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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선생님의 책을 빼놓지 않고 읽는 사람이다. 아쉬운 것은 요즘에는 저자의 책 생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베르토 에코의 말이 생각난다. 에코는 자기 내부에서 쓸 거리들이 마구 샘솟아서 주체할 수 없다고 한다.
무엇부터 말해야 좋을 지 모르겠다. 이 책은 정치경제학 비판에서 출발한다. 이는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다. 이 비판은 경제학 정치학 생물학 문학 등등을 가로지른다. 맑스에서 들뢰즈 불교 생물학 역사학 등을 가로지른다. 끊임없다 탈주한다. 간단히 말해 이진경-기계이다. 이진경-기계에 의해 쓰여진(편의적 의미에서) 이 책은 곧 '책-기계'가 된다.
우리는 이 책을 텍스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읽지 않는다. 이 책 자체가 새로운 기계와 접속하기 위한 기계이다. 그래서, 우리는 코뮨주의로 간다. 간다? 이 말은 적당하지 않다. 코뮨주의를 산다? 이 말도 적당하지 않은가?
외부의 사유에 대한 정의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자본에 대한 비판, 노동에 대한 비판, 계급에 대한 비판, 자본과 노동과 계급을 외부의 사유에 의해 재정의 한다. 이 재정의의 핵심을 외부적 사유라고 하면 적당할까?
몇 가지 점에서 놀란다. 어쩌면 이 놀라움은 이전에 경험했던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시 놀란다. 아니, 감동한다. 나는 사소한 것에도 감동을 잘 하고 거대한 것에서도 감동을 잘 한다. 그 점이라는 것은, 노동에 대한 새로운 관점, 계급에 대한 새로운 관점, 새로운 대안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저자는 노동에 대한 새로운 사유로부터 출발한다. 노동에 대한 근대성에 사로잡힌 맑스주의적 사유가 노동이 자본과 국가에 사로잡힌 계기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노동이라는 개념에 집적되어 있는 인간중심주의적 사유를 비판한다. 그리고, 국가와 자본에 대해 사유한다. 요는 국가와 자본의 횡포로부터 탈주하자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노동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힌 인간중심주의에 대해 비판하며, 생명과 기계의 경계, 생명의 개념에 대해 사유한다. 이로부터, 생명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통해 기존에 생명이라는 개념에 담겨 있던 목적중심주의 환원주의에 대해 재사유한다. 이러한 사유들의 종착점은 '코뮨주의'인것 같다. 그래서, 더 먼 종착점은 코뮤주의도 아닌.
나의 실천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인가? 우선 노동시간부터 줄여야겠다. 배부른 소리 한다고. ㅋ 맞다 배부른 소리다. 하여간 노동시간부터 줄여야겠다. 그리고, 시간을 재구성하는 것을 배워야겠다. 나 스스로 시간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배워야겠다. 또, 나의 외부와 소통해야겠다. 아니, 내부와 외부의 구분 자체가 방편적이라 외부라는 말을 쓰기도 뭐하다.
내가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나는 아무개-기계가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의해 이 책-기계는 다른 기계와 접속한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니다. '나'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아쉬운 점: 생물학에 대한 공부를 조금 더 또는 아주 많이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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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크스는 위대하다. 맹목적으로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한 가지의 이념과 생각의 덩쿨 속에서 그는 새로운 관점으로 새로운 세상을 위해 새로운 삶을 살아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위대하다고 해서, 그의 사상이 완벽한 것은 아니다. 그 사상이 10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작가는 이 사상을 철저히 글쓴이의 관점으로 재구성시킨다. 즉, 글쓴이만의 새로운 맑스주의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혹자는 이 책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낼 지도 모른다. 이 책이 맑스주의의 기본을 호도하고 있는건 아닌가라고 말이다. 하지만 맑스주의는 손에 잡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말할 수 있는 것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에 대해 이것만이 맑스주의라고 강요시킬 권리가 있는 사상도 아니다. 한가지 사상이란 것은 새롭게 시대에 맞추어 움직인다. 그렇다. 왜곡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쁜 의미의 왜곡으로가 아니라, 조금은 괘씸하지만 "인간"에 그리고 그 "인간의 더 놓은 저편"에 조금 더 가까이 가려는 당찬 "왜곡" 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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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동체?
