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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yaz Kale :: Orhan Pamuk 같은 문제를 놓고 나와 전혀 다른 극과 극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을 만나면 갈등에 빠진다. 내 주장이 옳다고 끝까지 밀어 붙힐 것인가, 아니면 그의 주장에 수긍이 간다고 내 생각을 수정할 것인가. 전자의 경우 끝을 기약할 수 없는 분쟁이 따를 것이고 후자의 경우 내 정체성에 위협이 올 것이다. 진실이 명확한 사안에 관해선 시시비비를 가려 분쟁과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겠지만 진실이 명확치 않거나 서로 믿는 진실이 다를 경우엔 어느 한쪽을 선택하지 않으면 영원히 대립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절대 진실' 만을 추구하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어째서 지구상에는 세대와 세대,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신념과 신념 사이의 대립이 끊임없을까? 그것은 '절대 진실' 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인류는 '절대 진실' 에 도달하기에 요원한 것일까? 자살 폭탄을 이고가는 과격한 이슬람 교도와 지하철 안에서 목에 핏대를 세우며 '예수천국 불신지옥' 을 외치는 골수 기독교인을 한 방에 넣는다고 생각해보자. 절대 신념으로 움직이는 이들 사이에서 접점을 이룰 절대 진실은 무엇일까. 서로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긴 세월을 함께 지내게 한다면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신념을 변함없이 지킬 수 있을까? 이념에 관한 경우로도, 보수주의자와 진보주의자를 함께 지내게 한다면 어떤 화학 작용이 일어날까 궁금해진다.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의 거리로만 계속 지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상호 영향을 받아 서로의 주장 논조가 변할 것인가. (물론 여기엔 이들이 외부 접촉이나 정보없이 오로지 둘이서만 생활한다는 전제를 요한다) 처음에는 서로를 설득하다, 분쟁하다, 상대의 주장에 동요하거나 자기 회의에 빠지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다 어느새 스스로의 신념을 조금씩 이동시키게 되지 않을까? 오르한 파묵은 이에 대한 궁금함을 소설로 은유하여 독자와 함께 사고한다. 이탈리아, 즉 서양에서 잡혀 온 기독교인 화자와 고지식한 터키(동양)인이자 무슬림인 호자를 제한된 공간 아래 함께 생활하게 하여 이들의 변화를 그려낸다. 호자의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면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연상한 화자는 미신을 믿는 터키인들에 대한 연민을 더해 호자에게 많은 지식을 전파하고, 호자는 스펀지에 물 흡수하듯 그 모든 것들을 습득한다. 지식이 많아지고 진실을 더 많이 깨우칠수록 호자는 무식한 터키인들을 경멸하고 그들을 계도하기 위해 각종 과학 기구를 만들고자 왕실을 설득한다. 그러나 그에게 무심한 왕실의 태도 때문에 호자는 절망을 거듭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화자는 이미 짐작했던 바 인양 냉소한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호자와 화자는 각자 자신을 비판하자는 논쟁에 부딪히게 되고 초조함과 권태 속에 스스로를 돌이키다 어느덧 둘은 자기회의에 빠져들게 된다. 그 와중에 흑사병이 발병되며 그때를 기점으로 호자와 화자는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스스로 호자보다 더 우월하다고 여겼던 화자는 근거없는 미신의 공포에 사로잡혀 위축되고, 흑사병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호자는 기세를 올리며 그 덕에 왕실의 신의까지 얻게된다. 왕실의 무지를 이용하여 권력과 재력을 확보한 호자는 그들을 제대로 계도할 방안을 찾다 결국 과학적 무기 생산에 몰두하게 된다. 이런 호자에게 영향을 준 인물로 알려진 화자는 덩달아 왕실의 호의를 받게되고, 그는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식하지 않다고 여기며 서서히 그들 사회에 물들어 간다. 호자의 거대한 무기가 완성되어 원정전쟁때 끌고 나가게 되지만 터키인들이 이용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이고 불완전해 무기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다. 전쟁마저 패배로 돌아가자 그들은 기독교인인 화자를 제물로 삼으려하고, 그의 목숨을 구명하기 위해 호자는 화자와 완전히 인생을 바꾸게 된다. 호자는 기독교인이자 서양인으로서, 화자는 무슬림이자 터키인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이것은 동양에 우월감을 가지고 계도하려 했던 서양의 이야기이자 과학과 미신, 보수와 진보, 기독교와 반기독교의 이야기임과 동시에 나와 남의 이야기다. 자아는 사는 환경에 의해 수많은 논리 중에 하나를 택하고 그것을 절대 진실로 믿고 맹종하여 길을 따르다 정체성을 보다 분명하게 확립하고자 하는 실천의 수단으로 타인에게 전파하려 한다. 