며 또한 민중의 상징으로 이 책에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창백한 지식인이었던 마르코스의 삶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스승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들려주고 있는 그 숱한 이야기들은 기본적으로 고대 마야인들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응축하고 있는 신화, 전설, 설화, 민담들에 뿌리를 대고 있기에 그들의 문화에 익숙지 않은 우리에게는 매우 이채롭고 들리고 쉽게 이해하기 힘든 심오한 뜻을 지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가만히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자명한 진리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유쾌한 유머와 기지가 넘치는 재치까지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되어, 누구라도 어렵지 않게 공감하게 된다. 그 중에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다음 이야기다. 가장 최초의 신들, 세상을 창조한 신들은 기억력이 아주 나빴다고 하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것이나 말한 것을 금세 잊어버리기 일쑤였다네. 몇몇 사람들은 그것은 가장 위대한 신들이 시간이 없던 때부터 세상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네. 즉, 그들 이전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 그들 이전에 아무것도 없었다면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말일세. 허나, 누가 알겠는가! 하여튼 모든 것을 망각한다는 것은 큰 문제였네. 그 나쁜 것을, 세상을 다스려왔고 지금도 다스리고 있는 모든 지배자들에게 상속했다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신들, 최초의 신들은 기억이 미래의 열쇠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 그들은 땅과 집과 이야기를 보살피듯이 기억을 관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네. 그래서 기억 상실에 대한 예방 조치로 최초의 신들, 세상을 창조한 신들은 그들이 해온 모든 일과 그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복사를 해두었다네. 바로 그 복사본을 땅 속에 숨겨두었다네. 땅 표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말일세. 그래서 세상의 땅 아래엔 바로 여기 위의 세상과 닮은 다른 세상이 있다네. 땅 표면 위의 역사와 나란히 병행하는 역사를 갖고 있는 세상이. 최초의 세상은 땅 아래에 있다네. (186~187쪽) 기억이 미래의 열쇠이고 진실한 역사를 간직한 세상은 땅 아래에 있다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엉뚱하지만 의미심장한 이 이야기는 원주민을 원시인 취급하는 현대인들의 그릇된 시선과 농민을 땅에서 내몰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반역사성에 대해 강하게 반대하고 있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기본 이념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어지는 글에서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거꾸로 된 잠망경이 있다면, 우리가 오래 전에 그 존재를 망각한 땅 아래 묻힌 그 열쇠를, 그 진실한 세상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고 말한다. 거꾸로 된 잠망경으로 땅 아래를 들여다보게 될 때, 온통 상처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지금 이 땅 위의 거짓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잠망경은 그저 상상 속에서만, 이야기 속에서만 존재하는 물건이리라. 하지만 나는 어쩌면 이 책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이야말로 바로 그 거꾸로 된 잠망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몇 해 동안 오로지 마음만을 들여다보느라 눈이 멀었던 두더지 한 마리가 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며칠 동안 내 가슴 속에서 다시 반짝 눈을 떴으니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나의 고백은 아마도 섣부르고 설익은 것이리라. 눈뜸과 깨달음을 통해 품게 되는 희망만으로는 무자비하게 입을 벌리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무시무시한 사자의 눈을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결코 얻지 못할 테니까. 우리를 마비시키는 공포를 넘어설 수 있는 용기는, 우리가 꿈꾸는 진실한 내일을 성취할 수 있는 용기는, 머리와 가슴이 아니라 손과 발을 통해서, 즉 고통의 체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일 테니까.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이 ‘내일’이라고 부르는 빵을 요리하기 위해서는 재료가 많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 재료 가운데 하나는 고통일세.”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모닥불 속에 장작 한 개비를 하나 던져 넣으면서 덧붙인다. (176쪽) |
|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 총알을 주렁주렁 목걸이처럼 걸고 총을 멘 채 검은 스키마스크와 별 세 개가 박힌 낡은 군모를 쓴 모습은 헐리우드 영화 주인공처럼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이라니요. 반란자의 이미지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게릴라로서 멕시코 원주민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며 노트북 컴퓨터로 세계 민중의 연대와 지지를 이끌어내는 모습에서는 이미지뿐만 아니라 반란 자체를 새로 만들어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2001년 봄,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평화행진으로 멕시코시티에 입성하는 여정은 그 자체로 큰 충격과 감동이었습니다. 