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울아비로 있을 때, 서울에서 온 아랫사람은 사귀는 아가씨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만 해도 길이 멀어 오면 자고 가야 하는 곳인 강원도 인제 원통까지 면회를 오곤 했다. 자주 편지를 주고 받고, 만나고...사랑이 잘 영글어가는가 싶었는데, 어느 날부터 이 녀석은 시무룩해졌다. 알고보니 사랑을 나누었던 아가씨가 다른 사내한테 시집을 간다며 편지를 보냈다는 것.
서로의 사랑을 굳게 다짐했을 터인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일이 있은 뒤부터 그 녀석이 있을 때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어쩌고 하는 얘기는 눈치가 보여 아예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간직하며 알콩달콩 사이좋게 사랑하며 같이 살면 얼마나 좋을까만, 세상 일은 바란다고 다 되는 게 아니라 뜻대로 안 될 때도 있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2002년에 만든 영화 <돌스 Dolls>는 이루기 어려운 세 묶음의 사랑을 담았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바라는대로 되지 않는 사랑을 아프게 그리고 있다. 그러다 보니 웃기는 모습을 곳곳에 섞어 넣기도 하던 감독의 다른 영화와는 맛이 다르다.
2. 마츠모토(니시지마 히데토시)는 사와코(칸노 미호)를 사랑해서 같이 살기로 다짐했지만, 다니는 일터의 사장 딸과 혼인하기를 바라는 어버이가 이들을 갈라 놓는다. "널 대학에 보낸 까닭은 아버지같이 살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야. 출세를 해야 해..." 어버이 때문에 억지로 마음에 없는 아가씨와 혼인하려는 마츠모토. 그런데 사와코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으며 머리도 어떻게 되었는지 병원에 있다는 말을 듣고는 식장을 뛰쳐나간다.
료코가 날마다 도시락을 챙겨 와서 같이 먹는 점심이 좋았지만, 히로시(미하시 타쓰야)는 돈을 벌기가 어렵다며 료코를 두고 그곳을 떠난다. "도시락을 만들어 토요일마다 여기서 기다릴게...꼭 돌아와야 해..." 료코가 뒤에서 소리치는 말을 들었지만, 뒷골목으로 들어가 야쿠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마주보는 눈빛에서 사랑이 피어나요..." 하는 노래쟁이 야마구치 하루나(후쿠다 쿄코)를 좋아해서 누쿠이(다케시게 쓰토무)는 네 해째 하루나를 따라다니지만 가까이 갈 수가 없다. 하루나가 득실대는 팬들한테 다 마음을 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가도 기찻길처럼 거리를 둔 채 지나쳐갈 뿐이다.
3. 기타노 다케시 감독이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짝사랑은 아니다. 둘 다 좋아하면서도 곁의 사람들 때문에, 때로는 먹고 사는 데 바빠 이루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그 사랑은 제대로 된 사랑이 아니다. 한쪽이 끝까지 놓지 않고 기다리는 사랑이다. 돌아올지 알 수 없으므로 마냥 기다리는 사람만 바보가 될 수도 있는 사랑이다. 고무신을 거꾸로 신은 사람한테는 보란듯이 새로운 사랑을 찾아가는 게 앙갚음 하는 길일 수도 있는데...
사와코나 료코, 누쿠이는 마냥 기다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는 게 아니라, 목숨을 걸고 옛사랑을 지키려 한다.
이렇게 기다린 끝에 얻는 게 뭘까? 뺑 돌아버린 다음에 나타난 마츠모토가 붉은 끈으로 두 사람의 허리에 묶고 온 나라를 같이 다닌들, 세월이 흘러 히로시가 공원에 나타나 제 얼굴도 잊어버린 료코의 도시락을 같이 나눠 먹은들, 아무도 만나지 않으려는 하루나를 만나려고 누쿠이가 제 눈마저 버리고 다시 만난들, 세월은 지나갔고 애틋한 마음은 그 옛날과 같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아플 뿐...
이런 사랑은 아무나 할 수가 없다. 감독도 아마 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하지 않았으니 그런 꿈같은 사랑, 아니 몹쓸 사랑을 다뤄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4. 많지는 않지만 만든 영화들이 나름대로 빼어난 덕분에 이름난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하나비> <소나티네> <기쿠지로의 여름> <자토이치>...들어있는 영화는 어느 것 하나 엉성한 게 없다. 그래서 아까운 마음없이 그냥 사게 되었는데, 들어있는 작품을 볼수록 감독의 솜씨에 놀랐다.
기타노 다케시 감독도 히치콕 감독처럼 만든 영화에 꼭 나올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보이지 않았다. 방송국 문지기의 모습이 비슷했지만 딱히 감독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푸른 빛을 많이 보여주는 탓에 '기타노의 블루'란 말을 들었는데, 여기서는 갖가지 빛깔을 보여준다. 봄에는 활짝 피어있는 벚꽃길을 보여주고, 여름에는 푸른 바다를, 가을에는 단풍으로 울긋불긋한 산을, 겨울에는 흰눈이 온 세상을 덮은 모습으로 화면을 채웠다. 게다가 마츠모토와 같이 다니는 사와코가 입은 옷은 철마다 빛깔과 모습이 달라 눈이 즐겁다.
'저승길의 파발꾼'이라는 일본 인형극 분라꾸로 처음과 끝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처음에는 사랑 때문에 말까지 잃어버린 사와코와 마츠모토가 다니는 모습에 조금 지겹기도 했다. 그런데 히로시의 이야기로 접어들면 보는 눈에 빛이 생겨나고 빨려 들어간다.
디브이디 화면이나 소리는 깔끔하다. 보너스도 그런대로 볼만 하다. 영화를 만들 때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감독과 마츠모토와 사와코를 맡은 이가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예고편도 들어있어 제값은 한다. 이 모음 디브이디는 다시 나오면 꼭 사라고 권하고 싶다. |
|
그 해 조용한 여름 바다. 소외효과를 인위적으로 쓰지 않고서도 관객을 떨어뜨려 놓을 줄 아는 감독. 그래서 영화를 통해 인생을 성찰하도록 만드는 감독. 주인공의 죽음도 관조하게 만드는 데서 그의 역량은 극에 달한다. 바닥 전면으로 방사상으로 퍼지는 넘쳐난 욕조물처럼 관객을 성찰로 젖어들게 한다. 기타노 다케시..... 좋은 감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