타인이 자신과 같다는 것을 확인할 때 비로소 스스로의 정체성이 온전해졌다는 착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현재의 내 상태를 불안해하며 남의 인생을 흉내내면서도 그렇게 흉내낸 인생이 또 불안해 타인이 나를 흉내내게끔 만들려 한다. 만약 이것이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면 결국 인간은 서로서로가 같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토록 서로가 같은데도 분쟁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인간이 '절대 진실' 을 영영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내 개인의 판단으론 아마도 '하얀성' 은 그들이 정복하고자 했지만 도달하지 못한 '절대 진실' 의 메타포가 아닐까 한다. '절대 진실' 을 한가운데 두고 이념과 이념, 종교와 종교, 인종과 인종, 나와 남이 영원히 대치한다. 그러다 세월이 지나, 혹은 환경이 바뀌어 문득 내 자신이 과거의 내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방향이 어느 쪽으로든 나는 분명 또 다른 타인의 방향으로 이동한 것이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와 다르다면 그것은 오로지 내 개인의 의지일까, 아니면 불가피한 타인의 영향일까. 그 누가 되었든 타인에 의해 어제와 다른 진실을 발견하고 사고방식이 바뀌었다면 나의 진정한 정체성은 어디에 있겠는가. 나와 다른 타인과 융합할 수 없어 영영 대치할 수 밖에 없더라도 그를 존중해야 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과거의 나도 현재의 나에게 있어 남이지 않겠는가. 전작에 걸쳐 [나의 정체성은 남이다] 라고 일관되게 주장하는 파묵에게 깊이 공감한다. 특히 작금처럼 상반된 이념이 한치의 양보없이 격렬히 맞부딪히는 상황에 있어선 해답의 돌파구는 여기에 있지 않나 하고 진지하게 성찰하게 된다. 지금의 내가 격렬하게 반대하는 상대와 같아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흑사병을 두려워했던 화자만큼이나 두렵지만, 그 두려움의 원인이 병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기반한 정체성이 무너질까 두려워한다는 것을 직시하고나면 뜻밖의 의연함을 기를 수가 있다. 변해도 좋다, 지금의 내가 아니어도 좋다, 나는 곧 남이다, - 이것에 익숙해진다면 세상은, 적어도 내 개인의 인생은 보다 평화롭지 않을까. 아직 이 길, '절대 진실' 로 가기에 한참이나 요원한 나에게 파묵의 이 환상 소설은 그나마의 대리 만족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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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출간된 중편 소설『하얀 성』은 오르한 파묵의 초기 작품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뒷부분에 작가의 '소설 후기'와 역자 후기를 읽으니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됐다. 어떤 과정을 거쳐 구상하고 썼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책이 얇아서 골랐고 오르한 파묵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고 읽기를 참 잘 했다. 만약 내용을 알고 읽었으면 덜 재미있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하다가, 중반에는 '이 사람들이 대체 왜 이러나' 하다가, 그 후부터 긴장감이 높아지고 마지막에는 무척 놀라웠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베네치아 젊은 학자 '나'를 태운 배가 오스만 해적에게 납치를 당한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노예가 되어 여기저기 끌려간다. '나'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의학 지식이 있고 영민하여 몸을 쓰는 노예를 면하고 시종 같은 노예로 파샤(장군)의 일을 봐주게 된다. 거기서 자신과 모습이 닮은 오스만 사람 '호자'를 만나 호자와 함께 파샤의 불꽃놀이를 성공적으로 준비한다. 호자는 파샤에게 '나'를 자기 노예로 달라고 해서 둘은 함께 살게 된다. 아주 오랫동안. 파룩이라는 사람이 1600년대 책을 발견해서 그 내용을 해석해나가는 방식의 액자 소설이다. 흑사병과, 오스만의 헝가리 · 폴란드 정벌 등 역사적인 사건이 눈에 보일 듯 생생하게 묘사된다. 무엇보다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건 파디샤(왕) - 파샤 - 호자 - 나 의 관계 때문이다. 노예와 주인, 신하와 군주 사이, 말 한마디 잘못하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시대다. '삶과 죽음'이 달린 상하관계에서 오는 팽팽함이 있다. 소설 해설에서는 두 주인공, 즉 나와 호자, 노예와 주인의 정신적 관계에서 긴장감이 유지된다고 쓰여 있다. 노예와 주인은 서양/동양, 베네치아/이스탄불, 이탈리아/오스만, 열등/우월 등의 대립을 이룬다. 하지만 두 남자는 닮았다. 우선 얼굴이 닮았고 호기심과 지식욕이 크고 배움에 열정적이다. 주인은 자기보다 우월해 보이고 뭔가 많이 알고 있는 노예에게 열등감과 동경을 동시에 느낀다. 둘은 서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숨기고 싶던 과거 일까지 서로 나누게 되고 생각도 닮아간다. 그 과정이 따뜻하지는 않다. 노예와 주인 관계였으니까.
