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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때가 있다. 무언가 이야기 하고 싶은데,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 놓고 싶을 때. 이러 쿵 저러 쿵, 토 달지 않고, 그냥 고개를 끄덕여 주는 사람. 나를 아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에 대해, 훈계하거나 충고하기를 좋아하지만... 그런 말조차 듣고 싶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 하고 싶을 때. 하지만 그런 사람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오다가다 만나 사이도 아니고, 설령 그런 사람과 만난다고 해도... 쉽게 말을 걸 수는 없을 테니까. 인생에 ‘만약에’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중해야 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하지만.. 만약 다시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 여자가 만약, 5분이라도 늦게 그곳에 갔다면,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거나, 평소와 똑같이 행동했더라면, 그 장면과 마주치지 않았을 것이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옆에 태우고 얼굴을 쓰다듬는 그런 것은 목격하지 않았을 텐데.. 여자는 남편의 그런 모습을 목격하고 목욕탕으로 간다. 평소 친하지 않았던 여자가 그곳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한 여자는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 한 여자는 남편의 외도 때문에 나름의 고민이 있다. 그렇지만 이혼은 아직 하지 않는다. 부부지만 부부 같지 않은 상태로 그렇게 살아가는 세 여자들. 결혼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는 그런 것 같다. 어느 순간 생겨버린 틈이 관계를 비틀어 버린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때만 해도 그 사랑이 변하지 않을 줄 알았을 것이다. 날씬하고 아름다웠던 꽃 같던 청춘이 지나고 아이를 낳으면서 훈장처럼 달게 된 옆구리 살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그때. 서로 방구를 끼고, 트림을 해도 어색하지 않고 익숙해 질 무렵.. 그게 생활이기에 특별히 비참해지는 기분도 들지 않았을 때 위기는 찾아오는 것 같다. 더 이상 서로에게 설레지 않는 모습에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만약 여자가 남편에게 바로 따지고 화를 냈다면 그렇고 그런 삼류의 불륜으로 끝났을 텐데 여자는 평소와 똑같이 남편을 대한다. 그리고 실제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지에 대한 정확한 정보도 주지 않는다. 어제와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 남편을 출근 시키고 아이들은 학교에 간다.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평범한 일상이 지속될 줄 알았던 여자였을 것이다. 전세금을 올려줘야 한다기에 대출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고, 아이들의 학교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똑같을 줄 알았던 일상에 금이 간다. 남편과 함께 앉은 여자로 인해. 어제와 완전 다른 오늘이 된 것이다. 나는 아니라고, 내 인생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남자 다 거기서 거기예요. 아주 괜찮은 놈, 천하의 나쁜 놈만 빼면 그놈이 그놈이야. 다들 치명적인 흠 하나씩은 있다고요. 여자도 그렇지만 그게 내가 견딜 수 있는 거냐, 없는 거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102) 여자의 입장에서 남자를 봐도, 남자의 입장에서 여자를 봐도 마찬가지란 생각을 한다. 얼마나 견딜 수 있느냐가 결혼 생활을 지속하게 하는 여부가 된다는 것을. 결국 남자는 여자에게로 돌아오게 될까? 아님 바람은 아니고, 그냥 아는 여자인데 뭔가가 묻어서 치워줬던 것일까? 어떤 상황도 정확한 것은 없지만, 생각한다. 평범했던 일상이 어느 날, 예고 없는 날벼락이 날아들어 왔다면... 나는 어떻게 처신 하게 될지... 세상은 깨지기 쉬운 유리와도 같지만 모든 것이 그렇다고 믿지 않는 건 내가 아직 순진해서 일까? 짧은 소설이지만 사랑이나 믿음이 깨지기 시작했다면 너무 쉽게 금이 간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우리 생활에, 아니 내 주변에는 어떤 틈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다시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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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여자(것도 내가 모르는!!)와 행복해하는 모습을 우연히 맞닥들이게 된다면 나는, 나는 과연 어떨까.. 나는 아마 <틈>에서의 정윤주처럼 제자리를 지켜내지는 못할 거다. 순간 확 돌아버리면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여서 그 불난 마음이 진정이 될 때까지 어딘가, 어디로든 뛰쳐나가 있을 것 같다. 안다. 이건 회피고, 도망이다. 하지만 정윤주는 달랐다.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으면서도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를, 자신이 있는 그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목욕탕을 나가기 시작했다. 애써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온탕과 냉탕의 냉랭함을 오가며 그녀는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그러는 사이에 정희와 승진을 만나 그녀들은 '중년 여자의 오전'을 같이 보냈다. 각자의 기호에 맞게 식혜와 미숫가루와 식초를 탄 음료를 마시며.. 목욕탕을 가본지 좀 오래됐다. 정윤주만큼은 아니지만 가족들과 아닌 혼자서는 가지 않은 게 꽤 되었다. 목욕탕의 습함과 뿌연 시야가 답답하기도 하고, 목욕하러 갈 때마다 마주치는 빈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목욕바구니들이 싫기도 했다. 당장 쓰지도 않을 거면서 다른 사람도 못 쓰게 만드는 그 심보가 참 싫었다. 그게 싫어서 목욕탕에 발길을 안하게 되었는데, 내가 그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읽게 될 줄이야..^;;;ㅋ 지나가는 사람 누구 하나 붙잡아 물어도 사연 없는 사람은 없다지만 그녀들의 이야기는 애잔했다. 부러 소리내어 말하지 않으면 남들은 그냥 잘 사는가보다~ 하고 넘길 숨겨진 이야기.. 한 사람, 한 여자이기보다 누구 누구의 엄마이기에 버텨내야 했던 그 이야기들.. 이래서 나는 결혼은 생각도 하겠군~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 그럼에도 살아가는 그녀들이 대견하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소설 끝, 정윤주 씨는 임정호 씨를 만나 어떤 이야기를 할까.. 그 뒷 이야기가 더 궁금해지는 소설이었다.