마르코스는 인터넷에 발표하는 성명서, 연설문, 편지, 에세이에 반역 사상을 유려한 문체로 보여주었는데 이 책에서도 그러한 면이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마르코스가 만난 지 두 번밖에 되지 않았을 때부터 왠지 모르는 존경심을 갖게 된 안토니오 할아버지. 멕시코 원주민을 대변하는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신의 이야기에 담긴 반역 사상을 시적인 문체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환상적이기까지 한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신화로 한정짓지 않고 멕시코 원주민 민중과 사파티스타에게 연결되는 지점을 찾음으로써 이야기를 풍성하게 합니다. 잘 빚은 서사시를 읽는 듯합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 소재는 무척 다채롭습니다. 신들이 색깔을 만든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 사자의 사냥 방법에 대한 이야기, 밤과 별들에 대한 이야기, 구름과 비에 대한 이야기, 단어에 대한 이야기, 칼과 나무와 바위와 물에 대한 이야기, 꿈에 대한 이야기, 무지개에 대한 이야기, 길과 나그네들에 대한 이야기, 처음과 끝에 대한 이야기, 소음과 침묵에 대한 이야기, 열쇠에 대한 이야기까지 세상사 모두를 이야기하려는 듯 계속 이어집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철학적 깊이와 환상적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데 기저에 흐르는 사상은 다양성에 대한 인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야기의 처음이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합니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어디론가 날아가는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를 보고 “한 마리의 새가 저렇게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는 마르코스에게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색깔의 유래를 들려줍니다. 신들은 낮을 움직이는 하양과 밤을 다스리는 검정밖에 없는 따분하고 지루한 세상을 바꾸기로 했답니다. 그리하여 피의 빨강과 희망의 녹색, 땅의 심장인 갈색, 지구의 색깔인 파랑, 소년의 웃음소리인 노랑을 만들고는 그 색깔을 간수하기 위해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 몸에 색을 칠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색동 앵무새 과카마야가 색깔을 갖게 되었고, 그렇게 세상 곳곳을 날아다니게 되었다네. 여자들과 남자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색깔이 다채롭다는 것’과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모든 색깔들과 모든 생각들이 적절한 곳을 찾으면 세상이 평화롭고 살 만한 곳이 된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말일세. (29쪽) 나와는 다른 존재들이 다채롭게 존재하고 그 다채로움이 제 자리를 찾아야 하며 그럴 때라야 세상이 평화롭고 살 만한 곳이 된다는 사상은 언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도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의하면 모든 말 가운데 최초의 세 가지는 바로 민주주의, 자유, 정의인데, 각 단어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민주주의는 다채로운 생각들이 적절한 합의를 보는 것이고, 자유는 어떤 길이든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며, 정의는 각자에게 걸맞은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채로운 색깔의 사상이 언어의 정의에 스며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세상의 불화는 나와 다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만 다른 존재를 보고, 자신이 우월하다며 오만하게 굴고, 사회적 지위가 높다고 우쭐대며, 잘난 체하고 착취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존재를 인정하고 모든 존재들이 적절한 곳을 찾게 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로운 세상의 선결 과제입니다. 따라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 ‘모두에게 모든 것을’이라 선언한 것은 결국 모두가 제 자리를 찾기 위한 싸움인 것이며, 그것은 멕시코 원주민들의 반역 사상과 상통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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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마르코스라는 가명을 쓰는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관이 멕시코 원주민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전설, 민담, 설화를 채집하여 투쟁과정에서 얻는 경험에 녹여낸 글이라고 합니다. 작은 아이가 논술을 준비하면서 읽었다고 하는데 다양한 글을 읽어 시험에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멕시코정부에 대하여 무장봉기한 원주민들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한국사회에 전하여 정권에 봉기를 촉구하는 듯한 메시지가 담긴 책을 사회현상에 대한 생각이 여물지 못한 학생들에게까지 읽혀야 하나 싶습니다. 역자의 소개에 따르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부사령과 마르코스는 멕시코 북부의 탐피고항의 부유한 가구상의 아들로 태어나 멕시코 국립자치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소르본느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산디니스타정권의 80년대 니카라과대학에서 종교학을 강의하기도 한 인텔리인데 1984년, 치아파스의 라칸도나 정글에 도착하여 게릴라가 된 후, 초칠 족과 첼탈 족 원주민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음백과사전에 따르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 주에서 1994년 1월 1일에 무장 봉기한 원주민 인디오 주체의 농민조직으로, “조직의 이름은 금세기 최초의 멕시코 혁명 영웅인 에밀리오 사파타의 이름을 따서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봉기한 날은 바로 북미자유무역협정(North America Free Trade Agreement/NAFTA)이 체결된 날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전체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원주민들의 권익을 무시하는 뿌리깊은 멕시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해소하고, NAFTA로 가시화된 신자유주의의 폭력에 맞서 투쟁하는 것이다. 