주인은 궁금한 게 많다. '왜 나는 나인가', '남들이 저지른 가장 나쁜 짓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몰두하고, '끝까지 가겠다'고 되뇐다. 전장에서 민간인들을 찾아다니며 '네가 저지른 가장 나쁜 짓이 무엇인지' 묻고 다니는 장면은 무척 잔인하고 덧없게 느껴졌다. 이교도의 잘못을 캐고 다녀 봤자 자신들의 잘못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들은 대개 비슷했다. 거짓말한 것, 좀도둑질한 것... 나와 남은 다르지만 다를 바 없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왜 나는 나인가'는 고대 철학자들부터 다뤄온 심오한 질문이지만, 결국 "사람들은 서로의 행세를 하면서" 살아간다. 본문에 나오듯,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한가.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라가 되었든, 사람이 되었든 말이다. 이 책을 정체성에 관한 소설로 보는 건 이런 이유인 듯하다. 나는 '왜 나는 나인가'를 묻는 호자를 보면서 사춘기 소년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어쩌면 일생은 내내 사춘기일지도. 주인공이 몇 명 되지 않고,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은 짧은 소설인데도 이것저것 많이 담은 느낌이다. 역사 소설이라 영화로 만들면 볼거리가 많겠다 생각했다. 400년 전 오스만 제국을 엿볼 수 있는 영화가 되겠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긴 여운을 남기겠지. 참고로 작가의 말은 이렇다. 어린 시절 아파트 윗 층 한 할머니의 집에서 본 풍경이 『하얀 성』의 바탕이 되었을 거라 했다. 과학, 천문학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주인공들에게 적용시켰다. 두 주인공의 정신적 관계와 긴장감을 소설의 기본 요소로 하고, 여러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쌍둥이-닮은 사람' 테마와, '발견된 필사본 방법'을 적용했다. 작가의 말에서 창작의 고통이 느껴지기보다는, 재미로 이것저것 섞어 쓰며 여러 실험적 구상을 했고, 그 과정에서 쓰는 재미가 있었겠다 싶었다. * * * * * * * "호자와 나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나보다 파샤가 더 초조해하는 것이 날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 당시 호자는 이 유사성에 대해 절대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유사성은 내게 이상한 용기를 주는 어떤 비밀이었다. 어떤 때는, 단지 이 유사성 때문에 호자가 살아 있는 한 내가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p.67) "진짜 학문은 그들이 왜 그렇게 바보 같은지를 이해하고, 그들의 머릿속이 왜 그런지를 알아서 그에 따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p.81) "우리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따스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들은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인지 모르고, 사원 첨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pp.165-167) "(...) 돕피오 성을 수호하기 위해 원정을 왔다는 것을 안 후, 우리는 성을 보았다.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218)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가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했던 것과 앞으로 할 것이지요."(p.229) "사람들이 그 어느 곳에서나 서로 같다는 것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들이 서로의 행세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고." (pp.231-232) "그 노인은 "인생의 가장 멋진 부분은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말했다. 그는 주저하면서 가방에서 지도 하나를 꺼냈다. 내가 지금까지 본 것들 중에서도 가장 형편없는 이탈리아 지도였다." (p.2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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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성은 굉장히 매력적인 소설이다. 터키를 배경으로 터키인인 작가가 저술한 이 소설은 이탈리아 출신의 젊은 학자가 항해 도중 터키로 납치당하면서 터키의 학자인 호자를 만나 벌어지는 일들을 현대어로 번역한 이중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이탈리아 학자와 터키 학자의 이야기인 셈이다. 이 소설을 보면서 터키의 매력은 동양과 서양의 만남에서 뿜어져나오는 조화라고 할 수 있다. 서양, 그 중에서도 르네상스가 가장 먼저 구현된 이탈리아와 그러한 서양을 거대한 힘으로 압도했었던 터키의 만남이 굉장히 절묘하다. 세계사의 흐름을 알고 이 소설을 본다면 건조한 필체임에도 꽤 흥미를 붙여 읽을 수 있다. 터키는 본디 비잔틴 제국이었다. 