p.31 어떤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고민이 시작되면 먼 데서 크거나 작은 파도가 밀려왔다. 해변으로 오는 동안 어떤 문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잔잔해지며 발에 닿지 않은 채 흩어졌고 어떤 문제는 키를 높이며 무섭게 치솟은 뒤 바닥에 부서지며 발목을 삼켰다. 전세 문제는 새벽까지 거세게 몰려와 여자의 발과 바짓단을 적셨다. 위안이라면 어떤 문제라도 때가 되면 발밑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십 대, 삼십 대 때는 여자도 파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문제라는 건 어디에서 발생해 어느 방향으로 불거지고 언제 몸을 키워 다가올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여기의 파도를 피하려고 옆으로 움직였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다른 파도에 옷이 흠뻑 젖기도 했다. 시행착오 끝에 여자가 터득한 건 호들갑 떨지 않고 파도의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바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문제를, 불행을, 마중 나가지 않고 거기 빠져들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는 것. 그게 사십 대 중반이 된 여자가 삶에서 얻은 교훈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p.74 모두 깊이 잠든 새벽에 안개비가 흩날렸고 두 사람은 일행들 몰래 숙소에서 빠져나와 젖은 나무 냄새가 자욱한 길을 오래 걸었다. 이미 가까웠지만 차갑고 달콤한 공기와 간밤에 나눈 이야기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해 거의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낸 다음 그 안에 든 마지막 담배를 건넸을 때 그녀는 소리 내어 웃었다. 이걸 나한테 주겠다고? 자신이 했던 말은 정확하지 않지만 그런 의미였고, 그가 했던 말은 표정과 억양까지 또렷하게 기억났다. "당연하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다며, 대단한 양보를 한다는 듯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한 개비의 담배를 사이좋게 나누어 피우는 동안 숙취와 불면과 피로감을 완전히 잊었다. 상대의 입술 사이에서 필터가 축축해진 담배가 넘어올 때마다 그녀는 키스를 하는 듯한 에로틱한 기분에 빠졌고 그건 점차 동지애로 번져나갔다. 그 담배를 비벼 끈 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자신의 가장 안쪽 서랍에 들어 있는 일기장을 꺼내 상대에게 보여주었다. 너라면 마음껏 읽어도 좋아. 어떤 사랑 고백은 너의 여기가, 이런 면이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상처와 치부를 너에게는 보여줄 수 있다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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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미, 틈 - 타인의 눈으로 자신의 궤적을 점검해볼 것
완벽하다고 자부할 필요도 없이 안정적인 일상의 궤도. 똑같은 일상의 꼭 같은 아침이었으나 차에 다른 여자를 태우고 어딘가로 가는 남편을 발견한 기점으로 윤주의 공전은 불안해졌다. 느닷없이 발견한 삶의 잔금은 들여다볼수록 커지는 균열이었다. 무탈하다고 여겼던 삶, 사랑, 그리고 자신. 파도 속에 휩쓸린 듯 위태롭게 부유하며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곱씹고 점검해본다.
어제 오전까지 멀쩡하게 이용하던 곳이 하루 사이에 위험한 곳으로 판명 나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하루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놀이터가 안전하지 않다면 언제, 어디에서부터 문제가 생긴 걸까. 점검을 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겠지. 그네의 줄이 끊어지거나 미끄럼틀로 올라가는 계단이 내려앉아 누군가 다칠 때까지 아무 의심 없이 이용했을 것이다. 24p
따져보면 원인은 도처에 있다. 때로는 존재의 이유조차 파멸의 원인이 된다. 멀쩡하게 매달려 있던 줄이 갑자기 끊어지거나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지 깨닫지 못한다. 틈이 벌어지고 부서지고 깨진 뒤에야 그게 애초에 견고하지 않고 연약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은 얼마나 훼손되기 쉬운가. 믿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누군가 정신 차리라고 여자를 흔들어대는 것 같았다. 이봐라. 이게 네가 사랑하던 사람이고 네가 마음을 붙이고 살고 있는 현실이다. 여자는 젖은 수건 속에서 소리 죽여 울었다. 46p
어제와 달라진 오늘은 동네 놀이터와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삶과 같다. 의심 없이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사실은 문제 투성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왜 어딘가를 훼손되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걸까. 마주하는 삶의 민낯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떠도는 윤주의 모습은 애처롭다. 그녀가 회상하는 완벽했던 순간들, 변하기 이전의 것들은 아름답고 다정했기에 더 슬프다. 믿음이란 왜 이토록 맹목적이었던 건지. 잘 알고 있다는 것들은 왜 이토록 낯설기만 한 것들뿐인 건지. 궤도를 벗어난 사람이 자신의 궤적을 타인처럼 바라보는 것 같다. 원래의 궤도를 찾아 가는 그녀의 걸음은 쓸쓸하기만 했다.