이진경의 『미-래의 맑스주의』 목차를 훑어 봤을 때, ‘생명과 공동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공동체?”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공동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데다가, 심지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첫번째 이유는, 오웬을 비롯해 19세기의 많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사회 문제를 공동체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던 실패담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맑스가 지적했듯이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잘못된 실천은 사회구조에서 오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이 미국에서 실험했던 많은 공동체는, 근본적인 해결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일종의 ‘땜빵’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동체라는 단어에 부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두번째 이유는, 1990년대 이후 한국의 공동체 운동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평가’에 있었다. 비록 내가 공동체 운동을 제대로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몇 가지 실험적인 의도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행해졌던 공동체 운동이 난관에 봉착하며 침몰하는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실’은 나에게 공동체 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 혹은 공동체가 과연 현실에게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을 심어 주었다.
2. 생명과 공동체에 대해서 공동체에 대한 이진경의 설명을 들어보자. 이진경은 「맑스주의와 코뮨주의」라는 장에서 왜 자신이 코뮨주의를 사유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이진경은 누구나 인정하는 1980년대 운동권의 이론가였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 출간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추상적으로 진행되었던 사회구성체 논쟁에 대해 방법론적인 문제제기를 가한 이진경의 주장에 동감했다. 그러나 1990년대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함께 이진경은 맑스주의의 문제점에 대해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을 통해 이진경은 “자본의 시선으로 자신을 보고 자본의 욕망을 자신의 욕구로 삼는 무의식적 습속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혁명은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p. 301)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이러한 이진경의 비판의식은 맑스의 ‘노동가치론’에까지 이른다. 이진경에 의하면 맑스의 노동가치론 역시 자본주의의 욕망에 포섭되어있는 이론이다. 맑스의 노동은 상품을 생산해내는 것으로 인정받고, 이러한 상품은 자본주의의 교환가치 속에서만 존재한다. 즉 맑스의 노동가치론은 자본주의가 성립하지 않으면 이해될 수 없는 이론인 것이다. 이진경은 이러한 맥락에서 맑스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근대성, 인간주의 등을 벗어나야 한다고 강변한다. 「생명과 공동체」는 이진경의 “근대를 넘어선 세계, 근대를 넘어서기 위한 방법, 그리고 근대를 넘어선 삶의 방식에 대해 탐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생명의 문제를 코뮨적인 사유를 통해 해명하고 해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연구의 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기계와 생명을 하나로 다루면서 보존이 아닌 변형과 창조, 혁명의 문제로 생명과 생태의 문제를 다룰 수 있는 이론의 창안”(p. 310) 하려는 것이다. 이진경은 생명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탄생했고 발전하게 되었는지 살펴본다. 생물과 무생물의 근본적 구별, 생명체와 환경이라는 대쌍 개념의 출현 등은 19세기 ‘생물학’을 통해 자연에 도입된 ‘새로운’ 관념들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왔던 ‘생명력’이라는 개념, 각각의 세포들과 기관들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작용하고 있다는 개념 역시 19세기의 ‘발명품’이다. 이진경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관념을 뒤흔들기 위해, 현대의 분자생물학의 역사를 서술한다. 분자생물학이 발전하면서 유전자가 밝혀지기 시작했고, 이러한 연구는 생명현상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분자생물학은 ‘생물학’이라는 학문에 물리적 내지 화학적 접근을 도입했다. 이러한 분자생물학의 도입은 생명현상을 규명하려는 기존의 입장에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생명체인지 아닌지 모호한 바이러스의 발견 등은 생명체와 비생명체를 근본적으로 분리해주던 기준이 사라짐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견은 생명의 실체론이 와해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즉 “생명은 이제 더이상 무생물과 근본적으로 다른 본성을 갖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는 것이다”(p. 335). 그러나 기존의 생명과 유기체 개념은 사라지지 않는다. 기존의 ‘원자’ 자리를 ‘유전자’가 다시 차지하면서, 생명과 유기체 개념은 생명력을 유지해간 것이다. ‘사회생물학’과 ‘유전자 선택론’과 같은 이론들은 ‘유전자의 존속’이 유기체의 존재나 기관들의 기능을 설명하는 목적 내지 존재이유라고 설명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알려지고 믿어지고 있는 유전자 개념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유전자의 구성이나 그 근원을 찾는 것에 있지 않다. 