비잔틴 제국에 이슬람 세력인 튀르크 족이 영역을 넓히면서 이슬람화되고, 결국 비잔틴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영역으로 잠식된다. 오스만 제국은 터키의 전신이기 때문에 터키에는 동서양의 매력이 모두 살아있다. 현재 터키는 소아시아 지역이기 때문에 아시아라 할 수 있지만(터키인의 전신인 투르크 족이 본디 중국 북방의 유목민족인 돌궐족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그리스 문화와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유럽권의 국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인 이스탄불은 매우 신비로운 도시로 알려져있다. 여기서도 동서양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학자와 터키의 학자인 호자가 등장한다. 이들은 매우 닮은 인물로 등장한다. 서로 동경 혹은 질투하기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이해한다. 이들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이들은 같은 사람으로 보이며 쉽사리 다른 점을 찾기 힘들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로 보아 작가는 동양과 서양은 본디 다른 세계가 아니며 터키는 이러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도시라는 점을 상기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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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도저히 한 번에 읽고 덮을만한 책이 아닐 것 같아서 결국 구입을 했다. 외국문학하면 대개 유럽이나 북미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책처럼 이슬람 문화를 전면으로 내세운 작품은 처음이라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서로 다른 문화권의 충돌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구 문명을 대표하는 '나'와 이슬람 문명을 대표하는 '호자'를 도플갱어처럼 닮은 인물로 설정하여 인간 존재론적인 성찰로 이야기의 주제를 한 단계 높이 끌어올리고 있다. '나'와 '타인'의 경계는 대체 어디쯤일까. '나'와 '호자'가 거울 앞에서 서로의 인생이 바뀌는 미래에 대해서 상상하는 순간에 이야기 밖에 있는 나조차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졌다. 뚜렷이 다른 자아와 사고방식, 지식체계를 가진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융합하고, 마침내 뒤바뀌는 전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전율을 느꼈다. 어쩌면 우리는 그 누구도 자신만의 삶을 살고 있지 않는지도 모른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가까운 사람 혹은 성공한 유명인의 삶에 영향을 받으면서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가끔은 나도 내가 기억하는 사건이 정말 내가 겪은 일인지, 친구로부터 들은 일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런 면을 통찰해내서 동서양 문화의 조화라는 주제 아래 풀어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할 뿐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의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마르셀 프루스트 (작가 인용)
인생의 가장 멋진 부분은 멋진 이야기를 꾸미고, 멋진 이야기를 듣는 것 아닌가요? -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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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소설이었다. '쉽지 않은'이라고 쓰지 않았다. 돌려 말하기 싫을 정도로 그냥 어려웠다. 그리고 그 어려움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읽어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읽었다.(추천한 행복한왕자님 때문이다. 도대체 이 글의 무엇을 찾아내 보라고 권하신 것인지, 작품의 주제보다 그 의도를 파악하는 일에 더 신경썼다. 그리고 둘다 실패했다.)
책의 내용에 대한 아무 정보 없이 읽었다. 얼마 전에 읽은 작가의 연애 소설 탓에 약간 긴장하는 듯한 마음을 갖고, 대단한 작가임을 새삼스럽게 확인해 보기 위해 책 자체로 바로 들어간 것이다.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싶었다. 어려웠으니까. 그렇게 섞어놓는 힘도 아무나 가진 것은 아니니까. 나는 작가가 섞어놓은 세상에서 결국 길을 잃고 말았다. 이 뜨거운 여름에 헤매다 보니 길 찾아 나오고 싶다는 간절한 생각도 들지 않았고, 에이 헤매다 눈 뜨면 나와 있겠지, 그랬다. 사실 그렇게 되었고.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던가, 글을 다 읽은 후에 옮긴이의 말을 읽었고, 그 다음에 작가의 말을 읽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써 놓은 리뷰를 읽었다. 그러고나서야 짐작되는 것들. 그러나 작품 바깥의 글을 통해 읽고 알게 된 것은 내것이 아니다. 그런가 보다 했다.
