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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명화극장'이나 '주말의 명화'에서 접했던 헐리우드 고전 영화에 대한 인상이 좋게 남아있어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고전영화를 자주 챙겨보는 편이다. 예전에는 TV에서 틀어주지 않으면 볼 수 없었는데, 90년대에는 비디오를 통해 요즘엔 DVD나 동영상을 통해서 등 개인적으로 고전영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해진 것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조춘(早春)'만 해도 그랬다. 감독의 명성하고 작품 제목은 이래저래 여기 저기서 줏어듣고 있던 차, 예스에서 싸게 팔고 있는 오스 야스지로 감독 DVD 세트를 놓칠 순 없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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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춘, 이른 봄. 겨울과 봄 사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조춘'은 1950년대 전후 패전의 상처를 딛고 한창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던 시절의 동경 샐러리맨 스기야마 쇼지의 일상 속을 파고 들어갔다. 전염병으로 아이를 잃고 난 뒤 아내 마사코와 사이가 예전같지 않아진 그, 그는 같은 회사의 타이피스트 기네코 지요와 외도를 하게 되는데..
권태로와진 부부를 다룬 작품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얘기도 일본 샐러리맨의 일상과 함께 펼쳐지고 있었다. 당시 일본 회사원들의의 소소한 일상이 눈에 들어와 어떻게 보면 순한 홍상수감독 냄새도 났다. 아침 통근길, 근무, 상사와 혹은 동료들과의 대화, 그리고 부부간의 갈등. 두시간 20여분이 넘는 긴 러닝타임동안 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갈등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거나 이렇다할 특별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다. 아니 감독이 그런 갈등이나 사건을 크게 부각시킨다기 보다는 물 흘러가듯 갈등도 사건도 전개되고 있다.
남편의 외도 사실을 안 아내가 친구 집으로 가버리고, 쇼지는 단신 지방으로 부임하게 됐다. 이쯤되면 부부 갈등이 심각한데도, 오스 야스지로는 결코 상황을 극한적으로 몰고가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 매가리 없이 풀어가나 싶어 보인다.
'조춘'에는 첫장면부터 50년대의 활기찬 동경의 모습이 등장했다., 고층의 빌딩들, 복잡하고 어수선한 출근길,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 그리고 간간히 나오는 직장 생활에 대한 이야기들, 동료들끼리 한잔 하면서 합창으로 노래하는 장면은 촌스럽다는 생각도 들고 정겹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월이 흘러도 사람사는 이야기는 비슷한가 보다. 또 아내가 임신하자 월급만으로 아이 키울 걸 걱정하는 동료에게는 하나는 키울 만하다고. 아이가 어떻게 나올지 하는 말에도, 막상 나오면 귀엽다고 덤덤하게 말해주기도 했다. 회사의 부속품인지 알면서도 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게 되기도 하고. 쇼지 부부의 갈등보다는 어째 샐러리맨들의 걱정과 이런저런 푸념들이 더 현실적이라 피부에 와닿았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은 갈등을 폭발적으로 부각시키기 보다는 인물들이 물 흐르듯이 문제를 풀어가게 놓아둔다. 새롭게 시작하기로 마음 먹고 오지인 새 근무지에서 함께 하게 되는 쇼지 부부, 그들 부부 사이는 이제 '조춘'과 같았다. 봄은 왔는데 봄같지 않은 봄이 아니라 이른 봄이었다. 아직은 겨울이지만, 큰 겨울을 지나고 봄이 가까이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는 이른 봄.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다른 작품으로 만춘(晩春),맥추(麥秋)가 있는 걸 보면 이 감독은 인생을 계절과 자연과 비슷하다고 여기나 보다. 그의 작품으로 이제 한 작품 본거라 아직 단언하기엔 이르지만 이 감독이 추구하는 경향이 이런 스타일인건가. 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맴도는 샐러리맨들의 일상도 삶도 돌고 도는 거라고 말하는 걸까. 기다리다 보면, 때가 되면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가는 게 순리라고, 인생사 다 돌고 도는 순환이라고. 그러니 견디고 기다려 보라고 말하는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