사람들이 제각각 떨어져 앉아 씻는 일에 열중하는 걸 보며 여자는 목욕탕이 참 이상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대중목욕탕이 언제 처음 생겼는지, 어떤 변화를 거쳐 지금의 형태에 이르게 된 건지 모르지만 알몸이 되어 깨끗하게 씻는 일은 개인적이고 은밀한 일인데 그걸 모여서 한다는 게 새삼 낯설고 기이했다. 맨 얼굴과 맨살을 드러낸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무방비상태가 되고 약한 존재가 된다. 그런데도 왜 모여서 씻기로 결정했을까. 제 손으로는 닦기 어려운 등을 밀고 밀어주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맨몸의 사람들이 서로의 약점이나 연약함을 바라보며 안도하기 위해서일까. 109p
삶의 적나라한 민낯을 확인하고 흔들리는 중년의 여성들은 목욕탕에서 모였다. 담배를 다시 피우게 된 여자, 남편의 잦은 외도에 맞바람으로 대응하게 된 여자, 다른 여자를 보며 웃는 남편의 모습을 목격한 여자. 그들은 목욕탕에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과장된 풍문이나 신랄한 험담, 친밀해지기 위해 반사적으로 주고받는 아이들의 정보 같은 것들이 아니라 그녀 자신들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어딘가 씁쓸해 보이는 구성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녀들이 무릎을 대고 앉아 있는 그 시간이 보기 좋았다. 왜인지, 다행이다 싶은 마음이랄까.
이 소설에서 사건이나 결말 같은 것은 중요치 않을 것 같다. 다만 그들의 ‘틈’을 목격함으로써 타인의 시선으로 스스로의 궤도를 되짚어보는 시간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것을 잃지 말라는 흔한 말을 흔하다고 무심하게 외면한 나에게는 일종의 경고등 같던 소설이었다.
-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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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서유미
서유미 작가님의 팬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감성을 위한 테이크아웃 소설'이라는 신박한(?) 아이디어로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출간한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의 10번째 소설인 '틈'은 114 페이지로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릴 수 있는 양임에도 불구하고 여운은 길게 남았다. 다른 많은 소설들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는 '균열'에 집중하지 않은 소설은 처음이다. 그 때문일까, 시계바늘 굴러가듯 잔잔하던 일상에서 '틈'을 발견한 순간의 낯선 감정을 묘사하는 서유미 작가님의 필력이 더욱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왜 많은 독자들의 작가님의 장편소설을 기다리는 지 알 것 같았다. 드라마로 치면 노희경 작가의 글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사람과 관계를 중요시하는 작가님 답게 책에서도 그 미묘한 부분들이 잘 드러나 있었다.
'틈'은 아이의 탄생을 기점으로 OO 엄마가 되어버린 세 여자의 이야기다. 그 중에서 가장 주를 이루는 건 여자 '정윤주'의 얘기다. 그럭저럭 가정생활을 잘 영위해나가고 있다고 믿어왔으나 남편과 다른 여자가 함께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여기에서 나머지 두 여자의 얘기로 자연스레 확장되며 그들의 삶 또한 보여주는데, 셋을 이어주는 매개는 제목과는 전혀 무관한 '목욕탕'이다. 미디어에서 주로 웃음유발장치로 주로 사용되는 그곳은 예전부터 서유미 작가님의 머릿 속에 밝고 명랑한 이야깃거리로 존재했으나, 중년의 여자가 혼자서 슬픔을 삭혀야 한다면 갈 만한 곳으로 목욕탕만큼 적합한 곳이 없다고 생각해서 '틈'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세 여자 윤서 엄마, 민규 엄마, 미호 엄마의 은밀한 모임 공간인 목욕탕에서 그들은 서로의 아픔을 나누고 한동안 사회에서 잃어버렸던 이름 또한 되찾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족을 위해 다소 수동적으로 살아가던 세 여자는 뜻밖의 만남을 통해 독립된 주체로서 스스로를 견고히 다져나간다.
<제 5회 노벨라 북콘서트> 중간에 낭독회 시간을 가졌다. 그 때 서유미 작가님의 남편인 강태식 작가님께서 틈의 마지막을 읽어주셨는데, 내게도 그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미호와 지유의 엄마가 아닌 임정호의 아내 '정윤주'가 남편을 찾아가 마주하려는 장면이다. 분명 남편의 불륜을 막 목격한 순간의 여자 정윤주는 위태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집 안이 아닌 밖에서, 윽박지르기와 분노 대신 앞으로 마주할 상황을 천천히 관망하는 그녀가 참으로 단단해 보인다.