동양과 서양이라느니, 나는 누구이고 너는 누구이냐라느니... 날씨 탓을 하고 싶기만 하다. 너무 찌고 너무 습하고 너무 덥고 너무 짜증나고, 그러니 동양과 서양의 관계, 나와 너와의 관계에 대해 내가 어떻게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겠는가.
중세 서양에 있었던 '노예'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해 보게 된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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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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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난 말은 바로 이거다. "네 정체가 뭐냐?" "네 정체를 밝혀라."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쓰기 쉬운 말이지만, 이 말처럼 철학적이고 심오한 말도 없는 것 같다. 이 말처럼 대답하기 힘든 말도 없는 것 같고...
정체... 正體, identity...
누군가 내게 "네 정체는 무엇이냐?" 혹은 "너의 정체성은 무엇이냐?"하고 묻는다면 사실 나는 상당히 머뭇거릴 것 같다.
고유한 나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 혹은 내가 이게 진짜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어느 정도나 될까?
어떤 글이든 글을 읽는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내게 있어 [하얀성]은 정체성에 관한 책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듯 같은 두 사람이 같은 듯 다른 두 사람이 되어 가는 이야기? 그럴 경우 누가 나이고 누가 그일까? 어디까지가 나의 고유의 영역이고 무엇이 나일까?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대 국가, 문화 대 문화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일 듯 하다.
어쩌면 오르한 파묵이 터키 작가였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가능했을 지도 모르겠다. 터키라는 나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타기 전엔 나는 이런 작가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나의 글읽기가 얼마나 편협되어 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암튼... [하얀성]을 읽고 난 솔직한 느낌을 기술하자면...
1. 처음으로 읽은 터키문학작품이라는 데 의의를 둘 수 있겠다.
2. 오르한 파묵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거나 그 사람의 작품을 연구하는 연구자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확 끌리는 매력이 있지는 않다.
이렇게 말하면 돌맞을 수도 있겠지만, 노벨상 선정에도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한 게 아닌가 싶다.
서구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색다르고 독특할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역시 비서구권이라고 할 수 있는 남미 작가들의 작품을 대할 때처럼 확 끌리거나 정말 색다르고 이채롭다는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다른 작품들도 더 찾아 읽고 싶다는 욕구도 일지 않았고...
물론 내 컨디션이 별로일 때 읽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 참고로 이번에 문학동네에서 나온 [하얀성]은 원전 번역이라고 한다. 이 점을 강조하는 걸 보면 예전 번역은 영어 텍스트를 번역한 듯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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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기간 : 4/9~4/11
오르한 파묵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자마자 서점가에 파묵의 책들이 깔렸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나도 그 대열에 합류하여 '내 이름은 빨강'이란 책을 집어 들었었는데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중간에 그만두어 버렸다. 웬만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 내가 미련없이 파묵의 책을 작파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번째는 터키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무지에서 비롯된 생경함이었고 두번째는 작가의 글쓰는 스타일이 나랑 맞지 않았으며 마지막으로 뭐니뭐니해도 너무 어려웠다는 것이다. 작품 길이도 길어서 참고 읽으려 해도 도저히 안되겠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는데 '하얀성'은 그래도 끝까지 다 읽었으니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묵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켰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이 책도 만만치 않게 난해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이탈리아인으로 어느날 터키 배에 납치되어 터키로 끌려오게 되는데 그 곳에서 자기와 쌍둥이처럼 닮은 호자라는 사람에게 노예로 팔리게 된다. 