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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시대의 이야기가 아닐 때, 먼 나라의 동시대 이야기보다 더 이질감이 느껴질 때가 있다. 2010년대에 100년 전이나 70여 년 전의 한국을 들여다볼 때처럼. 그들이 처한 상황은 우리가 머릿속에서 재생하려면 한참 시간이 걸려야 나오는 일제시대이기에 얼마나 힘들었지, 치열한 삶을 살아야 했는지 상상은 되는데, 눈에 다가오는 글자들은 현실로 다가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박완서 작가의 <세상에 예쁜 것>이 아니었다면 그냥 어디선가 흘려 지나가는 이름이 되었을 작가이다. 교과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이런 시각에서 쓴 이름으로 지나쳤을 뿐, 글자들을 자세히 따라가면서 이런 작가도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새삼 놀란다. 기억하는 사람들이 쓴 이야기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모른채 살아가고 있어서. 기억해야 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해서.
이야기 구성이 세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사적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게 아니라 독자의 머릿속에서 교차되게 이야기를 두 남자의 시선에서 시간과 공간의 이동을 함께 그려주어 입체적으로 보인다. 이미 수십년 전에 이런 방법으로 글을 쓴 분이 계셨다는 것이 놀랍다. 동경 유학생 유태림, 해방 후 함께 교직에 있던 이선생이 그를 보는 서술. 이렇게 한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른 남자가 자신의 이야기 속에 그 한 남자의 이야기를 함께 끌어안아 보여준다.
오랜만에 보는 우익과 좌익의 단어는 그 시대의 사상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던 청년들의 모습과 함께 낯설다. 그 시대는 사상에 따라 이분법으로 극단의 입장에 있던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어. 자질과 능력이 있으면서도 조선 혹은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현실때문에 좌절하고 방황하던 그들의 모습은 지금의 젊은이들과 많이 닮아있다. 단지 현실이 그렇게 된 이유만 다를 뿐.
이들은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는 없었을까? 일제시대가 끝나면 행복하리라 믿었던 그 신념이 좌익과 우익의 갈등과 신탁통치를 매개로 한 강대국들의 이권개입으로 또 다른 문제가 되었을 때 바깥에서 구경만하면서 추이를 지켜볼 수는 없었을까? 젊은 그들이기에. 실종되고 죽음으로 '그랬대'라는 식으로 잊혀지기에 너무 젊은 그들이기에 책인 줄 알면서도 현실속의 그 때, 그들의 모습이 안타깝다.
처음에 그냥 해방 후 격동기의 이야기겠거니 하고 읽었다가 유태림의 조금 더 젊은 시절의 고뇌와 일본에서 살던 한국인들의 대우와 그들의 생각, 탁류같던 해방후의 시기가 책에 대한 자세를 좀 더 진지하고 몰입하게 한다. 활짝 피워보지도 못한 그들이 아름다운 꽃 같아서, 틔우려는 꽃잎을 줄기에서 그냥 잘라버린 현실이 잔인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