멕시코 정부는 원주민의 생활개선 등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요구사항 대부분을 수용하는 평화협정 조인에 합의했지만,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측은 협정을 거부하고 야당인 민주혁명당과 공동투쟁으로 관공서를 점거했다. 1995년 1월 다시 정전합의가 성립되고 2월에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간부 5명이 체포되었으나, 4월에 정부가 강경책을 철회함으로써 교섭이 재개되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1997년 7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인간성을 지키기 위한 국제회의인 대륙간회합(Intercontinental Encuentros)을 개최했는데 이 회의에 5개 대륙, 42개국에서 3,000명 이상의 지식인·활동가들이 참여해 신자유주의에 맞선 전지구적 차원의 방법을 토론했다. 또한 2000년 3월에는 멕시코 대통령이 의회에 상정한 원주민 권리법안 의결에 맞추어 평화 대장정을 벌였다. 이들 반군 지도자들은 국회의사당에서 인디오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소개하고 원주민 권리법안의 중요성을 설명한 뒤 본거지인 치아파스의 라칸돈 밀림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멕시코의 보수·우익 정치권은 핵심 사항인 토지소유권과 자원이용권은 거부한 채 원주민자치권만 의결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측은 이를 맹렬히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이후 1년이 넘도록 침묵을 지키고 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실제로 이끌고 있는 마르코스는 밀림에 숨어 지내면서 이 모든 활동을 하고 있는 인물로, 그곳에서 주로 인터넷을 통해 외부와 연결하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전세계 민중운동의 국제적 표상이 된 마르코스가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라고 발표하면서 그를 테러리스트·범법자라고 비난했으나 멕시코 전국의 학생과 노동조합 지도자, 인권 옹호자, 좌파는 물론 각국의 진보세력들 역시 그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가공인물로 보이는 반군활동을 하면서 민중을 이해시키거나 외부에 자신의 봉기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하여 멕시코 원주민들의 신화, 전설을 재해석하여 이야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천지창조로부터 신들과 인간들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거리를 만들고 있는데 비의 신들, 황무지의 주인들, 땅 속 깊숙이 존재하는 지하세계 주인 등 고대 마야인의 세계에 살고 있던 '존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회지 출신의 지식인 마르코스가 현명한 노인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통하여 하늘과 땅의 섭리를 깨달아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물론 간간이 힘든 무장투쟁 생활의 단면을 조금씩 엿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셉 켐벨교수가 1949년에 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서 소개한 것처럼 전 세계의 온갖 신화들은 내용이 종교적이든 문화적이든 혹은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둘러않아서 벌이는 이야기든 간에 공통적으로 ‘기본적인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마르코스가 전하는 이 지역의 신화는 다소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등장하는 신들이 서로 싸우는 일에 몰두하면서 인간에 대한 배려의 정도가 그리 대단치 않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전하는 사자와 두더지에 관한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은 사자는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지역에 분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사하라사막 남쪽에만 서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말하는 사자는 우리에게 퓨마로 알려진 멕시코사자를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 사자에 대드는 유일한 동물이 두더지라고 하는데, 그것은 두더지가 땅속에 살기 때문에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두더지가 어떻게 퓨마에 대들 수 있는지도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땅속생활때문이 눈이 퇴화된 두더지를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을 자기 안으로 향하게 된 것이라는 색다른 해석도 특이합니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마르코스에게 전하는 세상에 처음 생겨난 세가지 말에 대한 정의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정의’는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걸맞은 가치를 되돌려주는 것, ‘자유’는 그것이 어떤 길이든 자신이 원하는 길을 선택할 수 있는 것, ‘민주주의’는 다채로운 생각들이 적절한 합의를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9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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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에보리진 박물관에서 원주민이 쓴 동화를 봤다.