이진경은 생명체를 ‘관계주의적 관점’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유전자를 구성하는 아미노산과 뉴클레오티드 등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어떤 것과 어떻게 결합하는지, 어떤 관계에 들어가는지에 따라 전혀 다른 성질을 갖게 된다. 배열이 달라짐에 따라 다른 성질을 갖는 단백질과 유전형질을 구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리차드 도킨스를 비롯한 학자들이 유전자가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관계에 대한 고려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계주의적 관점’으로 생명체를 이해한다는 것은, 환경에 의한 요인 역시 중요해진다는 의미이다. 유전자를 둘러싼 환경. 유전자의 기능이 환경에 영향을 받고 의존적이라면, 더이상 환경과 개체를 가르고 대립시키는 이분법은 무의미하지 않을까? “요컨대 개체와 환경을 가르고, 그 중 하나에 중심성과 능동성을, 다른 하나에 부차성과 수동성을 부여하는 그런 이분법은 더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p. 350). 관계주의적 관점으로 생명체를 이해하는 것은 공동체에 대한 이진경의 고민을 짐작하게 한다. 이진경은 이러한 생명체에 대한 연구에서 첫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기존의 생물학이 생물과 비생물을 구별하고 그 차이를 부각시켜왔다. 그러나 관계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구별법은 무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사고는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사유하는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인간도 다양한 생명체 속에서 관계를 이루한 한 존재에 불과하다. 둘째, 생명체란 상호의존적 순환계를 구성하는 요소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진경은 이를 ‘중-생’하는 요소들이라고 규정한다. 이렇게 순환적으로 상호의존하며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생명을 정의하고 이러한 개념을 공동체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순환계는 다양성과 항상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순환계 자체가 유지되고 보존되기 위해서는 종의 다양성과 개방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인간이 이루는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양성과 개방성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생명이 오래갈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의 공동체 역시 인간만의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생명체의 한 종류이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만의 연합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 관여하는 다양한 요소들, 자연들과의 연합이며, 이질적인 사람들이 서로에게 없는 것을 서로 제공하면서 순환적인 삶의 흐름을 형성하는 ‘중-생’의 한 형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외부에 개방적인 상태에서 그러한 순환계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능력이고, 따라서 그것은 그 중-생적 집합체가 수용할 수 있는 이질성의 폭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다양성의 폭에 의해 규정”(p. 367)된다고 말할 수 있다. 3. 대안을 위한 삶,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이상이 이진경이 생명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한 ‘공동체’이다. 이진경이 설명하는 공동체는 다양한 가치가 인정되고, 순환적인 삶을 구성하며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선 곳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대안으로써 ‘삶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이미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삶을 위해서는 우리의 육체 속에 각인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버려야 한다. 우리는 단순히 경제체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뿌리 깊은 자본주의의 흔적을 지워버릴 수 없다는 사실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삶의 각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다른 것이 ‘되는’ 변이와 생성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외부에 대해 열려있는 삶의 조건을 구성하기 위해 스스로를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한다. 앉아서 유목하기. 이진경의 사유를 쫓아가다보니, 어느새 공동체주의에 호감을 가지게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진경이 책의 마지막 단락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공동체에는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하나는 닫혀있는 공동체. 내가 지금까지 부정적으로 생각해왔던 공동체이다. 우리 주변에서 많이 관찰할 수 있는 닫힌 공동체는 우리의 삶을 고통스럽고 고단하게 만든다. 반면 열린 공동체는 공생을 위한 첫 걸음이다. 타인을 배제하지 않고,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공동체는 내가 추구해왔던 ‘코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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