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흑백사진이나 영화에 정감이 느껴진다고 하면, 이미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관대함이 발동해서일까. 맥추(麥秋:초여름)에게 호감이며 편안하게 받아들여진 것은 아마도 흑백영화라는 점도 작용했을 지도 모르겠다. 지난 달에 봤던 조춘(早春:이른 봄)에 이어 두번째로 본 오즈 야스지로 작품이었는데, 두 작품을 보고 나니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 스타일이 대략 감이 잡렸다. 그는 극적이고 강렬한 갈등이나 전개보다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인물의 성격이나 내용으로 작품을 끌어가고 있다.
맥추는 일본 중산층 집안의 딸 혼사에 관한 내용이다. 50년대 일본에서 스물 여덟이라면 노처녀 소리를 들을 나이였고, 동양권 문화가 그렇듯 노리코에게도 예외없이 결혼하라는 부모, 오빠의 압력이 가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족들의 염려에도 노리코는 결혼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도쿄 여성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노리코는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은 여성이었던 것이다. 결국 결혼하기로 결정하지만, 혼자서 결정함으로써 재취자리라는 점도 가뜩이나 마뜩잖아하는 부모로서는 딸의 결정에 더더욱 섭섭해진다.
상황을 보면 부모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혼자 결정하고, 홀 시어머니에 재취자리, 또 도쿄를 떠나야 하는 조건이 탐탁지 않은 것을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는 큰 소리 한번 나지 않았다. 혼자 큰줄 안다면서 의논 한마디 하지 않은 딸의 행동이 못마땅하지만 부부끼리 아쉬움을 말하는 거, 그게 다였다. 갈등이 바깥으로 불거지지 않았다. 아마 우리나라 드라마였다면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서 부모가 딸의 결정에 말리고, 반대하는 이야기로 한참 전개되지 않았을가.
그런데 '맥추'가 흥미로운 점은 노리코의 결혼이 작품의 구심점이 되는 내용이지만, 그녀의 결혼 이야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다는데 있다. 그 주변인물들의 소소한 이야기, 혹은 심정까지 자연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그들의 이야기에도 많은 부분에서 방점이 찍히면서 내용이 상당히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미혼과 기혼 친구들 사이의 미묘한 신경전이나 노년이 된 노리코 부모들의 인생을 돌아보는 태도를 담고 있고, 사랑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는 대목에도 솔깃해졌다. 오스 야즈지로는 등장인물들이 소소하게 자신의 심리를 털어놓게 하지만 결코 그들의 인생에 개입하지 않고, 담담하게 관조하는 듯한 시선으로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긴장감도 없고 다음 내용을 궁금해하지 않고도 손에 땀을 쥐지 않고,그들의 움직임과 대사를 지켜보기만 하면 됐다. 나태함과 늘어짐이 아닌, 담백함과 편안함을 주는 작품이고 그게 오즈 야스지로가 담아내는 색깔이었다.
노리코아버지가 멍하니 새털구름 낀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 그 눈길의 의미를 알 듯 말 듯했다.풍성하게 익은 보리들( 제목이 맥추니 보리라고 짐작했다)이 화면에 채워치면서 엔딩이 되자, 내마음까지 비워지는 것 같았다. 감독은 화면에 담담하게 담아냈을지 모르겠지만, 그 아버지의 무언의 시선, 그렇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시선은 인상에 남았다.
하늘높이 떠가는 풍선을 보고, 저것을 놓친 아이가 울고 있을 것이라는 대사나, 빠르게 지나온 지난 날과 행복에 대해 회고하는 대사는 결코 길지 않았음에도 찡한 여운이 남았다.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그동안 행복했다고. 전쟁에서 돌아오지 않는 둘째 아들에 대한 이야기도 잠깐 언급되지만, 아들이 돌아오는 것에 대한 기대를 접었는지, 아들의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인건지..그 정도의 불행은 감수하는 건지..인생안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인정하게 된 거겠지.
어떻게 갑작스레 결혼을 결심하게 됐냐고 묻는 친구 아야의 질문에 노리코가 답한 내용도 기억에 남았다. 오랫동안 가족끼리 다 알고 왕래하던 사람이지만 도쿄를 떠난다고 하자, 그제서야 알게 된거라고. 믿음이 느껴져서 결심한거라고, 사랑이 아니라고 하지만 친구는 그게 사랑이라고 말한다. 오즈 야스지로는 격렬하고 불꽃튀고, 없으면 못사는 흔히 영화에서 그려지는 낭만적인 사랑을 잡지 않았다. 가랑비에 옷 젖듯 오랜 시간 지켜보면서 스며들어온 믿음과 사랑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래 그런 사랑도 있는 거지. 그다웠다.
오즈 야스지로가 어떤 작품을 추구하는지 유추가 됐다. 그의 작품을 이제 고작 두편 밖에 안봤고, 아직 채 못본 작품이 훨씬 많지만 아마도 그는 뜨겁거나 롤러코스터 타는 듯한 작품을 연출하진 않았을 것이다. 갈등이 크게 부각되지 않고, 담백하고,잔잔하게 흘러가는 그의 작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 역시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살다 가고 싶으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