사막에 사는 짧은 꼬리 캥거루와 평야에 사는 긴 꼬리 캥거루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거짓과 민담 혹은 전설의 차이는 무엇일까?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오고 우리의 근간이 웅녀와 환웅사이에서 나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을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뭐 여론의 의견을 모은 전설에 대해 말할 수는 없지만 수업시간에 배운 것을 내멋대로 윤색하여 풀어쓴다면...
설화는 신에 대한 이야기고 전설은 영웅에대한 이야기다. 민담은 난사람이나 일반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현대사회가 될 수록 이야기형식은 민담에 가까워졌다.
설화, 전설, 민담은 고증을 거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어느정도 진정성을 가지며 또 어느정도 시대적 바탕을 지니고 있다. 또한 옛날 아주 먼 옛날의 일을 지금을 바탕으로 생각하고 추론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도 세상에 이런일이나 서프라이즈에 나오는 괴상한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천지가 만들어지는 옛날에는 그 기술이 오죽했겠냐.
잡설은 접고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로 넘어와야겠다.
마르코스는 멕시코 시파피스타 민족 해방군이다. 그는 자신을 혁명가가 아닌 반란자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운동이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며 자기 민족이 겪고 있는 현실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애써 설명하지 않는다.
안토니오 할아버지라는 인물ㅇ르 창ㅈ해 그의 입으로 자기 민족의 삶과 하늘과 땅의 탄생, 사랑과 평화에 대해 말한다.
아름다운 태고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의 상상과 비유에 놀라고, 이런 위트있는 사내가 어서 빨리 검은색 스키마스크를 벗고 세상 앞에 나와 좀 더 값진 이야기를 해주기를 기다리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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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두더지의 이야기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책을 살 때 이 책이 같이 왔다. 처음엔 책이 부록으로 오기도 했고 (안팔려서 증정을 할 만큼 재미가 없는건가..) 왠지 모르게 너무 허접해 보여서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Never judge a book by its cover.
이 책은 멕시코의 혼란기 속에서 혁명군을 이끄는 마르코스가 쓴 동화같은 이야기이다.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멕시코의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를 몰라서 답답했었는데 마치 이를 배려하기라도 하듯 이 책을 같이 보내준 것이다. 안그래도 마음이 가난해져서 동화를 읽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우연히 이 책이 그 시작이 되었다.
birth 와 death 사이 choice가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듯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선택을 한다. 선택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선택을 위해 끊임없이 고민한다.
그 중 '사자'와 '두더지'의 고민이 우리가 평생에 걸쳐 하게 되는 가장 큰 선택이 아닐까?