여자는 옷장 문을 여고 살펴보다 평소에 좋아하는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가볍게 화장을 한 다음 시간을 확인했다. 서두르면 점심시간이 끝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파트에서 나가는 빈 차가 있어 택시를 잡아탔다. 혼자하는 외출이 많아졌는데도 오랜만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나치게 비장해지는 것 같아 허공에 대고 손을 여러 번 털었다.
지하철역 주변은 많이 변해서 택시에서 내린 여자는 주위를 한참 둘러보았다. 여자가 자주 가던 이탈리안 레스토랑과 카페는 상호가 바뀌었고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들러 아이쇼핑하던 옷집은 저기 어디쯤이었겠다, 짐작만 했다. 어떤 곳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시간의 흐름을 느낄 수 없는데 이곳은 시간의 손바닥이 쓸고 간 흔적이 곳곳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중략)
"여보세요" "임정호씨. 나 정윤주야."
여자가 이름을 말하자 남편은 놀란 듯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하고 물었다. "지금 회사 근처에 와 있어. 잠깐 얘기 좀 해."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디냐고 거기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뒤 여자는 창밖을 내다봤다. 무엇에 대해 묻고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정해두지 않았다. 이 대화를 통해 어떤 충격을 받고 어떤 오해가 풀리고 무엇이 달라지고 나아질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미호와 지유의 엄마가 아닌 정윤주와 임정호를 기다리고 만나서 이야기할 거라는 점이었다. 여자는 빌딩의 출입문을 열고 나오는 임정호를 보았다. 그는 여자가 기다리는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p.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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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과 틈 사이에서
틈이 무엇일까 틈이란 말의 사전적 의미와 용례는 다음과 같다.
1.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갈라진 틈으로 물이 샌다.” 2. 모여 있는 사람의 속. “학생들 틈에 끼다.” 3. 어떤 행동을 할만한 기회 “틈을 보이다.”
그럼 이 소설에서는 ‘틈’은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을까 첫 번째 틈 - 벌어져 사이가 난 자리 먼저 찾아볼 수 있는 틈은 첫 번째 의미의 틈이다. 남편과의 사이에 난 틈이다. 이 책의 주인공, 여자 - 이름은 정윤주- 는 출근길에 우연히 남편의 차에 다른 여자가 동승한 모습을 목격하게 된다. 그 이후로 남편과의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의 의미는 어떤 것일까 <멀쩡하게 매달려 있던 줄이 갑자기 끊어지거나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지 깨닫지 못한다. 틈이 벌어지고 부서지고 깨진 뒤에야 그게 애초에 견고하지 않고 연약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45-46쪽) <사소한 균열일 뿐이라고, 아직 눈에 띄지 않는 금이 간 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믿음이 깨졌다는 건 얼마나 큰일인가 싶어서 자주 주저앉았다.> (85쪽) <평소에 아무 의심 없이 걷고 뛰어다니던 땅이 갑자기 쑥 꺼졌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다.>(99쪽) 바로 이 문장이 이 소설의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 틈 - 모여 있는 사람의 속. 여자는 그런 남편의 행동에 상처받아 생긴 그 틈을 여간해서 메꾸지 못하다. 그런 여자 - 윤주 - 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자는 가볍게 샤워를 한 후 열탕과 냉탕, 사우나를 오갔다. 그때마다 몸은 따뜻해지고 차가워졌으나 내면에는 결코 섞이지 않는 두 개의 구간이 존재한다.> (58-59쪽) <애써 온기를 유지하고 있는 온탕과 차갑게 식어 아무 표정도 없는 냉탕. 그 둘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여자는 문밖에 서서 어디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중이었다.> (59쪽) 그렇게 남편과 틈이 생겨, 상처받은 상태에 직면한 윤주에게 어떤 해결책이 있는 것일까 동네 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 둘 - 역시 남편과의 사이에 틈이 나있는 사람들 -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그들은 수시로 만나 제각기 자기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한다. 그 자리의 편함을 저자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아이 교육과 돈에 관련된 대화가 오가지 않아 좋았고 겸손이나 걱정을 가장한 자랑이나 은근한 과시가 없어 편했다.>(88쪽) 그런 그들이 이제 둘러 앉아 있다. <승진 정희와는 매일 봤다. 시간 약속을 하지 않았는데도 열한시 무렵 홀에서 만나 같이 음료수를 마셨다. 윤서 엄마가 승진이 된 뒤 민규 엄마는 임정희가 되고 여자는 정윤주가 되었다.> < ....과일이나 고구마를 싸오기도 했다. 세 사람은 꼭짓점처럼 모여 앉아 그걸 천천히 까먹었다.>(88쪽) 남편과의 사이에 틈이 생긴 사람들이 이제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 틈으로 들어간 것이다. 상처를 안고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틈으로 들어가 서로를 위로한다. 