호자는 주인공이 가진 모든 지식을 알고 싶어하고 처음엔 주인공이 호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치면서 관계가 시작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동화되어 나중에는 누가 호자이고 누가 주인공인지 자신들도 헷갈리는 경지까지 이르른다. 무려 20여년이 넘게 지속된 둘의 관계는 호자가 주인공의 차림으로 변장하여 이탈리아로 탈출하면서 끝나게 되고 나중에 주인공은 이탈리아에서 자신을 만났다는 사람의 말에 자극받아 이 '하얀성'이란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나에게 생경함을 안겨 주었던 터키의 지명이나 호칭이 거의 나오지 않아 우선은 읽을만 했는데 책의 끝 부분으로 갈수록 호자와 주인공을 구별해내는 것이 힘들어져 점점 골치가 아팠다. 파묵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여기까지가 내 수준인가 보다..ㅠㅠ) 잘 접해보지 않았던 터키를 배경으로 펼쳐진 이야기라 읽는 내내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꿈꾸듯이 읽었다. 책을 다 읽었을땐 약에 취해 있다가 깨어난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는데 이게 동방과 서방이 만나는 신비한 터키의 작가, 파묵의 책이 주는 일종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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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많이 접해보지 못한 터키의 작가라는 점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2. 동서양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우리는 터키 이스탄불을 말하지요. 3. 도플갱어 처럼 닮은꼴 사람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면서 닮아가는 과정이 참 신선한 소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책장이 넘어갈수록 그 난해함과 모호감이 머리를 아프게 하더군요. 정말 인내로 읽었던 책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번에 책을 손에서 놓는다면 다시 책을 잡기 힘들것 같다는 생각에 읽었습니다. 책장을 덮으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주인공과 호자의 입장에 있다면 과연 이들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려나 싶습니다. 뒤에 후기가 있습니다. 천천히 읽어보니 이 책에 대한 이해가 잘 되더군요. 분명 특별한 소재임에는 틀림 없지만, 모호함과 난해함은 감안하시고 읽는 것이 좋으실 듯 합니다. 물론 읽는 분들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참고하세요. ^^* |
| 오르한 파묵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이름은 들어본 듯하지만 책을 읽어본 적은 없다. 원래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책인데 내눈에 그의 책이 들어왔다. "하얀성" 밋밋한 표지에 평범한 서체로 그 평범하디 평범한 제목이 써 있는 책이 말이다. 아무레도 "노벨상 효과"라고 해야하나? 사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많은 책을 봤지만, 그 상이 주는 무거운 무게감 탓에 읽기를 꺼려왔다. 왠지 어둡고 어려우며 고리타분할 것만 같은 느낌! 바로 그게 노벨상이 가져오는 어두운 부분이 아닐까? 난 아직 젊고 어리기에 무겁고 어두운 것 보다는 젋고 경쾌하며 밝은 쪽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날 내 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없었고, 나는 파묵의 "하얀성"을 선택했다. 장편소설이라고 하기엔 책 두께가 너무 얇았다. 책의 서두에선 세르반테스의"돈키호테"와 움베르토 에코의"장미의 이름"이 떠올랐다. 왜냐? "하얀성"의 서두도 앞서 언급한 두 이야기처럼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쓰레기통이라는 비유가 더 어울릴만한 문서저장고에서 찾아낸 이야기라는 서두로 이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네치아인이자 기독교인인 나는 항해를 하던도중 터키 파자의 군대(''나''의 입장에선 해적과 다를바없는)에 습격을 당해 터키땅으로 끌려간다. 아직술탄이 존재하고, 지금처럼 알라를 믿는 그들의 땅에서 ''나''는 살아남기위해 조금 알고있던 알량한 지식들을 이용한다. 예를들면 의술이라든가, 과학적 지식들을. 그런 재주를 이용해 ''나''는 포로생활이 좀 수월해지지만 그 재주가 ''나''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나''는 자신과 너무나도 똑같이 생긴 ''호자''를 만난다. 그 둘은 마치 도플갱어처럼 닯았다. 마치 거울을 들여다 보고 있는 것 처럼. ''호자''는 과학에 미친 사람이며, 지식욕구에 불타는 사람이다. ''나''는 그런 호자에게 자신이 가져온 책과 정규교육으로 배웠던 모든 것을 전수해 준다. 오직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과 사랑하는 약혼녀를 만나기 위해. ''호자''와 ''나''는 성대한 불꽃놀이를 성대하게 치뤄내 파자의 총애를 받고, 마침내는 술탄마저 만나게 된다. 