두더지가 사자에게 공격 당하는 걸 본 사람이 있는가? 두더지는 눈이 보이지 않아 다른 동물보다 더 반항도 못하고 사자에게 잡힐 것 같지만 정 반대이다. 오히려 눈이 있는 짐승들은 사자를 보는 순간 (발이나 날카로운 이로 공격 당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자의 눈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된다. 원래 자신이 아니라 사자의 눈에 먹이감으로 비치는 자신을 보고 만다. 그 순간 짐승은 더 이상 반항하지 못하고 사자에게 자신을 맡긴다. 책 속에서 사자는 눈으로 사냥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두더지는 다르다. 눈이 없기 때문에 오직 자기 자신만을 볼 수 있다. 타인의 눈에 비친 자신이 아니라 온전한 자기 자신 말이다. 그래서 두더지는 사자에게 잡혀도 끝까지 반항해서 생채기 하나라도 내고 만다.
그러면 사자는 어떤가? 거울로 사자를 사냥하는 방법이 있다. 사자는 짐승을 사냥하면 심장을 물어 그 피를 먹는다. 사자가 좋아하는 암소를 미리 잡아서 심장에 깨진 거울을 넣고 심장을 갈라 그 안에 구부러진 못을 넣어 둔다. 사자가 암소를 사냥해 심장을 먹으면 처음엔 피가 마른 것을 의심한다. 그러나 곧 의심은 사라진다. 심장에 붙어 있던 거울과 못이 사자의 입에서 피를 나오게 하기 때문이다. 사자는 자신이 먹고 있는 피가 자신의 피인줄도 모르고 몸 안의 피가 다 빠져 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 거울과 못을 씹어대는 것이다.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책 속에 길이 있다.
많은 책을 읽은 건 아니지만 내가 읽은 책은 언제나 사자가 아니라 두더지가 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위엄있는 갈기 날카로운 발톱 강한 육체는 가지지 못하고 심지어 눈까지 멀었을 지라도 두더지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
어쩌면 나는 너무 당연한 가르침을 매일 대하고도 끝없이 또 다른 답을 찾아 해맸던 것은 아닐까? 내 안에 있는 답을 찾아 밖으로 멀리 헤맨 나는 진정 장님이 아닌가.
인생에서 우러난 가르침. 그 것을 전하는 뛰어난 문학적 능력.
난 이 두 가지에 엄청난 감동을 받았다. 거기다 동화형식으로 씌였다는 것에 더더욱 감동을 받는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말 잘 듣는 착한 어린아이가 되어 인생을 다시 배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지금에 와서야 느끼는 거지만 동화는 어른을 어린 아이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게 아닐까...
멕시코가 겪고 있는 자세한 사회적 상황을 안다면 더 절절히 다가올 이야기지만 굳이 그런 것들을 열거하지 않겠다. 이 책 자체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두더지. 그들에게 축복이 있길. |
|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책 제목이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라기 보다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와 마르코스’라고 했어야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만큼 안토니오 할아버지 캐릭터가 무척 중요하게 여겨졌거든요. 이 책을 읽기 전에 전 마르코스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전 책 제목에서 그냥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인줄 알았어요.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멕시코의 원주민을 대변하는 존재입니다. 그가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지, 아니면 한 사람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아직도 멕시코 원주민들 사이에 계속 공존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계속 그는 그들의 후손들에게 자신들의 뿌리를 알려주고자 합니다. 지금 여건상 미국의 텍사스에서 생활하는데, 아무래도 텍사스는 멕시코와 근접한 땅이라(미국인이 멕시코로부터 뺏은 땅이기도 하지요.) 멕시코인들을 많이 볼수 있고, 멕시코의 음식과 문화를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힘든 일은 멕시코인들이 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럽게도 저 역시 멕시코인보다 더 낫은 인간이라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요. 세상의 인간들 중에 누가 더 귀하고 덜 귀한 것이 있겠어요. 