세 번째 틈 - 어떤 행동을 할만한 기회 민규 엄마의 이야기이다. 처녀시절에 피웠던 담배를 아이를 임신한 후에는 끊었는데, 어느 순간 다시 피게 되었다. 그것을 이렇게 합리화한다. <인생에 이런 작은 틈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나, 그게 인간적인 거리고 합리화했다.>(66쪽) 생활에 치인 그 답답함을 담배로 풀어보는 그 작은 틈, 그것은 틈의 세 번째 의미로 쓰인 것이다. 더 중요한 세 번째 의미의 틈이 등장한다. 남편에게 자기가 목격한 일을 여자 - 윤주- 는 말하지 못한 채 지내고 있다. 그럼, 언제 이야기 하나 남편 얼굴을 볼 때 마다 그 생각이 난다. 묻고 싶다. 그 때 그 모습은 어떤 것인지 <어느 쪽을 원하느냐고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가는 뒷모습에게 묻고 싶었다.> (93쪽) 그러나 여자는 그러지 못한다. 그럼 언제 그런 틈을 만들 수 있을까 그냥 아무런 말, 하지 말고 가슴 속에 품은 채 살아갈 것인가 아니다. 저자는 그 해결책으로 또 다른 의미의 틈을 사용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바로 그런 틈을 만드는 여자의 모습이 그려진다. 남편에게 전화하여 ‘잠깐 얘기’하자고 ‘틈’을 만든 여자 정윤주에게 남편 임정호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으로 이 소설은 끝난다. 이 소설, 남편과 ‘틈’이 벌어진 여자들이 같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 ‘틈’에서 그 상처를 위로받고, 다시 일어서기 위하여 남편과, 상황과 직면하기 위한 ‘틈’을 만드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네 인생에서 어떤 틈은 피하고 어떤 틈은 만들어야 할지, 생각해 볼 틈을 준 책, 의미있게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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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도성장이 한창 지속되던 1980년대 태어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는 장래희망과 이상형이라는 말에 설렜다. 대부분의 또래 역시 장래희망으로 판사 검사 의사 야구선수 등등을 써냈고, 어른이 되면 멋진 이성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화려한 결혼식을 올린 뒤 화목한 가정을 꾸릴 줄 알았다. 개뿔, 현실은 부모의 계층을 그대로 이어받거나, 오히려 부모보다도 더 낮은 계층으로 떨어져나간 사람도 많다.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스스럼없이 밝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었다. 『한국이 싫어서』라는 소설 제목에서 보듯, 한국에서의 삶이 참 팍팍한 요즘이다. 이번에 은행나무에서 나온 노벨라 10번째 작품인 『틈』 역시 한국사회의 팍팍한 삶을 드러낸다. 은행나무의 '노벨라'는 경장편 소설 시리즈로, 분량이 길지 않다. 이 작품 역시 110여 쪽을 조금 넘는다. 짧은 이야기에서 서유미 작가가 표현하려 한 것은 사랑과 믿음이다. 주인공 정윤주는 미호와 지유의 엄마이지 임정호의 남편이다. 이야기는 정윤주가 동네 이웃인 정희와 승진과 목욕을 끝내고 여고 앞 분식집으로 가며 시작한다. 셋이 담담하게 여고 시절을 회상하던 중, 윤주는 남편의 차와 같은 모델을 보고 몸이 굳어버렸다. 며칠 전에 목격한, 남편이 차 안에서 다른 여성과 외도하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윤주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윤주의 이야기가 주이긴 하지만, 민규 엄마인 승진의 이야기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윤주의 고민은 남편의 외도이고 승진은 끊지 못하는 담배 때문에 속이 썩는다. 승진이 스트레스를 흡연으로 해소했다면, 윤주는 심야의 폭식으로 달랬다.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들도 한때는 직장인이었고, 낭만적인 사랑도 했던 여성이었다. 출산 전에는 윤주, 승진이라는 이름도 있었다. 지금은 그냥 ~엄마일 뿐. 그녀에게 남은 건 남편의 외도, 늘어난 뱃살, 투정버리는 아이들. 따져보면 원인은 도처에 있다. 때로는 존재의 이유조차 파멸의 원인이 된다. 멀쩡하게 매달려 있던 줄이 갑자기 끊어지거나 바닥이 무너지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허약하고 허술한지 깨닫지 못한다. 틈이 벌어지고 부서지고 깨진 뒤에야 그게 애초에 견고하지 않고 연약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사랑은 얼마나 훼손되기 쉬운가. 믿음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 (45~46쪽) 사랑과 믿음은 연약하고 개인을 보호해야 할 공동체는 무능하다. 그렇게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지진 않지만, 윤주네 집은 전세 급등 때문에 주거가 불안한 가정. 승진은 출산 뒤에도 오래 회사에서 버텨서 과장까지 갔으나, ADHD 진단을 받은 아이 때문에 커리어를 포기한다. 그렇다고 해서 서유미 작가가 이런 내용을 너무 어둡게만 그리지는 않았다. 전작인 『끝의 시작』에서도 보여줬던 차분한 서술 속에 숨은 따뜻함을 이번 작품에서도 곳곳에서 표출한다. 여고 앞 떡볶이집이라든지 목욕탕 등, 온기가 느껴지는 공간 설정도 그렇고 문장 중에서도 이런 부분. 가장 마음에 들었던 구절이기도 하다. 어떤 문제에 맞닥뜨릴 때마다 바닷가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고민이 시작되면 먼 데서 크거나 작은 파도가 밀려왔다. 해변으로 오는 동안 어떤 문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잔잔해지며 발에 닿지 않은 채 흩어졌고 어떤 문제는 키를 높이며 무섭게 치솟은 뒤 바닥에 부서지며 발목을 삼켰다. 전세 문제는 새벽까지 거세게 몰려와 여자의 발과 바짓단을 적셨다. 위안이라면 어떤 문제라도 때가 되면 발밑으로 빠져나간다는 것이었다. 