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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협찬 편견에 갇히지 않으려 골몰할수록 오히려 더욱 깊은 편견에 사로잡히는 기묘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깊은 구덩이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칠수록 기존에 가지고 있던 편견의 대척점을 찾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뿌리 깊은 편견까지 마주한 순간은 아득하게 느껴졌던 것도 같다. 『레시타티프』는 내게 그때의 기시감을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음습한 습성을 건드리는 기묘한 소설. 보육원에서 막을 올리는 이 작품에는 시작부터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이 명시된 두 소녀가 등장한다. 흥미로운 점은 두 소녀가 다른 인종임을 밝히면서도, 정작 누가 어떤 인종인지를 판단할 만한 결정적인 단서는 제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는 이 작품을 읽는 내내 몹쓸 호기심과 편견을 끌어안고, 때로는 그것들과 싸우기도 하면서 두 소녀의 인종에 집착 아닌 집착을 하게 된다. 서로 다른 인종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명시한 건 작가가 설계한 문학적 실험의 첫걸음이었던 셈이다. 사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문화권이나 흑인과 백인 사이의 역사적 갈등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은 나로서는, 작품이 중간중간 던지는 단서들을 특정한 인종에 관한 고정관념과 연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럼에도 작품은 ‘어떤 인종이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아?’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며, 독자가 그 몹쓸 호기심과 편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두 소녀는 보육원에서 함께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오랜 세월에 걸쳐 네 번의 재회를 하게 된다. 그리고 두 사람이 과거를 회상하는 과정에서 등장하는 또 다른 여성은 인종에 대한 편견과 잣대를 또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이 그녀에 대해 서로 다른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감정과 세월이 흐른 뒤의 감정이 뒤엉키면서 각자의 기억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된 걸까? 그날 벌어진 사건도, 그녀의 인종도, 서로 자신의 기억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며 언쟁을 벌이는 모습은 서글프게 느껴졌다. 피해자의 인종을 알아야만 그가 당한 폭력의 심각성을 말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사람은 결국 눈에 보이는 것만을, 그리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두 사람의 기억은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고, 갈등과 거리 좁히기를 되풀이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작품 속에서 다루는 편견의 대상이 인종에만 한정되지 않고 장애를 비롯한 다른 요소들로까지 확장되었다고 느꼈다. 특히 자신의 목소리로 사건을 증언할 수 없는 여성이 두 사람의 기억 속에서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된다는 점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정작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겪었는지는 끝내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타인을 이해한다고 믿으면서도 실은 자신이 보고 싶은 모습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레시타티프』는 끊임없이 편견의 저울 위에 독자를 올려놓고, 저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울이다 다시금 수평을 맞추며 막을 내린다.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는 이야기는 작가가 의도한 문학적 실험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인종적 정체성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회를 배경으로, 서로 다른 인종의 두 여성을 등장시키면서도 그들의 인종을 끝내 밝히지 않는 시도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작품을 다 읽고 돌아보니 본 이야기의 분량이 5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짧은 분량 안에 이토록 밀도 있게 담아낸 작품이라니. 문학적 실험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종종 난해한 문체나 파격적인 형식에 기대는 반면, 『레시타티프』는 이야기 자체의 힘으로 정면 돌파한다는 점에서 남다른 자신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각각의 머릿속에 내장된 편견이라는 필터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필터를 벗어던지려 애쓰는 순간조차 또 다른 편견에 사로잡히곤 한다. 결국 편견에서 멀어지는 첫걸음은 자신에게도 편견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일까? 사실, 이 작품을 다 읽은 뒤에도 이렇다 할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 시도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저울추에 손을 얹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돌아보는 습관을 갖는 것일 테다. 이 작품이 그랬듯, 어느 한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않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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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타와 트와일라. 이 흑인 또는 백인(누가 백인인지 흑인인지 정확하게 정해져있지않다) 여덟 살 소녀들의 삶 수십년이 50페이지의 짧은 분량에서 쏜살같이 지나간다. ⠀ 아픈 기억이자 둘이 공유하고 있는 보호 시설에서의 함께 했던 기억에서부터 성인 여성으로, 엄마로 살아가면서 중간중간 만나 묶는 매듭은 썩 유쾌하지 못하다. 함께 했던 보호 시설에서의 기억도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불량소녀들의 괴롭힘을 당하는 나이든 여성을 방관했는지 동조해 괴롭혔는지, 그녀가 백인이었는지 흑인이었는지 너무나 큰 차이임에도 정반대의 기억. 이러한 정반대는 시간이 지나서도 여전하다. ⠀ 누군가는 부유하고 누군가는 힘겹게 살아가고, 누군가는 부모의 권리를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식의 권리를 옹호한다. 이렇게 시소처럼 누가 흑인인 것 같았다가 백인인 것 같은 상황이 계속되어 인종을 맞춰야 하는 것 같지만 인종보다 끊임없이 누군가가 우위에 서고 약자가 생겨나는 것에 더 신경이 쓰였다. ⠀ 영원한 강자. 영원한 약자. 영원한 것은 세상에 없다지만 특히나 영원한 강자와 약자는 확실히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가 살아있어서가 아니다. 억눌린 사람은 항상 자신보다 더 못한 상황의 사람들을 발견하고 되갚기 때문이다. ⠀ 보듬어준다라는 아름다운 해결책도 있지만, 당한 것이 있는 입장에서 윤리적으로 행동하기가 쉽지 않다. 어딘가 해소라도 해야 겨우겨우 살아나갈 수 있지 않나. 인종과 윤리, 분명 집에 있으나 집이 아닌 것 같은 디아스포라. 아마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이쪽과 저쪽으로 명확하게 둘로 나누는 것을 계속하다보면 말이다. ⠀ 세상에는 희고 검은 것보다 회색이 더 많다. 완전히 극에 치우쳐 있는 것은 잘 없다. 하지만 나와 다르면 그때부터 자세히 살펴보는 것을 그만두고 선을 긋는다. 그렇게 이쪽저쪽으로 사방팔방으로 선을 긋다보니 내가 오롯이 발디딜 곳 하나 없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하나 없다. 저마다 자기가 그어놓은 선에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다. ⠀ 이 고립애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선을 지우고 선 너머에 있던 사람들을 이분법적이 아니라 자세히 살펴보는 것.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을 찾는 것이다. 편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 계급과 인종, 기억, 우정, 폭력, 방관, 배척. 짧은 이야기 속에서 끊이없이 이것들이 쏟아져나오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갖혀있지 말고 넓게 보아야 할 것이다. |