모두에게 주어진 생명은 평등하게도 단 하나인데 말이죠. ‘생각들이 다양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이 평화롭고 살만한곳이 되도록 하는 것이 안토니오 할아버지께서 바라시는 유토피아가 아닌지... 안토니오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시는 하늘과 땅, 신 그리고 인간들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미신을 믿는 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되고 우스운 일인가 생각되지만, 그 민간 신화의 바탕에는 그 민족의 정신과 생활양식을 알아낼수 있습니다. 전혀 거짓이라고 할수 없지요. 책 중간 중간에 있는 삽화는 이야기를 머리로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꺼져야 한다. 그러나 사실은 빛나는 이들은 스스로 꺼진 이들로 인해 밝게 빛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 세상 그 누구도 빛날 수 없다. p 70 그들은 정의와 자유를 향한 투쟁을 계속 될것입니다. 그들이 정의와 자유를 얻을 때 까지 말이죠.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후손이 빛나기 위해 스스로 꺼져가는 것을 선택할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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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태양이 침대 속에서 몸을 맡긴 여자의 / 아랫배와 같다고 말한다면 / 내 말을 믿고 내 모든 욕망을 이해하겠지.// 비오는 날 수정방울이 사랑의 무료함 속에서 / 계속 울려 터진다면 / 내 말을 믿고 사랑의 시간을 지연하겠지. (중략) 그러나 내가 이 모든 나의 거리와 / 끝없는 거리와 같은 나의 조국을 거침없이 노래한다면 / 당신들은 이제 내 말을 믿지 않고 사막 같은 곳으로 가버리겠지.
이 시는 그가 '내 까다로운 친구들에게' - 참여시에 몰두하지 않기를 바라는 친구들에게 -바친 엘뤼아르의 시다. 작가들의 현실 참여를 지지하던 그렇지 않던 간에 나에게 어떤 문학작품이 다른 목적을 가졌다는 것은 그만큼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이 책이 지닌 매력 때문에 아주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 매력은 크게 순수성과 문학성이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으나 각 이야기들의 논리적 관계나 일관성을 가지기보다는 하나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하여 적절하게 재구성하였다. 이 점은 논리적 글 읽기에 익숙한 나에게는 어려움이었고 또한 신선함이었다. 이러한 능력은 아이가 있는 아버지로서 가지고 싶은 재능이다. 그럼 세상에 대하여 참 잘 말해줄 수 있을 텐데. [인상깊은구절] 나는 그 동안 배웠던 역사적 사실을 나열하지 않았다. 그 주제에 대해 새로운 강의를 하듯이 또렷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나는 그때 싸웠던 남자들과 여자들이 느꼈던 고독을 묘사하려고 했다. 계속 전진하려는 그들의 숙원에도 아랑곳없이 계속 되는 방해와 중상 모략으로 그들이 상처받았다는 것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내가 비센테 게레로 게릴라 부대가 멕시코 산악 지대에서 끈질긴 저항을 벌이던 때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밭은기침을 하며 내 말을 끊었다. 연기 나는 파이프가 뜨거워졌으므로 그는 입술에 어떤 놀라운 일을 벌어졌다는 것을 알리듯이 쿨룩 기침을 했다. "내게 무엇인가 떠올랐네" 안토니오 할아버지가 부채질을 하면서 말했다. 모닥불을 살리고, 기억들을 살리기 위해서. 과거의 반란군 사이에서, 담배 연기와 모닥불 사이에서,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짐을 내려놓는다. 무거운 것을 훌훌 털어버리듯이 짐을 내려놓는다. 아주 가치 있는 짐을, 가치 있는 이야기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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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날씨가 많이 차가워졌지만 여전히 여름은 여름인가봐요.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이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는 것을 보면 말이에요. 오늘 오랫만에 종묘에 갔었어요. 연대통일 집회를 준비하는 수많은 대오를 바라보면서 지난 여름 나의 모든 삶과 투쟁의 기억을 회상하면서....
한동안 정신없이 헤매다보니 낙오자가 되어있더군요. 길을 잃고 방황하던 그 와중에 한권의 책을 발견했지요. 다른 이들에겐 단순한 우화집으로 비춰졌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네 투쟁하는 이들에겐 결코 그렇지만은 않을듯한 책이었죠.