하지만, ''과학이 곧 국력''임을 외치는 ''호자''에 비해 술탄은 너무 어렸다. 아직 동물을 좋아하고, 사냥을 좋아하는 어린술탄에 관심을 끌기위해, ''호자''는 과학을 점술의 도구로 이용한다. 언제쯤 전염병이 수그러 들지, 사자의 새끼가 암컷일지 수컷일지 같은 것을 알아맞춰 술탄의 관심을 끈다. 그 모든 것들이 ''나''와의 대화와 ''나''가 가르쳐준 지식들에서 나왔음에도 ''호자''는 그런 사실을 무시한다. ''나'' 또한 그런 ''호자''를 시니컬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오히려 그를 괴롭히는데 머리를 쓴다. 너무나 같은 두 사람이지만 둘은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서로를 사랑하기 보다는 헐뜯고 상처를 주기에 바쁘다. 아마도 ''나와 너무 똑같은'' 존재에 대한 거부감 일 것이다. 쌍둥이도 아니고, 피가 섞인 것도 아니다. 기독교와 이슬람교. 서로 절대 가까워 질 수 없는 그들의 종교처럼 두 사람은 같지만 다르다. 그래서 서로 상대방을 괴롭히면서 괴로워하는 상대방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낀다. 상대를 조롱하고 무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때마다 두 사람은 다시 마주앉아 서로의 과거를 젂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또 다툰다. 이야기의 말미에 가면 글을 서술하는 사람인 ''나''가 ''나''인지 아니면 ''호자''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다. 지금껏 이야기 했던 사람의 정체 자체가 모호해 지는 것이다. 이 것은 인간의 성장에 비유할 수 있다. ''호자''''와 ''나''가 더이상 ''호자''도 아니고 ''나''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하지만 여전히 ''호자''이고 또 ''나'' 인것. 이야기는 마치 한 인간이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 하다. ''나''는 관조적이며 조언자적인 성격을 띈다. 또한 ''호자''는 아직 어리고 성급하며 또 그런 반면에 관심거리엔 주의력이 깊다. 그런 두 사람이 같이 지낸 그 긴 시간은 마치 인간의 청소년기를 보는 듯하다. 마침내 사춘기가 끝나면 인간이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이야기 끝에선 두사람의 감정싸움도 없고, 두 사람의 존재는 일체되어진 듯 보인다. 마치 내 안의 날뛰던 질풍노도의 감정들이 가라앉은 것 처럼 말이다. 내가 처음 읽은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 얇은 두께보다,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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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관심을 끄는 사람을 만나, 미지의 매력적인
삶을 접하고, 오로지 그의 사랑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마르셀프루스트, Y.K, 카라오스만오울루(터키 소설가)의 번역본에서 노예가 된 서양 베네치아인 학자와 그의 주인이 된 터키인의 이질적인 모습이 정체성 탐구를 통해 동일화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오르한 파묵은 해묵은 동,서양의 환상을 걷어내고 특유의 지적인 문체로 각각의 정체를 모색하고 있다. 그는 "동,서양 문제를 두 인물의 주인-노예 혹은 지배-피지배 관계로 변형시키고, 그들을 한 방 안에 넣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게 했던 소설"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단순히 동,서양 두 축의 관계 뿐만 아니라 두 인물의 긴장감 넘치는 자기 성찰을 꼼꼼하게 그리고 있다. "우리는 몰락이라는 말을, 제국의 손에 있는 나라를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이해했던가? 우리는 지도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 먼저 어떤 나라가 그 다음에 어떤 산과 어떤 강이 제국 손에서 떨어져나갈 것인지를 슬픔에 가득 차 예측하곤 했다. 그렇지 않다면, 몰락이라는 말은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변하고 믿음이 변한다는 의미였던가? 우리는 이스탄불 사람들이 어느 날 아침 따스한 침대에서 각기 다른 사람으로 변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그들은 옷을 어떻게 입을 것인지 모르고, 사원 첨탑이 왜 필요한 것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쩌면 몰락이란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위의 글은 동,서양의 관계에 대한 직접적인 작가의 목소리로 읽힌다.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다른 사람들의 우월성을 보고 그들을 닮으려고 하'면 '부지불식간에 사람들이 변하고 믿음이 변하며' 이는 곧 '제국의 손에 있는 나라를 하나하나 잃어버리는' 몰락의 길이다. 자신을 잃는 것이 곧 몰락이다. 우월성은 저 대단한 자본주의의 힘을 의미하지 않는다.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월하지 못한 상태가 아니라, 나를 잃는 일. 그래, 그랬었지. 오르한 파묵의 '하얀성'은 터키의 특산물 같다. 터키의 지리적, 문화적 위치를 가늠해볼 때 그곳의 작가가 아니고서는 상상하기도, 쓰기도 요원한 소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