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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 또 다른 소설작품들이 인용되는 경우를 종종 만나게 된다.<인간 희극> 같은 경우처럼 말이다.문제는 <인간 희극>이란 작품을 오랫동안 사로얀이 아닌 발자크의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거다.'인간 희극'이라 읽고 '인간 극장'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혹은 그 반대로 오독을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다.중요한 건 처음부터 사로얀의 <인간 희극>이란 제목 자체가 잘못 번역되었다는데 있었다는 거다.물론 나는 그 사실을 모른채로 오독을 한 경우에 해당되지만,중요한 건 잘못된 번역이 그대로 통용되어 사로얀의 작품은 여전히 <인간 희극>이라는 거다.그래서 찾아봤다.고전을 읽을때마다 찾아보게 되는 <김승희의 세계문학기행>을 "<인간 희극>이란 원제가<The Human Comedy>인데 단테의<신곡> 즉 <The Divine Comedy>를 의식하고 정한 제목인 듯 보인다.단테의 시대가 작가의 상상력이 신을 탐험하고 신들의 세계를 방문하여 유랑할 수 있었다면 사로얀의 시대는 천상의 신보다는 지상의 인간들 그중에서도 고집되고 가난하지만 인간미를 잃지 않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인간 군상 속으로서의 탐험이나 유랑이 더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73쪽 <김승희의 세계문학기행>에 소개된 '인간 희극'을 읽으면서 '호머'와 '율리시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로얀의 마음을 이해할수 있게 되었다.율리시스 라는 이름과 호머 라는 이름을 마주하면서 주인공들결코 평범한 성격을 가진 인물은 아닐거라 예상은 했지만 말이다.율리시스는 고작 4살인데 소설에 인용된 모습을 보면 네살이라고는 믿을수 없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물론 내가 그려본 이미지가 그랬다는 거다)14살의 호머 역시 마찬가지.그래도 호머의 경우는 조금 일찍 철이든 소년정도로 이해할수 있겠으나 율리시는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았다.아이러니한 건 그래서 더 호머와 율리시스의 이미지를 찾고 싶어졌다는 거다.율리시스 같은 경우는 특히 현실에서 쉽게 만날수 없을 것만 같은 꼬마라서 더 찾아보고 싶었다.그리고 구글을 통해 검색해 보다 앙커 사무엘 알베르트의 그림 속에서 호머도 찾고,율리시스도 찾고 늙은 전신 기사 그로간씨도 찾았다.물론 지극히 주관적 해석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이겠으나 앙커의 그림을 보는 순간 내가 찾던 율리시스였다.
구체적 소설의 배경이 언급된 것은 아니나 전쟁과 경제공황이 배경임을 알수 있다.호모는 고작 열네 살인데 일을 해야만 한다.형은 전쟁에 병사로 나갔고,아버지는 이미 계시질 않는다.그럼에도 소년은 소위 말하는 일찍 철이든 소년이라 세상을 향한 원망은 크지 않다.다만 소년이 갖는 불만이라면 누군가에게 죽음을 알려야 하는 전보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자신이 어떻게 해 줄 수 없다는 아픔.동시에 자신의 형에게 그런 죽음이 온다면 그 역시 세상을 향해 분노를 표하겠다고 하지만...결말에서 느껴지는 기분이란 호모가 더 당당히 살아가게될 거라는 기분이 든다는 거다.소설의 제목 때문인지 막연하게 '희곡'작품집인가 생각했더랬다.그런데 책의 제목도 그렇고,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름 호모와 율리시스도 그렇고 내용도..생각해 보면 번역에 잘못된 부분은 있었다고 하나 굉장히 반어법적인 그러면서도 심오한 느낌이 담겨 있는 작품이란 생각을 했다.문학적으로 유려한 표현이 있다거나 극적인 긴장감 같은 요소는 없음에도 이상하게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살아 숨쉬는 것만 같았다(사실 그래서 인물들의 이미지를 더 찾아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해서 호머의 감성에 나도 모르게 깊게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어찌보면 조금 투박한데..그래서 더 인간적이고...그래서 또 가슴 한켠이 울컥해 지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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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희극, 윌리엄 사로얀, 문예출판사
월리엄 사로얀은 캘리포니아 태생의 작가로 이 작품은 그의 자서전 같은 성격도 띠고 있다. 그는 시종일관 따뜻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그려낸다. 전쟁 중 작은 동네 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에피소드를 주인공 호머의 눈으로 바라본다. 수채화 같다는 표현이 작품해설에 나오는데 딱 그런 분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