이십 대, 삼십 대 때는 여자도 파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나 문제라는 건 어디에서 발생해 어느 방향에서 불거지고 언제 몸을 키워 다가올지 알 수 없었다. 때로는 여기의 파도를 피하려고 옆으로 움직였다가 무방비 상태에서 다른 파도에 옷이 흠뻑 젖기도 했다. 시행착오 끝에 여자가 터득한 건 호들갑 떨지 않고 파도의 세력이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여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바다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애썼다. 문제를, 불행을, 마중 나가지 않고 거기 빠져들지 않은 채 그대로 서 있는 것. 그게 사십 대 중반이 된 여자가 삶에서 얻은 교훈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다. (31~32쪽) 서유미 작가는 2008년 정도인가부터 좋아했던 소설가다. 『판타스틱 개미지옥』, 『당신의 몬스터』을 재미있게 읽었고 취준생 시절 『쿨하게 한걸음』으로 위안을 얻었다. 올해 나온 『끝의 시작』 덕분에 인터뷰할 기회도 있었고. 굳이 나누자면 『판타스틱 개미지옥』이나 『당신의 몬스터』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사건의 특수함을 내세운 작품이고 『쿨하게 한걸음』, 『끝의 시작』, 『틈』은 문장과 분위기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재미를 원한다면 전자를, 통찰이 필요하다면 후자를 추천한다. 둘 중 어떤 쪽이든 요즘처럼 한국 소설아 잘 안 나오는 시기에는 좋아하는 소설가들의 작품이 나오면 그저 행복하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써 주시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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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엔가 상처받고 아픔에 겨워 돌아 누운이의 마음에 생긴 틈을 보듬고 감싸안는 표지의 그림처럼 우리는 늘 그렇게 삶이라는 지난한 과정속에서 수 많은 상처로 얼룩진 틈을 안고 사는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소설류의 대부분이 사랑의 스펙트럼이 다양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이 책은 그런 사랑의 스펙트럼을 비집고 드러나는 어찌 할 수 없는 틈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 적어도 나에게만은 아니라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틈이라는 인식을 해보면 삶에대한 태도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가져본다. 사랑을 말하고 논할때 많은 사람들은 지나간 시절 자신들의 잊혀진 행위에서 사랑의 감정을 찾고 그것이 사랑인양 말하기도 한다. -다들 그렇게 두근거리는 몇 장의 사진과 몇몇의 두근거리는 따듯한 순간을 사랑이고 믿으며 사는게 아닐까--35Page 이렇게 우리는 사랑의 진실을 가슴속에 묻어둔채 지나간 환상속에서 사랑을 찾고 있는것은 아닐까? -사랑은 얼마나 훼손되기 쉬운가, 믿음은 또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가.--46Page 사랑의 영원함을 약속하고 그것만을 바라는 우리에게 현실은 그저 수 많은 틈바구니 속의 너덜너덜한 사랑을 암시할 뿐 영원함도 진실함도 갖추지 못한채 그 알량함을 눈가림으로 포장하고 있다는것을 왜 알지 못하는것일까? 사람을 사랑하고 알아 간다는건 길이보다 깊이라는 측면이 더욱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인간을 속속들이 알아보기엔 무리가 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어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수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해 두 딸아이를 키우며 행복한 감정을 진하게 느끼던 정윤주는 일상적인 삶의 어느 중간쯤에서 남편의 바람을 목도하고 충격에 쌓여 스스로 고민하고 어쩔줄 몰라하는 스스로의 심리적 상황들을 고스란히 글로 표현하며 동일한 세대이자 또다른 이웃들의 고민과 함께 그녀 역시 삶의 틈속에서 자신이 잊고 살아온 그 무엇인가를 인식하고 지금까지의 자녀와 남편에게 목메어 살아온 자신의 삶을 정지시키고 새로운 삶으로의 도전을 예감하며 소설은 마지막으로 치닫는다. 누구에게나 부정적일 수도 있고, 긍정적일 수도 있는 틈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함께 사는 이들 에게 그것이 얼마나 파장을 미치며 삶에서 커다란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는지는 그런 틈새를 만나고 경험하며 고민하고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그 존재의 경중을 말할 수 없다. 작고 가벼운 것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모든것은 그런 작고 가벼운것, 바로 틈에서 시작될 수 있음을 새삼느끼게 되고 부정적인 틈으로 나의 행복을 저울질 하지말고 긍정적인 틈으로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 책이라고 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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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은 분량의 글이 많은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의 일상이, 그 반복되는 일상의 권태가, 호기심이 그리고 당연시하고 있는 것들에 대한 생각이 다시금 재음미하게 하는 글이다. 가벼운 일상의 일들이 소개된다. 그리고 그 일들에 대한 심리가 미묘하게 그려져 나간다. 상당히 매력적인 언어들로 채색된 인물의 마음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아마 저자의 화술이리라.