모르겠어요. 세미나 등을 통해 접해본 책과 같이, 무언가 이론적으로 딱딱 정리된, 그런 류의 책은 결코 아니니까요. 이런 책을 통해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았다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금까지 어떠한 활동을 통해서 느꼈던 것보다도 전 이 책에서 많은 걸 느꼈거든요.
세상이 처음 생기던 그 순간엔 어떠한 억압도 존재치 않았노라는, 모든 이들이 평등했었다는 이야기, 신들이 하나하나 인간 세상을 창조해가던 그 과정에선 결코 존재치 않았던 지금의 불평등 구조, 그렇기에 과거의 평화로움을 되찾기 위한 투쟁은 정당하고 그러한 정당한 투쟁을 위해서는, 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안토니오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하나하나 마음이 와닿더군요. 산에서부터 내려온 작은 실개천 하나하나 모여 커다란 강물을 이루고, 한번 내려온 실개천은 결코 다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노라는, 땅속으로 밖에 향할 수 없다는 이야기, 그와 같이 실개천들이 하나하나 모여서 강물을 이루는 것이 우리네 투쟁이라는 이야기까지.. 이론적인 것들 하나하나 알아가면서 그 안에서 정당성을 찾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지난 날의 몸부림이 부질없게 느껴지더군요. 왜 그 땐 이렇게 쉽게 고개 끄덕일 수 있음을 알지 못했었는지, 지금에 와서 아쉬워하고 후회하지만 너무 늦은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선배, 안토니오 할아버지는 이런 말을 하더군요.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빛나게 하기 위해 스스로 꺼져야 하고, 빛나는 이들은 스스로 꺼진 이들로 인해 밝게 빛나는 것이라구요. 어쩌면 전 계속 빛나고파 안달이 나 있는 상태였나봐요. 제 불을 꺼야만 다른 이들이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려 들었었나봐요. 그래서 힘들었었나봐요.
무언가 운동을 함에 있어서 가장 두려웠던 건 폭력으로 무장한 경찰도, 하나하나 잠식해 들어가는 시장구조도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정부는 멕시코 민중을 두려워한다. 하기에 그렇게 많은 병사들과 경찰들을 거느리고 있다. 즉, 정부의 두려움은 아주 크다. 따라서 아주 작다.' 이 말이 우리 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겠죠..) 그것은 같은 캠퍼스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무관심이었죠. 2001년 3월 11일, 헌법광장에 모인 20만의 관중을 향해 마르코스는 '우리에게 늘 부족했던 건 바로 당신들이었다' 라는 고백을 했죠. 그 곳에 모인 수많은 관중들은 그 고백에 이렇게 화답했답니다. '너희들은 외롭지 않아!'라구요. 언젠간 저도 그런 대답을 들을 수 있겠죠..? 그걸 바란다면, 좀더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되는것이겠죠?
마지막으로 이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는군요. '투쟁은 둥근 원과 같다. 어느 곳에서나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끝나지 않는다'라는.... 전 지금까지 제가 그려왔던 원의 어딘가 한 부분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겠죠. 어느 곳에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기에, 지금 일어서도 늦지 않는 것이겠죠...? 이제 그만 잠들어야 할 것 같아요. 제겐 계속 원을 만들어나가야 할 임무가 주어져있으니까요. 쉬지않고 원을 그려나가는 그 과정속에서 현실은 과거가 되고, 미래가 현실이 되고, 그리고.... 무언가 조금은 나아지는 걸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2001. 8. 14.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를 읽고... 후배가 드립니다. [인상깊은구절] 2001년 3월 17일 인터뷰에서 초칠족 출신의 다비드 사령관에게 물었습니다. "봉기할 때 무장이 형편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떤 군사 전략으로 봉기했습니까?" 다비드 사령관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무기는 우리가 정당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정당성을 알리는 것이 우리의 전략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