무척 매력적이었던 저자의 다른 글 ‘테이블’과 같은 맥락에 있는 작품이라 보아도 좋을 듯하다. 가정을 이뤄 살아가는 부부의 일상적인 삶과 그 가정에 찾아온 시련이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남자의 일상과 다른 모습을 통해 여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심리를 자잘하게 분석하여 표현하고 있다. 마음을 다스리기가 어려워 행하는 행위들도 가감 없이 제시해 독자들로 하여금 그 심리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고해도 될 것이다.
기발한 표현들이 많다. 읽으면서 밑줄을 치고 싶은 곳이 많다. 이 표현은 나도 인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이 많고, 그런 비유들은 상당히 신선함을 가져다주고 있다. 화자의 다양한 경험, 그리고 언어에 대한 열정이 그렇게 만들지 않나 생각이 된다. 언어의 표현력을 상당히 즐겨하는 나의 입장에서는 저자의 매력적인 표현이 마음에 무척이나 감긴다. 아! 그렇게 분의 글이 많이 읽히는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기도 했다. 읽으면서 표현면에서 무척 좋아하는 김훈 작가님이 많이 생각났다. 김훈 작가가 반복에 의한 표현의 매력을 느끼게 해준다면 저자는 비유에 의해 장면이 눈에 보이게 그려주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준다. 두 분 다 언어가 감칠맛 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언어에 대해, 그 맛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해주신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글의 주인공 여자는 어느 길에서 남편의 차를 발견한다. 그런데 그 차를 발견하고 그냥 돌아섰더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리라 한다. 그리고 남편만 보았으면 또한 다음 일들이 없었으리라 한다. 하지만 그 차안에 탄 사람들의 모습과 행위들을 낱낱이 보고야 만다. 그것이 글의 모든 내용의 출발점이요 바탕이 된다. 이로 인해 여자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거리를 방황하게 되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목욕탕에 가게 되고, 욕탕에서 오히려 자녀로 인해 얽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과 어울리게 되고, 그들의 얘기를 듣다가 공감을 하게 되고, 자신의 얘기도 풀어내게 되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공감을 얻기도 한다.
또 혼자서 거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수리 중이라고 막아놓은 놀이터에 대한 마음을 내어놓기도 하고, 남편에 대한 배반감에 치를 떨기도 하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해 보기도 하면서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토로하기도 한다. 아예 몰랐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하고, 남편에게 언제 그 사실을 드러내 놓을까 마음을 내기도 하고, 결단의 마음도 지녀보기도 하면서 혼자의 마음속에 가지가지 방황의 시간을 가지기도 한다.
참람한 마음이 섬세한 심리의 내밀한 드러냄으로 나타난다. 저자의 화술이 못내 놀랍다. 이러한 내용을 이렇게 눈을 떼지 못하게 하면서 끝까지 읽어가게 만드는, 그러면서 재미를 느끼게 만드는 그 솜씨가 놀랍다. 먼저 읽은 ‘테이블’를 통해 이 책을 구입하여 읽게 되었는데, ‘테이블’의 흐름을 인지해 볼 수 있는 저자의 마음과 표현이 담긴 글이 아닌가 한다. 정말 흥미롭게 읽은 글이다. 글을 통해서 오늘의 소설들이 독자들과 소통하는 한 방법을 목도한 것 같아 기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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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편독을 하지 않는편이지만, 이상하게 소설을 잘 읽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꼭 읽고 싶었다. 제목만 들어선 무슨 내용의 소설인지 전혀감이 잡히지않았지만 책소개를 읽어보니 마음에 와닿는 부분이 많아 읽게된 것 같다.
저자는 끝을 마무리 짓지 않은(내 주관적인 기준에서) 열린결말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인지 책을 다 읽고나서도 한동안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 과연 주인공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리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있을까?
이 책의 주인공은 여자다. 미호엄마로 불리는 여자. 그녀의 이름을 밝히기전까지 그녀는 그냥 소설속에서 '여자'로 불린다. 그리고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요장소는 '목욕탕' 여자가 목욕탕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두 '여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소설의 클라이막스였다.
이제 [그 여자]의 이야기를 좀 해볼까. 유아교재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던 여자는 같은 층의 다른회사에 다니던 남자를 만나게된다. 우연히 A4용지를 빌리러 온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처음엔 밀어냈지만 적극적으로 다가오는 그 남자에게, 결국은 이직와 자아실현의 꿈은 버리고 현실적인 편안함을 선택한 여자.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던 그때, 은행일을 보고 나오던 그 여자앞에, 자신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차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것을 보게된다. 그날 이후로, 여자의 삶은 이전과는 확 다른 삶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목욕탕에서 숨죽여 울던 날, 다른 두 여자를 만나게 되고, 동네엄마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던 그 여자는 그들과 둘도없는 막역한 사이가 되어 자신의 아픔을 말하게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다들 각자의 사연과 아픔을 간직한 채 살고 있었다는걸 알게되는데.... 여자는 모든것을 쏟아붓고 난 후, 자신의 감정을 추스른 후에 남편을 만나러 가게된다. 그리고 소설은 여기서 결말을 맺는다. 그 여자는 남편에게 무슨말을 했을까?
소설을 읽으며 여자와 내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회사일로 남편을 만난것도 그렇고, 처음엔 남편을 밀어내고 내 꿈을 쫓으려 했지만 결국엔 나도 현실적인 안주를 택하게 되었다. 항상 나만 바라보고 사랑해줄 것 같은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걸 보게된다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없기에 상상도 할 수 없지만, 이 책에선 평소 가던 길을 잘 가고있는데 갑자기 땅이 푹 꺼지는 느낌이라고 한다. 평생 느껴보고싶지 않은 감정이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는 걸 아는데도 아이들 때문에 산다는 건, 그냥 그렇게 산다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걸까? 엄마가 행복해야 아이도 행복하다는데 불행한 엄마에게서 아이들도 그런 감정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데 당장 이혼하는 것도 현명한 선택은 아닐터, 주인공의 감정이 몰입하다보니 자연스레 많은 물음표가 떠다니고 있었다.
뒤늦게 세 여자의 이름이 밝혀진다. 미호엄마였던 여자는 정윤주, 윤서엄마는 김승진, 민규엄마는 임정희. 그녀들의 이름을 늦게 밝힌 건 왠지 '자신'이 아닌 누구누구의 '엄마'로 살고있는 많은 여자들에게 메세지를 주기위함 같았다. 아이를 낳고 기르더라도 '나'를 잊지않고 살아야겠다는 걸 소설을 통해 배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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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내가 힘들다고 하면, "나도 힘들어."를 외치고는 했다. 속마음은 '너만 힘드냐?!.' 그래 지금도 그 마음은 51% 정도는 남아있다. 그리고 49% 는 당신이 힘들면 별로인데, 어떻게 풀어야할까? 그런 생각을 한다.
114쪽에 커피와 음악, 조각보 같은 시간, 현관문 앞에서 배웅해주던 단풍잎 같은 손이 있어서, 하나님과 가족들에게 의지할 수 있어서, 지인들과 나누는 안부 인사와 짧은 대화가 있어서, 그런 일상이 곁에 있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작가의 말이 마음에 와닿아서 제일 먼저 써봤습니다. 인생을 살면 이런 저런 틈이 많이 발생하지요. 그래서 아이들을 보면 짜증도 났다가 이 아이들과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재미 중에 가장 큰 것인데 하면서 마음을 다잡고는 하고요.
우엣든 인생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평범한 삶은 평범한 대로 영웅의 삶은 그 나름 대로 고난의 연속이라 싶네요.
34쪽
신호에 걸린 차와 남편의 옆모습과 드러난 목덜미는 생생한 데 시간이 지날수록 현실감이 떨어졌다. 직접 본 게 아니라 누군 가 전해준 얘기였다면 믿었을까. 차에 여자를 태우고 있더라는 얘기가 아니라 횡령이나 도박, 뺑소니에 관한 거라면 찜찜해하 면서도 수긍했을 것이다. 그가 특별히 돈에 약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여자 문제는 일으키지 않을 거라는 믿음 같은 게 있었다. 요즘 보는 남편의 모습이라곤 밤과 주말에 한정돼 있을 뿐인데 여자는 십 년 전에 받은 인상을 그대로 믿었다. 다들 그렇게 두 근거리는 몇 장의 사진과 몇몇의 따뜻한 순간을 사랑이라고 믿 으며 사는 게 아닐까.
이 이후로는 특별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여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는 것에 대해 남편이 질색하는 이야기. 아이 문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에피소드 와 덜 친한 사람들과 얽히는 이야기로 채워지고요. 그래도 주인공의 일상에 균열이 간 것은 그대로인 상황이지요.
그리고는 소소한 그러나 여운이 큰 112쪽입니다.
여보세요 임정호씨. 나 정윤주야. 여자가 이름을 말하자 남편은 놀란 듯 왜 그래? 무슨 일 있 어? 하고 물었다. 지금 회사 근처에 와 있어. 잠깐 얘기 좀 해.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어디냐고 거기에서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전화를 끊은 뒤 여자는 창밖을 내다봤다. 무엇에 대해 묻고 무 슨 말을 해야 할지 정해두지 않았다. 이 대화를 통해 어떤 충격 을 받고 어떤 오해가 풀리고 무엇이 달라지고 나아질지 알 수 없었다. 확실한 건 미호와 지유의 엄마가 아닌 정윤주가 임정호 를 기다리고 만나서 이야기할 거라는 점이었다.
"엄마가 뿔났다"와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나이가 지긋한 엄마들이 가출을 합니다. 아니 정당한 권리를 내세우며 이제 여자인 그리고 자기 자신인 채로 살고 싶다고 이야기 하는 장면이 이 대화에서 연상이 됩니다. 저는 아내와 행 복하게 살면서 "자신이 최00으로 살고 싶다."는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졌습니 다. 그녀가 하고픈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도록 이야기 많이 하면서 조율해야겠 습니다. 저의 틈을 메꿔야겠네요.
이 리뷰는 서평단에 선정되어 증정받은 책을 읽고 작성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